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16대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 LVCIVS VERV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Lucius Aurelius Verus | ||
출생 | 130년 12월 15일 | ||
로마 제국 로마 | |||
사망 | 169년 1월 23일 (향년 38세) | ||
로마 제국 알티움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
161년 3월 7일 ~ 169년 1월 23일 (8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 휘 | <colbgcolor=#fff,#1f2023><colcolor=#373a3c,#ddd>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1] Lucius Ceionius Commodus | |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2] Lucius Aelius Aurelius Commodus |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아우구스투스[3] Imperator Caesar Lucius Aurelius Verus Augustus | |||
개선칭호 | 아르메니아쿠스(164년), 파르티쿠스 막시무스(165년), 메디쿠스(166년) | ||
가문 |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 ||
종교 | 로마 다신교 | ||
부모 | 친부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4] 모친 아비디아 파울티아 양부 안토니누스 피우스 양모 대 파우스티나 | ||
황후 | 루킬라(164 결혼) | ||
자녀 | 소(小) 루키우스 베루스(요절), 아우렐리아 루킬라(요절), 루킬라 플라우티아[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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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오현제 중 마지막을 장식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동생[6]이자 공동 황제였다. 조카는 로마 역사상 최악의 황제로 악명을 떨친 콤모두스였다. 하지만 형, 조카와 달리 인지도는 그리 높지 않다.[7] 황제로서의 이름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아우구스투스였다. 재위 기간은 161년 3월 17일부터 169년까지였다.2. 황제가 되기 전 생애
2.1. 출생과 본가
오현제 중 한 명인 하드리아누스의 양아들이자 후계자 겸 공동 황제였던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친아들로 130년 12월 15일 태어났다. 본명은 증조부, 조부, 아버지와 같은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였으며, 본가는 에트루리아에서 시작된 오래된 명문가였다. 그의 어머니 역시 로마 시대의 그리스인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를 후원한 옛 에트루리아 지방의 로마 귀족 가문 출신으로 친부모 모두 오래된 이탈리아 가문 사람들이었다.루키우스 베루스의 본가는 친가, 외가 모두 이탈리아 귀족이었고 모두 그 역사는 당시 로마 사회 안에서 상당했다.
본가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가문은 에트루리아 시대때부터 내려온 유서깊은 씨족 내 분파 가문이다. 이 씨족 가문은 같은 뿌리에서 시작된 분파 가문들(루푸스, 알비누스[8] 등)과 달리 로마 편입 이후에도 가장 성공한 집안이었다. 콤모두스 가는 제정시대에 접어든 2세기 무렵 다른 신흥 이탈리아 귀족들과 달리 공화정 후기에 원로원 의원들을 배출한 노빌레스로, 당시 몇 남지 않은 세습 귀족 가문이었다. 같은 씨족 내에서도 이 가문과 견줄만 했다는 알비누스 가문도 2세기에야 위세를 날린 것을 생각해보면, 콤모두스 가문의 위세는 더욱 대단했는데 루키우스 베루스 직계는 여타 다른 친척과 비교하면 이중 으뜸이었다.
루키우스 베루스의 직계는 원로원 의석을 대대로 세습했을 뿐만 아니라, 집정관까지 루키우스 베루스 직계에선 무려 2번이나 연속 배출했다. 베루스의 직계는 증조부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가 가장 유명하지만, 이 사람 선대때인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시대부터 원로원 의석을 세습하면서도 두 황제 아래에서 고위직을 역임했다. 이런 배경 외에도 루키우스 베루스의 증조부는 78년 집정관을 지낸 인사로 이 무렵 이탈리아 내 에트루리아 혈통 귀족 중 영향력이 상당한 원로원 의원이었다. 베루스의 부친과 이름이 똑같은 친할아버지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역시 106년에 집정관을 지냈던 거물이었고, 친아버지는 하드리아누스의 양자로 입적되어 공식 후계자에 올랐으며 공동 황제이기도 했다.
외가를 살펴보면 이 집안도 대단했는데 어머니 아비디아 파울티나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 집정관까지 지낸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폰티우스 니그리누스의 직계 후손이었다. 하지만 루키우스 베루스의 외조부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찍힌 나머지 원로원에서 제명되는 흑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친할아버지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니그리누스가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에 아카이아 총독을 지냈고, 큰아버지 티투스 아비디우스 퀴에투스 역시 아카이아 총독을 지낸 까닭에, 일찍부터 루키우스 베루스의 외가인 아비디아의 친정은 그리스 지역, 그리스인들과 강한 유대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베루스의 친모 아비디아는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얻었다. 로마에서 발굴된 비문에 따르면, 아비디아는 장녀 케이오니아 파비아, 장남 루키우스 베루스, 차남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차녀 케이오니아 플라우티아 순으로 자녀를 얻었다. 루키우스 베루스의 누나 케이오니아 파비아는 136년 비비아 사비나 황후의 조카손자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후일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약혼했지만, 138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상호합의 하에 약혼을 파기했고, 이후 법적 숙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주선 아래 비슷한 또래의 노빌레스 청년귀족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와 결혼했다. 베루스의 친동생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는 서기 110년생인 숙부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와 동명이인으로, 원로원 의원으로 있었다는 것 외에는 자세한 경력이나 삶이 알려지지 않는다. 여동생 케이오니아 플라우티아는 166년 집정관을 지낸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푸덴스와 결혼해, 사이에 세르빌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딸을 얻었다. 세르빌리아는 후일 집정관을 지낸 유니우스 리키니우스 발부스와 결혼해, 소(小) 유니우스 리키니우스 발부스라는 이름의 아들을 뒀는데, 그는 4세기 위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주장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1세의 딸인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와의 사이에서 고르디아누스 3세를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고대기록의 주장은 19세기에 이르러 거짓으로 확정났다.
