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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치하 티베트 |
몽골 | 티베트 |
1. 개요
몽골과 티베트 망명정부 간의 관계를 정리한 문서다.오늘날에도 상당수의 몽골인들이 티베트 불교를 믿고 있고, 몽골에서 중국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겸해서 많은 몽골인들이 티베트 독립운동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인 편이다.
일단 몽골의 대중적인 여론과 다르게 정치외교적 측면에서 보면 몽골과 티베트 망명 정부 간의 관계는 상당히 냉혹한 현실을 많이 반영하는 편이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몽골을 자주 방문했었다. # 역시나 이에 중국은 항의하며 몽골이 자꾸 달라이 라마의 방문을 허용하면 보복조치를 한다며 협박하여 결국 몽골은 어쩔수 없이 달라이 라마의 방문을 금지했다. # 몽골에서 중국인의 출입국 심사를 엄격히 해도 잘 항의하지 않던 중국에서 달라이 라마 14세의 몽골 방문만큼은 강력하게 항의한다.
몽골 정부 입장에서도 몽골 내 할하 몽골인 외에도 서부 지역에 카자흐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나 투바인 같은 소수민족들의 자치권 확대 요구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내몽골 내 민족주의자들과 티베트 망명정부가 친하다는 이유로[1] 티베트 망명 정부와 일정수준 거리를 두고 있다.[2]
물론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인 교류가 적다는 것 뿐이지 몽골 불교계와 티베트 망명정부 간에는 비공식적으로 우호적인 교류가 많이 진행되는 편이다. 티베트 불교가 몽골에서 주요 종교인 이유로 상술한 달라이 라마 14세와 몽골인들과의 친교 관계도 그렇고, 젭춘담바 후툭투도 있다. 오늘날에도 많은 몽골인 승려들이 티베트 망명 정부가 위치한 다람살라 티베트 망명정부와 연계된 인도 내 티베트 불교 사원에서 유학하고 있다.
2. 역사적 관계
2.1. 중세
몽골과 티베트의 첫 조우는 1236년인데, 당시 티베트 부족장 한 명이 몽골에게 투항하고 금에게 대항하는 것으로 기록이 시작된다. 1240년, 몽골 제국은 티베트를 제압하기 위해 항복한 탕구트 계열 장군에게 군사 3만 명을 주어 티베트를 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역사적인 까담빠 종파의 절 두 곳이 불 타고 승려들이 학살당하는 등, 잔인한 결과가 많이 뒤를 따랐다. 몽골 제국은 티베트를 정복하되 성(행정구역)을 설치하지는 않고 다루가치를 파견하였다. <티베트 정치사(Tibet: A Political History)>를 쓴 샤캅파는 "다루가치가 라싸에 있었지만 티베트 내정에 전혀 간섭하지 않았고, 왕 황실로부터 책봉이 있었지만 이는 사카 판디타와 관련 없는 일부 샤꺄파 수령에게 해당할 뿐"이라고 적시했다. 원나라는 티베트 불교 샤꺄파(홍모파)의 쌰꺄틴진을 대리 통치인으로 삼았다.칭기스 칸은 위구르 문자를 개량한 몽골 문자를 만들라고 지시했는데, 쿠빌라이 칸은 여기에 더해 티베트 불교 승려 팍빠를 시켜 파스파 문자를 만들도록 했다. 홍모파의 승려 팍빠는 상도를 중심으로 샤머니즘, 경교, 이슬람 등 온갖 종교가 각축을 벌이던 몽골에 티베트 불교를 전파하였다. 비록 파스파 문자는 원나라에서만 사용되고 여타 몽골 제국 방계 국가[3]에서 사용되지 못하면서 사장되었지만, 티베트 문화가 원나라에 몽골인 지배층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음은 부정할 수 없다. 파스파 문자는 티베트 대장경을 몽골어로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
티베트인들은 색목인으로 분류되어 원나라에서 우대를 받았다. 팍빠와 같은 티베트 불교 수장들이 원나라 황실로부터 받은 대우는 왕공귀족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티베트 불교 수장들은 명목상 황제의 스승으로 대우받았기 때문에, 이들의 행렬에는 황제 및 후비공주 등 모두가 문 밖에서 영접할 정도였다. 원 무종 때에는 티베트인 승려(西僧)를 구타하는 자는 그 손을 자르고 욕하는 자는 혀를 절단한다."라는 황명이 내려졌다. 절대권력을 얻은 티베트 불교 승려들은 한족들의 논밭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의 횡포를 부렸다.[4] 다른 한편 중화주의자들의 반티베트 감정은 중국 내 반몽골 감정과 엮여있다. 다시 말해서 한족 자신들은 제국주의, 식민주의 가해자가 아니며 과거 원나라, 청나라 때의 복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은연 중에 박혀 있다.
