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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 서울 육상궁 서울 毓祥宮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의문로 12 (궁정동) |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제사유적 / 제사터 | |
면적 | 26,342㎡ | |
지정연도 | 1966년 3월 22일 | |
시대 | 조선 영조 1년(1724) | |
관리단체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관리소 | }}}}}} |
|
<colbgcolor=#c00d45> 왼쪽부터 차례대로 저경궁, 대빈궁, 경우궁(선희궁) |
국가유산청에서 제작한 칠궁 랜선 답사 영상 |
서울관광재단에서 제작한 칠궁 및 백사실 계곡 영상 |
[clearfix]
1. 개요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청와대 내)에 위치한 사당으로, 조선의 왕을 낳았지만, 왕비가 되지 못한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1]즉, 칠궁은 법적 어머니인 왕비에게 바치는 효와는 별개로, 왕의 생모에게 바치는 사적인 효를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일반적으로 '칠궁'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하술할 이유로 문화재로는 '서울 육상궁'이라는 명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사적 제149호에 해당한다.
2. 상세
1725년(영조 원년), 영조는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인 숙빈묘(淑嬪廟)를 건립했다. 이후, 숙빈 최씨의 지위 격상을 위해 1744년(영조 20년), 사당은 '육상묘(毓祥廟)'로, 1753년(영조 29년)에는 '육상묘'에서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되었다.본래 조선 왕실의 후궁 사당은 한성 각지에 분산되어 있었으나, 1870년(고종 7년), 제례의 효율성을 고려하여 인빈 김씨의 저경궁(儲慶宮)과 화빈 윤씨의 경수궁(慶壽宮) 신주를 수빈 박씨의 경우궁(景祐宮)으로 이관했다. 또한, 희빈 장씨의 대빈궁(大嬪宮), 정빈 이씨의 연호궁(延祜宮), 영빈 이씨의 선희궁(宣禧宮), 의빈 성씨의 의빈궁(宜嬪宮) 신주는 육상궁으로 옮겨 통합 제향을 진행했다.
1878년(고종 15년), 육상궁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해 123칸의 건물이 소실되었으며, 재정 문제로 인해 67칸 규모로 축소 복원되었다. 이후, 1881년(고종 18년)에도 화재가 발생해 신주까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1908년(융희 2년), 〈향사이정(享祀釐正)〉 칙령이 반포되면서 국가 제례 체계가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후궁들의 신주는 육상궁으로 통합되었으며, 기존의 독립된 사당들은 국유화되었다. 단, 경수궁과 의빈궁은 합사되지 않고, 신주를 묘에 묻는 매안(埋安)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이로써 육상궁을 중심으로 경우궁,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등이 집약되었다.
1929년, 순헌황귀비의 덕안궁(德安宮)이 추가되면서 최종적으로 사당 7개가 모였고, 이를 '칠궁(七宮)'이라 칭하게 되었다. 덕안궁은 원래 현재의 서울특별시의회 본관 부지에 있었으나, 경성부가 문화시설 건립을 이유로 철거하고, 부민관(府民館)을 신축했다.
현존하는 칠궁의 신위는 전각 5채에 봉안되어 있다. 중심에 냉천정(冷泉亭)을 두고, 동·서로 구획되며, 동쪽에는 연호궁(육상궁)이 위치하고, 서쪽에는 저경궁, 대빈궁, 경우궁(선희궁)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덕안궁은 이들보다 앞쪽에 별도로 자리한다.
과거에는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했으나, 1968년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 사건 이후, 청와대 경호 문제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이후, 박정희 및 전두환 정권 시기에 주변이 훼손되었고, 도로 및 길이 개설되면서 원형이 크게 손상되었다.
2001년 11월, 제한적 개방이 이루어졌지만, 사전 예약과 신원 확인 절차를 거쳐야 했으며, 청와대를 경유해야만 관람이 가능했다. 2018년부터는 칠궁만 별도로 관람할 수 있도록 조정되었으며, 2019년에는 예약제에서 시간제 운영 방식으로 변경되면서 보다 자유로운 관람이 가능해졌다.
2022년 5월 10일, 대통령 집무실이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청와대가 개방됨에 따라, 칠궁 또한 완전히 공개되었다.
