<colcolor=#fff> 애버벤 참사 Aberfan Disaster | ||
<colbgcolor=#bc002d> 발생일 | 1966년 10월 21일 오전 9시 15분 사고일로부터 [dday(1966-10-20)]일 | |
발생 위치 | 영국 웨일스 애버밴 | |
유형 | 산사태/폭우/붕괴[1] | |
원인 | 채광으로 인한 폐기물 발생 및 폭우 | |
인명피해 | <colbgcolor=#bc002d><colcolor=#fff> 사망 | 144명 |
실종 | n명 | |
부상 | n명 | |
구조 | n명 | |
재산 피해 | n원 | |
소실 면적 | 초등학교, 중학교, 가옥 18채 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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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6년 10월 21일 영국 웨일스 애버밴에서 발생한 참사.2. 사고 이전
2.1. 애버밴 마을
웨일스 지방은 19세기 산업 혁명 시기부터 석탄과 철광석 같은 귀중한 자원들 대량으로 채굴되면서 광업이 크게 발달한 지역이다.[2] 애버밴 지역은 웨일즈 남부 지역 산악 지대의 계곡 경사면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로 탄광 사업이 발달하며 사건 당시에는 약 5000명의 인구가 거주하던 규모 있는 마을이었다.채광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마을 위쪽에 위치한 탄광 주변에서는 여러 종류의 폐기물들이 발생되기 시작했다. 1947년 영국 정부가 석탄 산업을 국유화한 이후 국내 석탄광의 개발은 국가석탄위원회(NCB)에서 관리 아래에서 이루어졌는데, NCB는 대량의 채광 폐기물들을 탄광 근처에 쌓아두기만 하고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이렇게 폐기물들이 쌓여가면서 탄광 인근에는 폐기물 더미가 만든 봉우리가 무려 7개까지 늘어났는데 이 봉우리들은 작게는 17m에서 크게는 50m가 넘어가는 엄청난 부피를 가지고 있었다.
탄광 지역은 석탄 찌꺼기 산으로 뒤덮여 풀 한 포기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수준까지 오염되었고, 이로 인해 인근 지역들은 '죽음의 땅'이라는 별명까지 생겨버리게 되었다.[3]
2.2. 전조
폐기물 봉우리들은 모두 마을 위쪽에 위치하여 만약 붕괴사고가 발생했을 때 인명피해를 야기할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봉우리의 규모가 불어나면서 크고 작은 산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는데, NCB는 이것들은 대부분 폐기물 더미의 표면이 살짝 흘러내린 것이지 대규모 붕괴로 이어질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래도 대책이라고 봉우리 근처에 배수로를 설치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으나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아니었다. 1944년 11월에 폐기물 더미의 일부가 무너지는 사고를 시작으로 1963년 5월에는 봉우리의 살짝 무너지고 11월에는 더 큰 규모의 사고가 발생하였다. NCB는 여전히 붕괴사고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보고 배수로를 정비하는 수준의 대책만 실행하였다.7개의 폐기물 봉우리는 언제든 무너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4, 5, 7번 봉우리 주변에는 개울이나 샘이 위치해 있어 구조적 안정성이 상당히 불안한 상황이었고, 애버밴 지역에 폭우가 내릴 때마다 폐기물 봉우리에서 발생된 오염된 물들이 마을로 흘러들어오자 주민들이 NCB측에 항의하고 나섰지만 NCB의 조치는 여전히 배수로를 정비하는 것 뿐이었다.
