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17:51:56

효무제(유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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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송 제4대 황제
효무제 | 孝武帝
파일:유송 효무제.jpg
출생 430년 9월 19일
유송 양주 단양군 건강현
(現 장쑤성 난징시)
즉위 453년 5월 20일
유송 양주 단양군 건강현 신정
(現 장쑤성 난징시)
사망 464년 7월 12일 (향년 34세)
유송 양주 단양군 건강현 황궁 옥촉전
(現 장쑤성 난징시)
능묘 경녕릉(景寧陵)[1]
재위기간 유송 제4대 황제
453년 5월 20일 ~ 464년 7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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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F51BA><colcolor=#ece5b6> 본관 팽성 유씨
준(駿)
부모 부황 태조 문황제
모후 효무소태후
형제자매 부황 기준 19남 12녀 중 3남
모후 기준 외아들
배우자 문목황후
자녀 28남 8녀
아명 도민(道民)
휴룡(休龍)
작호 무릉왕(武陵王)
묘호 세조(世祖)
시호 효무황제(孝武皇帝)
연호 효건(孝建, 454년 ~ 456년)
대명(大明, 457년 ~ 4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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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평가4.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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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남북조시대 유송(劉宋)의 제4대 황제.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효무제(孝武帝). 휘는 유준(劉駿). 자는 휴룡(休龍). 아명은 도민(道民).

송문제 유의륭의 3남으로 아버지가 큰형 유소(劉劭), 둘째형 유준(劉濬)에게 죽임을 당하자 그들을 주살하고 즉위했다. 세조라는 묘호답게 과연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고 황권강화를 위해 유씨 황족들을 대부분 주살하였다. 후대에 나타날 두 명의 폐제보다는 낫겠지만 말이다.

초기 3년간 효건(孝建)을, 후기 8년간 대명(大明)이란 연호를 사용했다. 그의 앞에 큰형 유소가 태초(太初)라는 연호를 453년 계사년 음력 2월부터 4월까지 3개월 사용했는데 문제는 유소의 치세가 흑역사가 됐기 때문.

2. 생애

원가 7년(430년) 8월에 유의륭과 노혜남(路惠男)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둘째 형 시흥왕(始興王) 유준(劉濬)과는 동명이인이다. 원래 무릉왕, 옹주 자사로 있으면서 양양을 수비했고, 안북장군과 서주 자사로 임명되어 팽성을 수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양 전투에서 패전해서 진군장군으로 좌천되었다가 북중랑장으로 복귀했으며 강주 자사로 임명되었다. 유준은 총명하여 독서를 할 때 한 번에 7줄을 함께 읽었고, 문재가 매우 훌륭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다. 이처럼 유준은 문무에 모두 재능이 있는 엄친아였다. 그러나 아버지 유의륭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팽성을 수비하고 있었다.

원가 30년(453년) 2월, 큰형인 태자 유소가 유의륭을 시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면서 그의 인생이 급변한다. 유소는 보병교위 심경지를 시켜 유준을 죽이라는 밀명을 내렸지만, 오히려 심경지는 태자가 없으면 장남이 황위를 계승한다는 법칙에 따라서[2] 유준과 함께 유소를 공격하기로 마음먹는다. 여기에 이복 동생이자 유의륭의 6남 경릉왕 유탄, 무제 유유의 6남으로 유준의 숙부인 형주 자사 남군왕 유의선, 옹주 자사 장질, 사주 자사 노상 등과 함께 유소 토벌에 나섰다.

4월, 결국 유준은 신정에서 유소를 격파하고 황제에 즉위했으며, 5월에는 건강을 점령하고 유소와 형 시흥왕 유준을 죽이며 그들의 시체를 거리에 내걸었다. 또 그들의 가솔들을 채찍으로 때리고 그 상처에 독주를 부어 모두 멸족시켰다. 유소의 자는 휴원(休遠)으로 부인으로는 은씨(은옥영)와 왕씨(왕앵무)가 있었다. 은씨는 남편 유소가 잠시 황제가 되자 황후가 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남편이 일찍 사망하였다. 은씨, 왕씨, 그리고 유소의 네 아들 유위지, 유적지, 유빈지, 신원미상의 아들, 딸 하나까지 그와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시흥왕 유준의 자는 휴명(休明)으로 그의 부인, 그의 세 아들 유장문, 유장인, 유장도 역시 모두 죽임을 당했다.

