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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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賈堅(? ~ 358)
전연의 인물. 자는 세고(世固). 기주(冀州) 발해군(渤海郡) 출신.
2. 생애
어려서부터 기개와 절개로 높이 여겼고, 궁술에 능하여 3섬여 무게의 활을 잘 다루었다고 한다. 후조에 임관하여 전중감(殿中督)을 지내던 중, 후조가 염민에 의해 멸망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부곡 수천 호를 거느렸다.영흥 원년(350년) 9월, 전연의 보필장군 모용평이 발해를 순행하면서 사자를 보내 가견을 초빙하였으나, 가견은 응하지 않고 투항을 거부하였다. 결국 모용평은 공격을 감행했고, 가견은 고성(高城)에서 전연군을 맞아 싸웠으나 패하여 사로잡혔다.
연왕 모용준은 가견이 60여 세가 넘은 나이임에도 활을 그렇게 잘 쏜다는 소문을 듣고, 그 솜씨를 시험하고자 하였다. 이에 숙부 모용각에게 명해 100보 거리에 소를 두게 하고 가견에게 쏘라 명하니, 모용각이 준비를 모두 마친 후 가견에게 물었다.
"능히 적중할 수 있겠는가?"
가견이 답했다."소싯적이었다면 맞추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연로하여 저 정도는 바로 맞출 수 있습니다."
이를 들은 모용각은 크게 웃었다. 그러나 막상 가견이 활을 쏘자 첫번째 화살은 소의 등을 스쳤고, 두번째 화살은 배를 스치면서 모두 소의 털만 벨 뿐이었다. 모용각이 다시 물었다."다시 시도한다면 능히 적중할 수는 있겠는가?"
그러자 가견은"적중하지 못한 것이 기이한 일이지, 어찌 적중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라 답하고 다시 한 발을 쏴서 소를 맞췄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그 정묘함에 감탄하였고, 연왕 모용준은 가견의 재주를 아껴 그를 죽이는 대신 낙릉(樂陵)태수로 삼아 계속 발해군을 통치케 하였다.영화 7년(351년) 11월, 일전에 전연에게 투항했던 방약(逄約)이 발해군으로 들어가 무리를 모으고 반란을 도모하였다. 이에 가견은 사람을 보내 발해 사람들에게 이해득실을 따져 깨우치게 하였고, 방약은 사람이 모이지 않아 반란을 포기한 채 동진으로 도망쳤다. 이후 가견은 태산(太山)태수로 전임되어 산치(山茌)를 지켰다.
광수 2년(358년) 12월, 동진의 북중랑장 순선이 군대를 거느리고 산치를 습격하였다. 당시 가견의 병력은 700명 뿐으로, 순선이 가진 병력에 비해 10배 이상 차이났다. 가견이 성 밖으로 나가 적을 치려 하자, 장수들이 그를 말리며 말했다.
"적은 무리로 대적하기보다는 굳게 지키는 것이 낫습니다."
이에 가견이 답했다."굳게 지킨다한들 능히 전투를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고는 직접 선두에 서서 동진군에게 돌격하여 손수 적 10여 명을 베어 죽였고, 그의 병사들 또한 용맹하게 싸워 총 1,000여 명의 적을 죽인 후 성으로 복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선의 진군은 막을 수 없었고, 이내 동진군은 산치성을 포위하였다. 가견이 한탄하며 말했다."나는 성년이 된 이래로 공명(功名)에 뜻을 두어왔건만, 이처럼 궁박한 상황에 놓인 것이 어찌 하늘의 소행이 아니겠는가! 구차하게 목숨을 구할 바에야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키리라!"
이후 장수들을 향해 말하길"이제는 곤궁한 지경에 이르러 쓸만한 계책도 남지 않았다. 경들은 이만 떠나도 좋으나 나는 여기 남아서 죽겠다."
라 하였다. 이에 장수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부군(府君)께서 떠나시지 않는다면 저희 역시 떠날 수 없으며, 단지 함께 죽을 뿐입니다!"
라 하고는 가견에게 빨리 말 위에 오를 것을 재촉하였다. 장수들의 결의를 확인한 가견은 말에 올라 외쳤다."나는 도망치는 것을 막지 않겠다! 지금 마땅히 경들과 다시 한번 결투(決鬥)에 임하되, 만약 지탱할 수 없는 형세가 된다면 경들은 나를 돌아보지도 말고 재빨리 전장을 떠나도록 하라!"
가견이 성문을 열고 출격하니, 순선의 병사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가견이 해자 위의 다리에 말을 세운 채 좌우로 활을 쏴 동진군을 사살하니, 동진군은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다리를 무너뜨려 가견을 해자로 빠뜨린 뒤에 생포하였다. 가견이 사로잡히자 산치성도 금세 무너져 함락되었다.가견이 순선 앞으로 끌려오자, 순선은 가견을 질책하며 말했다.
"그대의 할아비와 아비 모두 진나라를 섬기며 대대로 진나라의 신하였거늘, 어찌하여 본인의 뿌리를 배반하여서는 곧바로 항복하지 않았는가?"
가견이 답했다."진나라가 중화(中華)를 버린 것이지, 내가 배반한 것이 아니다. 주인을 잃은 백성은 강한 쪽에 붙어 안녕을 추구하는 법이거늘, 어찌 절개를 고친 것이라 할 수 있느냐! 나는 성인이 되고 관직에 올라 조나라부터 연나라에 이르기까지 뜻을 쉬이 바꾸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대는 어찌 홀연히 항복을 권할 수 있는가?"
하지만 순선 또한 지지않고 가견을 더욱 질책하니, 가견이 그를 꾸짖으며 외쳤다."수자(豎子)야! 이 내공(乃公)께서 어찌 아녀자를 섬길 수 있겠느냐?"
결국 순선은 분노하여 가견을 밖에 그대로 두었고, 비가 올 때도 방치하였으며, 먹을 것 하나 주지 않았다. 가견은 분노와 원통함으로 인해 며칠만에 사망하였다. 가견 사후 경소제 모용준이 그의 아들 가활(賈活)을 임성(任城)태수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