1966년 10월은 애버밴 지역에 집중 폭우가 내리던 시기였다. 10월 20일 밤 시간에 들어 폭우로 인해 7번 봉우리의 높이가 3m 가량 내려앉았는데, 다음 날인 21일 오전 7시 30분 광산으로 출근한 작업반 인원들은 봉우리의 상태가 심상찮음을 감지하고 광산 관리자를 호출하였다. 관리자 역시 봉우리의 상태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우선 당일 작업을 정지하고 봉우리를 점검하고 위치를 이동시키는 조치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폭우로 인해 봉우리의 안정성이 크게 손상된 상황이었고, 1966년 10월 21일 오전 9시 15분. 7번 봉우리가 붕괴하면서 계곡 아래로 쏟아지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2.3. 애버밴 참사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폐기물 더미는 산사태를 발생시키며 계곡을 따라 마을 쪽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규모의 잔해들은 우선 2개의 농장과 오두막을 덮쳤는데 농장에 있던 거주자가 이 참사의 첫번째 희생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후 잔해들이 계곡에 있던 수도 시설을 파괴하였는데, 이로 인해 대량의 물이 쏟아지며 산사태의 규모와 속도가 더욱 흉악해지기 시작하였다.산사태는 계곡 마을에 있던 Pantglas 초등학교와 중학교, 주변에 있던 가옥 18채를 파괴하고 나서야 힘을 잃고 잠잠해졌다. 당시 초등학교에는 방학을 하루 앞두고 등교한 학생과 교사들로 가득했었는데, 어린 아이들이 자리에 앉아 출석을 받는 와중에 산사태가 학교 건물 전체를 집어 삼키고 말았다. 사건 이후 집계된 사망자는 144명. 이들은 7세에서 10세 사이의 어린아이 116명과 28명의 성인들이었다.[4]
산사태가 발생시킨 엄청난 굉음은 천둥번개나 제트기의 소음에 비견될 수준이었다. 놀란 주민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왔을 때 마을 한 곳이 참혹한 사고 현장으로 변해있었고, 지역 경찰과 소방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손과 도구를 이용해 잔해를 파내려가기 시작했다. 소식을 들은 인근 광부들도 집결하여 구조 작업에 나섰고, 시신과 생존자들이 수습되어 각각 예배당과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산사태가 파괴한 수도 시설에서는 여전히 대량의 물이 쏟아져 내려오며 구조 작업을 방해하였는데, 오전 11시 30분이 되어서야 당국에 의해 겨우 수도관이 차단될 수 있었다. 시신들은 인근 예배당으로 옮겨져 신원 확인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시신이 워낙 많은 탓에 주변에 있는 예배당 하나를 더 비워 영안실로 사용해야 할 지경이었다.
보도 등을 통해 현장에 수천 명에 달하는 자원봉사자들이 모여들고, 영국 육군 등지에서도 구조 인원이 파견되는 등 구조 작업에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산사태가 수습되는데는 약 일주일의 시간이 소모되었다.
3. 사고 이후
3.1. 무책임
애버밴 참사는 수십 년 전부터 예견되었던 일이었다. 지역 주민들이 국가석탄위원회(NCB) 측에 사고 위험성을 경고하며 대책 마련을 주문했음에도 NCB는 무책임으로 일관했고, 결국 끔찍한 참사로 이어지고 만 것이다.NCB의 무책임은 사고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국가석탄위원회장 알프레드 로벤스(Alfred Robens)는 사고 당일 관련 사실을 보고받고도 국장급 인사와 수석 엔지니어를 파견하기만 하고 본인은 서리 대학교 총장 취임식에 참석하였다. 사건 현장의 주민들과 유가족들이 NCB를 비난하자 현장에 파견된 NCB 간부들은 로벤스 위원장이 구조활동을 지휘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늘어놓았고, 로벤스 위원장은 사건 다음날 저녁에서야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기자회견을 열어 NCB는 사건 조사에 협력할 것이지만 사고의 책임은 전면적으로 회피하는 뻔뻔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이후 사건조사위원회가 발족하였으나 NCB는 여전히 사건 책임을 부정하였다. 144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대형 참사에서 책임을 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NCB 간부나 직원 그 누구도 기소되거나 징계를 받지 않았다. NCB는 유족들에게 50파운드의 보상을 제시하였으나 비판을 받자 500파운드로 액수를 올려 보상안을 제시하였다. 유가족들은 NCB의 뻔뻔한 태도에 분개하였으나 NCB는 사과도 책임도 없이 비판에는 무시로 달관하기만 했다.