2.2. 입양과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절
8세가 되던 해인 138년 아버지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사망했고, 어머니 역시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가 안토니누스 피우스, 대 파우스티나의 양자로 입양되기 전후인 136~138년 사이에 마지막 흉상을 남긴 이후 공식 기록, 활동이 없다. 친어머니 아비디아 역시 이런 배경 때문에 138년 사망한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 요절 전후로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하듯이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는 성년식을 치른 때, 제위에 오른 때의 두 번 동안 모두 그녀 생전을 축원했고, 즉위 후 친어머니를 기리는 비문을 두 개 남겼다. 따라서 루키우스 베루스의 양할아버지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의 새로운 후계자로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선정해 그와 입양관계를 맺을 때, 루키우스 베루스를 처제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사위인 원로원 의원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지명하고 상속자로 삼겠다고 하면서, 안토니누스와 그 아내 대 파우스티나를 머물고 있던 별궁으로 불려들어 이들 부부에게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9]와 함께 루키우스 베루스를 그의 양아들로 입양할 것을 요구했다.이때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자신의 친구이자 동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10]의 사위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받아들이면서 여러 가지 조건을 붙였고, 아내 비비아 사비나 황후의 조카로 안토니누스의 아내인 대 파우스티나에게 자신의 법적 손자인 루키우스 베루스를 친아들로 삼을 것을 요청했다. 안토니누스, 대 파우스티나 부부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와는 인척 관계였기 때문에, 안토니누스 부부는 친조카 마르쿠스와 함께 루키우스 베루스를 양자로 삼고, 약속을 이행했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이후 안토니누스 피우스, 대 파우스티나 부부에게 명령 아래 자신의 법적 손주 중 케이오니아 파비아, 루키우스 베루스 남매를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처조카이자 두 양자 중 첫째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부부의 딸 소 파우스티나의 배필로 삼으라고 강요했다. 이 명령은 일방적이었기 때문에, 루키우스 베루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딸이었던(그리고 이후 본인의 장모가 되기도 하는)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소 파우스티나)와 정혼했다.
그러나 이 약혼은 소 파우스티나가 10살 가까이 많을 정도로 연상인데다, 로마 상류층 남녀의 초혼 적령기상 문제가 많았다. 아울러 안토니누스가 황제가 됨에도 불구하고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입적 조건은 지나칠 정도로 후임자에게 불리해 수정이 불가피했다.
양아버지 안토니누스 피우스 |
이런 이유 때문에 하드리아누스가 죽고 난 이후,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심사숙고 끝에 선제의 기본 계획인 “하드리아누스의 다음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그 다음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큰 틀만 유지하고, 루키우스 베루스와 자신의 딸 간의 약혼은 파기했다. 이 과정에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아내 대 파우스티나와 단둘이 결정하지 않고, 당사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소 파우스티나의 의견을 들었고, 어린 루키우스 베루스를 배려했다. 그 결과, 트라야누스의 피를 자신의 외할머니 루필리아 파우스티나를 통해 이어 받은 소(小) 파우스티나는 큰외삼촌의 아들로 트라야누스의 누나 울피아 마르키아나의 피를 물려 받은 고종사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약혼 후 결혼했다. 그런데 이 결혼은 신랑과 신부 모두 결혼 적령기가 비슷한 나이대라서 문제가 없었고, 당시 로마에서는 고종사촌 간의 근친혼도 많았던데다 아들이 없는 친척이 조카나 처조카 등 친인척을 사위로 삼아 그를 양자로 삼고 자신의 지위를 물려주는 일이 흔했다.[11]
이와 동시에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의 누나 케이오니아 파비아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136년 약혼한 사이였던 것을 신랑 아버지 자격으로 138년 취소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직 결혼 적령기가 안 된 케이오니아 파비아의 혼처를 다시 구해, 집정관을 배출한 원로원 귀족 가문 중 하나인 플라우티우스 가의 자제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의 아버지)와 결혼시키고, 그를 후원해 159년 집정관에 오르게 해줬다. 이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그의 두 양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가 명분과 실리를 모두 획득하게 한 결정이었는데, 실제로 이런 계획 변경은 안토니누스 왕가에 우호적인 귀족 가문을 늘려주는 조치가 되었다.
카이사르 시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즉위 후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자신의 처조카이며 사위이자 실질적인 후계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역대 로마 황제 중 어떤 사람보다 일찍이 제왕 교육을 시켰고, 고위직을 맡기며 자신의 일을 돕게 했다. 안토니누스는 두 양자 중 처조카이자 사위인 마르쿠스를 의심의 여지 없이 더 총애했다. 하지만 안토니누스는 마르쿠스보다 9살이나 어린 루키우스 베루스 역시 사랑했다. 그는 일찍 두 아들을 잃은 뒤, 양자로 맞이한 마르쿠스와 루키우스를 모두 친아들로 여겼고, 대 파우스티나 역시 자신의 친조카인 마르쿠스와 함께 입양한 루키우스를 훌륭히 키우고 많은 정을 쏟았다. 하지만 대 파우스티나는 140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런 배경으로 루키우스 베루스는 양모 대 파우스티나를 일찍 여읜 뒤, 대 파우스티나의 이모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처형인 소(小) 마티디아 손에서 자랐다. 이 결정은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아내를 잃은 뒤, 루키우스 베루스를 소 마티디아에게 맡긴 결과였는데, 안토니누스는 친딸 소 파우스티나와 양자, 처조카이자 사위인 마르쿠스를 양육하는 것에도 소 마티디아에게 이를 정중히 제안해 함께 성장하게 했다.