효무제가 살육하면서, 유소의 부인, 즉 유준의 형수 은옥영(殷玉英)이 대리옥승(大理獄丞) 강각(江恪)과 나눈 문답이 걸작이다.
은옥영(殷玉英): "너의 집안에서 골육이 서로 죽고 죽이는데 어째서 천하에 죄없는 이를 억울하게 죽이려고 하는가?"(汝家 骨肉相殘害 何以 枉殺 天下無罪人?)
강각(江恪): "(역적에게) 황후를 제수받고도 죄가 없다니 무슨 말인가?"(受拜皇后 非罪而何?)
은옥영: "이건 임시일 뿐이었고, 당연히 왕앵무를 황후로 삼으려 했다."(此 權時爾 當以 鸚鵡爲后也.)
송서 99권』, 「이흉전二兇傳[3]

대리옥승을 풀이하자면 수사, 기소형사재판모두 맡는 아문(기관)인 대리시(大理寺)의 관원으로 옥승(獄丞)이란 수사와 감옥사무과 형벌집행을 맡은 벼슬인데 당나라 기준으로 산계가 문관 종9품하인 장사랑(將仕郞)이다. 유송은 당나라보다 앞서 존속했기 때문에 품계 역시 차이가 있겠지만 직무를 생각하면 이때도 말직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한때 황후였다가 말단관리에게 모욕을 당한 셈으로 당시 이들을 향한 효무제의 증오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또 아비를 죽인 인간 말종이라는 뜻에서 유소, 유준 형제의 집을 허물고 연못으로 만들어 버렸으며, 그들의 일당과 무당 엄도육 일당을 멸족하고 시신을 모두 불태웠다.

그런데 효무제 유준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었는지, 아님 막장 황제들의 왕조라서 그런지 황제가 된 후에는 아주 엉망이었다. 유의선과 장질은 유소와 시흥왕 유준의 토벌 공로가 크다고 자랑하며 매우 교만하고 횡포했는데, 일을 대부분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했다. 사실 장질의 공을 잘 아는 효무제 유준은 장질이 해달라는 것을 들어주었고, 유의선은 10년 동안 형주에 있으면서 재산을 축적하고 정예 병력을 훈련시키면서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했다. 그런데 효무제 유준은 유의선의 딸들, 즉 자기들의 사촌 동생들을 숙의로 삼고, 은씨와 사씨로 고친 다음 계속 끼고 살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누설했다가 죽은 자가 많았다.

효건 원년(454년) 2월, 이에 분노한 유의선은 장질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호응하는 자가 매우 적었고, 계획이 허접해서 금방 격파당했다. 6월에 그들은 죽임을 당했으며 동시에 멸족되었다. 이때부터 효무제는 종실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온 정력과 역량을 집중했다. 그후 황족들간에 살육이 자행되기 시작했다.

효무제는 형주, 양주, 강주를 분할하여 동양주와 영주를 설치하고, 인구를 분산시켜 세력을 약화시켰다. 또 인사권을 쥐고 있던 이부상서를 두 사람으로 이원화시킨 후 따로 대신을 임명하지 않고 중서, 통사, 사인이 정사를 토의하게 했다. 그의 악랄한 황족 사냥은 문제 유의륭의 6남인 남서주 자사 경릉왕 유탄을 제거하면서 절정을 달렸다. 유탄의 자는 휴문으로 유의륭과 은씨(은수화) 사이에서 태어난 유의륭의 6남이었다. 유의륭이 태자로 책봉하려고 했지만 그 직전에 유의륭이 아들에게 죽었다. 그런 만큼 유탄은 서생들을 가까이하고 인망을 쌓았다. 유탄은 성격이 관대하고 예절이 밝았으며 유소, 시흥왕 유준, 유의선, 장질 등 유준의 적들을 쳐부수는 데 공을 세워 인심을 얻었다. 또 유탄의 세력이 강했으므로 유준은 그를 꺼렸다.

대명 3년(459년) 4월, 효무제는 기습적으로 건강에 있는 경릉왕의 군대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하지만 오히려 지자 이에 빡친 효무제는 유탄을 치기 전에 건강에 있던 경릉왕의 일당 1,000여 명을 주살하여 내부 호응 세력이 될 수도 있는 자들을 모조리 처결했다. 결국 광릉을 함락하여 경릉왕을 멸문하고 동시에 광릉에서 학살을 저질렀다.

앞서 언급한 대로 효무제는 성욕이 심했는데, 심지어 자기 어머니와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이는 효무제가 자기 어머니에게 들러 밤새도록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유송 왕조에 미친 인간이 워낙 많은 데다, 이 양반의 행적이 워낙 막장인지라, 소문이 진짜라고 해도 그리 이상하진 않을 수준이다.