지역 회복을 위해 기금이 설치되었고 몇 개월만에 8만 건이 넘는 기부금이 접수되어 1,606,929파운드의 액수가 모집되었다. 그러나 지급 위원회는 지급 액수를 두고 논쟁을 벌이며, 희생자와 유족과의 생전 관계를 조사하여 유족의 정신적 고통을 정량화해야 한다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제대로 돈을 내놓지 않았다.
심지어 남은 폐기물 봉우리의 처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고 이후 주민들은 봉우리 처리를 요구했으나 처리 비용을 두고 웨일즈와 잉글랜드 당국, NCB 사이에 알력다툼이 벌어지고 비용절감을 이유로 봉우리를 단지 정비만 하겠다고 발표했다가 비난을 받고 철거로 입장을 바꾸는 등 사고에 책임을 져야할 자들이 나서 비참한 참사의 비극을 한 층 더하는데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몇 년 넘도록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심지어 철거 비용을 마련한답시고 재난 기금에서 150,000파운드를 빼가는 짓거리까지 벌어지기에 이르렀다.[5]
이 당시 빼앗은 15만 파운드는 사건 발생 이후 30여년이 흐른 1997년에서야 기금에 반환되었다. 이나마도 30년이 흐르면서 물가 상승이나 이자 비용 등은 모두 무시되었고 정확하게 15만 파운드만 반환되는 등 정부 당국은 최후의 최후까지 유족의 마음을 후벼파기만 했다.
4. 이후
당시 영국 총리였던 해럴드 윌슨은 사고 당일 왕실 전용기를 대여하여 사고현장을 방문해 유가족들을 위로하였다. 그런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현장 방문을 바로 계획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영국 노동당 등에서 큰 비판을 받고 뒤늦게야 사고현장을 방문해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일도 있었다.훗날 엘리자베스 2세는 재위 기간 중 가장 후회하는 일이 애버밴 참사 당시에 사고 지역을 바로 방문하지 않은 것이라 말했다. 이후 여왕은 꾸준히 4차례 더 에버밴을 직접 방문했고, 50주기에도 주민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메세지를 보내기도 했다.# 2017년에는 이와 정확히 반대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런던 그렌펠 타워 화재사고로 인해 큰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당시 총리인 테레사 메이는 다음 날에야 나타나 (피해자들은 만나지 않고)소방 간부들의 보고만 듣고 떠나 논란이 일었는데, 이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주민들과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화재를 진압한 소방관들과 자원봉사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윌리엄 왕자와 함께 사고 현장을 방문하자 그제서야 다급하게 다시 피해자들을 만나러 와 큰 지탄을 받았다. 국민의 슬픔앞에 지도자가 권위를 내세우기보다는, 그들의 슬픔을 직접 위로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 사람이 바로 엘리자베스 여왕이었으니 이는 당연한 행보라고 할 수 있다.
사고로 아이들을 잃은 애버밴 지역의 광부들은 추모를 위해 합창단 Ynysowen Male Choir[6]을 조직했다. 이후 영국과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펼치고 수익금으로 자선 사업을 한다.
애버밴 지역엔 사고를 추모하는 추모공원이 지어졌다.#
4.1. 예지몽?
사고 전날, 애버밴 지역의 아이들이 "친구들이 죽는 꿈을 꿨다." 며 등교를 거부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사고 현장에서 아이들을 구조한 정신과 의사 존 바커는 이러한 사례를 듣고 예지몽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애버밴 참사 예지몽을 겪었다는 편지 76통을 받았다.