소 마티디아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딸로 여긴 누나의 손녀로, 고상하고 교양 넘치는 귀부인이었다. 그녀는 중부 이탈리아의 움브리아 지방에 있는 마티게와 로마를 오고 가며 살았는데, 그녀가 대부분 거주해온 마티게의 호화 대저택은 트라야누스 황제가 소 마티디아에게 직접 선물로 준 저택이었다. 그녀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무척 아낀 친혈육으로, 첫 남편과 사별 후 재혼하지 않았고, 자녀 없이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녀는 서기 85년생으로 서기 161년까지 살 정도로 매우 장수했다.
루키우스를 친아들처럼 키운 소 마티디아는 성격이 차분하고, 자애롭기로 유명했다. 오늘날 이탈리아에 있는 마티게의 어원이 될 정도로 그녀는 마을 주민 모두에게 상냥했고 많은 기부와 시혜를 했다. 일찍부터 이부 여동생 비비아 사비나, 루필리아 파우스티나 자매를 친여동생처럼 여겼고, 그들의 남편들과 자녀, 사위와 유대관계가 매우 깊었다. 그녀는 두 여동생 중 막내인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자녀, 손주들을 친자녀처럼 여긴 나머지,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딸 대 파우스티나를 딸로 여겼으며, 대 파우스티나의 남편인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원로원 의원이던 시절부터 많은 후원을 하는 등 그를 사위로 여겼다. 더해 소 마티디아는 어린 루키우스 베루스를 하드리아누스, 비비아 사비나의 법적 손자가 아닌 친아들 내지 친손자로 여겨 많은 정을 쏟았다.[12]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이런 결정은 결과적으로 루키우스 베루스가 긍정적이고, 사랑 많은 성격을 갖게 했다. 소 마티디아는 고모, 이모, 할머니, 어머니 자격으로 루키우스 베루스를 키우며,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손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외손녀 소 파우스티나를 무척 아끼고 이들 부부의 딸들을 양육하는 것을 도왔다. 그러면서 그녀는 루키우스 베루스를 친아들처럼 극진히 키웠다. 이런 성장 배경은 루키우스 베루스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를 법적 남매 정도로 여기지 않고, 마르쿠스를 친형처럼 따르고, 소 파우스티나를 누나이자 형수로 여긴 배경이 됐다.
안토니누스가 어린 루키우스 베루스에게 공식적인 제왕수업을 뒤늦게나마 시켰다고 해도, 진심으로 루키우스를 아꼈다. 비록 후계자는 두 양자 중 처조카이자 사위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돌아갔다. 그렇지만 안토니누스는 루키우스 베루스를 친아들로 여겨, 국가 행사에서 그를 대동해 함께 다니고, 여행 등을 함께 다니는 등 정을 쏟았다. 황제는 루키우스 베루스에게 최고 수준의 교육을 시켰고, 좋은 인품 아래 자신의 또 다른 후계자이자, 로마 최상류층의 일원으로 자라길 바랬다.
루키우스는 하드리아누스 사망 당시, 18살이었던 마르쿠스와 달리 10살도 안 된 어린 소년이었고, 양모 이상의 어머니였던 대 파우스티나를 잃을 당시에는 고작 10살에 불과했다. 따라서 안토니누스는 루키우스를 아내의 이모인 소 마티디아 손에서 자라게 하면서, 스승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어린 베루스의 기본적인 예절과 기초적인 교양 교육에 신경썼다. 안토니누스는 애초부터 자녀교육에서 예의범절을 중요시한 아버지였다. 더해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적당한 나이의 후계자가 있었고, 로마에서 10살도 안 된 어린 아이에게 제왕 교육을 시키는 경우에는 당시 기준으로도 파격 수준을 넘을 정도의 이른 방식임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안토니누스는 두 아들의 교육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고, 집안 어른인 소 마티디아와 의논을 하며, 루키우스 베루스의 미래를 관리했다. 따라서 루키우스는 황제의 실질적인 후계자인 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직접 선정해 뽑은 스승들에게 배웠다. 형 마르쿠스는 당시 당대 최고의 명사이자 웅변가, 문법학자였던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 제국 동부 출신 아카이아인 귀족으로 뛰어난 웅변가이자 정치가 헤로데스 아티쿠스 등을 스승 삼아 제왕교육을 받았다. 반면 루키우스 베루스는 나이가 어린 까닭에 모든 기초 교육과 품행 훈련을 프론토로부터 철저히 배웠다. 이렇게 된 이유는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뛰어난 능력에도 인간 말종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폭력적이었던 반면, 프론토는 인격자로 인내심이 대단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프론토에게 어린 루키우스 베루스는 예의바르고, 시를 쓰는 능력과 웅변에 훌륭한 학생, 연설문을 작성하는 실력이 탁월한 학생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이런 교육과 별개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나이가 제법 있던 상황상 확실히 완성된 후계자인 마르쿠스만을 단독 황제로 생각했다. 따라서 루키우스 베루스에게는 전통적인 로마귀족 가문의 자녀 양육방법 그대로 루키우스를 가문을 이을 형을 돕는 차남으로 훈련시키는 것에 집중했다. 그래서 그가 루키우스로 하여금 명예로운 경력이라고 불린 로마 엘리트 공직 코스를 두루 거치게 한 것은 자신의 둘째 아들이 24살이 된 해부터였다.
