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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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成公都생몰연도 미상
전연의 인물. 자는 문조(文祖). 광주(廣州) 진흥군(晉興郡) 원오현(元吳縣) 출신.
2. 생애
성정이 날래고 싸나웠으며, 힘이 뛰어나 18세에 양용(陽勇)[1] 전투에서 모(矛)를 휘두르며 크게 소리치니, 적들이 모두 두려워 감히 성공도를 혼자서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방숙에 비견된다 칭하였으나, 이에 관해서 어떤 사람이 논하길"고대의 것과는 상황이 달라 비교할 바가 되지 못한다."
라 하였다.[1] 주석에 따르면 전연 시기를 통틀어 양용에서 전투가 벌어진 적이 없기에 용맹을 날렸다는 것에 대한 오기로 추정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