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복의 시대와 형태에 따라 구분되는 다양한 의복 양식들을 정리한 문서.
2. 상세
옛부터 삼국시대~조선에 이르기까지 한복은 기본적으로 상유하고(上襦下袴)[1] 양식을 따르고 있다. 또한 아한대성 기후조건 덕에 몸을 감싸여미는 y형식의 의복문화가 잘 정착할 수 있었다. 참고로 중국의 한푸는 기본적으로 위아래 한 벌인 통옷이지만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한 탓에 대체로 상의하상(上衣下裳)[2]이라 불리며 차별되는 의복문화를 가지고있었다.전체적으로 북방(알타이)계 호복의 양식을 근간으로 두며, 기원전 7세기의 기마민족 스키타이의 의복문화에서도 꽤나 영향을 받았다. 둘다 유목민족 특성상 상의와 하의가 명확히 구분되는것이 특징이며 바지를 입는다. 이러한 양식은 고구려 벽화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3] 때문에 대륙과 반도는 서로다른 의복양식과 구조를 가지게 되었고, 이것을 가지고서 과거 중국쪽에선 이를 문제삼아 한복을 오랑캐의 옷이라며 폄하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이 말해주는 건 몇몇 중국인들이 주장하는 "한복의 근원은 중국이다." 라는 의견에 대한 반증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한민족의 전통의상은 오랫동안 주변국들의 영향을 받아왔지만 큰 변화를 보이진 못하다가 고려에 이르러 원나라에게 큰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이때 기존의 허리띠 대신 한복의 상징인 옷고름이 생겨났다. 단순히 가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의도적으로 길이를 줄여 빈부분을 장식으로 채운다는 식의 의복문화가 생긴것도 이때부터이다. 이후 시간이 흐름에따라 다양한 요소들이 사라지거나 파생되었으며, 조선에 이르러 밑의 양식들을 끝으로 전통의상이 완성되었다.
(문서의 설명을 위해 첫번째 사진을 삼총사라 명함)
간혹 사람들 사이서는 한복 문서에 올라와 있는 의상 정리표처럼, 한 시기의 한 대표양식을 떠올리며 "조선후기에는 모두가 짧고 노출하는 옷만 입었다." 라는 생각들을 하기도 한다. 물론 그러한 정리방식이 잘못되었다 말할 순 없지만, 어느정도 정정할 부분이 있다.
정확한 한복의 변천사를 표현하자면, 시간이 흐를수록 저고리가 "짧은 양식으로 변화" 가 아닌 "짧은 양식도 추가" 이기 때문이다. 사진에서 보여지듯 후기~구한말 시절이라도 이전시기의 한복양식들은 여전히 존재해왔으며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거나 묘사되는 것처럼 한 시기에 하나의 양식이 아닌, 다양한 양식들이 다함께 복합적으로 존재하던 것이 한복문화였다.[4]
가장 기본적인 바지or치마저고리 만 해도 시대별로 다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꾸미느냐에 따라 다양한 모습들로 표현된다. 외투라 하더라도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내부를 세세히 따져보면 그 수가 절대 만만치 않다. 도포나 쾌자와 같이 유명한 것들은 물론이고, 구조적, 형태적인 측면에서 볼때 뚜렷이 구분되지 않더라도 각자다른 성격을 지닌 다양한 한복들이 존재한다. 한복/종류 참고,
2.1. 삼국시대 ~ 고려
이때만 해도 의복문화의 독창성이 생기기 전이라서 북방계 의상과 비슷하게 기본적인 상의와 하의, 허리끈, 모자와 두건을 기본착장으로 삼았다. 그당시에도 조선과 같이 평복은 고유의 형태를, 관복 및 공복은 중국의 복식을 받아들인 이분적 복식 제도였으며 상류층도 일상에서는 고유의 한복을 입었었다. 한민족의 의복문화는 오랜시간을 특별한 변화없이 유지되어왔으며 본격적으로 현재의 한복을 만들어낸것은 조선에 이르러서이다. 그렇다 한들 한복은 예나 지금이나 기본적으로 상유하고의 형태를 벗어난 적이 없었으며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기본적으로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포(겉옷)이나 치마를 입었다.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스타일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한중일이 국가마다의 독창성을 지니게된 것에는 약 수백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시기에는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시아 문화권의 모든 국가에서 유사한 형태의 복식 문화를 보인다.