20대 초반 무렵의 루키우스 베루스 |
이는 루키우스 베루스가 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보다 무려 6년이나 더 늦은 나이에 제왕 교육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실제 안토니누스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뒤 마르쿠스에게만 전권을 이양하고, 공동 집정관 신분의 루키우스에게는 권한을 내리지 않았다. 즉, 그는 생전 루키우스 베루스를 자신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거나, 안 좋은 일이 터질 경우 즉위할 차차기 황제로 생각해 교육시켰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루키우스 베루스가 23세에 재무관을 맡은 뒤, 곧바로 24세의 나이에 조영관, 법무관 경력을 인정한 다음 집정관을 곧바로 지내게 하는 등 경력을 쌓게 했다. 이때 그는 느긋해보이고 철이 없어도 늘 예의바르고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해냈다고 한다. 그래서 양부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자신이 사망한 161년, 차남 루키우스에게 차기 황제이자 사실상 공동 황제였던 장남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파트너로 삼아 두 번째 집정관을 지내게 해주며, 루키우스에게 마르쿠스 다음 황제로서의 제왕 교육을 시작했다.[13]
루키우스 베루스는 안토니누스와 마르쿠스가 자신을 친아들, 친동생으로 대우하고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꼈던 것을 알았다. 그는 진심으로 아버지와 형을 사랑하고 존중했다. 루키우스는 본인 스스로 제위에는 큰 욕심이나 관심도 없는 편이었다. 그래서 힘들고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공직보다는 그저 아버지와 형을 곁에서 도우면서, 여유롭게 사는 전형적인 귀족 가문의 차남으로서의 삶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즐겼다. 때문에, 그는 이에 대해 불만을 품는 등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루키우스는 안토니누스 생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마찬가지로 황제가 되기 전까지 이탈리아 반도를 벗어나 생활한 적도 없었고, 군단 경험이나 해외 여행 같은 가벼운 출장 경험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아버지 안토니누스가 두 아들을 지나치게 아끼고 잠시라도 떨어져 지내길 진짜 싫어할 정도로 팔불출인데다, 본인과 자신의 두 아들이 이탈리아와 캄파니아 외의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가거나 공무를 위해 떠난다면 속주들 입장에서는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을 걱정한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3. 황제 즉위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루키우스를 후계자이기보다는 넘버 3로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후계자로 생각했고, 자신이 고령이 된 뒤 마르쿠스의 제위 등극이 임박해진 직후에야 마르쿠스의 파트너 집정관으로 추천해 제왕 교육을 강화했다. 그리고 자신이 죽던 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르쿠스의 세번째 집정관 파트너로 루키우스를 삼으면서 갓 30에 접어들 루키우스가 고령인 자신이 죽을 경우 40대에 접어든 마르쿠스의 차기 황제로 확정되었음을 원로원에 알렸다.아울러 안토니누스는 소(小) 파우스티나와 루키우스가 파혼한 이후에도 31세가 될 때까지 다른 신부감을 정해주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마르쿠스와 소 파우스티나의 장녀 루킬라가 아직 결혼 적령기가 안 된 소녀인 탓에 미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루키우스는 아버지 안토니누스, 형 마르쿠스 부부와 함께 늘 황궁과 안토니누스 사유지 내 시골 별장을 오가며 생활했고, 독신으로 자유롭게 살았는데 이는 그가 현직 황제의 둘째 아들, 차기 황제의 동생이라는 타이틀과 그의 출신 내력, 잘생긴 외모 등으로 인해 미혼 로마 여성들의 인기를 높이는 이유가 되었다.
상술했듯이 루키우스의 성격은 본래 선량한데다 유쾌하고 뛰어난 교양을 갖추고 있었으며, 솔직하고 개방적인 성격이었다. 이런 성격은 진지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장남같은 묵직한 성격을 가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대비되었다. 또한 본인이 아버지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 차별받는다고 생각하며 원망과 증오심을 갖기보다는, 형이니까 당연하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자유로운 상황을 즐기며 낙천적으로 살았다. 그리고 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도 사이가 아주 돈독하여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우애가 깊었다.
161년 3월 6일, 로마 근교 별궁에서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노환으로 잠자듯 편안하고 조용히 세상을 떠나자 형 마르쿠스와 함께 국장을 치렀다. 이때 원로원에서는 그를 단순한 넘버 2이자, 아들로서 해야할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유해가 시신 상태로 관에 담겨 영묘에 안치된 뒤[14]에는 이 모습이 자신들의 예상과 달랐음을 알게 되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신격화가 통과된 이후, 원로원 회의장에서 거행된 황제 취임식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 취임을 요청받은 것은 본인뿐만 아니라 동생 루키우스도 함께라고 발표했다. 이에 원로원에서는 40세의 마르쿠스와 31세의 루키우스 베루스의 공동 황제 취임을 요청했고, 이들은 관례대로 선(先) 사양, 후(後) 승인한 후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15]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그는 이때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로 이름을 개명했고,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아우구스투스라는 제호를 취했다. 이어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의 장녀로, 친어머니와 같은 소 마티디아가 양육했던 루킬라와 정식으로 약혼을 발표했다.
