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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말 발행된 최초 민간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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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 ||||
505호 | ← | 506호 | → | 507호 |
한성순보 | 독립신문 | 협성회회보 |
독립신문 獨立新聞 Dongnip sinmun (The Independent) | ||
<colbgcolor=#87ceed><colcolor=#fff> 국가 | 조선 · [[대한제국| ]][[틀:국기| ]][[틀:국기| ]] | |
창간 | 1896년 4월 7일 | |
종간 | 1899년 12월 4일 | |
설립단체 | 독립협회 | |
사장 | 서재필 H. 엠벌리 | |
필진 |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주시경 등 | |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506호 | ||
독립신문 獨立新聞 The Dongnip sinmun (The Independent)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 연세대학교 | |
분류 | 등록문화재 / 기타 / 동산 | |
수량 / 면적 | 1식 | |
지정연도 | 2012년 10월 17일 | |
시대 | 1896년 4월 7일 ~ 1899년 12월 4일 | |
소유자 (소유단체) | 학교법인연세대학교 | |
관리자 (관리단체) | 학교법인연세대학교 |
<colbgcolor=#87ceed> 《독립신문》 창간호 조선 서울 건양 원년 사월 초칠일 금요일 (1896. 4. 7.) |
1896년(건양 원년) 4월 7일[1]에 독립협회의 전신인 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에서 창간한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2]으로 순한글 3면[3], 영문 1면으로 구성됐다. 서재필이 중심이 된 독립협회의 기관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독립신문은 어디까지나 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와 독립협회에서 발행한 신문이고, 독립협회 기관지는 엄연히 월간 《대조선 독립 협회보》가 따로 있지만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처음에는 주 3회 300부 발행했다. 1897년(건양 2년) 1월 5일부터 영문판을 4면짜리 The Independent로 분리했다. 1898년(광무 2년) 7월 1일 일간으로 바꾸었다.[4] 독립협회가 해체당한 이후, 윤치호, 헨리 아펜젤러 등이 잠시 맡았으나 정부에서 인수한 뒤 폐간시켜버렸다.
사진에 보면 아래아가 남아 있다. 《독립신문》이 나온 지 한참이나 지나서 1933년에 아래아가 폐지되었기 때문. 또한 한글에 띄어쓰기를 정착시킨 신문이기도 하다. 이전까지는 한글을 쓸 때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서재필은 대한제국에서 추방당했던 1898년(광무 2년)에 《독립신문》을 일본에 팔아넘기려는 생각도 있었다고 하며 쌍방간의 사정으로 성사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당시 이상재와 윤치호의 만류로 넘어갔다고 하는데 그들의 말로는 독립신문이 서재필의 것이냐고 항변했다는 것이다. 애초에 《독립신문》 자체가 서재필 개인의 돈으로 설립한 신문이 아니기 때문에 서재필이 이걸 일본에 팔아도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만민공동회 활동 등으로 인해 서재필은 추방령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되었고 결국 윤치호가 운영을 이어받았다. 이 때문에 친일 논란이 일면서 독립신문 창간일을 기념해 만들어진 '신문의 날'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있기도 했는데, 정부는 물론 관련학계에서도 부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정진석 한국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신문의 날은 서재필 개인이 아니라 독립신문 창간을 기념하는 날이며, 독립신문은 최초의 민간지로서 개화사상과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류가 되고 있다"고 했으며,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추진하는 등 과거사 규명에 앞장서온 민족문제연구소의 김민철 연구실장은 "서재필과 독립신문이 친일적 논조를 펼친 것은 러시아의 침략을 경계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 시대적 한계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독립신문은 다음과 같이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친일적인 논조를 게제하였다.
일국이 두 해 전에 청국과 싸워 이긴 후에 조선이 분명한 독립국이 되었으니 그것 또한 조선 인민이 일본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있을 터이나, 조선 인민 중에 일본을 감사히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 없는 것은 다름 아니라...
- 1896년 독립신문 제6호 논설
일본 정부와 일본 인민들이 조선이 진보하는 것만 즐거워하지, 어떤 나라이든지 도와주는 것은 상관 아니 하노라.... 조선 사람들이 일본이 조선을 위한다는 것을 자세히 모르는 것이다.
