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10-18 11:11:41

반청


1. 개요2. 역사적 특징3. 기원4. 국가별 상황
4.1. 중화권
4.1.1. 중국4.1.2. 대만
5. 같이 보기

1. 개요

反清

청나라에 반대한다는 의미이다. 영어로는 'anti-Qing [sentiment]'라고 지칭한다.

한국사 교과서에는 이 ‘반청(反淸)’이라는 단어 자체는 그리 자주 언급되지 않는 편이다.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이 개념을 시대적 상황에 맞게 '친명배금(親明排金)', '숭명반청(崇明反淸)' 혹은 북벌론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역사적 용어로 언급하기 때문이다.#[1] 구한말 관련해서도 자주 쓰이는 용어는 아닌데, 반청파 같은 용어보다는 친일파, 친러파 같은 더 정확한 대체어가 존재하기 때문.

2. 역사적 특징

오늘날 중국과 대만에서 반청감정은 다소 복잡하면서도 민감한 소재인데, 중화민국은 신해혁명을 통해 청나라를 무너트리며 건국되었지만 한편으로 청나라를 국계승계한다고 주장하며 청나라의 영토 중 중국 본토 이외의 영토(동튀르키스탄, 남몽골, 만주, 티베트)에 대한 영유권은 주장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현대 중국 사회의 흐름과 역사, 민족주의나 역사해석을 고찰할 때 이런 반청 감정에 대한 인지부조화에 대한 이해는 필수이다. 첫 번째로는 1. 반청 운동은 서구 열강의 중국 침탈과 함께 한족 민족주의 성립에 직접적인 원인이고, 2.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원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될 당시 국호 인민공화국은 마르크스-레닌주의적 해석에 입각하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완전한 형태의 사회주의 국가 시스템)으로 이행하기 전 단계 즉 민족주의-부르주아 혁명 단계에 있는, 다시 말해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이행하기 전 단계에 해당하는 국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3. 한편으로 중국 공산당은 청나라의 과거 영토를 승계하려는 목적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주는 연방제를 검토하기도 했으나,# 상황이 중국 공산당에게 유리해지자 연방제 방안은 폐지되었던 바 있다. 청나라의 계승자로 그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인식과 청나라 말 반청감정에서 비롯된 피해의식이 동시에 주는 이중잣대는 오늘날 시진핑 정권의 중국 내셔널리즘의 근간이 된다 하겠다.참조기사(이코노미스트지 영문기사)

3. 기원

청나라에 대한 반감은 전통적으로 오랑캐로 여겨지던 만주족의 지배를 반대한다는 것에 있었다. 청나라 후반 반청운동의 기반은 순치제와 강희제 시절 활동했던 중화주의자 왕부지의 사상을 근간으로 한다.
신체 구조, 군집성, 배타성 면에서 한족은 오랑캐와 구별되지 않지만, 그래도 한족은 전적으로 오랑캐와 구별되어야 한다. 왜 그러한가? 만약 인간이 스스로를 사물과 구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늘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다. 한족이 스스로를 오랑캐와 구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상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다. 천지가 인간들을 서로 구별하고 통제하고 있는데 인간이 스스로 사회 집단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다.
- 왕부지(王夫之 1619~1692)[2]

왕부지가 단순히 한족이 아닌 사람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증오하며 멸시하는 글만 썼던 것은 아니다. 청나라를 증오했던 왕부지는 한편으로 만주족이 중원으로 유입된 계기가 명나라의 실정에 있다고 보면서, 결론으로 명나라 황제들은 국가를 개인의 사유물처럼 여겼기 때문에 국가가 붕괴했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청나라 말기 서구열강 등을 모방하여 한족 민족주의에 입각한 근대국가를 세우고자 한 당대 중국의 공화주의자들은 재발굴된 왕부지의 저서들을 읽고 그의 사상에 깊이 매료되었는데, 이렇게 왕부지를 우상화한 인물로는 쑨원, 량치차오, 캉유웨이가 있었다.