5. 매체
- 더 크라운: 엘리자베스 2세의 전기에 대해 다룬 영국 드라마로 시즌 3에서 이 사고를 다뤘다.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20년 2월 23일자에서 예지몽에 대해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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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2019년 10월 23일39 영국 냉동 컨테이너 집단 사망사건 2017년 6월 14일72 런던 그렌펠 타워 화재사고 2017년 5월 22일23 2017년 맨체스터 경기장 테러
- [ 200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2005년 7월 7일56 2005년 런던 지하철 폭탄 테러 2004년 2월 7일23 모어캠 만 참사 2002년 10월 12일204 23 2002년 발리 폭탄 테러 2001년 9월 11일2,996 67 9.11 테러 2000년 6월 18일58 2000년 도버항 밀입국 참사
- [ 199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99년 10월 31일217 21 이집트 항공 990편 추락 사고 1999년 10월 5일31 라드브로크 그로브 열차 충돌사고 1999년 9월 28일26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국 관광객 버스 사고 1999년 9월 28일29 오마 폭탄 테러 1994년 6월 2일29 1994년 RAF 치누크 추락 사고 1992년 9월 28일167 36 파키스탄 국제항공 268편 추락 사고
- [ 198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89년 8월 20일51 마치오네스호 참사 1989년 4월 15일97 힐스버러 참사 1989년 1월 8일47 브리티시 미들랜드 국제항공 92편 추락 사고 1988년 12월 21일270 팬 아메리칸 항공 103편 폭파 사건 1988년 12월 12일35 클래펌 정션 열차 충돌사고 1988년 7월 6일167 파이퍼 알파 화재 사고 1987년 11월 18일31 런던 킹스 크로스 역 화재사건 1987년 3월 6일193 해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호 참사 1986년 11월 6일45 1986년 브리티시 인터내셔널 헬리콥터 치누크 추락 사고 1985년 6월 23일329 27 에어 인디아 182편 폭파 사건 1985년 5월 11일56 브래드포드 시티 구장 화재 1985년 8월 22일55 영국항공 투어 328편 화재 사고 1985년 2월 11일21 랑겐브루크 버스 사고 1983년 7월 16일20 영국 항공 헬리콥터 S-61 추락 사고 1980년 9월 9일44 더비셔호 침몰 사고 1980년 8월 16일37 덴마크 플레이스 방화 사건 1980년 4월 25일146 단 에어 1008편 추락 사고
- [ 197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78년 2월 11일42 퍼시픽 웨스턴 항공 314편 추락 사고 1976년 9월 10일176 자그레브 상공 공중충돌 사고 1975년 5월 27일32 디블스 다리 버스 추락 사고 1975년 2월 28일43 무어게이트역 지하철 충돌사고 1974년 11월 21일21 브링엄 펍 폭탄 테러 1974년 6월 1일28 플릭스버러 폭발사고 1974년 3월 3일346 177 터키항공 981편 추락 사고 1973년 8월 2일50 서머랜드 참사 1973년 4월 10일108 인빅타 국제항공 435편 추락 사고 1972년 7월 5일30 콜드 하버 병원 화재 1972년 6월 18일118 브리티쉬 유러피언 항공 548편 추락 사고 1971년 11월 9일52 영국 공군 허큘리스 추락사고 1971년 10월 21일21 ~ 22 클락스턴 폭발 사고 1971년 1월 2일66 1971 아이브록스 참사 1970년 7월 3일112 단 에어 1903편 추락 사고