설상가상으로 할아버지 유유가 만든 농기구 박물관을 탐방했을 때는 거기에 있던 유유의 초상화를 삿대질하며 저런 미천한 영감이 황제를 차지하다니 지나치다며 패드립을 쳤다. 송서의 무제본기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孝武 大明 中 壞上所居陰室 於其處起玉燭殿 與羣臣觀之. 牀頭有土鄣 壁上挂葛燈籠 麻繩拂. 侍中 袁顗 盛稱 上儉素之德 孝武不答 獨曰 "田舍公得此 以爲過矣."
효무제가 대명 중에 이 머물렀던 곳인 음침한 방을 헐고 그곳에 옥촉전을 세워서 뭇 신하와 함께 구경하였다. 침대의 머리맡은 흙벽으로 삼아 벽에는 칡으로 만든 등롱과 삼끈으로 만든 먼지떨이가 걸렸다. 시중 원의가 의 검소한 덕을 성대하게 칭찬했으나 효무제는 이를 무시하고 중얼거렸다. "저런 천한 늙은이가[4] 이걸 얻다니 지나치다."
애초에 효무제는 원가 7년, 즉 문제 유의륭이 즉위한 지 7년 후, 무제 유유가 죽은 지 10년 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미 고인이 된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실 무제 유유 이후로 송나라가 망할 때까지 문제 유의륭 외에는 정상인 황제가 없었으므로 유유의 박물관도 소용이 없었던 것 같다.

효무제는 인재 선발에서 자기의 비위를 맞춰주고, 아부를 떠는 간신들을 중용하고 총애했다. 시중 안사백은 효무제와 도박을 해서 일부러 한 번에 100만 냥을 잃고 환심을 얻어 심복이 되었다. 또 효무제는 은귀비가 죽자 진군태수 유덕원에게 우리 부인이 죽었는데 님이 곡하는 실력을 보고 상벌을 내릴 거임이라고 말하자 유덕원은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비통하게 울면서 눈물을 짜냈다. 이에 효무제는 기뻐하며 유덕원을 예주자사에 임명했는데 세설신어에 따르면 마침 그 날이 유덕원이 사별한 부인의 제삿날이었다고 한다.

효무제는 반대로 자신에게 간언을 마구 날리는 충신에게는 잔혹하게 대했다. 단양윤 안준은 여러 차례 사치와 음란 행위에 대해 간언을 올렸는데, 결국 유탄과 한패라는 죄를 씌워 다리를 자르고 죽였다. 또 여릉내사 주랑도 날카로운 직언을 하자 미워하여 어머니의 장례를 성의있게 하지 않았다면서 불효자라는 이유로 죽였다. 효무제는 대규모로 궁전을 짓고, 나무에 비단을 입혔으며 애첩과 총애하는 간신들에게 자주 상을 내려 국고가 비었다. 은귀비의 장례식에는 수십리의 산굴을 파서 거대한 묘[5]를 만들었는데 그 부역에 죽은 백성들이 많았다.

또한 효무제는 재물을 탐내어서, 자사 또는 2,000석 이상의 녹봉을 받는 관리들에게 재물을 바치라고 명령하여 강제로 바치게 했고, 바치지 않으면 파직하거나 죄를 씌워 죽였다. 바친 자들도 반드시 그와 도박을 해야 했는데 돈을 뺏고, 결국 모든 재산까지 날려먹게 한 후에야 판을 그만뒀다. 거기다 종일 술만 먹고 취해서 대신들을 대취하게 하고, 서로 희롱하게 하는 것으로 재미를 삼았다. 시중 심회문이 술을 마시지 않고 농담을 하지 않자 건방지다는 이유로 자살하라고 명령하고, 그의 세 아들도 죽였다. 그 외에 대신들을 모욕했는데 황문시랑(黃門侍郞) 종영수(宗靈秀)는 몸이 비대하여 절을 올리는 것을 힘들어했다. 일부러 그에게 많은 것을 하사하여 그가 사례의 절을 올리게 만들어 힘들게 절을 하며 끙끙대는 그를 웃음거리로 삼았으며 종영수의 아버지 광록훈(光祿勳) 종숙헌(宗叔獻)의 상을 나무로 만들어서 종영수의 청사로 보냈다. 또 심심하면 자신의 노비[6]에게 곤장으로 대신들을 치게 했는데 상서령 이하의 관원은 곤장을 피할 수 없었다.