4. 황제로서의 치세
4.1. 파르티아 전쟁
161년, 즉위한 해부터 흉작이 생겨 밀 생산 및 공급 문제, 포도와 과일, 채소 재배에 있어서의 타격 등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거기에다 가을부터는 테베레 강이 범람해서 홍수까지 심해졌는데, 이런 힘든 상황에서 파르티아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동부 전선의 전쟁까지 준비해야 했다.둘 다 군대 경험도 없었고, 이탈리아 밖을 나간 적도 없는 상황에서 맨 먼저 한 것은 파르티아의 공격으로 1개 군단을 잃고, 패배의 책임을 지며 자결한 카파도키아 속주 총독의 후임을 지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두 명의 황제가 한 행동이 최악이었던 것은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이자 이곳의 방어선을 지키는 책임자를 카파도키아로 보내 구멍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프리스쿠스의 후임을 다시 지명해야만 했다. 이때 마르쿠스는 칼푸르니우스 아그리콜라를 임명하고 고지 게르마니아 방어선을 담담하는 속주 총독에는 아우피디우스 빅토리누스를 임명해 공백을 메꿨다.
그런 상황에서 파르티아군을 이끌고 있던 볼로가세스 3세는 목표를 시리아 속주로 바꿔 공격했다. 이에 총독인 코르넬리아누스가 반격에 나섰지만 패배하여 퇴각한다는 암울한 소식이 전해졌다. 뒤이어 동방 동맹국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전해졌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파트너인 31세의 젊은 루키우스 베루스를 동방 전선에 파견했다. 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입장에선 나름 현명한 판단이었다.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대로 "루키우스는 육체적으로 튼튼하고 나이가 젊어서 전선을 지휘하기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완전한 오판이었다.
루키우스 베루스가 로마를 떠난 건 162년 초여름이었는데, 이마저도 반도 끝 브린디시로 가는 도중 루키우스가 카누시움에서 병으로 쓰러져 늦어지고 말았다[16]. 다행스러운 것은 병의 원인이 너무 놀아서 피로가 쌓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루키우스 베루스는 4일 동안 푹 쉰 다음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동쪽으로 갔다. 그런데 이마저도 루키우스 베루스가 안티오키아로 직행하기보다는 그리스 반도의 코린트에 상륙하여 아테네로 향하면서 더 늦어지고 말았다. 그 결과, 루키우스 베루스는 32세의 생일을 아테네에서 편안하게 보내고 에게 해 일대의 섬들을 관광하며 느긋하게 소아시아 해안가의 에페소스, 밀레투스를 거쳐 겨울이 돼서야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루키우스 베루스가 시간을 질질 끌며 여행을 느긋하게 즐기는 동안, 새로운 총독 시타티우스 프리스쿠스는 서둘러 영국에서 터키 동쪽 끝까지 최대한 빨리 도착해 패잔병들을 다독이고 전력을 재정비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루키우스 베루스였다. 그는 온갖 환영식에 참석하고 제국 동방을 여행하며 늦게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이후에도 일처리가 매끄럽지 못했다. 그는 장군들과 가진 회의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이다. 더해서 루키우스 베루스와 신임 총독 리보 사이에 의견 차이마저 생겨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루키우스 베루스는 시리아에서 새로운 애인을 만나 연애를 즐기느라 일찌감치 작전 회의에서 제외되었고, 총독 리보마저도 시리아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건강을 해치고 말았다는 것이다[17]. 이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보낸 수행원들은 황제와 총독을 제외시키고 재빨리 작전회의를 진행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루키우스가 노는 사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사망한 총독 리보의 후임으로 율리우스 베루스를 임명하여 파견하고 반격을 펼쳤다. 그 결과, 프리스쿠스의 반격을 시작으로 하여 로마군은 163년 봄부터 공세를 펼쳐 아르메니아 수도까지 진격, 파르티아군을 쫓아내고 파르티아가 앉힌 파코루스 왕자를 폐위시킨 후 소파에무스를 왕위에 앉혔다. 그리고 163년 말에는 완전히 파르티아군을 내모는 데 성공했다.
콤모두스의 누나이자 베루스의 아내 루킬라. |
전쟁이 2년째 접어든 164년, 루키우스 베루스는 배를 타고 '이오니아의 진주'라고 불리는 에페소스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형제이자 공동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14살 된 큰 딸 루킬라와 결혼식을 올렸다[18]. 결혼과 동시에 루키우스 베루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동방에 왔을 때 사귄 그리스 미녀와의 관계를 끝내고, 결혼 생활을 별 문제없이 이어나갔다.
결혼 이후 루키우스 베루스는 1년차 전쟁 때와는 달리, 황제임을 내세워 전략에 참견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장군들에게 파르티아와 강화를 맺자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도 이기고 있고, 장군들이 반대했기에 결국 그 제안은 쏙 들어가고, 국경인 티그리스 강을 넘어서 파르티아 영토를 공격하고 철수하는 전략으로 수정되어 실행에 옮겨지게 된다. 특히 이때 시리아 출신의 장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맹활약해서 파르티아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것으로 파르티아 제국은 전력면에서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60년 뒤 파르티아보다 강적인 사산조 페르시아 대두의 원인이 되고 만다.
166년 10월, 전쟁이 끝난 뒤 루키우스 베루스는 아내 루킬라와 함께 귀국하여 파르티아 전쟁 승리 기념 개선식을 올렸는데, 이는 49년 만에 열린 개선식이었다.