3. 구성하는 일곱 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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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 칠궁 중에서 연호궁(육상궁)의 모습 |
궁호 | 후궁 | 출생 | 사망 | 궁호 추상 | 남편 | 아들 |
저경궁 (儲慶宮) | 경혜인빈 김씨 (敬惠仁嬪 金氏) | 1555.03.21. (명종10.02.29.) | 1613.12.10. (광해05.10.29.) | 1775.06.29. (영조31.06.02.) | 선조 | 원종[정원대원군] |
대빈궁 (大嬪宮) | 옥산부대빈 장씨 (玉山府大嬪 張氏)[3] | 1659.11.03. (현종즉위.09.19.) | 1701.11.07. (숙종27.10.08.) | 1722.11.18. (경종02.10.10.) | 숙종 | 경종 |
육상궁 (毓祥宮) | 화경숙빈 최씨 (和敬淑嬪 崔氏) | 1670.12.17. (현종11.11.06.) | 1718.04.09. (숙종44.03.09.) | 1744.04.19. (영조20.03.07.) | 숙종 | 영조 |
연호궁 (延祜宮) | 온희정빈 이씨 (溫僖靖嬪 李氏) | 1694. (숙종20.) | 1721.11.16. (경종01.09.27.) | 1778.04.14. (정조02.03.18.) | 영조 | 진종[효장세자] |
선희궁 (宣禧宮) | 소유영빈 이씨 (昭裕暎嬪 李氏) | 1696.08.15. (숙종22.07.18.) | 1764.08.23. (영조40.07.26.) | 1789.01.21. (정조12.12.26.) | 영조 | 장조[사도세자] |
경우궁 (景祐宮)[6] | 현목수비 박씨 (顯穆綏妃 朴氏)[7] | 1770.06.01. (영조46.05.08.) | 1823.02.05. (순조22.12.26.) | 1825.01.19. (순조24.12.01.) | 정조 | 순조 |
덕안궁 (德安宮) | 순헌황귀비 엄씨 (純獻皇貴妃 嚴氏) | 1854.02.02. (철종05.01.05.) | 1911.07.20. | 1911.07.27. | 고종 | 의민태자[영친왕] |
4. 폐지된 한 궁
사당 | 후궁 | 출생 | 사망 | 추상 | 폐지 | 남편 | 아들 |
의빈궁 (宜嬪宮) | 의빈 성씨 (宜嬪 成氏) | 1753.08.06. (영조29.07.08.) | 1786.11.04. (정조10.09.14.) | 1790년 (정조14.)이후 | 1908.07.23. (융희 02.07.23.) | 정조 | 문효세자 |
1873년(고종 10)에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육상궁(毓祥宮), 연호궁(延祜宮), 경우궁(景祐宮), 선희궁(宣禧宮), 의빈궁(宜嬪宮)을 '궁(宮)'으로 지칭했다.[17] 이후 1898년(광무2)에 이 궁을 '칠궁(七宮)'이라고 했다.[18]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에 봉안한 신위는 육상궁 안에 각별히 신주의 방을 만들어 합사하고, 폐궁(廢宮)의 경우 연호궁을 제외하고 모두 국유로 이속시킨다. 신위를 이안하는 절차는 궁내부에서 따로 이를 정한다. 의빈궁(宜嬪宮), 경수궁(慶壽宮), 영소묘(永昭廟), 문희묘(文禧廟)에 봉안한 신위는 매안(埋安)하고 해당 궁과 사당은 의빈궁을 제외하고, 모두 국유로 이속시킨다. 다만, 의빈궁과 경수궁의 묘소에는 영소묘와 문희묘의 원소(園所) 예에 따라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고, 매안 절차는 궁내부에서 따로 이를 정한다.[19]
1908년(융희 2)에 향사이정(享祀釐正)의 칙령으로 의빈궁은 칠궁에서 폐지되었으나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었다.[20] 제사는 일 년에 한 번씩 의령원(의소세자 무덤)과 효창원(문효세자 무덤)의 예에 따라 지냈다.5.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 서울 육상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서울육상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칠궁
- 시사상식사전 : 육상궁
- 시사상식사전 : 칠궁
-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 칠궁
-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 육상궁(지상 건물 일체 포함)
- 두산백과 : 서울 육상궁
6. 사적 제149호
영조의 생모이며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 원년(1724)에 세워 숙빈묘라 했으나 영조 29년(1753)에 승격시켜 육상궁이라 고쳐 불렀다. 고종 19년(1882) 화재를 당하여 다음해에 복구했다. 육상궁은 칠궁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1908년에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는 7개의 궁들을 이곳에 옮겼기 때문이다. 칠궁은 육상궁,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을 일컫는데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친모로서 정비에 오르지 못한 7인의 신위를 모셔 제사지내는 곳이다.