효무제는 신하들을 놀리고 그들의 외모에 따라 혹은 키가 크고 작은 것, 몸이 비대하고 여윈 것에 따라 대신들에게 별명을 달아주기도 했으며, 평상시에는 대신들의 관직이나 이름을 부르는게 아니라 별명으로 불렀다. 예를 들어 수염이 많은 사람은 양이라고 불렀으며, 안사백은 이빨이 몇 개가 부족해서 이빨이 드러난다는 뜻에서 언(齴)이라는 별명을 붙였고, 유수지는 인색해서 효무제가 항상 유수지를 구두쇠라고 불렀다. 또한 왕현모의 경우 노창(老傖)[7]이라고 불렀다.

대명 8년(464년) 윤5월, 효무제는 음란한 생활을 하다가, 총애하던 은귀비가 죽자 술만 퍼먹다가 그대로 병을 얻어서, 결국은 재위 12년 만에 35세의 나이로 건강 옥촉전에서 사망했다. 7월에 경녕릉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아들 유자업이 뒤를 이었는데 그는 재위기간 내내 막장 짓만 하다가 폐위되고 결국 11번째 동생인 상동왕 유욱이 뒤를 이었다.

효무제는 28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유자심(劉子深), 유자봉(劉子鳳), 유자현(劉子玄), 유자형(劉子衡), 유자황(劉子況), 유자문(劉子文), 유자옹(劉子雍), 유자우, 유자운, 유자소는 요절했고 유자란과 유자사는 유자업에게 살해당했으며 남은 아들들은 모두 명제에게 살해당했다. 결국 효무제의 대는 끊기고 말았으며, 명제는 선심 쓴다고 자기 아들인 유찬을 효무제의 이전 작위였던 무릉왕으로 봉했다.

3. 평가

사신(史臣)은 말한다. 자신을 부려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은 요순(堯舜)의 마음이며, 자신을 이롭게 하여 만물에 미치게 하는 것은 평범한 임금의 뜻이며, 백성들의 생명을 다하게 하여 스스로 생활하는 것은 걸주(桀紂)가 하는 짓이다. 대명(大明) 연간의 세상을 보고 있노라면 장차 백성들의 생명을 다하게 하려는 것이었도다! 비록 주공(周公)의 아름다운 재능이 있었으나 오히려 재능을 채워서 어지럽혔으니 무슨 이로움이 있었겠는가!

- 《송서》의 저자 심약
다만 위 항목에는 만행만 나와 있는데, 양심 있는 늙은 신하 채흥종을 비롯한 유의륭 때부터의 원로 대신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그 유준도 이들만은 함부로 하지 못했다. 건강의 요직에 그럼에도 묵묵히 제자리 지키며 제할일 하는 관료들이 있었는데, 이들에 대한 참소가 들어가면 어쩌다가 한 번은 간파해서 그들을 지켜주는 의외의 행동도 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을 하고 수없이 많은 애꿎은 신하들이 죽었어도 유송이 나름 제대로 돌아갔던 건 유준에게 최소한도의 양심과 선을 지키는 지성만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북위를 공격하기 위해 문신들과 회의한 것 자체는 크게 나무랄 게 못된다. 문신이라고 해서 군사에 아주 문외한이란 법은 없기 때문. 유명한 병법가인 손자나 오자 같은 이들도 무신보다는 문신에 가까운 인물이다.

물론 유능한 심경지가 반대론을 펼쳤고, 유준에게 아부하던 무리들을 백면서생이라고 깠는데 결국 패하긴 패했지만 북위라고 늘상 유송과의 전투에서 승승장구만 한 건 아니고, 되도 않는 약탈을 저지르다가 매복에 걸려 참패한 사례도 꽤 된다. 당시 적국이었던 북위는 북방 유목제국이었던 유연과의 전쟁도 전쟁이지만, 그 전에 다름아닌 유송과 벌였던 전쟁에서의 소모, 그리고 관중에서의 잦은 반란 탓에 다소 휴지기를 가져야 했던지라 국경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또한 상술했듯 비록 이상성욕이 후대인이 보기에도 심했지만, 과감하고 민첩해 술에 만취해 있다가도 신하들이 들어오면 가짐을 바르게 하고 취한 척하지 않는 등 본인이 최소한의 처신은 할 줄 알았고, 국가가 돌아가는 바에 아주 무관심하진 않았다. 그래서 그나마 그 당대에는 체면을 보전할 수 있었다.

