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2 11:52:46

파이퍼 알파 화재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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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파이퍼 알파3. 사고 전개 과정4. 사고 이후

1. 개요

1988년 7월 6일 북해에서 대규모로 석유와 천연가스를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해양 플랜트 파이퍼 알파에서 화재가 발생한 뒤 무너져 구조원 2명을 포함한 167명이 사망한 사고.

간혹 이 사고를 부유식 시추선에서 발생한 사고로 오인하는데 파이퍼 알파는 움직일 수 있는 부유식 시추선이 아니라 해저에 고정된 고정식 해양구조물이다.

2. 파이퍼 알파

옥시덴탈 페트롤리움사에서 운영했던 북해의 2만톤짜리 석유 생산 플랫폼으로 24시간 가동되며 240여명의 작업자가 상주하였다. 3년간의 건설 끝에 완공된 1976년부터 가동을 시작했으며 운영 도중에 천연가스 생산도 할 수 있도록 개조되었다. 덕분에 애버딘에서 176km 떨어진 지점에서 석유를 시추하였는데 하루에 30만 배럴 가량의 석유를 뽑아냈다. 이는 북해의 석유 생산량과 천연가스 생산량 중 10%를 차지했다.

51m/s(185km/h)의 바람과 30m 높이의 파도도 견디도록 설계되었고 강재 구조물의 반 이상이 바다에 잠겨 있었으며 전체 높이는 해저에서부터 230m로 자유의 여신상의 2.5배 크기였다.

4개의 모듈로 구성된 생산갑판에서 석유를 가공했는데 모듈 A에서는 해저에서 석유를 시추하였고 모듈 B와 C에선 석유와 가스를 가공하였으며 모듈 D에는 전력발전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작업자들을 위한 식당과 매점, 세탁실, 창고, 소규모 극장 등이 있어 작은 해상도시라고 불리기도 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 구명보트 6개, 구명정 13개, 구명조끼 500개, 구명부표 31개가 있었다. 또 바닷물을 그대로 빨아올려 뿌리는 화재 방지 시스템 또한 있었다. 하지만 후술할 사고에서 이 안전 시스템들은 잘 작동하지 못했다.

3. 사고 전개 과정

1988년 7월 6일 오전 7시 45분 작업반장 버나드 커티스가 보수작업 허가증을 발급했고 12시에는 인부 2명이 생산갑판에서 안전밸브를 푸는 작업을 했다. 6시 교대 때까지 마무리 작업을 해야 하는 정기작업이었다. 그런데 6시가 돼서도 다른 낮 근무는 끝났으나 작업은 다 끝나지 않았다. 연결된 펌프를 닫고 작업을 다음날 아침 전에는 끝내기로 했다. 야간 근무자 62명은 작업에 돌입했고 나머지는 생활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9시 45분에 비상경보가 울렸는데 B LPG펌프 쪽에서 울린 것이었다. 경보가 울린 이유는 정비가 필요하단 의미였고 자주 있는 일이라 여기까진 아무도 크게 신경쓰질 않았다. 펌프를 정비하고 재가동 했지만 이상하게 재가동이 되지 않았다. 가스는 계속 차오르고 저장탱크가 꽉 차기까지 30분도 안남은 상황이었다. 보안시스템은 기지 전력을 중지했고 기지의 전기가 나가 석유 생산이 중단될 상황이었기에 재빨리 막아야 했다.

하는 수 없이 A 펌프를 사용하기로 했다. 문제는 A 펌프는 안전밸브가 분리된 상태였는데 밸브와 펌프는 서류를 따로 관리하고 있었다. 서류들이 자리, 장소별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펌프 관련 서류에 밸브에 대한 내용은 없었고 그걸 모르는 채로 안전밸브가 분리된 펌프를 사용하게 됐다. 그나마 안전밸브 대신 점검 당시 뚜껑으로 막고 나사를 조이긴 했으나 렌치가 아닌 손으로 조인상태여서 느슨하게 조여진 상태였다.