고려의 경우 이전의 의복과 별 차이가 없었으며 당나라풍이 유행하면서 저고리위로 치마를 입는 의복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했으며, 고려말기에 있던 원 간섭기의 영향으로 생겨난 몽골풍의 유행을 통해서야 비로소 한반도의 의복문화는 큰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대표적으론 이때부터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고, 고름이 생겨나 조선으로 이어지게 된다.
2.2. 장저고리 양식
장저고리 한복 (허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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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저고리 한복 (흉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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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저고리 한복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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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실루엣을 보여주며 초기양식인 만큼 아직 노출부위가 없어 2피스가 기본이고, 저고리의 형상이 /로 나아가며, 겨드랑이를 위한 부분이 따로 존재한다. 평균적으로 저고리가 허리부근까지 내려오나 경우에 따라 (흉통~손목)까지 여럿이다. 이러한 구조적 특징들은 중기이후로 짧은 ■의 실루엣이 유행하게 되면서 중심에서 밀려났다. 대신 길이가 긴 남성한복에서 쉬이 찾을 순 있다.
장점으로는 면적이 넓은만큼 부족했던 의복제작기술이 어느정도 가려진다는 것으로, 이러한 점은 후기양식에서 크게 부각된다. 단점으로는 위아래의 구분이 부족해 신체미가 보여지기 어렵고 몸이 짧고 뚱뚱하게 보여질 수 있다는 점, 팔을 모았을때 자칫 옷이 앞으로 부풀려지기도 한다는 점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개선하고자 만들어진 것이 바로 중기양식이다.
이러한 양식이 조선초기를 대표한다지만 시간이 흘렀다 하여 그 문화가 사라진것은 아니었기에, 조선의 멸망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긴저고리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들어서면서 짧은 저고리 양식만 유지되는 바람에, 여러 미디어와 디자인계에서 잘 보이지 않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실제로 긴저고리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조선초기의 유산이라 여기기도 하는등, 아직 개발 및 발전될 부분이 많은 양식이다.
2.3. 중저고리 양식
중저고리 한복 (흉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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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저고리 한복 (가슴 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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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저고리 한복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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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의 실루엣을 가지며 평균적으로 저고리가 (가슴 밑~흉통)까지 내려온다. 저고리의 형상이 | 자로 나아가며 겨드랑이 부분이 생략되었고 저고리의 길이가 전보다 줄어들었는데 줄어든 만큼의 빈부분을 매우는 것은 치마허리와 가슴가리개라는 의상 겸 장식이다. 이러한 노출장식이 생겨나면서 한복은 3피스로 발전하게 된다. 덕분에 초기양식처럼 쭉 연결되지않고, 위아래가 더 명확이 구분되어 인체의 실루엣을 더욱 살릴 수 있었다. 이러한 장식기법은 같은 중기양식이라도 각각 다르게 표현되는데, 노출이 아예 없는 경우, 허리부분으로만 살짝 들어내는 경우, 후기양식과 비슷하게 크게 들어내는 경우 등 다양한 양상들을 보인다..
"■모양의 저고리, 줄인만큼 생기는 노출장식" 이러한 개념의 미적요소들은 계속 이어지고 변형되어 추후에 생겨날 모든 한복양식들에게 기초가 되어 구조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장점으로는 기존의 초기양식의 단점들을 대부분 해결했다는 것이다. 신체적인 실루엣이 드러나게 된 점, 부풀림 현상 완화, 새로운 장식문화 개척 등 한복이란 의류문화에 큰 발전이 있었다는 점이다. 단점으로는 위에서 말했듯 다른양식들의 기초가 되어지는데 단순히 길이를 바꾸거나, 서구적인 장치를 추가하는 등, 이전과 같은 성장을 보이지 못하고 단순히 제자리걸음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는 점이다.