4. 둘러보기(계보)

송서(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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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본기(本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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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권 「무제기(武帝紀)」 4권 「소제기(少帝紀)」 5권 「문제기(文帝紀)」
유유(劉裕) 유의부 유의륭
6권 「효무제기(孝武帝紀)」 7권 전폐제기(前廢帝紀)」 8권 「명제기(明帝紀)」
유준(劉駿) 유자업 유욱(劉彧)
9권 「후폐제기(後廢帝紀)」 10권 「순제기(順帝紀)」
유욱(劉昱) 유준(劉準)
※ 11권 ~ 40권은 志에 해당. 송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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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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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권 「유열등전(庾悅等傳)」 53권 「장무도등전(張茂度等傳)」 54권 「공계공등전(孔季恭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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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권 「장도등전(臧燾等傳)」 56권 「사첨등전(謝瞻等傳)」 57권 「채곽전(蔡廓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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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권 「문구왕전(文九王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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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연지 장질 · 노상 · 심유지 왕승달 · 안준
76권 「주수지등전(朱脩之等傳)」 77권 「유원경등전(柳元景等傳)」 78권 「소사화등전(蕭思話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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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권 「문오왕전(文五王傳)」
유탄 · 유위 · 유혼 · 유휴무 · 유휴범
80권 「효무십사왕전(孝武十四王傳)」
유자상 · 유자훈 · 유자방 · 유자욱 · 유자란 · 유자인 · 유자진 · 유자원 · 유자우 · 유자맹 · 유자운 · 유자사(劉子師) · 유자소 · 유자사(劉子嗣) · 유찬
81권 「유수지등전(劉秀之等傳)」 82권 「주랑등전(周朗等傳)」 83권 「종월등전(宗越等傳)」
유수지 · 고침 · 고기지 주랑 · 심회문 종월 · 오희 · 황회
84권 「등완등전(鄧琬等傳)」 85권 「사장등전(謝莊等傳)」 86권 「은효조등전(殷孝祖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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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권 「소혜개등전(蕭惠開等傳)」 88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89권 「원찬전(袁粲傳)」
소혜개 · 은염 설안도 · 심문수 · 최도고 원찬
90권 「명사왕전(明四王傳)」
유우 · 유홰 · 유숭 · 유희