- [ 196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69년 1월 5일50 아리아나 아프간 항공 701편 추락 사고 1968년 11월 18일22 제임스 와트 스트리트 화재 1968년 11월 5일49 히서 그린 열차 탈선 사고 1967년 2월 26일21 셀턴 병원 화재 1967년 11월 4일37 이베리아 항공 062편 추락 사고 1967년 6월 4일72 스톡포트 비행기 추락 참사 1966년 10월 21일144 애버밴 참사 1966년 7월 31일31 다윈호 침몰 사고 1965년 10월 17일36 브리티시 유러피언 에어워이즈 비커스 951 추락 사고 1965년 7월 4일41 영국 공군 C.1A 추락 사고 1965년 5월 17일31 1965년 캠브리안 광산 참사 1965년 4월 14일26 BUA DC-3 추락 사고 1960년 6월 28일45 식스 벨즈 광산 폭발 사고
- [ 195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58년 8월 14일99 KLM 607-E편 추락 사고 1958년 2월 27일35 윈터힐 비행기 참사 1958년 2월 6일23 뮌헨 비행기 참사 1957년 12월 4일90 루이섬 열차 충돌사고 1957년 11월 5일45 아퀼라 항공 S.45 추락 사고 1957년 5월 1일34 이글 항공 비커스 비스카운트 추락 사고 1957년 3월 14일20 브리티시 유러피안 항공 비커스 701 추락 사고 1957년 3월 5일20 영국 공군 베버리 C.1 추락 사고 1954년 12월 25일28 영국해외항공 보잉 377 추락 사고 1954년 1월 10일35 영국해외항공 781편 공중분해 사고 1953년 5월 2일43 BOAC 783편 추락 사고 1953년 1월 31일154 프린세스 빅토리아 호 침몰사고 1953년 1월 5일27 1953년 브리티시 유러피언 항공 비커스 610 추락 사고 1952년 12월 5일 ~ 9일4000+ 1952년 런던 그레이트스모그 1952년 10월 2일112 해로우 앤 윌드스톤 열차 추돌사고 1952년 9월 6일31 판버러 에어쇼 추락 사고 1952년 1월 10일23 에어 링구스 C-47 추락 사고 1951년 12월 4일24 질링엄 버스 참사 1951년 4월 16일75 어프레이 호 침몰 사고 1950년 10월 31일28 1950년 브리티시 유러피언 항공 비커스 610 추락 사고 1950년 10월 17일28 브리티시 유러피언 항공 C-47 추락 사고 1950년 3월 12일80 랜드로우 항공 참사
- [ 194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49년 8월 19일24 브리티시 유러피언 항공 DC-3 추락 사고 1949년 1월 17일20 미 공군 B-29 추락 사고 1948년 10월 20일40 KLS L-049 추락 사고 1948년 7월 4일39 노스우드 상공 공중충돌 사고 1948년 4월 17일24 윈스포드 열차 충돌 사고 1948년 3월 2일20 사베나 DC-3 추락 사고 1947년 10월 26일28 고스윅 열차 탈선 사고 1947년 10월 24일32 사우스 크로이던 열차 충돌 사고 1947년 4월 23일39 샘탬파호 침몰 사고 1946년 3월 9일33 번든 파크 참사 1946년 1월 1일20 리치필드 열차 충돌 사고 1945년 9월 30일43 본 엔드 열차 탈선 사고 1945년 9월 14일21 볼벤터 영국 공군기 추락 사고 1945년 6월 15일27 처치 노웰 미 공군기 추락 사고 1945년 5월 6일31 미 공군 C-46D 추락 사고 1945년 4월 23일31 맨 섬 미 공군 B-17 추락 사고 1945년 4월 22일21 풀벡 영국 공군기 추락 사고 1945년 2월 19일20+ 질스 다코다 3 추락 사고 1945년 1월 10일22 밸리 마카렛 열차 충돌 사고 1944년 11월 27일70 영국 공군 창고 폭발 사고 1944년 8월 23일61 프렉턴 항공기 참사 1944년 7월 27일22 미 공군 DC-3 추락 사고 1944년 2월 19일20 미 공군 DC-4 추락 사고 1943년 7월 3일20 영국 공군 포커 FXII 추락 사고 1943년 3월 27일379 대셔호 폭발 사고 1943년 3월 3일173 베스널 그린 지하철역 참사 1943년 2월 24일37 반달호 침몰 사고 1942년 10월 2일239 큐라소호 침몰 사고 1942년 4월 13일25 임버 민간인 오사 사건 1942년 1월 1일57 스네이드 광산 참사 1941년 12월 30일23 에클스 열차 충돌 사고 1941년 10월 31일49 허더스 필드 공장 화재 1940년 11월 4일27 노턴 피츠워렌 열차 사고