2.4. 단저고리 양식
단저고리 한복 (가슴 위~흉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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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저고리 한복 (가슴 위~가슴 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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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저고리 한복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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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적으로 저고리가 (가슴 위~밑)일 정도로 겨우 가리거나 노출하는게 특징이며 매우 짧고 옅게 여미어 입는다. 전체적인 구조는 중기양식과 동일하며 보통 치마를 허리부분에서 묶던것이 후기로 접어들며 가슴부분에서 묶기도 하는등 소소한 변화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기존의 노출장식에게 극단적으로 다가간 양식이란 것이다. 치마허리와 가슴가리개의 노출장식에 많은것을 투자한 경우이다 보니 장식부분에 다양한 형태가 나타났다. 전처럼 단순히 천을 두르는 것만이 아닌 늘어뜰이기, 매듭짓기, 더 감아 부풀리기, 허리띠 추가로 묶기 등 천 하나로 다양한 형태의 가슴장식을 만들어 입었다.
장점으로는 기존의 노출장식을 더욱 풍성하고 다양하게 만들었다는 것, 전통양식의 최종형태라는 것이다. 허나 이러한 장점과는 반대로 의복으로서 단점도 드러난다. 장식을 위해 저고리가 가슴 윗부분까지 짧아졌음에도 기혼여성의 경우 노출장식인 가슴가리개를 수유와 노동의 편의를 위해 가슴아래까지만 착용하거나 아예 착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팔을 위로 향할 경우 신체를 따라 옷이 위로 올라가면서 가슴과 겨드랑이가 그대로 노출되고 만다는, 의복에 있어서 큰 결함이 생겨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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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어느정도 크기가 있었던 전기, 중기양식은 면적이 꽤 컸던만큼 보기에 큰 불폄함이 없던 반면 후기양식의 저고리는 그 크기가 매우 작고 형태가 위태롭다 보니 의복수준이 낮아보이게 하는 단점도 있고, 노출장식에 쓰이는 천이 일반적인 저고리의 길이를 늘리는 것보다 조금 더 많은 자원을 소모하게 한다는 것이 있다.
2.5. 서구 양식
서구식 한복 (가슴 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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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식 한복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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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총사 중 왼쪽 인물의 양식, 일제강점기를 통해 서구열강의 문화가 유입되며 생겨난, 일종의 퓨전양식이며, 생각보다 그 역사가 비교적 짧은 의상이다. 이또한 중기양식의 연장선상이지만 서구의 영향을 받아 전통과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며 이후 생겨날 현대양식의 기초가 되어지는 양식이기도 하다.
평균적으로 저고리가 (가슴 밑)에서 고정되어진다. 다른 양식들은 크게 2가지 길이로 나뉘어 다양성을 보이는데 반해, 서구양식은 그 길이가 정확히 흉통보다 조금 짧은 길이를 유지한다. 서구양식으로 넘어오면서 전통적인 "허리묶음치마"가 아닌 서양에서 유입된 "어깨허리치마" 일명 "통치마"가 쓰여지며 노출장식이 활약할 공간이 사라져버렸고, 동시에 신체적인 실루엣 또한 축소되었다.[9] 이것 말고도 고름대신 단추를 쓴다든지, 서양식 허리띠를 맨다든지 하는 등 기존의 전통요소들이 서구식으로 대체되거나 사라지는 과정을 겪게된다.
이후 서양문물이 전통문화를 대체하기 시작하고, 여학교들을 중심으로 통치마입기 운동이 펼쳐지면서, 이러한 양식은 한반도 전역으로 널리 퍼지게 된다. 그덕인지 일제말기~6.25전후의 사진들을 보면, 그전까지 입어오던 다른 양식들은 죄다 엿바꿔먹었는지 온통 서구식 통치마 만이 판치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장점으로는 의복의 단순화가 이루어졌다는 점,[10] 짧은 저고리의 노출의 문제가 해소되었다는 점이다. 저고리의 길이가 길어진것도 있지만, 치마가 어깨에서 시작에 신체를 통으로 감싸버리니 저고리가 짧아 위로 올라간다고 한들 어차피 그부분은 속살이 아닌 치마가 자리해주기 때문이다. 단점으로는 특유의 실루엣과 미적인 부분을 희생시키고 말았다는 것이다. 저고리는 흉통과 가슴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 놓여졌고, 통치마를 쓰니 노출장식이 소멸하고 신체적인 매력이 전기양식보다 떨어지는 결과가 나왔다. 다행히도 입는 사람이 이를 알다보니 짧은 저고리 중에서도 그나마 긴 것을 입거나 허리띠를 따로 묶어서 장식과 실루엣을 가지고자 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변화를 주고자 했다.