5. 사망
루키우스 베루스의 도안이 담긴 금화
파르티아 전쟁 이후 2년(166 ~168)까지는 로마에서 보냈다. 그러다가 게르마니아 전쟁이 발발하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도나우 강 전선으로 향했다. 이들은 168~169년에 걸친 겨울 동안 아퀼레이아에 머물렀다. 당시, 황제 일행이 겨울에 도나우 강 전선에 나가지 않은 이유는 안토니누스 역병이 만연해있어 황제들이 역병에 감염될 것을 막아야했기 때문이었다.[19]
169년, 봄이 되자 루키우스는 수도 로마로 향하게 되었다. 황제 일행이 100km 떨어진 알티눔에 온 무렵, 루키우스 베루스는 갑자기 병에 걸려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고는 이틀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39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죽음에 대해 도나우 강 전선에 퍼져있던 역병에 감염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뇌졸중을 의심하고 있다.[20]
루키우스 베루스는 아내 루킬라와의 사이에서 3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1명의 딸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죽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 역시 콤모두스 시대때 어머니 루킬라와 공모해 자신의 사촌오빠이자 외삼촌이었던 콤모두스를 암살하려 했다가 발각되어 유배 후 처형되었다.
6. 외모와 성격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왼쪽)와 루키우스 베루스. 베루스는 당시 미남으로 추앙받았다. |
즉위 당시 30대에 갓 접어든 독신 황제였고, 잘생긴 외모 때문에 로마에서 인기가 상당했다.
루키우스 베루스는 함께 입양됐지만, 양부모 안토니누스 피우스, 대 파우스티나의 처조카, 친조카인 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달리, 나이가 어리고, 소 파우스티나와 파혼 후 제위에서 멀어진 까닭에 주목도가 덜했다. 그러나 아주 어릴 적부터 양어머니 대 파우스티나가 친아들처럼 끼고 살았고, 대 파우스티나가 140년 사망한 뒤에는 비비아 사비나 황후의 언니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장모인 살로니아 마티디아의 장녀 소 마티디아 아래에서 자랐다. 소 마티디아는 161년 이후 즈음 사망했는데, 그녀는 매우 다정했고 어린 루키우스 베루스에게 어머니와 같았다. 양부 안토니누스 피우스 역시 처조카인 마르쿠스처럼 루키우스 베루스를 제위계승자로는 우선시하지 않더라도, 친아들처럼 대하며 그를 끼고 살았다. 이런 배경은 루키우스 베루스가 태생적으로 쾌활한 가운데, 둘째이자 막내아들 같은 성격을 갖는 것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입양을 통해 맺어진 의형제로 친형제 같았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밝혔듯이, 루키우스 베루스는 사색적이고, 진지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무척 아낀 동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상당한 미남이며 중간 이상의 꽤 큰 신장을 가졌음에도 본인을 꾸미는 것에는 전혀 무관심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달리, 본인의 잘생긴 얼굴과 훌륭한 신체 조건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자신을 꾸미고 치장하는 것을 즐기고, 모든 것의 화려함을 좋아했다. 그는 본인 스스로도 자신이 잘생긴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당대 기록들에 따르면, 비록 좁은 이마를 가지고 있는 게 흠이었고 갸름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수염을 턱 전체에 걸쳐 길렀지만, 당대 미남이라고 불린 친아버지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전자를 이어받아 큰 키에 갸름한 얼굴, 섬세한 이목구비, 금발머리에 파란 눈을 가지고 있어서 그 후광이 더 돋보였다고 한다.
루키우스 베루스는 자신의 조카 콤모두스와 마찬가지로 본인의 풍성하고 매력적인 금발머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이런 점보다 주목받은 것은 그가 굉장한 멋쟁이였다는 점이다. 루키우스 베루스는 친아버지 아일리우스 카이사르, 양아버지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찬가지로 멋쟁이였는데, 이런 점은 항상 칙칙하고 매우 어두운 계열의 옷만 입고 다닌 형 마르쿠스와 비교된 이유가 됐다. 더해 루키우스 베루스는 일찍부터 전형적인 황실, 명문귀족 가문의 막둥이처럼 성격이 항상 밝기로 유명했다. 또 그는 금발머리, 벽안에 대한 자부심이 과해, 자신의 금발머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머리에 금가루를 뿌렸고, 패션에도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다. 따라서 진지하고 사색적인 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이런 측면에서 많이 대비됐는데, 이는 그가 현직 황제의 차남이라는 타이틀과 제위 계승 넘버 2의 멋쟁이 미남 황족이라는 지위 때문에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특히, 이런 외모적인 자부심은 원로원 의원들과 일부 로마인들에게는 외모에 대한 지나친 자존심이 쾌락과 경박함의 증거로 보여 많은 오해를 받았다. 그래서 후대의 일부 로마인 저자들에게 그는 즉위 전부터 황제 아들 중 놀기 좋아하는 한량으로 기록됐고, 즉위 후에는 아버지의 통제에서 벗어난 전형적인 인물로 묘사됐다. 그는 조카 콤모두스처럼 축제와 사냥에 열중한 나태한 군주로까지 묘사되었고, 형의 후광에 기댄 무능하고 쾌락에 찌든 황제로 평가되었다.[21]
하지만 이런 후대의 기록과 달리 루키우스 베루스의 성품은 조카처럼 폭군도, 형처럼 성군도 아닌 평범한 군주였고, 심지어 영리했다. 루키우스 베루스는 어릴 적부터 스승 프론토가 시 쓰기와 연설문을 쓰기 좋아하고, 세심하고 우수한 학생으로 평가할 만큼, 머리가 좋았다. 형 마르쿠스, 스승 프론토와는 수준이 상당한 주제를 가지고 장시간 토론을 하며 즐길 수 있는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양부, 스승, 아버지 뻘의 원로원 의원이나 관료들에게 항상 예의를 갖춘 까닭에 미움보다는 항상 사랑을 받았다. 놀기 좋아하는 모습에도 인내심이 대단하고, 상황이나 환경을 느긋하게 즐기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형 마르쿠스가 종종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따라 함께 에트루리아 시골로 떠날 때마다, 동생 루키우스가 어린 까닭에 시골 밤공기가 너무 찬 것을 걱정함에도 형을 걱정시키지 않고 씩씩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당대 사람들과 가족들에게 악덕도, 덕목도 많지 않고 본성이 착한 사람임에도 언행을 보거나 들어보면 다소 경박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저서 《명상록》에 이런 심정을 솔직 담백하게 기술했다.
