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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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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동아시아2.2. 중동2.3. 유럽
3. 주요 사건4. 연도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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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8세기는 서력으로 701년부터 800년까지다.

2. 역사

2.1. 동아시아

동양은 지난 7세기가 대격변의 시대였다면 8세기는 비교적 안정된 시대였다. 특히 매년 고구려ㆍ백제ㆍ신라에 일본과 당이 끼어들어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한반도평화 그 자체였고,[1] 통일신라와 발해의 전성기였다. 실제로 민정문서를 보면 노비 비율이 엄청나게 줄어들어있는데 전쟁이 없어져서 전쟁포로 노비가 없어진 것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이 시기 당나라탈라스 전투안사의 난 등 사건은 많아서 마냥 평화로운 시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중국사의 다른 세기보단 상대적으로 혼란은 덜했고 전성기의 판도를 유지했다. 일본은 나라 시대였는데 이 역시 꽤 조용하게 내실을 다진 시대였다.

2.2. 중동

우마이야 왕조이슬람 제국은 710년대에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에 진입하면서 서유럽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이후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 제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기독교 세력이 산지로 올라가 세운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이슬람 세계에 맞서면서 800년에 달하는 레콩키스타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편 750년 우마이야 왕조는 아부 알 아바스에 의해 전복되어 무너졌으며 아바스 왕조가 새로 들어섰다. 망명한 우마이야의 아브드 알 라흐만 1세는 이베리아 반도로 도망쳐 후우마이야 왕조, 즉 코르도바 에미르국을 세웠다.

2.3. 유럽

일반적으로 말하는 중세의 모습이 갖춰진 시기로, 이슬람의 침입으로 인한 일련의 정치적 상황과 기온의 변화로 인한 새로운 민족, 슬라브족과 바이킹(노르만족)의 남하가 중세 유럽의 틀을 갖추게 만들었다.

710년대 이슬람 제국의 이베리아 정복 이후 서유럽 세계, 특히 피레네 산맥을 마주하는 프랑크 왕국은 이슬람의 직접적 위협에 직면했다. 위협은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로 현실화되었으나, 궁재인 카롤루스 마르텔루스가 침략을 막아내면서 이슬람 세계의 진공은 멈추었다.

당시 프랑크 왕국은 메로베우스 왕조의 통치를 받았으나 실권은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루스에게 있었다. 왕권이 약화된 김에 마르텔루스가 속한 카롤루스 가문은 정권 교체를 꾀했다. 정치적 협력자를 찾던 도중 눈에 들어온 것은 로마 주교, 즉 교황이라는 존재였다.

교황이 중세 권력의 정점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중세 전성기인 11~13세기에는 사실이었지만, 적어도 8세기에는 아니었다. 8세기의 교황은 동로마 제국이 관할하는 로마 교구의 주교일 뿐이었고, 교회를 제국이 통제하려는 황제의 의도에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독자적 지위를 얻고자 교황 또한 정치적 후원자를 찾아다녔다. 결국 교황과 카롤루스 가문은 서로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환상의 파트너가 되었다.

마르텔루스 이후 궁재가 된 단신왕 피피누스 3세(피핀)가 교황에게 서신을 보내 무능한 메로베우스 가문 대신 자신이 왕이 되도록 유도했고, 이런 정치적 판단을 꿰뚫어본 교황 자카리아가 승인하면서 751년 프랑크 왕국의 왕조는 카롤루스 왕조로 교체되었다.

교황이 카롤루스 가문의 부탁을 들어주었으니 카롤루스 가문이 교황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인지상정일 것이다. 라벤나 총독부가 무너지고 랑고바르드 왕국이 교황의 영역을 위협하자 피핀은 랑고바르드 왕국을 제압하고 교황에게 754년과 756년 두 차례 교황에게 영토를 기증하여, 교황이 군주로서 통치하는 영역인 교황령이 탄생하였다. 이는 오늘날은 크게 줄었지만 바티칸 시국의 기원이 된다.

피핀 사후 768년 프랑크 왕국의 국왕은 샤를마뉴라는 프랑스어식 명칭으로 알려진 카롤루스 대제(카롤루스 마그누스)가 되었다. 그의 46년간의 통치 기간 동안 프랑크 왕국은 영토를 급격히 넓히고 동쪽에서 세를 불리던 아바르 칸국을 제압하면서 서유럽의 패자가 되었다. 300년 간 활력을 잃었던 서유럽 세계가 다시금 유럽의 중요한 영역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지는 조금씩 대서양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카롤루스 왕조와 교황 간의 유착은 800년 교황이 카롤루스에게 서로마 황제의 관을 씌우는 행위를 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교황이 서로마의 관을 씌운다고 하여 서로마 제국이 부활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사실 여부가 어떻든 이제 서유럽에도 동로마와 맞먹는 제국이 탄생했다는 관념이 당대에 널리 퍼졌다.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시초가 되었다.

8세기는 여러모로 중세의 본격적 개막이라고 부를 수 있다. 4세기와 5세기가 유럽 중세의 초석을 놓았다면 8세기는 초석 위에서 중세라는 집을 지어낸 것과 같다.

카롤루스 가문과 교황의 유착에서 일어난 정치적 행위는 프랑크 왕국과 가톨릭 교회 모두를 유럽의 중요한 행위체로 끌어올렸다. 또한 봉건제와 장원제 같은 중세의 요소들도 이 시기부터 점차 나타난다.

봉건제와 장원제는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시작된 전형적인 틀 같은 것이 아니며, 지역이나 상황에 따라 그 모습은 다르게 나타났다.

3. 주요 사건

4. 연도 목록



[1] 8세기 한국사 왕조의 전쟁 기록을 살펴보면 장문휴의 등주 원정, 신라군의 발해 1회 공격(그나마 가다가 싸우지 않고 그냥 돌아옴) 등 한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거의 10년에도 몇 번씩은 전쟁이 일어나던 삼국시대나, 나라가 뒤집어지는 내전과 내침이 흔했던 고려 시대 대부분 시기와 비교하면 확실히 큰일이 별로 없는 태평성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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