그러나 일제의 문화통치, 6.25전쟁 등 여러 혼란기를 거치며 전통문화의 소실 및 퇴보가 일어났고, 사실상 주류문화가 서양식으로 바뀌며 한복은 의복의 개념에서 멀어져 허례허식화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복문화에서 기존의 서구양식과 동일하지만(짧은 저고리+어깨허리치마) 전혀 다른 양식의 복장이 등장하게 된다.
2.6. 남성용 한복
남성용 한복 (허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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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용 한복 (손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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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용 한복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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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적으로 저고리(허리~손목), 바지(정강이~발목) 정도이며, 초기 여성한복과 같이 원시적인 ▲모양을 띈다. 저고리의 경우 평균적인 길이가 있으나, 흉통만큼 짧은것도 있고, 손끝까지 긴것도 있는 등 다양각색이다. 여성복과는 단순히 치마와 바지의 차이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구별, 공통 되는 특징들이 여럿 존재한다.
대표적인 차이점으론 남성용 한복은 여성용 한복과는 달리 유일하게 반팔 양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름사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정체는 지금의 러닝셔츠와 같은 역할을 하는 속저고리이다. 그래서인지 제대로 입은것 보단 반쯤 풀어해친 모습의 사진들이 많으며, 이를 빌미로 한복을 까는 주장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공통점이라 하면, 그 개념은 다르지만 저고리 밑으로 의류 및 장식을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위에서 콩타작을 하는 남자들을 잘 보면 저고리 밑으로 제3의 영역이 나와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용 한복에서 저고리를 줄인만큼의 빈부분으로 속장식을 들어내보이듯, 남성용 한복에도 비슷한 개념이 있다. 다만 여성용처럼 일부러 속을 보이는 개념이 아닌, "남은 부분을 재활용"하는 개념에 가깝다. 보통 "속저고리(속옷)" or "바지허리"가 쓰이는데, "속저고리"의 경우 긴 속저고리가 짧은 겉저고리 밑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바지허리"의 경우 바지허리 밑에 따로 허리띠를 묶고, 그 위를 밑으로 접어내림으로서 저고리 밑으로 노출시키는 것이다.[11]
여담으로 머리수건의 경우, 여러 인터넷, 미디어매체를 통해 보면 단순히 띠를 두르는 것으로 한정되어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허나 이러한 묘사법은 잘못된 것으로, 조선의 남성들은 머리띠에서 그치지 않고 다양한 형태들로 천들을 꾸미면서 둘렀다.
전형적인 남성 머리수건 | ||
다양한 형태의 남성 머리수건 |
3. 현대한복 양식
3.1. 여성용 한복
한반도가 서구화되어가면서 기존의 전통적인 요소들 또한 이러한 흐름을 피할 수 없었다. 한복은 이전의 서구양식을 중점으로 유지되어가기 시작했고 한복의 발전과 디자인 또한 구한말의 양식을 가지고 이런저런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가 바로 현대한복, 그나마 실생활적 요소가 있던 기존의 서구양식과는 달리 철저히 예복의 성격을 취하게 되면서 결혼식이나 설날, 추석과 같은 특정 시기에만 입어지는 옷으로 변화하였다.
평균적인 의복길이가 매우 극단적으로 치우쳐 있다.. 저고리는 후기양식 또는 서구양식의 짧은 길이를, 치마는 서구식 어깨허리치마 이지만 발끝까지 덮어버리는 엄청난 길이를 자랑한다. 물론 구한말의 사진 속에서 저러한 양상들이 확인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확인되는바 대부분 양반규수와 같은 높은 사람들이거나 기생들이었지 일반 평민들 사이서는 확인되지 않는 양식이었다. 허나 그것이 현대로 들어서며 일반화된 것이다. 더욱이 기존의 흰색 중심에서 벗어나 다채롭게 염색을 하며, 다양한 무늬들과 장식들을 넣어 화려하게 꾸민다. 이러한 요소들 때문에 일본이나 중국과는 달리 실생활에 이용되지 못하고 문화적으로 고립되어지는 현상이 발생되어지는 것이다. 의복으로서의 가치대신 오로지 화려함과 보여주기에만 치중되었기 때문이다.
