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몬테소리 Maria Tecla Artemisia Montessori | |
<colbgcolor=#67809f> 출생 | 1870년 8월 31일 |
이탈리아 왕국 마르케 키아라발레 | |
사망 | 1952년 5월 6일 (향년 81세) |
직업 | 아동 교육학자, 아동 정신과 의사 |
국적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로마 사피엔차 대학교 의학과 |
경력 | 로마 국립 특수 교육학교(1898~1900) 이탈리아 교육부 장관(1922~1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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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아동교육학자이자 아동정신과 의사. 교육학에 문외한이더라도 몬테소리 교육법이란 표현은 워낙 교육업체에서 많이 홍보문구로 써와서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2. 생애
이탈리아 키아라발레(Chiaravalle)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와 어머니의 열렬한 서포트를 업고 로마 사피엔차 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한 유일한 여학생이었다.설에 따르면 의대생 당시 여자라는 이유로 해부실습 수업 참여가 금지되었다고 한다. 마초 문화 경향이 강한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의대는 심각한 남초사회였으니 이러한 불평등이 심했다고 한다.
졸업 후 동 대학 부속병원 정신병과 조수가 되었으나 여전한 차별대우 및 아이들을 학대하는 당시의 관습에 지쳐 교육학으로 전향을 결심, 1898년부터 2년 간 로마의 국립 특수교육학교에서 일한 다음 로마대학교에 재입학해 7년간 실험심리학과 교육학을 배웠다. 1907년 3~6세까지의 노동자 자녀들을 위한 유치원 '어린이의 집(Casa dei Bambini)'을 열어, 이른바 몬테소리 교육법(法)에 의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1922년에는 이탈리아의 교육부 장관이 되었으며, 몬테소리의 학교 및 교육 방법은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평화와 어린이 교육을 강조하는 등 몬테소리의 교육 방식은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과 부딪히는 부분이 많았다. 결국 몬테소리는 공직을 사임하고 1934년 이탈리아를 떠나서 아들이 거주하고 있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정착했다. 이후 몬테소리는 네덜란드, 영국, 인도 등을 찾아다니며 교육법을 전파하다가 1952년 네덜란드 노르트베이크(Noordwijk)에서 뇌출혈로 별세했다. 향년 81세.
3. 아동 교육에의 기여
교사들의 권위주의적 교육에 강력히 반대하고 어린이의 권리존중을 주장하여 어린이의 신체 및 정신의 발달을 북돋우는 자유로운 교육과, 어린이 하나하나의 활동리듬에 알맞은 개성발전교육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교육 방향이 어린이들로 하여금 자율성과 자발성을 배울 수 있도록 하며, 자기개발에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또, 감관(感官)의 훈련이야말로 모든 정신발달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하고, 갖가지 놀이 도구를 고안하여 감관을 훈련시키고자 하였다.몬테소리식 교육이 자신의 유치원 운영을 통해 효능이 입증되자, 세계 각국에서 그녀의 방식을 배우려 몰려왔는데, 이 때를 계기로 그녀의 이름을 따 교구(敎具) 회사를 세웠다. 하지만 의사 시절의 과거 스캔들이 걸려서 홍역을 치르기도 했었다.
몬테소리의 교육법에 대해 공격을 일삼는 극우 선동가들은 그녀의 학교를 탄압하였으나 1945년 그들의 지도자인 베니토 무솔리니가 처형되면서 그녀의 학교에 대한 탄압은 끝을 맺고 그녀의 교육은 보편적인 교육론 중 하나로 널리 받아들여졌다.[1][2]
오늘날에도 권위주의적 교육론과 어른들의 의식이 팽배한 상황인데[3] 정말 시대를 앞서간 정신의학자이자 교육학자이다.
저서로 《가정에서의 어린이 Das Kind in der Familie》(1926) 《교회에서의 어린이 The Child in the Church》(1929) 《인간 가능성의 교육 To Educate Human Potential》(1948) 등이 있다.
또한 몬테소리 교육법이 미국 등을 거쳐가면서 마치 영재를 만들어주는 기적의 조기교육 방법인양 소개되기도 했다. 위에 나왔듯이 어린이의 놀이와 자율성을 강조하는 몬테소리의 본래의 의도를 생각하면 심각한 왜곡이라 할 수 있다.
인도에서는 이러한 교육법을 전파한 그녀의 영향을 받아 1959년에 시티 몬테소리 스쿨(City Montessori School, CMS)이 설립되었다.[4]
4. 개인사
미혼모이기도 했다. 함께 병원에서 일한 동료 의사인 주세페 몬테사노 박사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다가 임신을 했는데 남자 쪽 집안에서 여자가 의사라는 이유[5]로 반대가 심해서 파혼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아들 마리오 몬테사노를 홀로 키우게 되었다.당시 미혼모에 대한 시선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싸늘했기 때문에 몬테소리는 한동안 아들을 조카로 소개했었다고 한다. 지금도 사회적 유명인 중에 (입양의 경우는 있을 수 있더라도) 친자녀를 홀로 낳아 키우는 미혼모는 드물다. 특히 동양권에서는 더더욱 찾기 어려워서 후지타 사유리가 지극히 예외적인 케이스이다.
