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15:43:28

신라 서면도통 지휘병마제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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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3. 여담4. 관련 문서

1. 개요

西

후백제의 왕이 되는 견훤이 무진주(광주 일대)에서 892년 스스로 사용한 관작. 신돈, 김부식, 최충헌의 관작들과 함께 한국사에서 매우 많은 관작들로 손꼽히며 총 47자다.

2. 설명

많고 많은 관작을 분리해서 해석 해보면 다음과 같다.[1]
  • 신라(新羅): 자신의 국가를 선포하기엔 아직 신라의 권위가 남아있어 국적을 신라로 유지.
  • 서면도통(西面都統): 신라 서부 지역을 관장하는 도통. 도통은 당나라의 직위다.
  • 지휘병마제치(사)(指揮兵馬制置(使)): 도지휘사, 병마사, 제치사(制置使)[2]에서 따온 것으로 모두 무관직이다.
  •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 당의 도독은 사지절[3]도독, 지절[4]도독, 가절[5]도독 세 분류가 있는데 신라국왕이 사지절의 봉호를 받았기에 그 아래인 지절을 칭한 것으로 보인다. 전무공등주군사는 전주(완산주), 무주(무진주), 공주 등의 주군사(州軍事)라는 의미이다.
  •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행수법으로 본인의 관직보다 낮은 직책을 받았을 때 그 앞에 행을 붙인다.
  • 겸(兼): (직위를 겸하다.)
  • 어사중승(御史中丞): 어사대 소속으로 감찰권을 맡는 직위.
  • 상주국(上柱國): 천자가 공이 큰 신하에게 치하하는 의미로 내려주는 훈위.
  • 한남군 개국(漢南郡 開國公): 한남군 지역의 공작.
  • 식읍이천호(食邑二千戶): 하사 받은 식읍이 2000 호.
관작을 풀면 신라 서방의 도통, 군대를 관리하는 제치사, 전주, 무주, 공주 등 주의 지절도독주군사, 전주의 자사, 어사대 어사중승, 상주국 훈위를 받은 한남군 공작이다. 받은 식읍은 2000 가구.

당나라의 도통, 지휘사, 병마사, 제치사, 지절도독, 주군사, 주자사, 어사중승에서 따와 만든 관작이다.

사실상 신라로부터 독립했으면서도 관직명의 맨 앞에 '신라'를 붙여 형식상 신라의 신하임을 내세우고 자신을 왕(王)이 아닌 공(公) 작위로 자처한 이유는, 견훤 자신이 신라 왕실 근위대 장교를 역임한데다 수백 년 동안 대대로 그 신라 왕실 근위대에 정예병을 배출한 옛 사벌국 일대(오늘날 경북 문경, 상주 일대) 지역 출신이었기에 그때까지도 신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버리진 못했기 때문이었다.

궁예야 본인이 정치적으로 큰 손해를 본다는 걸 모를리 없었을 텐데도 대단히 비이성적인 반신라 일변도로 정책을 펼쳤고, 관제 개혁마저도 어떻게든 가능한 선으로 신라색을 지우려고 몸부린친 게 역력했으니 논외로 치더라도, 왕건이나 양길은 저렇게 한 적 없었던 걸 보면 이는 견훤의 개인적 개성이 더 이유가 컸다고 봐야 한다.

견훤은 8년 정도 이렇게 실제로는 왕노릇을 하면서도 그렇다고 왕은 아닌 외공내왕의 애매한 칭호를 달고 한반도 서남부를 군벌로서 지배하다가 900년에야 완산주(전주)에서 백제왕에 즉위하였다. 이후에도 후백제가 신라한테 '존왕(尊王)'의 의(義)를 두터히 하고 사대(事大)의 정(情)을 깊이 하였다.' 운운하는 것을 보면 왕을 칭한 후에도 형식상 신라왕 아래로 행세 하였다. 신라는 신라왕 아래 명주군왕이나 갈문왕, 고구려왕, 보덕국왕, 탐라국왕, 우산국왕과 같은 왕아래 제후왕이 있던 나라다. 이는 고려도 마찬가지인데 고려왕 아래에 낙랑왕, 실직군왕, 필영대왕, 문영대왕, 정간왕, 양헌왕 같은 제후왕이 있었다. 실제로 고려왕 왕건은 경명왕 때 신라와 국교 수립을 하면서 신라에게서 정식으로 고려왕 인정을 받았는데, 이는 왕건이 이전의 보덕국 국왕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견훤은 차마 백제왕을 자칭하지 못하던 시절에도, 이후 백제왕이 된 후에도 신라한테서는 한 번도 그 지위를 공인받지 못했다.