서구양식의 연장선에 있다보니 저고리가 후기양식만큼 짧아도 치마가 다 덮어줘서 신체가 노출될 일은 없다.
20세기 까지만 하더라도 남북한 모두 이러한 양상을 즐겨입었으며 2020년 기준, 남한은 그 수가 줄었지만, 북한과 조선족들에겐 여전히 널리 쓰이고 있는 양식이다. 허나 그 수가 줄었다 뿐 지금도 여러 미디어를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현대식으로 디자인되는 옷들의 대다수가 이러한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잘 봐줘야 조선말기의 한복을 디자인할 뿐 다른 전통양식들은 없다시피 취급되니,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다른 양식들에도 디자이너들이 손을 뻗기 시작했다지만 미디어에서 그리는 한복은 아직도 이쪽 양식이 대표적이다.
3.2. 남성용 한복
남성용 한복에게도 서구열강의 영향으로 인해 새로운 양식이 생겨나기도 했었다. 그것이 뭔가 결론부터 말해보자면 바로 "단추"와 "주머니"다.서양문물의 영향으로 단추가 생겨나 앞에서 옷을 여몄으며, 기존의 "옷고름, 복주머니"가 아닌 "단추, 호주머니"를 사용했다. 거기서 한번 더 변형해서 2번째 사진과 같이, 단추대신 여러개의 짧은 고름이 달린 마고자 양식의 한복이 나오기도 했다. http://www.okpedia.kr/Contents/ContentsView?localCode=krcn&contentsId=GC05300955
여성의 통치마 양식과는 달리, 남성의 단추저고리 양식은 크게 빛을 바라진 못했었다. 그 이유는 일제중~후기에 접어들며 지금의 양복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구조(단추, 호주머니), 멋짐, 새로움 등의 이유들로 너도나도 양복을 챙겨입었고, 그대로 한복의 자리를 대체하는 바람에 얼마안가 사라지고 말았다. 허나 6.25 이후의 사진에서도 소수 확인되는 걸 보아 아예 소멸했던 건 아닌 듯.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남성용 한복에도 결국 문제가 발생하게 되니, 위에서도 언급했던 한복문화의 쇠퇴와 허례허식화가 찾아오고야 만 것이다.
전쟁이후 경제적으로 부족해지다보니 천을 아낀답시고 전체적인 품이 많이 죽어버렸다. 당장 바지만 봐도 조선때의 푸짐함이 사라지고 초라라고 후줄근한 행색을 보여준다. 기존의 저고리에서 보이던 ▲의 실루엣이 없어졌으며, 현대한복에서 흔하디 흔한 염색조차 없이 바지저고리 모두 흰색을 유지하는건 덤, 이러한 현상이 계속 유지되는 원인들 중 하나는 한복 디자이너들이 남성과 여성의 한복을 다루는 방식에서 서로 같지 못하다는 것이다. 여성용 한복의 경우 치마저고리의 근본적인 형태와 장식에 손을대는 반면, 남성용 한복의 경우 배자, 쾌자와 같은 겉옷 꾸미기에만 집중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디자인 방식은 한복 디자인의 고착화를 불러일으켰다.
실제로도 남성용 한복은 디자인, 미디어, 인식면에서 모두 여성용 한복보다 뒤쳐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양성에서도 꽤나 떨어지는데, 여성한복이 여러 양식과 가능성을 건드릴 때, 남성한복은 (붕어배레+속저고리+배자or쾌자)에서 바뀌질 않으니, 서로의 발전수준은 거의 한세기 정도 차이가 난다. 사람들 사이서도 남성한복의 수준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3.3. 생활한복(남한)
과거 급격하게 진행된 서구화, 근대화로 인해 우리 사회는 한복을 포함한 전통문화를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생각하며 보존은 커녕 청산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한복문화가 제 모습을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 시기에 새롭게 만들어진 한복의 정체성은 실제 과거의 한복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고 현대인들에게 다양한 오해들을 양산해내기도 했다.[12]그러나 1980년대 들어서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국제적인 문화교류도 증가되면서 자국 문화나 한국적 정체성에 대한 관심도 급증되었다. 1986년과 1988년에는 아시아게임과 올림픽게임을 치르면서 한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우리옷 입기 운동’도 전개되었으며 특히 종로에 위치한 '질경이 우리옷'이라는 업체가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다. 원래는 현대한복, 모던한복, 실용한복, 일상한복, 생활한복 등의 명칭이 90년대 중반까지 병용되다가 1996년 12월 '한복입기'를 추진한 당시 문화관광부에 의해 '생활한복'으로 공식 명칭이 지정되었다.