91권 「효의전(孝義傳)」
공영 · 유유(劉瑜) · 가은 · 곽세도 · 자원평 · 엄세기 · 오규 · 반종 · 장진지 · 왕팽 · 장공 · 서경 · 손법종 · 범숙손 · 복천여 · 허소선 · 여제민 · 손극 · 하자평
92권 「양리전(良吏傳)」
왕진지 · 두혜도 · 서활 · 육휘 · 완장지 · 강병지 · 왕흠지
93권 「은일전(隱逸傳)」
대옹 · 종병 · 주속지 · 왕홍지 · 완만영 · 공순지 · 유응지 · 공기(龚祈) · 적법사 · 도잠 · 종욱지 · 심도건 · 곽희림 · 뇌차종 · 주백년 · 왕소 · 관강지
94권 「은행전(恩倖傳)」
대법흥 · 완전부 · 왕도륭 · 양운장
95권 「삭로전(索虜傳)」 96권 「선비토욕혼(鮮卑吐谷渾)」
삭로 토욕혼
97권 「이만전(夷蠻傳)」
임읍국 · 부남국 · 가라타국 · 가라단국 · 반황국 · 반달국 · 사파파달국 · 사자국 · 가비려국 · 고구려 · 백제국 · 왜국 · 형옹주만 · 예주만
98권 「저호전(氐胡傳)」 99권 「이흉전(二凶傳)」
구지 · 저거몽손 유소(劉劭) · 유준(劉濬)
100권 「자서전(自序傳)」
심약
(1) 본명이 사유(謝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인(景仁)으로 표기되었다.
(2)본명이 저유지(褚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숙도(叔度)로 표기되었다.
(3) 본명이 장유(張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무도(茂度)로 표기되었다.
(4) 본명이 왕유지(王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홍(敬弘)으로 표기되었다.
(5) 본명이 왕욱(王彧)으로 유욱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문(景文)으로 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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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권 「송본기상(宋本紀上)」 2권 「송본기중(宋本紀中)」 3권 「송본기하(宋本紀下)」
유유(裕) · 유의부 유의륭 · 유준(駿) · 유자업 유욱(彧) · 유욱(昱) · 유준(準)
4권 「제본기상(齊本紀上)」 5권 「제본기하(齊本紀下)」
소도성 · 소색 소소업 · 소소문 · 소란 · 소보권 · 소보융
6·7권 「양본기상·중(梁本紀上·中)」 8권 「양본기하(梁本紀下)」
소연 소강 · 소역 · 소방지
9권 「진본기상(陳本紀上)」 10권 「진본기하(陳本紀下)」
진패선 · 진천 · 진백종 진욱 · 진숙보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 11·12권 「후비전(后妃傳)」 ||
조안종 · 소문수 · 장애친 · 장궐 · 사마무영 · 호도안 · 원제규 · 노혜남 · 왕헌원 · 은숙의 · 하영완 · 심용희 · 왕정풍 · 진묘등 · 강간규 · 진법용 · 사범경 · 진도정 · 유지용 · 배혜소 · 왕보명 · 하정영 · 왕소명 · 유혜단 · 저영거 · 왕순화 · 장상유 · 치휘 · 왕영빈 · 정영광 · 완영영 · 서소패 · 장요아 · 심묘용 · 왕황후 · 유경언 · 심무화 · 장여화
13·14권 「송종실급제왕전(宋宗室及諸王傳)」
유도린 · 유도규 · 유의경 · 유준고 · 유의진 · 유의강 · 유의공 · 유의선 · 유의계 · 유소 · 유준(濬) · 유삭 · 유굉 · 유탄 · 유위 · 유창 · 유혼 · 유휴인 · 유휴우 · 유휴무 · 유휴업 · 유휴천 · 유이부 · 유휴범 · 유휴약 · 유자상 · 유자훈 · 유자방 · 유자욱 · 유자란 · 유자인 · 유자진 · 유자원 · 유자우 · 유자맹 · 유자운 · 유자사(劉子師) · 유자소 · 유자사(劉子嗣) · 유찬 · 유우 · 유홰 · 유숭 · 유희
15권 「유목지등전(劉穆之等傳)」 16권 「왕진악등전(王鎮惡等傳)」
유목지 · 서선지 · 부량 · 단도제 왕진악 · 주령석 · 모수지 · 부홍지 · 주수지 · 왕현모
17권 「유경선등전(劉敬宣等傳)」
유경선 · 유회숙 · 유수 · 손처 · 괴은 · 상정 · 유종 · 우구진 · 맹회옥 · 호번 · 유강조
18권 「조륜지등전(趙倫之等傳)」 19권 「사회등전(謝晦等傳))」
조륜지 · 소사화 · 장도 사회 · 사유 · 사방명 · 사령운