5. 몬테소리 교육기관
마리아 몬테소리는 자신의 교육관과 교육방법을 문서로 정리하여 출판했다. 이를 주목한 미국 등 각국의 교육기관이 몬테소리 교육론을 받아들여 몬테소리 교육을 실시했다. 마리아 몬테소리는 국제 협회를 설립하기는 했지만, 몬테소리 교육의 보급을 위해 몬테소리를 상표화하거나 상업화하지 않았다.[6] AMI에서 원래의 몬테소리 교육을 보급하고 있지만, 꼭 AMI의 자격을 취득하거나 그 내용을 준수해야만 몬테소리의 간판을 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몬테소리 교육을 표방하는 교육기관 사이에서도 몬테소리 교육의 내용에 대해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주요 국제 협회는 다음과 같다. 이외에도 많은 협회들이 존재하며 사설 자격증 취득 코스를 제공하는데, 협회의 역사와 공신력을 잘 알아보고 판단하는 것이 좋다.
- 국제 몬테소리 협회 (Association Montessori Internationale): 1929년 마리아 몬테소리 본인이 설립. 가장 근본이 되는 협회로서 정통 몬테소리 교육의 보급에 힘쓰고 있다.
- 미국 몬테소리 협회 (American Montessori Society): 1958년 AMI의 미국 대표인 람부쉬가 설립.
미국의 경우, 1910년 약 100여 곳의 교육기관이 몬테소리 교육을 도입했다가 당대 유명한 교육학자였던 존 듀이의 비판을 받고 쇠퇴했다. 그 후 1950년대에 다시 도입되어 널리 퍼졌다. INSEAD에서 3,000명의 임원과 500명의 창업가를 조사한 결과 많은 수가 몬테소리 교육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바바라 월터스가 2004년 구글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를 인터뷰하면서 부모가 대학교수였던 것이 주요 성공 요인이었는지 묻자 그들은 그 점 대신 어릴 때 몬테소리 교육을 받은 것을 꼽기도 했다: "우리 둘 다 몬테소리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규칙과 명령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고,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질문하고, 일을 조금 다르게 하는 훈련의 일부였다고 생각합니다." #
미국에서는 다양한 몬테소리 교구 회사들도 성업 중이다. Lovevery처럼 전통적인 몬테소리 교구에 화려한 컬러를 가미해 구독제로 배송하는 회사가 있는가 하면, Lalo처럼 몬테소리와 다른 교구를 함께 취급하는 곳도 있고, 개별 교구를 아마존 등 유통 채널을 통해 파는 회사들도 있고, 몬테소리와 아무 관계 없는 장난감에 몬테소리 키워드를 붙여 파는 곳들도 있다(...).
한국에서도 몬테소리 교육기관들이 있다. 비용은 물론 교구의 구성, 내용, 운영방식 등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다. 또 몬테소리 특성상 다양한 국내외 협회가 존재하므로, 협력하거나 인증을 받은 협회도 조금씩 다르고, 지도사가 어떤 교육을 받고 자격을 취득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책도 다르다. 몬테소리 교구 판매를 취급하는 국내 회사로는 아래 3사가 유명하다:
- 한국 몬테소리[7]
- 아가월드 몬테소리
- 키즈에이원
- 이외에도 굉장히 많은 국내 몬테소리 교육기관과 협회가 있다.
한국에서 몬테소리 교육을 하는 주요 방법은 다음과 같다.
- 몬테소리 어린이집/유치원: 몬테소리 교육을 하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매일 등원한다.
- 몬테소리 기관 방문 수업: 몬테소리 교육기관에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수업을 하고 온다.
- 몬테소리 홈스쿨: 몬테소리 교육기관이 파견한, 또는 프리랜서인 몬테소리 지도사가 정기적으로 가정에 방문하여 수업을 진행한다.
- 엄마표 몬테소리: 양육자가 몬테소리 교육을 공부하여 직접 몬테소리 교육을 한다.
한편, AMI로부터 몬테소리 교구의 제조인증을 받은 업체는 4곳이 있는데, 그 중에서 AMI 설립연도와 같은 해 창업한 네덜란드의 니엔후이스(Nienhuis)가 가장 근본 업체로 취급 받는다. 니엔후이스의 모든 몬테소리 교구는 AMI로부터 개별 인증을 받았고, 마감과 내구성이 뛰어나다. 하지만 가격이 매우 비싸다.[8] 니엔후이스의 국내 판권을 가진 업체는 몇 년에 한 번씩 바뀌고 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훌륭한 지도사의 지도를 받는 것이다. 몬테소리 기관마다 가능한 지역이 다르고, 지도사마다 만족도도 다를 수 있으니, 주변에 몬테소리 교육을 하고 있는 부모가 있는지 알아보고 만족도가 어떤지부터 알아보는 것이 좋다.
[1] 마리아 몬테소리에 대한 글[2] 이 글은 교육에 의한 평화주의를 실천한 마리아 몬테소리의 견해를 소개하는 내용이기도 하다.[3] 나무위키의 급식충, 초딩 항목 등을 보면 여전히 중년 꼰대를 비판하는 나무위키에서 마저도 꼰대스러운 서술이 많다.[4]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엄청나게 큰 편이며,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수용인원을 자랑하여 심지어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하였다.[5] 의대에 처음 입학할 때도 그렇고 당시 이탈리아의 사회상이 여성에 대해 워낙 보수적이었다보니 여성이 직업, 그것도 의사라는 고스펙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아니꼽게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다. 지금도 여성관이 보수적인 국가에서는 고스펙 여성들을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경우가 많이 있다.[6] 미국에서는 몬테소리가 보통명사라는 판결이 나왔으며, 이는 법적으로 마리아 몬테소리의 교육론과 얼마나 가까운지에 대해 전혀 따지지 않고 어떠한 책임도 없이 몬테소리를 표방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7] 창업자의 자녀 명의로 운영하는 유치원에서 식자재로 물의를 일으켜 '못된소리'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문제의 유치원은 폐업했다.[8] 모든 유아용품이 그렇듯이 교구도 사용기간이 결코 길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부모에게 가성비 문제는 더 크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