그는 대개의 로마귀족 권세가 일가 안의 철없는 도련님처럼, 종종 철없는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친구로 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할머니 쪽 친척인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가 판사였을 당시, 두 유명 배우가 분쟁으로 민사재판으로 다투는 사건을 담당할 때에 그랬다. 루키우스 베루스는 친구 칼푸르니우스가 판사를 하면서 이 사건을 맡자, 평소 유명 배우들과 두루 친분이 두텁고 후원을 많이 해준 본인이 이를 돕겠다면서, 형 마르쿠스나 스승 프론토에게 급히 사람을 보내 도움을 구했다. 그런데 그는 도움을 요청하면서, 두 배우 중 누가 더 인기가 있는지 물어봤고, 이 논쟁의 결론을 궁금해 했다. 이런 루키우스의 철없는 행동은 스승 프론토와 그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한 형 마르쿠스 모두를 당황하게 했는데, 다행히 두 사람 모두 철없는 루키우스가 악의 없이 물어본 까닭에 화를 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사건 때문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스승 프론토는 루키우스 베루스의 행동 때문에 종종 본인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종종 자제력을 요구받았다. 이런 일 이외에도 루키우스 베루스는 지나치게 놀기 좋아하고, 자신의 건강을 과신하면서 낙천적으로 행동해, 가족들의 걱정을 샀다. 그는 즉위 이후, 항상 밤낮을 바꾼 화려한 연회 생활에 빠져 지냈고, 잠이 부족해 병석에 눕는 등 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많은 걱정을 샀다. 파르티아 전쟁을 위해 떠난 뒤에는 형 마르쿠스에게 자랑스럽게, 안티오키아에서 자신이 매일 주사위를 던지면서 논다고 자랑하거나, 본인과 형 마르쿠스가 응원 중인 전차팀의 리그 성적과 경기 결과를 묻는 등, 제위에 오른 뒤에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인내심을 종종 시험했다. 이외에도 루키우스 베루스는 로마에 사람을 보내, 빵과 서커스 시혜를 이유로 본인이 후원 중인 최고의 전차 기수와 말 등을 동방으로 초청하는 모습을 보였고, 로마에 있는 배우, 운동선수, 시인들을 초청하고, 본인과 형 마르쿠스의 황금 동상 등을 제작하라고 지시한 뒤 안티오키아까지 공수하는 등 원로원 의원들이 볼 때, 철없고 놀기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스승 프론토는 이 소식을 루키우스 베루스의 서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서신 등으로 전해 듣곤, 고향인 푸닉 지방에서 쉬고 있다가, 이탈리아로 다시 거처를 옮겨 로마에 살면서 루키우스 베루스의 변호인 역할까지 해야 했다. 이때 프론토는 이런 것을 불편하게 여긴 원로원 일부에게 일일이 찾아가서, 루키우스 베루스가 민심 이반을 막고, 시혜를 위해 그랬다고 노구의 몸을 이끌고 로마로 온 다음 변호를 했다. 형 마르쿠스 황제와 형수 소 파우스티나 역시 루키우스 베루스가 동방으로 황금동상을 공수해오는 등의 행동을 벌일 때마다 노심초사했고 주변 반응을 지켜보다가 약간의 오해라도 생기면 그들에게 루키우스가 국정 운영상 이런 일을 했다고 변호했다.
그럼에도 루키우스 베루스는 마르쿠스의 솔직한 기술 내용처럼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착한 사람이었고, 악의가 없었다. 또 그는 늘 공손함과 애정, 그리고 형과 가족에 대한 따뜻함을 지녔다. 그는 나태해보여도 의외로 상당히 유능한 능력도 갖췄고, 경박해보이는 듯 해도 실제 모습은 예의와 도덕심을 잃지 않았다. 업무 태도 역시 어떤 책임을 맡을 때마다 긍정적이었고, 투덜거리는 일이 없었다. 물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를 아낌에도 그가 철없는 행동을 하거나, 열정적으로 전차 경주를 좋아하고, 서커스 관람을 즐기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겼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특히 못 마땅하게 여긴 것은 루키우스 베루스가 아내 루킬라와 함께 계속해서 화려한 연회를 열어 새벽까지 노는 일, 배우들을 후원하고 좋아하는 극단을 황궁으로 초대한 일이었다. 하지만 루키우스 베루스는 형 마르쿠스를 머리 끝까지 화나게 하지 않게 적절히 처신을 잘 했다.그는 놀더라도 계속 공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했고, 마르쿠스 황제가 꼼꼼하게 살펴보더라도 일처리를 완벽히 했다. 맡겨진 업무는 다 끝마치고 연극 관람을 가거나, 아내 루킬라를 데리고 유흥을 즐겼다. 즉위 후에도 형 마르쿠스의 말을, 부관이 총독의 말을 그대로 따르듯 충실히 따르면서도 최선을 다했고, 공동황제이더라도 형 마르쿠스의 권위를 드높이며 본인을 공동황제 이전의 동생처럼 처신했다.