- [ 193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39년 12월 12일136 두체스호 침몰사고 1939년 10월 28일35 밸리필드 광산 참사 1939년 6월 1일99 테티스호 침몰사고 1937년 12월 10일35 캐슬커리 열차 충돌 사고 1937년 7월 2일30 홀디치 광산 참사 1936년 8월 6일30 완클리프 우드무어 광산 참사 1934년 9월 22일266 그레스포드 참사 1932년 1월 26일60 M2호 침몰 사고 1931년 11월 20일45 벤틀리 광산 붕괴 사고 1931년 1월 29일27 1931년 헤이그 광산 폭발 사고 1930년 10월 5일48 R101호 추락사고
- [ 192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29년 12월 31일72 글렌 극장 참사 1928년 6월 27일25 달링턴 열차 충돌 사고 1923년 9월 25일40 레딩 광산 침수 사고 1922년 9월 5일39 1922년 헤이그 광산 폭발 사고 1921년 10월 9일22 로완호 침몰 사고 1921년 8월 23일28 R38급 비행선 추락 사고
- [ 191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19년 10월 20일31 레벤트 광산 사고 1919년 1월 1일201 ~ 205 로라일호 침몰 사고 1918년 9월 25일470 오틀란토호 침몰 사고 1918년 7월 14일37 UB-65 침몰 사고 1918년 10월 24일364 프린세스 소피아호 침몰 사고 1918년 9월 16일79 글래턴호 폭발 사고 1918년 7월 1일134 칠웰 탄약 공장 폭발 사고 1918년 2월 24일94 플로리젤호 침몰 사고 1918년 1월 31일 ~ 2월 1일105 메이 섬 전투 1918년 1월 12일155 민니 광산 참사 1918년 1월 12일188 오팔호 침몰 사고 1917년 7월 9일843 뱅가드호 폭발 사고 1917년 6월 13일43 애쉬톤 언더 라인 폭발 사고 1917년 2월 21일650+ 멘디호 침몰 사고 1917년 1월 29일32 K13 침몰 사고 1917년 1월 19일73 실버타운 폭발 사고 1917년 1월 19일30 E36호 침몰 사고 1916년 12월 5일35 번보우 탄약 공장 사고 1916년 8월 21일 ~ 24일40 로우 무어 폭발 사고 1916년 4월 2일115 파버샴 공장 참사 1915년 6월 22일226 퀸틴스힐 철도 참사 1915년 5월 27일352 프린세스 이레네호 침몰 사고 1915년 5월 7일1198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 1914년 10월 30일83 로힐라호 침몰 사고 1914년 10월 14일439 셍헤니드 탄광 참사 1914년 5월 29일1014 엠프레스 오브 아일랜드호 침몰사고 1914년 1월 16일58 A7호 침몰 사고 1912년 7월 9일91 카데비 광산 참사 1912년 4월 14일 ~ 4월 15일1514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1910년 10월 21일344 프레토리아 광산 참사
- [ 1900년대 이전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09년 2월 16일168 웨스트 스탠리 광산 참사 1908년 10월 27일29 야머스호 침몰 사고 1906년 12월 28일22 엘리엇 정션 열차 충돌 사고 1906년 7월 1일43 세일스버리 열차 충돌 사고 1905년 11월 19일39 왓슨 스트리트 하숙집 화재 1905년 7월 27일20 홀로드 열차 충돌 사고 1905년 3월 10일33 1905년 캠브리안 광산 참사 1903년 1월 27일52 코니 병원 화재 1902년 4월 5일25 1902 아이브록스 참사 1898년 6월 21일34 알비온호 진수식 참사 1896년 4월 30일82 펙필드 광산 참사 1892년 8월 26일112 파크 슬립 광산 참사 1888년 9월 5일63 모리스우드 광산 참사 1887년 9월 5일186 엑세터 극장 화재 1887년 2월 