이 또한 견훤의 출신 성분 탓에 견훤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던 신라 왕실 특유의 사정에 원인이 있고, 게다가 그나마 반독립 상태였던 패서 일대야 그렇다쳐도 이백 년 넘게 직접 지배한 옛 백제 영역에 더해 견훤이 백제군으로 부린다는 군인들 대부분이 옛 신라 정규군 군인이었으니, 신라 입장에선 후백제든 견훤이든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게 불가능하였다.

한편 후백제918년오월에 조공하고 중대부(中大夫) 관작을 더 받았는데, 이상의 관작이 자칭이 아니고 오월에 조공하고 하사받은 관작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도통이니 상주국이니 하는것들은 죄다 당나라의 관작들이다. 하지만 직함은 당나라의 것이지만 그 직함 뒤에 붙은 관장 부서, 지역은 전혀 당나라 소속이 아니다. 즉 견훤이 오월에게 직접 "나에게 '신라 서부 담당' 도통, '신라 전주'의 자사대행, '신라 군대를 담당한' 제치사, '신라 한남군을 봉지로 받은' 공작위를 달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은 후백제와 오월의 건국 시기에 맞지 않는다. 견훤이 훗날 오월에 조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서의 명칭을 쓴 것은 그에 훨씬 앞선 892년이고, 완산주로 북상하여 정식으로 백제라는 국호를 칭한 것도 900년인데, 오월 태조 전류는 후백제 건국 당시까지도 절강(浙江) 지역의 절도사로서 일개 군벌일 뿐이었고, 907년에 이르러서야 후량 황제 주전충으로부터 오월왕으로 책봉을 받았으며, 908년부터 슬그머니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등으로 외왕내제 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후 925년에는 중국 후당조공하고 상기 칭호와 비슷한 부분이 많지만 더욱 격이 높아진 총 52자검교태위(檢校太尉) 겸(兼) 시중(侍中) 판백제군사(判百濟軍事)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해동(海東) 사면도통(四面都統) 지휘병마제치등사(指揮兵馬制置等事) 백제왕(百濟王) 식읍이천오백호(食邑二千五百戶)란 관작을 받기도 했다. 이때에는 신라가 없어지고 해동과 백제가 들어가있으며 지위도 공(公)에서 왕(王)이 되었다.

이처럼 견훤이 끈질기게 신라 도통직을 자처한 것은 신라에 대해 견훤이 한 일종의 인정 투쟁이었다고 봐야 진상에 가깝다. 골품제의 한계상 견훤이 노릴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는 신라 왕궁 근위대장을 역임하는 것을 통해 정식 '장군'이 되는 것이었는데, 본인 능력에 자신이 있는 견훤은 오늘날 기준 원스타에 해당하는 지위를 끝으로 자기 커리어를 마감할 생각이 없었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런 도박을 벌였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 중국 대륙에서는 황소의 난을 계기로 당 조정에서 이런저런 무장세력에게 절도사직을 마구 던져주는 현상이 발생했는데, 견훤 역시 이를 모델로 최소 1~2개 주를 장악할 정도의 세력을 구축하면 신라 중앙조정에게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계산 하에 일을 벌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견훤이 요구하던 직책은 '도통' 즉 신라군 총사령관 내지는 신라 정규군 대장군에 준하던 직책이었고 그 전에는 이런 부류의 반란자가 선례에 없었으니, 신라가 현대의 우리처럼 견훤이 한반도 역사에 손꼽을 장군임을 미래시로 알 수 있었던 것도 아닌 이상 이런 요구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사실 안다 해도 그 당이 어떤 꼬라지가 났는지를 훤히 보고 있는 이상 받아들여봤자 신라 해체를 가속화할 것은 명약관화였고.