그는 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상으로 관대했고, 아량 역시 넓었다. 그의 양부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풍자작가로 관대한 조치에도 불경죄, 반역죄로 처벌받을 뻔한 마룰루스를 용서해주고, 나아가 그가 추가 보복을 당하지 않게끔 해줄 정도로 아량이 넓었다. 그런데 마룰루스가 안토니누스 피우스 사후에도 어떤 보복 없이 추방이나 사형을 면했던 이유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보다 루키우스 베루스 덕이 컸다. 진지하고 권위와 위엄 아래의 관대함을 강조한 형 마르쿠스조차 이전 황제 중 인내심이 대단한 트라야누스 등의 황제들이 그랬듯이, 선을 제대로 넘은 마룰루스에게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그런데 루키우스 베루스는 선황인 아버지 안토니누스 피우스처럼 자유라고 하며 관대함을 보여주면서, 어떤 경우에는 형 마르쿠스보다 아량이 넓었다. 또 형제의 사촌인 안니우스 리보의 아내가 자신들의 젊은 그리스인 해방노예와 재혼할 당시에도, 분노한 나머지 얼굴을 비추지 않은 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형수 소 파우스티나와 달리 그래도 황실 체면을 지키면서 인간다운 모습도 보여줬다.
이런 이유 때문에 루키우스 베루스는 즉위 이전부터 원로원에게 경박하고 화려하지만 본성은 착하고 예의가 바르다는 평판을 얻었고, 사람들에게 품성과 행동을 이유로 미움을 받지 않았다. 이는 공동 황제였던 그의 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마르쿠스는 자신의 일기를 통해 베루스를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동생"이라고 말할 정도로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꼈다.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베루스가 쓰러지고 요절한 순간에 큰 충격 속에서 오열했고, 그를 기리는 축제를 열며 루키우스 베루스가 좋아한 전차 경주와 서커스를 개최할 때 큰 상실감을 밝혔다.
[1] 태어났을 때 받은 첫 이름[2] 양자로 입적된 후의 이름.[3] 황제로 즉위한 후의 이름.[4] 또는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라고도 한다.본명은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하드리아누스와 양부-양자 관계를 맺었다.[5] 막내딸로 유일하게 생존해 성인이 됐다. 그러나 어머니 루킬라와 함께 외삼촌이자 사촌오빠 콤모두스를 암살하려고 했다가 실패해, 카프리섬으로 추방됐다가 그곳에서 처형됐다.[6]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 어린 시절 입양되어 역시 입양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형제 지간이 되었다.[7] 성군으로 이름을 날린 형과 폭군으로 이름을 날린 조카에 비해 평범한 사람이라 묻힌 케이스라 볼 수 있다. 공동 황제 시절에도 사실상 전권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있었고, 루키우스 베루스는 마르쿠스의 정책과 전략을 그대로 실행에 옮긴 일종의 대리이자 부황제에 가까웠다.[8] 나중에 포스투무스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최후의 라이벌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배출했다.[9]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본명[1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할아버지로 아내 루필리아 파우스티나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누나 울피아 마르키아나의 외손녀였다.[11] 안토니누스 피우스 역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가 사별 직후 재혼하자, 아들이 없는 외조부 손에서 자라 외가를 물려받은 케이스였다.[12] 다만, 그녀 소유의 마티게 대저택은 유언장을 통해 소 파우스티나의 몫으로 돌아갔다.[13] 이때 마르쿠스는 3번째 집정관 경험이었다.[14]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장례식 기록에 따르면 “성대하게 장례식을 거행한 뒤 그의 두 아들과 아내 곁에 시신 상태로 매장됐다”고 한다. 즉, 그는 화장되지 않고 매장됐는데, 이는 당시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로마의 새로운 장례 풍습을 황제에게 적용해 거의 최초로 치른 국장이었다고 연구자들은 말한다.[15] 이 사건은 로마 제정 역사상 최초였다. 그래서 이를 예상하지 못한 원로원은 당황했다.[16]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동생을 아피아 가도의 중간 지점인 카푸아까지 동행했지만 이 보고를 받은 뒤, 말을 타고 카누시움까지 내려가야만 했다.[17] 리보는 결국 현지에서 얻은 풍토병으로 병사하고 만다.[18] 이 결혼은 정략결혼인 동시에,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법적으로는 삼촌과 조카의 결혼이었다.[19]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루키우스 베루스가 로마로 돌아가고 싶어했기 때문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루키우스 베루스를 붙잡기 위해 차선책으로 제시했다고 한다.[20] 실제 루키우스 베루스의 생활은 화려하고 굉장히 불규칙했다고 한다.[21]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런 후세의 비뚤어진 평가와 묘사에 결정적인 한 방이 된 것은 루키우스의 조카였던 콤모두스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