- 1896년 독립신문 제44호 논설
하나님이 조선 백성을 불쌍히 여기사, 일본과 청국 사이에 싸움이 생겨 못된 일하던 청인 놈들이 조선서 쫓겨 본국으로 가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에 천만 번이나 다행한 일이다.
- 1897년 독립신문 제144호 논설
조선은 계속해서 일본 돈을 써야 한다. 일본 은전을 여전히 일용한 일로 고시를 하였다 하니 우리는 전국 재정을 위하여 크게 치하하노라.
- 1898년 독립신문 별호 논설#
- 1896년 독립신문 제6호 논설
일본 정부와 일본 인민들이 조선이 진보하는 것만 즐거워하지, 어떤 나라이든지 도와주는 것은 상관 아니 하노라.... 조선 사람들이 일본이 조선을 위한다는 것을 자세히 모르는 것이다.
- 1896년 독립신문 제44호 논설
하나님이 조선 백성을 불쌍히 여기사, 일본과 청국 사이에 싸움이 생겨 못된 일하던 청인 놈들이 조선서 쫓겨 본국으로 가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에 천만 번이나 다행한 일이다.
- 1897년 독립신문 제144호 논설
조선은 계속해서 일본 돈을 써야 한다. 일본 은전을 여전히 일용한 일로 고시를 하였다 하니 우리는 전국 재정을 위하여 크게 치하하노라.
- 1898년 독립신문 별호 논설#
네이버에서 《독립신문》의 원문과 원문을 현대 한글로 표기해놓은 한글 현대문, 영문판 전부를 제공하고 있다. 다만 뉴스 라이브러리가 아닌 지식백과에서 볼 수 있다. 링크 신문을 보면 재밌는게 상당히 많은데, 어떤 사람이 구독료가 너무 비싸다고 항의하는 편지글을 《독립신문》에 써서 보내자, 신문의 장점을 쭉 설명하면서 택도 없는 소리라고 대놓고 말하는 기사도 있으며, 논설기사에는 '시방'이라는 다소 구수한(...) 표현이 있는 경우도 있다. 해외토픽이나 갖가지 광고[5][6], 가십 기사들도 재밌는 게 상당히 많다.
1가지 더, 개신교계 미션 스쿨이었던 이화학당과 같이 한민족 역사에서 최초로 크리스마스를 기념한 곳이 《독립신문》이었고. 당시 크리스마스를 휴무로 했다. 이를 소개한 2018년 크리스마스 이브 jtbc 앵커브리핑.
근대 한국어로 된 마지막 사료는 아니지만[7] 후기 근대 한국어로 된 가장 유명한 사료라서, 이 시기의 한국어를 보여주는 예시로 자주 쓰인다.
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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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 ||||
509호 | ← | 510호 | → | 511호 |
대한매일신보 | 독립신문 상해판 | 친목회 회보 |
독립신문 獨立新聞 Dongnip sinmun (The Independent) | ||
<colbgcolor=#330066><colcolor=#fff> 단체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창간 | 1919년 8월 21일 | |
휴간 | 1932년 | |
복간 | 1933년 | |
종간 | 1943년 7월 20일 | |
소재지 | 상하이 프랑스 조계 패륵로 동익리 5호 (상하이 시절) | |
설립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사장 | 이광수# 박은식 이장훈 | |
필진 | 안창호 이유필 이광수 김규식 주요한 박종화 신채호 등 | |
종류 | 기관지 | |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510호 | ||
독립신문 (1, 2) 獨立新聞 Dongnip sinmun (The Independent) Published in Shanghai)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 연세대학교 (1)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198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 | |
분류 | 등록문화재 / 기타 / 동산 (1, 2) | |
수량 / 면적 | 1식 (1) 1건 170점 (2) | |
지정연도 | 2012년 10월 17일 (1) 2020년 11월 6일 (1) | |
시대 | 일제강점기 | |
소유자 (소유단체) | 학교법인연세대학교 (1)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 |
<colbgcolor=#330066> 《독립신문》 상해판. 위 사진은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510-1호이고 아래 사진은 제510-2호이다.[8] |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에 발행한 신문. 첫 이름은 《독립(獨立)》이었다가 1을 계승하여 이름을 고쳤다. 책임자는 박은식. 역사학자로 유명한 그 박은식이 맞다.
심지어 무장 투쟁론을 펼치던 신채호가 이끌던 주간지 《신대한》과 논쟁까지 벌였다. 이광수가 《독립신문》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이때 신대한의 편집장은 김두봉.