13일39 와트슨 광산 참사 1887년 5월 23일73 우드스톤 광산 참사 1885년 12월 23일81 마디 광산 폭발 사고 1884년 7월 16일24 불하우스 브리지 열차 탈선 사고 1883년 7월 3일124 다프네호 참사 1883년 6월 16일183 빅토리아홀 참사 1882년 2월 16일63 트림돈 그랜지 광산 참사 1881년 10월 14일189 아이마우스 참사 1879년 12월 28일59 테이 브리지 붕괴 사고 1878년 9월 11일268 애버컨 광산 참사 1878년 6월 7일189 우드핏 광산 폭발 사고 1878년 9월 3일600+ SS 프린세스 앨리스 침몰 사고 1877년 10월 22일207 블랜타이어 광산 참사 1874년 12월 24일34 쉬프톤 처웰 열차 탈선 사고 1874년 9월 10일25 소프 열차 충돌 사고 1873년 3월 20일535 SS 아틀란틱 침몰 사고 1871년 2월 24일38 펜터 광산 폭발 사고 1868년 12월 26일26 퀸핏 광산 폭발 사고 1867년 1월 15일40 리진트 공원 참사 1866년 12월 12일361 오크스 폭발 사고 1866년 1월 11일220 런던호 침몰 사고 1865년 3월 15일20 벨 스트리트 홀 화재 1865년 1월 16일20 던디 압사 사고 1864년 10월 6일 ~ 7일53 뉴캐슬 대화재 1864년 3월 11일244 데일 디크 저수지 붕괴 사고 1861년 8월 25일23 클레이턴 터널 열차 충돌 사고 1853년 10월 20일30 하트레이크 참사 1852년 2월 26일444 ~ 450 버큰헤드호 침몰 사고 1850년 3월 30일150+ 로얄 애들레이드호 침몰 사고 1849년 2월 19일70 로얄 극장 참사 1848년 8월 18일100+ 모레이 어선 참사 1846년 7월 9일39 이스트 휠 로스 광산 참사 1845년 5월 2일79 그레이트 야머스 대교 붕괴사고 1844년 9월 28일95 해스웰 광산 폭발 사고 1838년 7월 4일26 휴스카 광산 참사 1812년 5월 25일92 펠링 광산 참사 1808년 9월 20일23 로얄 오페라 하우스 화재 1807년 11월 19일400+ 로치데일호 프린스 오브 웨일스호 충돌 사고 1807년 4월 18일60 ~ 90 하위치 페리 참사 1807년 2월 23일27 ~ 34 1807년 뉴게이트 참사 1806년 12월 25일22 스톳필드 어선 참사 1806년 3월 16일400+ 인빈시블호 침몰 사고 1800년 5월 17일673 퀸 샬롯호 화재 1727년 9월 8일80 번웰 인형극 극장 화재 1707년 10월 22일1400+ 실리 영국 해군 참사
[1] 폐기물 봉우리 중 하나가 붕괴하였다.[2] 이 때문에 '대영제국의 발전소' 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3] '죽음의 땅'이라는 별명은 애버밴 지역에 국한된 명칭은 아니었다. 환경오염의 심각성은 커녕 오염의 개념도 존재하지 않던 시절부터 무차별 개발이 이루어진 터라 웨일스에 위치한 광산 인근 지역들은 대체적으로 오염도가 심각한 수준에 다다르고 있었다. 채광 작업으로 발생되는 석탄과 철광석 찌꺼기 등의 부산물들은 광산 주변에 아무렇지 않게 버려지고 있었고 당국이 위험성을 파악했을 당시에는 무려 웨일스 면적의 약 8% 가량이 심각하게 오염된 뒤였다. 웨일스 당국은 이후 웨일스개발청(WDA)를 설립하여 대대적인 토양오염 정화에 나섰다. 오염 지역의 토양을 갈아 엎어 유해물질을 제거한 뒤 헥타르랑 약 200톤의 닭똥을 살포하고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녹화 작업을 개시, 1988년에 들어서는 약 18000 헥타르 면적의 지역을 정화하는데 성공하였다.[4] 교사나 학교 직원들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희생하려 했으나, 엄청난 규모의 참극 앞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모두 시신으로 발견되고 말았다.[5] 지급 위원회는 유족들에게 줄 돈은 지급하기 싫어하면서 15만 파운드를 지출하는건 순순히 동의해준 것이다.[6] Ynysowen은 웨일스 Merthyr Vale 지역의 웨일스어 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