3. 여담

동문선에 기록된 예종 시책문엔 이자겸의 직위가 나와있다. 당시 이자겸의 직위는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6]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겸(兼)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7] 수태보(守太保)[8] 익성동덕추충좌리공신(翊聖同德推忠佐理功臣)[9] 상주국(上柱國)[10] 소성군 개국백(邵城郡 開國伯)[11] 삼중대광(三重大匡)[12]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13]였다.

척준경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에게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
(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14] 삼중대광(三重大匡)[15]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16] 검교태사(檢校太師)[17] 수태보(守太保)[18]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19] 판호부사(判戶部事) 겸(兼)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20] 상주국(上柱國) 관작을 받았다.

견훤은 최충헌의 관작으로 유명한 총 46자의 '벽상삼한삼중대광[21] 개부의동삼사[22]태사[23]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24] 상장군[25] 상주국[26] 병부어사대판사[27] 태자태사[28](壁上三韓三重大匡 開府儀同三司 守太師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上將軍 上柱國 兵部御史臺判事 太子太師)'보다 한 글자가 더 많다.

신돈도 만만찮은데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29] 벽상삼한중대광[30] 영도첨의사사사 판중방감찰사사 취성부원군[31] 제조승록사사 겸 판서운관사(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壁上三韓重大匡 領都僉議使司事 判重房監察司事 鷲城府院君 提調僧錄司事 兼 判書雲觀事)' 관작들을 가졌다.

4. 관련 문서



[1] 한국사데이터베이스[2] 851년(선종 대중 5년), 당에서 제정된 직위.[3] 전/평시 모두 2천석 이하의 관리까지 처형 가능[4] 전시에는 2천석 이하의 관리까지 처형 가능, 평시에는 관직이 없는 사람을 처형 가능[5] 평시에는 처벌권이 없고 전시에만 군령위반자를 처형 가능[6] 평장사는 중서문하성의 차관.[7] 판상서이부사는 상서성 이부의 장관, 서경유수사는 서경 조정의 최고 장관을 의미한다.[8] 삼사 직 중 가장 낮은 직위.[9] 좌리공신호.[10] 최고위 훈위.[11] 인천의 백작.[12] 1품 1등위 향직 품계.[13] 종 1품 최고위 문산계 품계.[14] 인종이 준 위사공신호. 신흥사의 공신당에 초상화가 올라갔다.[15] 1품 1등위 품계로서 최고위 품계. 향직 품계는 원 태조가 만든 정식 품계였으나 성종이 문산계 품계를 만들면서 명예직으로 밀려났다.[16] 종1품 품계로서 최고위 품계. 문산계 품계는 성종이 도입한 정식 품계이다. 문관, 무관 모두 문산계의 구분을 따랐다.[17] 검교는 직위에 이름만 올리는 명예직이다.[18] 본인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에 수직을 붙힌다. 태보는 삼사 직 중 하나다.[19] 평장사는 중서문하성의 차관이다. 중서문하성의 장관은 문하시중. 바로 밑이 평장사다.[20] 판호부사는 호부의 장관으로 약칭이다. 풀네임은 '판상서호부사'로 줄여서 판호부사, 호부상서 등으로 불렸다. 서경유수사는 서경 분사의 최고 장관이다.[21] 향직 품계.[22] 문산계 품계.[23] 수직, 삼사.[24] 중서문하성 문관직.[25] 무관직.[26] 훈위.[27] 상서성 병부 및 어사대 문관직.[28] 태자부 소속 문관직, 삼사.[29] 보세공신호.[30] 문산계 품계.[31] 부원군 봉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