1943년 18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했다. 《일제 강점기 보물찾기 2》에서는 미공개본인 190호가 나온다.
이승만의 탄핵 소식을 알린 호외가 발간되기도 했다.#
<colbgcolor=#330066> 이승만의 탄핵을 알린 1925년 3월 25일 자 《독립신문》 |
3. 인터넷 언론
1번 항목과의 구별을 위해 '인터넷 독립 신문'이라고도 부른다.1998년 신혜식이 만든 우익 언론. 처음에는 '안티 김대중' 웹사이트로 시작되었으나 독립 신문으로 바뀌었다. 노무현 정권 당시 몇몇 사진 합성 만평이 논란과 소송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노무현 얼굴에 "김정일 정권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발언 말풍선을 붙이고 거기 위에 크로스헤어를 올리고 밑에 저격수 사진 대충 붙여서 아래에 자막으로 '한 번만 더 민족의 원수 김정일을 두둔했다간 네 머리에 총알을 박아버리겠다'라는 코멘트를 한 만평이 있다. 강정구 교수가 종북 관련으로 논란이 되었을 때 간첩 리철진 포스터에 노무현을 합성하고 돼지 대신에 참수된 머리[9](모자이크 처리)를 손에 든 것처럼 합성하고 "강정구 동무 건들면 이렇게 되는 거야"[10]라는 캡션을 넣은 만평 등이 있었다.
이외에 대표적인 기사는 베트남 출신으로 세계 4대 성불이라 불린 틱낫한 스님 방한 때 벌인 것. 스님이 베트남 전쟁 때 반전 시위를 했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비난하고 스님이 포르노 배우와 섹스하는 합성 사진을 올린 것이 있다.
2011년 군소 우파 계열 인터넷 언론과 뉴스파인더로 통폐합했다. 따라서 뉴스파인더는 인터넷 독립 신문의 후신인 셈.
이후 신혜식은 팟 캐스트 방송인 신의한수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1] 덕분에 4월 7일은 한국에서 신문의 날이 되었다.[2] 한국 최초의 신문은 1883년 10월 31일에 만든 《한성순보》. 단 이건 국가에서 만든 것이다. 사실 《독립신문》도 정부에서 4400원의 지원금을 받았다. 여기에 지원금이 더해져서 창건되었는데, 정부는 운영에 개입하지 않았으므로 민간 신문으로 분류한다.[3] 최초의 순한글판 간행이라는 타이틀도 갖고 있다. 위 창간호 우측 하단을 잘 읽어보면 이런 내용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신문이 한문은 아니쓰고 다만 국문으로만 쓰는 것은 상하귀천이 다 보게 함이라. 또 국문을 이렇게 구절을 떼어 쓴즉 아무래도 이 신문을 보기가 쉽고 신문 속에 있는 말을 자세히 알아보게 함이라. 각국에서는 사람들이 남녀 무론하고 본국 국문을 먼저 배워 능통한 후에야 외국 글을 배우는 법인데 조선서는 조선 국문은 아니 배우더라도 한문만 공부하는 까닭에 국문을 잘 아는 사람이 드무니라."(이하 생략)[4] 배재학당 학생회 협성회가 창간한 주간 신문 《협성회회보》가 1898년 4월 9일 《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일간지로 재창간 했다. 따라서 수 개월 차로 한국 최초 일간지는 《매일신문》이다. 재창간자는 이승만.[5] 이 광고에는 남대문 가는 길에 서양에서 온 귀한 금 단추가 떨어졌으니 찾으면 신문사로 연락을 해 달라는 광고도 있다(...).[6] 참고로 위의 1호의 광고는 대충 신문 소개와 구독 비용과 구독 신청 방법, 기사거리를 제보하는 방법 등을 설명하고 있다. 아마 첫 호이니 이런 홍보들을 실은 듯 하다.[7] 일반적으로 언어학자들은 1933년에 조선어학회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발표된 이후를 현대 한국어의 시작으로 간주한다.[8]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9] 머리의 정체는 김종빈 전 검찰총장이다.[10] 만평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노무현이 강정구 까는 놈들 ㅁㅈㅎ시켜버리겠대!"이다.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9] 머리의 정체는 김종빈 전 검찰총장이다.[10] 만평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노무현이 강정구 까는 놈들 ㅁㅈㅎ시켜버리겠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