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케아 제국 초대 황제 | |
로마 제국 제118대 황제 테오도로스 1세 Θεόδωρος Α΄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라스카리스 Θεόδωρος Κομνηνὸς Λάσκαρις |
출생 | 1175년 |
동로마 제국 | |
사망 | 1221년 11월 (향년 46세) |
니케아 제국 | |
재위 기간 | 니케아 황제 |
1205년 3월 19일 ~ 1221년 11월 (16년) | |
전임자 | 알렉시오스 5세 |
후임자 | 요안니스 3세 |
부모 | 아버지 :마누일 라스카리스 어머니 :이리니 칸타쿠지나 |
배우자 | 안나 앙겔리나 아르메니아의 필리파 마리 드 쿠르트네 |
자녀 | 이리니 라스카리나 |
종교 | 그리스도교(정교회) |
[clearfix]
1. 소개
로마 제국 제118대 황제, 동로마 제국의 잔존국 니케아 제국 라스카리스 왕조 초대 황제.2. 생애
테오도로스 1세는 동로마 제국의 귀족 가문인 라스카리스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1199년 황제 알렉시오스 3세의 딸 안나 앙겔리나의 재혼 상대로 선택되어 황가의 일원이 된다. 가족관계로는 이사키오스 2세의 조카사위, 알렉시오스 5세의 동서가 된다. 또한 형제로는 알렉시오스 5세가 폐위가 된 후 황제를 자칭했던 콘스탄티노스 라스카리스의 동생이 된다.1204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자 로마 제국은 공중분해되어버렸다. 트라키아로 도망가 반격을 준비하던 황제 알렉시오스 5세는 선황제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가 되어 연합하는 듯 하였으나 제대로 뒤통수를 맞아 칭제범으로 몰려 눈이 뽑히고 십자군에게 잡혀 처형당했다. 수도를 장악한 십자군은 라틴 제국을 세워 그리스 일대를 장악하였고, 이피로스와 트라페준타 일대에서는 도망친 귀족들이 건국한 군주국들[1]이 발흥하였다. 아나톨리아 서부는 무정부 상태에 돌입해 룸 술탄국에게 야금야금 먹히고 있었다.
1204년 니케아에 터를 마련한 테오도로스는 비티니아와 미시아 일대를 정리하고 아나톨리아 서부 일대로 나아갔다. 같은 해에 알렉시오스 1세가 건국한 뒤 흑해 연안을 따라 비티니아로 세력을 확장하던 트라페준타 제국을 저지하였으나, 그해 말 라틴 제국의 보두앵 1세와 포이마네논에서 격돌하여 대패했다. 행정 체제도 군대도 돈도 없는 껍데기 상태에서 급조한 군대만으로는 당연한 결과였고, 라틴 제국군이 마르마라 해 연안을 전부 장악하고 수도 니케아 근방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대위기였다.
구원은 뜻 밖의 방향에서 나타났다.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 칼로얀이 라틴 제국을 침공하여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라틴 제국의 주력을 격파하고 황제 보두앵 1세를 사로잡은 것이었다. 적의 예봉이 꺾여 시간을 벌게된 테오도로스 1세는 서둘러 국가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아나톨리아 서부의 이오니아 지역을 통합했으며, 붕괴한 행정제도를 처음부터 다시 세웠고, 정치와 조세의 모든 제도를 짧은 시간 내에 재건하였다. 이전 동로마 제국의 관직이 전면 복구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테오도로스의 기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2]
1205년에는 다시 라틴 제국의 위협이 닥쳤다. 2대 황제인 앙리가 아드라미티온을 점령, 다시 공세를 걸어온 것이었다. 아드라미티온 근교에서 양측은 맞붙었으나 또 패배한 니케아 측은 불가리아와 연합, 공동의 적인 라틴 제국을 견제하고자 하였고 그 해 4월 불가리아가 후방을 침공하자 라틴 제국은 물러나게 되었다.
1206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요안니스 10세가 안식한 뒤 니케아에 총대주교좌를 이전하고[3], 프리기아 지역을 통합하였다. 이 무렵 룸 술탄국은 또 다시 니케아에 대한 침략을 개시했으며, 테오도로스는 라오디키아, 안탈리아 등이 룸 술탄국 측에 넘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208년, 요안니스 10세가 안식한 뒤 1년 넘게 공백이던 총대주교좌에 새 총대주교로 미하일 4세를 선출하고[4] 새 총대주교의 주관으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1211년 전 황제이자 테오도로스 1세의 장인인 알렉시오스 3세가 니케아에 왔다. 알렉시오스 3세는 니케아 궁정에 선임황제로써 자신의 입지를 요구했는데 거부당하자 룸 술탄국으로 도주, 니케아를 칠 것을 주문했다.[5] 룸 술탄국의 공격 소식을 접수한 테오도로스 1세는 1200명의 그리스인 병사와 800명의 라틴인 기사대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출전했다. 메안데르의 안티오키아 전투[6]에서 룸 술탄국의 군대를 만난 니케아군은 고군분투 속에 적군을 격파했다. 테오도로스 1세 본인도 전장 한복판에서 분전했다. 이 때 테오도로스 1세가 룸 셀주크 술탄 카이쿠스로 1세와 직접 칼싸움을 벌여 술탄을 전사시켰다고 한다.[7]
1211년 말 안티오키아 전투로 약화된 니케아를 노리고 라틴 제국이 공격했다. 트라페준타 제국, 룸 술탄국과 협정을 맺어 니케아 제국을 고립시킨 후의 공격이었다. 린다코스 전투에서 니케아군은 라틴 군대에게 패배하였고 결국 협상의 결과로 미시아가 통째로 넘어갔으며 비티니아와 이오니아 일부가 넘어갔다.