물론 당시 티베트 불교에 샤꺄빠만 있던 것은 아니고, 쌰꺄빠와 경쟁하던 꺄규빠에서 차가타이 칸국의 도움을 받아 봉기를 일으킨 적도 있었다. 봉기는 진압되었지만, 원나라가 무너지자마자 티베트에서는 꺄규빠 세력이 쌰꺄빠를 밀어내고 티베트를 장악했다. 그러나 원명교체기 몽골인들이 명나라에게 패퇴하는 과정에서, 대도가 함락당하고 상도가 명군에게 파괴된 것을 계기로 티베트 불교 역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원나라의 티베트 불교 행사는 엄청나게 화려하고 과시적이었는데, 더군다가 티베트 본토의 쌰꺄빠 세력이 위축된 상황에서, 북원에서 원나라 때 티베트 불교 행사를 재현하기는 불가능했다.
2.2. 근세
티베트 불교는 튀메드부의 알탄 칸 때부터 다시 몽골인들의 종교가 되었다. 쿠빌라이 칸이 샤카빠를 지원한 것과 대조적으로 알탄 칸은 부족민 전체를 이끌고 티베트 불교 겔룩빠로 개종하였다. 달라이 라마라는 명칭도 몽골의 알탄 칸이 지어준 것이다. 1578년에 티베트 불교 겔룩빠의 교주 소남갸쵸가 알탄 칸을 방문했는데, 알탄 칸은 정통성 확보를 위해[5] 티베트 불교 겔룩빠를 국교로 선포했으며 교주를 달라이 라마로 선포했다. 이는 몽골 지역의 종교가 티베트 불교가 되는 계기이며 최초의 달라이 라마 등장이었다. 소남갸초는 자신의 선대 교주들을 각각 1, 2대 달라이 라마로 칭하고 알탄 칸에 감사하는 마음 및 알탄 칸 계의 정통성 확보, 몽골을 통한 티베트 내에서의 겔룩파 세력 강화를 위해 알탄 칸의 증손자를 4대 달라이 라마로 삼았다. 4대 달라이 라마는 유일한 몽골인 달라이 라마이다.알탄 칸이 부족민 전체를 이끌고 티베트 불교로 개종한 것은 튀메드 부와 적대하던 다른 부족들 사이에서도 영향을 주었다. 얼마 되지 않아 오이라트 연맹 역시 티베트 불교로 개종하였다. 유목제국은 정주민 제국과 다르게 체계적인 왕위 계승법이 존재하지 않았고 국가 거점이 요새와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것도 아니라서 내분으로 인한 국력 약화 문제가 심각하였었다. 티베트 불교나 이슬람교는 유목 제국들의 내분을 막는 해결사 역할을 하였다. 오이라트 연맹과 이웃한 튀르크계 카자흐 칸국이나 모굴리스탄 칸국이 이슬람교를 믿는 상황에서 이들과 대치하던 오이라트 부족들은 티베트 불교로 개종을 선택했던 것이다. 오이라트 부족의 일파였던 호슈트 부족들이 티베트 고원과 코코노르 호수 일대를 장악한다. 이 과정에서 겔룩빠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 5세는 호슈트 칸들과 협력하여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영토를 확장하여, 토번 제국 멸망 이래 수백여 년간 분열되어 있었던 티베트 고원 일대를 통일하였다. 호슈트 몽골-티베트 연합군은 부탄 왕국을 위협하였으며, 라다크와 레 일대까지 진출을 노렸으나, 무굴 제국이 티베트와 인도 사이에 있던 소왕국들을 지원하면서 팽창은 저지되었다.
한편 호슈트 칸국이 같은 오이라트 계열 유목 집단인 준가르 칸국의 위협을 받자, 달라이 라마들은 당시 청나라의 도움을 요청한다. 청나라 황제들은 준가르 칸국을 견제하고 제국 내외 몽골족들의 민심을 얻을 목적으로 달라이 라마를 황제의 스승으로 대우하고, 대신 티베트를 청나라의 보호국으로 삼는다. 청나라는 호슈트 칸국 시절보다 오히려 달라이 라마의 자치권을 강화해주되 대신 코코노르(암도) 지역에는 티베트 고원 위짱 지역과 별개의 이번원을 세웠다. 이번원(理藩院)은 만주어로 '바깥 지역을 통치하는 기구'를 뜻한다. 한족 지식층은 거의 모두 이번원에서 배제되었고, 대부분은 중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들로 행정이 운용되었다. 청나라 치세 당시 티베트인들과 외몽골인들의 지위는 명목상으로는 한족에 비해 우월하였다.
2.3. 근현대
신해혁명으로 만주족의 청나라가 멸망하자, 외몽골과 티베트는 한족의 중국과 관계가 없다고 선을 그으며 독립을 시도하였다. 먼저 티베트는 청나라 멸망 이전 영국령 인도 제국 그리고 러시아 제국과 모두 접촉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러시아 제국은 티베트를 방치하였고, 티베트는 미승인국인 티베트 왕국으로 독립한다.한 편 몽골 역시 티베트인 승려 복드 칸을 지도자로 하여 복드 칸국을 건국하였다. 1913년 양국 사이에는 몽장 조약이 맺어졌다. 한 편 복드 칸은 달라이 라마와 연계된 겔룩빠 승려였으나, 바로 그 이유로 티베트 왕국의 달라이 라마 13세가 자신의 귄위를 위협할까봐 무척 경계했다고 한다.