9시 52분 A펌프를 작동하자 느슨하게 조여진 뚜껑으로 엄청난 양의 LPG가 새어나오고 가스누출 경보가 하나둘씩 울리더니 엄청나게 많은 양의 경보가 울렸다. 이윽고 폭발이 일어났다.[1] 그 자리에서 인부 2명이 숨지고 컨트롤룸이 파괴되었으며 휴게실에 있던 인부 대부분이 사망했다. 또한 방화벽이 파괴되면서[2] 파편이 날아가 모듈 B의 파이프를 강타하고 파이프가 손상을 크게 입었다. 이후 모듈 B의 탱크에 있던 55톤의 원유도 타오르기 시작했다.

폭발로 전등이 나가고 터빈이 꺼지자 작업반장은 비상 정지 버튼을 누르고 통제실을 빠져나왔다. 밸브가 자동으로 닫히고 오일관과 가스관이 막혔으며 전력발전기가 꺼졌다. 문제는 폭발로 중앙경보제어장치가 망가져 경보가 안 울렸다.

10시 5분, 인부 중 21명이 밧줄을 난간에 묶고 타고 제일 낮은 갑판까지 내려간 뒤 바다에 뛰어들었고 기지 측면의 구명보트와 근처 송유관을 설치하던 배의 구명정을 타고 탈출했다. 화재로 인해 보트로 갈 수 없자 평소 비상시에 모이던 매점으로 향했다. 매점 바로 위에는 헬기장이 있어 구조헬기가 오면 구조될 수 있으리라 이들은 믿었으나 불길이 너무 강해 헬기는 올 수가 없었다.

모듈 B의 원유가 타면서 아래로 떨어졌고 잠수부들이 발 아프지 말라고 깔아 뒀던 고무매트에 불이 붙어 매트 바로 위의 120기압의 수송관을 달구기 시작했다. 수송관은 열을 버티다 못해 부서지고 고압가스 30톤이 분출되면서 10시 20분에 또 다시 폭발[3]이 일어났다.

10시 30분, 매점을 빠져나온 인부들은 강철 창고로 대피했고 비계공 중 한 명은 세탁실을 통해 밖으로 나와 바다에 뛰어내려 기지 다리를 붙들고 있다가 구조되었다. 한편 다른 구조정도 6명을 구조했지만 파이퍼 알파의 파편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게 됐다. 10시 50분에 또 다시 폭발이 일어났다. 파편은 800m까지 날아갔고 1.5km 거리에 떨어진 선박에서도 폭발을 느낄 정도였다. 구명정도 화염에 휩싸이자 구조대원과 생존자들은 구명정을 버리고 탈출했다. 한편 폭발로 벽면이 날아가자 강철 창고에 있던 이들이 구멍으로 탈출하고 지나가던 구명정 덕에 살아남았다.

이후 11시 20분, 다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로 기지에 고정된 크레인이 떨어지고 데릭이 망가졌으며 생활관이 떨어져나가 가라앉아서 안에 있던 81명의 인부들이 사망하고 해저 145m에 가라앉았다.[4] 이후 전체적인 해상 기지는 무너져내리고 동쪽으로 기울었다. 남은 건 모듈 A 뿐이었다.

228명의 인부 중 165명이 사망했고 구조대원 2명이 사망했다. 살아남은 인부는 전부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로 뛰어든 이들이었다. 이 사고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에서 일어난 화재 중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화재로 기록됐다.

4. 사고 이후

옥시덴털 페트롤리움사는 유족들에게 보상을 해야 했다. 다만 형사처벌은 증거가 불충분해 받지 않았다.

조사 도중 정보 전달의 미흡, 부족한 비상구, 소화펌프 안전시스템의 부족, 약한 방호벽 등이 지적되었고 전세계의 해양기지와 시추선이 이를 받아들이고 개선했다.

[1] 이 폭발은 근처를 지나가던 톨랜드 커발리에호의 선장이 목격했는데 이후 화재와 붕괴로 자료가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 화재 조사에 중요한 제보가 됐다. 아래에서 폭발이 일어났다는 제보를 듣고 공기보다 무거운 LPG가 폭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외에도 근처 선박에서 아들의 숙제를 돕기 위해 사진을 촬영하다가 기지 건물의 폭발 장면을 촬영하게 된 찰스 밀러의 사진도 조사에 도움이 됐다.[2] 불을 막는 것만 고려했고 폭발은 고려하지 않아 폭발에 매우 약했다.[3] 위의 영상의 폭발.[4] 3개월 뒤 해난구조대에 의해 건져올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