20권 「사홍미전(謝弘微傳)」 21권 「왕홍전(王弘傳)」 22권 「왕담수전(王曇首傳)」
사홍미 왕홍 왕담수 ,왕훈,
23권 「왕탄등전(王誕等傳)」 24권 「왕유지등전(王裕之等傳)」 25권 「왕의등전(王懿等傳)」
왕탄 · 왕화 · 왕혜 · 왕욱 왕유지 · 왕진지 · 왕소지 · 왕열지 · 왕준지 왕의 · 도언지 · 원호지 · 장흥세
26권 「원담전(袁湛傳)」 27권 「공정등전(孔靖等傳)」 28권 「저유지전(褚裕之傳)」
원담 공정 · 공림지 · 은경인 저유지
29권 「채곽전(蔡廓傳)」 30권 「하상지전(何尙之傳)」 31권 「장유전(張裕傳)」
채곽 하상지 장유 ,장승,
32권 「장소전(張邵傳)」 33권 「범태등전(范泰等傳)」 34권 「안연지등전(顔延之等傳)」
장소 범태 · 순백자 · 서광 · 정선지 · 배송지 · 하승천 안연지 · 심회문 · 주랑
35권 「유담등전(劉湛等傳)」 36권 「양흔등전(羊欣等傳)」 37권 「심경지등전(沈慶之等傳)」
유담 · 유열 · 고침 · 고기지 양흔 · 양현보 · 심연지 · 강이 · 강병지 심경지 · 종각
38권 「유원경전(柳元景傳)」 39권 「은효조등전(殷孝祖等傳)」 40권 「노상등전(魯爽等傳)」
유원경 은효조 · 유면 노상 · 설안도 · 등완 · 종월 · 오희 · 황회
41권 「제종실전(齊宗室傳)」
소도도 · 소도생 · 소요광 · 소요흔 · 소면 · 소경선 · 소적부 · · 소탄 · 소탄지
42·43권 「제고제제자전(齊高帝諸子傳)」
소억 · 소영 · 소황 · 소엽 · 소고 · 소장 · 소삭 · 소감 · 소봉 · 소예 · 소갱 · 소구 · 소현
44권 「제무제제자·제문혜제자·명제제자전(齊高帝諸子·文惠諸子·明帝諸子傳)」
소장무 · 소자량 · 소자경(卿) · 소자향 · 소자경(敬) · 소자무 · 소자륭 · 소자진 · 소자명 · 소자한 · 소자륜 · 소자정 · 소자악 · 소자문
소자준 · 소자림 · 소자건 · 소자하 · 소소수 · 소소찬 · 소보의 · 소보현 · 소보원 · 소보인 · 소보유 · 소보숭 · 소보정
45권 「왕경칙등전(王敬則等傳」 46권 「이안인등전(李安人等傳)」
왕경칙 · 진현달 · 장경아 · 최혜경 이안인 · 대승정 · 환강 · 초도 · 조무 · 여안국 · 주산도 · 주반룡 · 왕광지
47권 「순백옥등전(荀伯玉等傳)」 48권 「육징등전(陸澄等傳)」
순백옥 · 최조사 · 설연 · 우종 · 호해지 · 우완지 · 유휴 · 강석 육징 · 육혜효 · 육궐
49권 「유고지등전(庾杲之等傳)」 50권 「유환등전(劉瓛等傳)」
유고지 · 왕심 · 공규 · 유회진 유환 · 명승소 · 유이 · 유규
51·52권 「양종실전(梁宗室傳)」
소경 ,소매 소발 소앙 소욱, · 소의 · 소부 · 소창 · 소융 · 소굉 ,소정인 소정의 소정덕 소정립, 소수 · 소위 · 소회 · 소담
53권 「양무제자전(梁武帝諸子傳)」
소통 · 소종 · 소적 · 소속 · 소윤 · 소기
54권 「양간문제자·원제제자전(梁簡文帝諸子·元帝諸子傳)」
소대기 · 소대심 · 소대관 · 소대림 · 소대련 · 소대춘 · 소대성 · 소대봉 · 소대아 · 소대장 · 소대균 · 소대위 · 소대훈 · 소대구 · 소대흔 · 소대지 · 소대원 · 소방등 · 소방제 · 소방구 · 소방략
55권 「왕무등전(王茂等傳)」
왕무 · 조경종 · 조의종 · 석천문 · 하후상 · 길사첨 · 채도공 · 양공칙 · 등원기 · 장혜소 · 장징 · 풍도근 · 강현 · 창의지
56권 「장홍책등전(張弘策等傳)」 57권 「심약등전(沈約等傳)」 58권 「위예등전(韋叡等傳)」
장홍책 · 유역 · 정소숙 · 여승진 · 악애 심약 · 범운 위예 · 배수
59권 「강엄등전(江淹等傳)」 60권 「범수등전(范岫等傳)」 61권 「진백지등전(陳伯之等傳)」
강엄 · 임방 · 왕승유 범수 · 부소 · 공휴원 · 강혁 · 서면 · 허무 · 은균 진백지 · 진경지 · 난흠
62권 「하창등전(賀瑒等傳)」 63권 「왕신념등전(王神念等傳)」 64권 「강자일등전( 江子一等傳)」
하창 · 사마경 · 주이 · 고협 · 서리 · 포천 왕신념 · 양간 · 양아인 강자일 · 호승우 · 서문성 · 음자춘 · 두즉 · 왕림 · 장표
65권 「진종실제왕전(陳宗室諸王傳)」
진의 · 진상 · 진혜기 · 진창 · 진담랑 · 진백무 · 진백산 · 진백고 · 진백공 · 진백인 · 진백의 · 진백례 · 진백지 · 진백모
진숙릉 · 진숙영 · 진숙견 · 진숙명 · 진숙경 · 진숙헌 · 진숙제 · 진숙문 · 진숙달 · 진숙탄 · 진숙표 · 진숙웅 · 진숙중 · 진숙엄 · 진숙신 · 진숙우 · 진숙평 · 진숙오 · 진숙흥 · 진숙선 · 진숙목 · 진숙검 · 진숙징 · 진숙소 · 진숙광 · 진숙순 · 진숙모 · 진숙현 · 진숙륭 · 진숙영