4. 국가별 상황

4.1. 중화권

한족 민족주의가 왕부지의 사상과 서구의 민족주의, 공화주의 사상과 연계되어 다듬어지기 이전 반청 성향의 한족 민족주의는 사이비 종교와 결합하는 성향이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1796년부터 1805년까지 10년 동안 '멸만흥한'(만주족의 국가를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킨다)[3]을 내세운 불교계 사이비 종교운동인 백련교도의 난, 그리고 만주족을 보이는 족족 학살한 것으로 악명높은 기독교계 사이비 종교 운동인 태평천국 운동이 있었다. 홍수전의 태평천국군은 난징을 점령할 당시 전족을 하지 않는 가정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만주족 4만여 명을 색출해 내 남녀노소 가리지않고 학살했는데, 이는 근대 민족주의와 연관된 전형적인 인종청소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참고로 오늘날 홍수전이 쓴 시들은 현대 중국 문학 평론가들에게 "홍수전이 시를 이따위로 쓴 거 보면 과거시험에 맨날 떨어진 게 이해가 된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잉여인간이 사이비 종교를 등에 업고 반청 감정을 부추킨 것만으로 한 국가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은 19세기 들어서 한족 쇼비니즘이 태동하고 있었다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족 신사층들의 민병대(향용)를 이끌고 백련교도의 난과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했던 것에서 보듯 사이비 종교에 기반한 반란은 한족 지식인들의 전반적인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족 지식인들은 청나라 군의 근간이자 만주족의 기득권을 지탱하는 제도이기도 했던 팔기군의 무능을 목격하고, 청나라와 만주족에 대한 평가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이는 한족 지식인들 사이에서 한족 민족주의, 공화주의에 기반한 사상이 유행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현대 중국문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인물이자 중화주의와 유교 사상을 비판한 인물인 루쉰도 반청주의자였다. 일본 유학 와중에 몰래 변발을 잘라낸 것으로도 알려진 그는 노골적으로 만주족에 대한 민족적 혐오를 드러내는 것은 자제했지만,[4] 당대 만주족이 청나라에 도입한 구습이자, 외국에서 돼지꼬리 머리라고 조롱의 대상이 되던 변발에 대한 반감만은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변발보다 더 싫어했던 청나라의 유산은 따로 있었다. 루쉰은 청나라 만주족 황실이 한족 지식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시행했던 문자의 옥 같은 사상 검열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청나라 조정이 지식인들의 비판 정신을 거세하고 고증학 같은 비정치적인 학문에만 몰두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중국의 근대화를 늦추고 민족의 활력을 빼앗았다고 보았던 것다.

신해혁명도 반청 한족주의자들에 의해 일어났다. 당연히 중화권의 공통 국부라고 불리는 쑨원도 한족주의자였으며, 한족주의자들이 중국국민당을 세웠다.

루쉰의 대표작 아Q정전은 신해혁명 이후에도 중국의 혼란상이 지속되던 상황에서 쓰여진 작품이다. 본 소설의 주인공 아Q의 이름 Q는 변발을 한 머리의 뒤통수를 형상화한 것이다. 소설의 전반부에 묘사되는 아Q의 여러 찌질이같은 모습은 외세인 만주족의 지배 하에서 노예처럼 안주했던 한족 사회를 묘사했다면, 소설의 후반부는 신해혁명 자체에 대한 풍자로, 당대 혁명 주도한 사람들이 청나라의 부정적 유산을 제대로 청산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 결과 중국이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한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마을의 지배층이던 일본 유학파 출신 전씨 아들[5] 같은 기회주의자들이 혁명이 일어나자 손바닥 뒤집듯 혁명당원으로 변신해 완장을 찬다. 이들은 혹시나 혁명이 실패해서 다시 청나라 조정이 정권을 잡을 것에 대비해 변발을 말아서 몰래 감추고 다니며, 혁명 이전 과거와 똑같이 행동한다. 아Q는 혁명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혁명 주도세력이 강해 보인다는 이유로 동조하고 다니지만 전씨 아들 등에게 개무시당한다. 뒤이어 조씨 집안이 강도를 당했을 때 아Q는 약탈에 참여하지도 못했으나, 만만하다는 이유로 도둑 누명을 쓰고 영문도 모른 채[6] 공개 처형당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아Q정전은 당대 지식인들의 반청 감정을 베이스로 하되, 반청 운동에서 출발한 신해혁명이 철저한 인적·정신적 청산 없이 피상적인 변화에만 그쳤다는 것을 자성하는 내용을 담아낸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4.1.1.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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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에서는 기존 인류 역사의 발전을 "노예제-봉건제-자본주의"라는 간단한 도식을 통해 설명해 왔다.[7]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청나라를 중국의 근대화를 가로막고 외세의 침략을 자초한 무능하고 부패한 봉건 왕조로 평가하면서 동시에 부청멸양(청나라를 돕고 양놈들을 죽이자)을 기치로 내세웠던 의화단 운동을 고평가하는 모순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의 모순적인 태도는 마오쩌둥이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무시당하는 원인 중 하나였는데,[8]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는 국제주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한족 민족주의자로 보아 불신하고 경멸했던 것이다.#