1212년 라틴 제국과 룸 술탄국 전선이 안정되자 테오도로스는 트라페준타 제국을 공격했다. 시노피 이서의 영토가 수복되었으며 트라페준타 측은 약체화되었다. 이후의 평화를 기회로 테오도로스는 군사력을 재건하였고, 라틴 제국과는 결혼을 빌미로 관심을 계속 돌려두다가 1220년에 라틴 제국을 향해 공세를 취했다.
1221년에는 후계자로 사위 요안니스 3세를 택했다. 지지를 확보하고 형제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유력자들을 소집하여 투표과정을 거쳤고, 이를 통과한 요안니스는 충분한 정통성과 당위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요안니스 역시 테오도로스의 기대에 걸맞은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면서 이는 테오도로스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선택이 되었다.
1221년 말 테오도로스 1세가 사망했을 때, 니케아 제국은 인구 300만 명의 지역강국이 되어 있었고 그가 증원한 군대 8천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의 기반이 되었다.
3. 가족관계
부: 마누일 라스카리스모: 이리니 칸타쿠지나
형:콘스탄티노스 라스카리스
제: 알렉시오스 라스카리스
제: 이사키오스 라스카리스
첫번째 아내: 안나 앙겔리나
자: 요안니스 라스카리스(1212년 사망)
자: 니콜라오스 라스카리스(1212년 사망)
녀: 이리니 라스카리나(요안니스 3세의 아내)
녀: 마리아 라스카리나(헝가리 왕국 벨러 4세의 아내)
녀: 에우도키아 라스카리나
둘째 아내: 아르메니아의 필리파
자: 콘스탄티노스 라스카리스
셋째 아내: 마리 드 쿠르트네
사위: 요안니스 3세
4. 창작물에서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미디블2: 토탈 워 - 킹덤즈의 모드들중 하나인 stainless steel 모드에서 로마 제국 후기 캠페인의 시작 군주로 니케아 제국의 황제답게 니케아에서 시작한다. 능력치도 괜찮아 야전 지휘관으로 쓸 만하며 바로 지천이 콘스탄티노플이라 좋은 버프를 주는 콘스탄티노플의 구제자라는 칭호를 얻기 쉬운 군주.
토탈 워: 아틸라의 모드중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Medieval Kingdoms Total War 1212 AD모드에 니케아 제국의 황제로 등장한다. 능력치도 보통 이상이 되며 팩션 자체도 플레이어가 잘하면 초반에 바로 비잔티움 제국 재건을 할수 있는 정도니 대체로 많이 플레이 되는 편.
크루세이더 킹즈 3에서도 1178년 캠페인에서 등장한다. 다만 원역사대로면 3살이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6살로 설정되어 있다.
[1]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트라페준타 제국[2] 국가의 관직과 제도는 매우 복잡하고 체계적이어서 기억만으로 복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테오도로스 1세의 천재성이 빛나는 부분이다.[3]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십자군에게 함락된 이후 요안니스는 디디모티호로 피신했고 테오도로스는 피난간 요안니스에게 니케아로 와 줄 것을 요청했으나 요안니스는 고령을 이유로 사양했다.[4] 테오도로스와 정교회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정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총대주교를 선출할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교황을 이를 무시하고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라틴 총대주교좌를 설치했다. 결국 테오도로스와 정교회는 가톨릭과의 타협 없이 자체적으로 총대주교를 선출한다.[5] 테오도로스 1세 입장에서 본다면 거절할 수 밖에 없었는데 알렉시오스 3세는 이미 다른 사위였던 알렉시오스 5세의 뒷통수를 쳤던 경력이 있었고(물론 알렉시오스 5세가 이전부터 보인 행보에 대한 자업자득이긴 했다.) 알렉시오스 3세가 살아있을때 황제를 자칭했기에 제위를 내놓아도 목숨이 보장되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6] Ἀντιόχεια τοῦ Μαιάνδρου. 현 터키 아이든 주 쿠유자크(Kuyucak).[7] 황제와 술탄의 칼싸움은 당대 역사가인 니케타스 코니아테스의 역사서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