진심 · 진장 · 진윤 · 진억 · 진언 · 진경 · 진건 · 진념 · 진지 · 진전 · 진번
66권 「두승명등전(杜僧明等傳)」
두승명 · 주문육 · 후진 · 후안도 · 구양위 · 황법구 · 순우량 · 장소달 · 오명철
67권 「호영등전(胡穎等傳)」
호영 · 서도 · 두릉 · 주철무(1) · 정령세 · 심각 · 육자륭 · 전도집 · 낙문아 · 손창 · 서세보 · 주부 · 순랑 · 주경 · 노실달 · 소마하 · 임충 · 번의
68권 「조지례등전(趙知禮等傳)」
조지례 · 채경력 · 종원요 · 한자고 · 화교 · 유사지 · 사기 · 모희 · 심군리 · 육산재
69권 「심형등전(沈炯等傳)」
심형 · 우려 · 부재 · 고야왕 · 요찰
70권 「순리전(循吏傳)」
길한 · 두기 · 신념 · 두혜도 · 완장지 · 견법숭 · 부염 · 우원 · 왕홍궤 · 심우 · 범술증 · 손겸 · 하원 · 곽조심
71권 「유림전(儒林傳)」
복만용 · 하동지 · 엄식지 · 사마경 · 변화 · 최령은 · 공첨 · 노광 · 심준(峻) · 공자구 · 황간 · 심수 · 척곤 · 정작 · 전완 · 장기 · 고월 · 척곤 · 왕원규
72권 「문학전(文學傳)」
구영국 · 단초 · 변빈 · 구거원 · 왕지심 · 최위조 · 조충지 · 가희경 · 원준 · 유소(昭) · 종영 · 주흥사 · 오균 · 유협 · 하사징 · 임효공 · 안협 · 기소유 · 두지위 · 안황 · 잠지경 · 하지원 · 서백양 · 장정견 · 완탁
73·74권 「효의전(孝義傳)」
공영 · 유유(瑜) · 가은 · 곽세통 · 엄세기 · 오규 · 반종 · 장진지 · 구걸 · 사각수 · 왕팽 · 장공 · 서경 · 손법종 · 범숙손 · 복천여 · 허소선 · 여제인 · 손극 · 하자평 · 최회순 · 왕허지 · 오경지 · 소예명 · 소교처양 · 공손승원 · 오흔지 · 한계백 · 구관선 · 손담 · 화보 · 해숙겸 · 한영민 · 유풍 · 봉연백 · 오달지 · 왕문수 · 악이지 · 손법종 · 유도민 · 등담공 · 도계직 · 심숭소 · 순장 · 길분 · 견염 · 조발호 · 한회명 · 저수 · 장경인 · 도자장 · 성경준 · 이경서 · 사린 · 은불해 · 사마고 · 장소
75·76권 「은일전(隐逸傳)」
도잠 · 종소문 · 심도건 · 공순지 · 주속지 · 대옹 · 적법사 · 뇌차종 · 곽희림 · 유응지 · 공기 · 주백년 · 관강지 · 어부 · 저백옥 · 고환 · 두경산 · 장영서 · 오포 · 서백진 · 심인사 · 완효서 · 등욱 · 도홍경 · 제갈거 · 유혜비 · 범원엽 · 유선 · 장효수 · 유승선
77권 「은행전(恩倖傳)」
대법흥 · 서원 · 완전부 · 기승진 · 유계종 · 여법량 · 여문현 · 여법진 · 주석진 · 육험 · 사마신 · 시문경 · 심객경 · 공범
78·79권 「이맥전(夷貊傳)」
임읍 · 부남 · 중천축국 · 사자국 · 고구려 · 백제국 · 신라 · · 부상국· 하남왕국 · 탕창 등지 · 무흥국 · 형옹주·예주만 · 고창 · 쿠처 · 우전국 · 파사국 ·연연
80권 「적신전(賊臣傳)」
후경 ,왕위, · 웅담랑 · 주적 · 유이 · 진보응
(1) 본명이 주철호(周鐵虎)로 당태조로 추존된 이호(李虎)를 피휘하여 무(武)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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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중에 유자업이 이 무덤을 파헤치려다 실패하자 똥이 뿌려지는 수모를 당했다(...)[2] 역적인 장남과 차남을 제외하면 유준이 장남이었다.[3] 두 흉악범의 열전. 원흉소와 시흥왕 준은 아예 따로 열전까지 만들어 까였다.[4] 원문은 전사공(田舍公)으로 이는 전사옹(田舍翁)의 동의어다. 전사옹은 시골뜨기 늙은이지만 견문이 좁고 고집스러운 시골 늙은이로 뜻이 파생되었는데 즉 황실의 창시자이자 자기 할아버지를 아는게 없는 꼰대라 욕한 것이다.[5] 전폐제 유자업은 즉위이후 이 무덤을 파헤치고 부장품을 싹슬이하는 짓을 저질렀다.[6] 곤륜에서 온 노예였다.[7] 남방 사람들이 북방에서 온 사람들을 부르는 멸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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