스탈린의 사망 이후 흐루쇼프 시대 들어서 중국과 소련은 만주를 비롯한 동북 국경지대에서 분쟁이 일어난다. 중국 측에서는 국경 분쟁 관련한 역사 해석에서 한편으로 프리모리예 지방을 러시아에 내주었던 청나라를 원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청나라한테서 물려받은 영토 중 중국 본토가 아닌 지역에서는 내선일체와 비슷하게 소수민족들을 한족에 동화시키는 정책을 펼치며, 대외적으로는 이웃 국가들을 대상 먼저 속지주의를 기반으로 만주족, 조선족, 내몽골인을 비롯한 여러 소수민족들의 역사를 해석한 이후 다음 코스로 속인주의를 기반으로 국경 너머까지 패권을 행사하려는 공격적인 역사관을 내세운 것이다. 당시에도 이러한 중국의 역사관은 한족 쇼비니즘이라고 비판받았다. 오늘날 중국의 중화민족 이데올로기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기원 역시 청나라의 과거 영토 유산에 대한 집착의 결과물이라 하겠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식 정체성은 56개 소수민족이 결합한 '통일적 다민족국가'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공화국에서 설명하는 인민은 마오주의적 설명에 의하면 '중화민족'이다. 그러나 이는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내선일체 비슷한 명목상의 설명이고, 중국의 인구 9할이 한족이다보니 중국 공산당 측에서 의도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민간에서 반청 감정이 표출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푸운동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중국 본토에서 한푸 운동 즉 만주족 청나라의 전통 의상인 치파오 대신 그 이전 한족들의 전통 의상인 한푸를 중국인들의 진정한 민속 의상으로 여기는 운동이 일어났다. 중국 공산당 측에서는 대외적으로는 한푸 운동의 한족 민족주의적 성격을 지적하며 만주족을 비롯한 소수민족을 배척하고 위화감을 준다는 지적을 하고 있으나, 대내적으로는 은근히 또 중국 민간의 한복공정을 지원하는 모습을 보여 한국 내에서 우려를 사고 있다.#

4.1.2. 대만

일본은 대만을 점령한 이후 중일혼혈의 해적 대장 정성공을 우상화했다. 그 결과 오늘날 대만에서도 '반청복명'(反清復明, 청나라에 반대하고 명나라를 복구시킨다) 기치를 내건 동녕국(소위 정씨왕국)을 자국 역사의 근간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삼합회의 기원이 되는 천지회(天地會)가 대만에서 일으킨 임상문의 난 역시 반청복명 운동의 일환이다.

한편 정성공은 종종 국부천대 이후 장제스의 행보와 비교된다. 반청복명은 장제스의 "반공대륙", "대륙수복"과 유사하고 그의 본성인에 대한 학살과 핍박은 정성공의 원주민 학살과 비교될 수 있다.

5. 같이 보기


[1] 참고로 한국사 교과서는 박제가, 박지원 같은 청나라를 긍정적으로 봤던 실학자들을 올려치기하는 성향이 있어 교과서 상으로는 조선시대 반청 감정을 일원화하기 어려운 입장이다. 이들 실학자들이 한국사는 물론 윤리나 국어 교과서에서 부각되서 다뤄지는 이유는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하는 자본주의 맹아론을 교육하는 것이 국민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 하에서다.[2] 강희제는 왕부지를 사면하면서 관직을 제안하는 관용을 베풀었으나, 왕부지가 이를 거부하고 고향 근처에서 은신하면서 청나라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였다. 결국 청나라 조정은 왕부지의 저서들을 금서로 지정하여 검열하였다.[3] 밑의 대만 문단에서 말할 '반청복명'도 집회에서 나타나기도 했는데, 이는 명나라를 그대로 복원하자는 의미라기보다는 청에 대한 강한 반감을 나타내는 구호에 가까웠다.[4] 신해혁명 이후 몰락한 만주족 노파를 측은하게 여긴 기록을 남긴 적도 있다.[5] 아Q는 이 인물을 '가짜 양놈'이라고 부른다..[6] 처형 직전 아Q는 서명 란에 이름을 쓸 줄 몰라서 동그라미를 그릴 때 동그라미를 더 잘 그리지 못했는지 따위나 후회한다.[7] 여기서 중국 관제 사학계는 청나라는 봉건제 왕조이지만 이족(과거에는 로로족이라고도 불렸다), 티베트 등을 중원의 봉건적 지주제와 달리 인신 예속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노예제 사회로 규정하였다. 마르크스주의 기본 교리에 따르면 사회는 노예제와 봉건제를 차례로 거쳐야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이들 소수민족이 "공산당의 인도를 받아 노예제 사회에서 사회주의 사회로 수천 년의 발전을 단숨에 뛰어넘었다(직접과도, 直接過渡)"고 선전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소수민족 정책이 봉건왕조 청나라의 그것보다 수천년 이상 앞선다고 자평한다.[8] 또 다른 하나는 마오주의에 대한 스탈린의 불신을 들 수 있다. 스탈린은 마오주의 이론을 두고 "이건 완전 봉건주의잖아."라고 평가했던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