복드 칸국은 중국의 외몽골 출병으로 무너졌다. 하지만 러시아 내전으로 인한 혼란기에 중국 세력이 축출되고, 결국 몽골 인민당의 주도로 다시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독립 직후 몽골 인민당은 이미 고령에 접어든 복드 칸을 숙청하지 않고 국가 주석 대우는 해주었는데, 이는 티베트를 의식한 것이 아니라 복드 칸이 외몽골을 독립시킨 기여를 인정한 차원에서 그런 것이었다. 20세기 초반 양국은 서로 소 닭보듯 데먼데먼한 상황을 유지하였다. 둘 다 사실상의 미승인국인 처지 때문에[6]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도 애매한 입장이었다.
독립 몽골은 몇년 후 공산화되어 향후 허를러깅 처이발상에 의한 피비린내나는 불교 탄압을 겪는다. 그는 공산화를 진행하라는 소련의 압력과 당시 몽골 내 티베트 불교의 근본주의화[7] 등의 이유로 자국 내 티베트 불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1950년대 초반 중국이 티베트를 침략, 강점하면서 티베트 왕국은 멸망하였다. 인도 다람살라에 티베트 망명정부가 들어서고, 일부 젭춘담바 후툭투 9세를 포함한 일부 몽골인 불교 지도자들 역시 몽골 인민 공화국의 불교 탄압을 피해 다람살라로 피신하였다.
몽골 인민 공화국은 티베트 왕국 멸망으로부터 수십여 년이 지난 20세기 후반에야 티베트 불교 탄압 정책을 완화시켰다. 몽골인민 공화국 시절 다람살라로 피신했던 젭춘담바 후툭투 9세(복드 칸의 후계자)는 몽골의 민주화 이후에야 몽골로 귀환하여 2012년 몽골에서 입적하였다.
3. 문화적 관계
티베트 불교는 몽골 제국 시절부터 몽골인들에게 유행하던 종교였다. 상술하듯 몽골 제국 시대 쿠빌라이 칸의 지원을 받아 원나라에서 유행하던 티베트 불교 종파는 샤꺄빠였다. 몽골의 티베트 불교는 근세 잠시 단절의 역사를 겪다가 다시 부활하는데, 오늘날 몽골에서는 겔룩빠가 우세한 종파이다.몽골인 승려들은 티베트어로 된 경전으로 학습하고 승려의 복식도 티베트 승려와 동일할 정도로 몽골과 티베트의 불교는 거의 차이가 없다. 몽골 승려들의 수준은 예전부터 우수하였는데, 제13대 달라이 라마가 몽골을 방문한 후 그 곳 학승들의 능숙한 논쟁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일이 지금과 같은 길고 철저한 게쉬 학위 제도를 정립하게 된 계기가 될 정도였다. 안병남, 《티베트 불교의 사원 교육제도》
현재 몽골 인구의 약 60%가 불교도로 대부분 티베트 불교(주로 겔룩빠)를 믿으며, 간단 사원이 몽골 티베트 불교의 중심적인 사원이다. 소련이 붕괴된 1990년대 이후 몽골과 칼미키아 공화국, 부랴티아 공화국, 투바 공화국의 승려들이 남인도의 티베트 불교 사원인 고망(Gomang) 사원으로 유학을 오기 시작하여 현재는 2,000여 명의 몽골, 러시아 연방 출신 승려들이 고망 사원에서 정진 중이다. 그 중에는 게쉬 학위를 취득한 승려나 사원의 방장(方丈) 등 고위직에 오른 승려도 상당 수 배출될 정도로 몽골 승려들의 자질은 우수하다. #
4. 관련 문서
[1] 몽골 공화국의 할하 몽골인들은 내몽골인들과 사이가 상당히 좋지 않다.[2] 다만 시진핑의 내몽골인 탄압이 심해지면서부터는 몽골 공화국과 내몽골의 관계가 개선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3] 일 칸국과 킵차크 칸국, 차가타이 칸국의 외교문서 및 인장은 몽골 문자로 되어 있다.[4] 출처 : 중국 불교사 / 미찌하다 료오슈 저 / 계환 역[5] 알탄 칸은 칭기스 칸의 직계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원칙상 칸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없었다. 종교의 힘을 빌어 칸으로써 권위를 정당화하려 한 것[6] 현대 몽골은 외몽골 지방인데, 외몽골의 독립은 2차대전 후에야 소련 외의 다른 국가들에게도 인정받았다. 아예 존속기 내내 미승인국 처지에 머무르다가 재합병된 티베트야 말할 것도 없딘.[7] 1918년 통계 기준 외몽골 할하 몽골인 성인 남성의 44.5%가 티베트 불교 승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