육상궁은 나즈막한 담에 둘러싸여 있고 왼쪽에는 네 개의 사당이 각기 독립해 서로 접하여 서있다. 이 사당 앞쪽에는 제사지내는 곳과 우물이 있으며 그 앞에 정문이 있다. 제사 지내는 건물 주위의 뜰은 한국식 정원의 전형을 이루어 정숙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육상궁(지상건물일체포함) → 서울 육상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영조 원년(1724)에 세워 숙빈묘라 했으나 영조 29년(1753)에 승격시켜 육상궁이라 고쳐 불렀다. 고종 19년(1882) 화재를 당하여 다음해에 복구했다. 육상궁은 칠궁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1908년에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는 7개의 궁들을 이곳에 옮겼기 때문이다. 칠궁은 육상궁,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을 일컫는데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친모로서 정비에 오르지 못한 7인의 신위를 모셔 제사지내는 곳이다.
육상궁은 나즈막한 담에 둘러싸여 있고 왼쪽에는 네 개의 사당이 각기 독립해 서로 접하여 서있다. 이 사당 앞쪽에는 제사지내는 곳과 우물이 있으며 그 앞에 정문이 있다. 제사 지내는 건물 주위의 뜰은 한국식 정원의 전형을 이루어 정숙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육상궁(지상건물일체포함) → 서울 육상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1] 칠궁에 합사된 신위에서 'OO궁'이라는 호칭은 조선시대 궁호를 의미한다.[정원대원군] [3] 희빈 장씨는 왕비가 된 적도 있었으나, 얼마 후 인현왕후의 복위로 인하여 다시 정1품 빈이 됐다. 다른 빈들과는 달리 대빈이라 칭하는 이유는 왕비로 지낸 적이 있어서라는 이유로 추측된다. '대빈(大嬪)'이라는 말도, '대비(大妃)에 준한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대빈궁만이 원형 기둥으로 된 것도 왕비자리에 있었던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효장세자] [사도세자] [6] 본래 계동에 있었고, 갑신정변 때 개화파가 고종을 창덕궁에서 경우궁으로 이어시켜 갑신정변 하면 경우궁은 항상 등장한다.[7] 1901년(고종 38년) 10월 11일 비(妃)로 추존됐다.[영친왕] [9] 유교식 사당 구조에서 가운데 길은 원래 사람이 다니지 못하고 사당에 모셔진 혼령만이 다닐 수 있는 신도(神道)이다.[10] 《일성록》 정조 10년 병오(1786) 11월 18일(무자) 4번째 기사[11]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지내주는 제사[12] 《일성록》 정조 11년 정미(1787) 9월 13일(정축) 2번째 기사[13] 《정조실록》 정조 20년 5월 8일 임자 2번째 기사[14]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내수사각방상하책》 제1책 4b면[15] 디지털장서각, 《제물등록》 1책, “毓祥宮 宣禧宮 宜嬪宮 名日祭 酌獻禮 同”[16] 장서각기록유산DB 《사전사례편고 전(祀典事例便考 全)》 “祭燭……德興宮 大嬪墓廟……儲慶宮園 毓祥宮園 延祜宮園 宣禧宮 宜嬪宮…….[17] 《태상지》 제3책, “宮 儲慶宮 仁嬪金氏 元宗私親, 毓祥宮 淑嬪崔氏 永宗私親, 景祐宮 綏嬪朴氏 純宗私親…大嬪宮 禧嬪張氏 景宗私親, 延祜宮 靖嬪李氏 眞宗私親, 宣禧宮 暎嬪李氏 莊獻私親, 宜嬪宮 宜嬪成氏 文孝私親”[18] 《향수조사책(享需調査冊)》 제8책, 〈칠궁이묘(七宮二廟)〉 “儲慶宮 毓祥宮 延祜宮 景祐宮 永昭廟 文禧廟 大嬪宮 宣禧宮 宜嬪宮”[19] 《승정원일기》 순종 원년(1908, 융희(隆熙) 2) 6월 25일(기묘) 양력 7월 23일 목요일 7번째 기사.[20] 장서각 기록 유산DB 《향비규정》 4책, 순종 원년(1908, 융희(隆熙) 2) 9월 7일, 입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