오늘날의 생활한복 |
허나 현실적으로 따졌을때 말이 현대 "한복"이지 사진상으로 확인했을때 한복이라기보단 "잠옷"에 더 가까운 형태로 발전하였다. 그 어떤 전통적인 요소하나 없이 그저 옷 한벌 만들어놓고 한복이라 하는 꼴이다.
결국 아래와 같은 과정을 거치며, 현대한복은 업체의 난립과 인기의 절감을 통해 한복시장을 위축시키는 요소가 되었다.
1996년 문화관광부에서 의욕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매달 첫째 토요일을 '한복 입는 날'로 정하고, 전 직원의 한복 입기를 추진했다. 또한 전통한복 업체 8곳, 생활한복 업체 7곳(당시 전부였음)을 초청하여 직원들을 대상으로 특별 전시판매를 열어주었다. 국장부터 한복을 입고 관심을 갖자 평직원들이 뒤따랐고, 이때부터 폭발적인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로 소비자들의 지갑사정이 여의치 않음은 물론인데다 '생활한복이 돈이 된다더라'하는 풍문이 돌면서 평화시장 쪽의 모방전문 서양옷 업체들이 한복업계로 대거 뛰어들어 레드오션이 되어버렸다. 문화관광부 쪽의 말을 따르면 한때 생활한복 업체가 500곳이 넘었다고 했다. 수요는 급감했지만 공급은 오히려 70여배가 늘어난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대다수의 업체들은 수십년간 한복을 입어보지 않았던 소비자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한복의 중요한 특징을 없애고 왜곡하기 시작했다. 서양옷처럼 체형에 딱 맞게 만들어 몸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섶, 대님 등 중요한 부분을 마구 없애버렸다. 그런가 하면 100% 화학섬유(폴리에스테르)를 썼고, 청바지를 바느질하던 재봉사들의, 한복에 대한 기초지식도 없고 정성도 결여된 바느질이 겹치면서 소비자들의 생활한복에 대한 매력이 갑자기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의 생활한복의 모습으로 고착화되어버려서 인식 역시 나쁜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편하다던 한복이 '불량률의 증가'로, 전혀 편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면서 어렵게 샀던 생활한복에 대한 재구매 매력은 급격히 감소되기 시작하고, 생활한복에 대한 인상이 아주 나빠져 버린 것은 치명타였다.
결국 5개 정도의 유명업체는 부도로 쓰려졌고, 생산업체가 몇 십 개로 위축되면서 시장은 꽁꽁 얼어붙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돈벌기 위해 편법을 썼던 것들이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13]
3.4. 조선옷(북한·조선족)
[[인류무형문화유산|{{{#1da3b2 인류무형문화유산}}}]] | |
<colbgcolor=#1DA3B2><colcolor=#fff> 조선옷차림풍습 Custom of Korean costume: traditional knowledge, skills and social practices i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 |
국가·위치 | <colbgcolor=#fff,#1f2023> [[북한| ]][[틀:국기| ]][[틀:국기| ]] |
지정번호 | 2096 |
등재연도 | 20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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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한복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전통에 대한 보전"에 있다. 물론 조선시대의 한복과는 응당 다른 부분도 있지만, 한국이 한복문화를 발전시킨다며 서구적인 의복요소들을 이용해 전격적인 개량을 거친 것과는 달리, 북한의 한복문화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 한복의 전통적인 요소들을 간직한 채로 유지하고 있다. 외관적으로도 주머니를 드러내지 않고, 단추가 아닌 옷고름을 통해 섶을 덮는 등 조선 후기 양식을 그대로 간직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나 여성한복보다 남성한복에서 이런 양상을 띠고있다. 이후 자기네 명칭인 조선옷 명의로 2024년 '조선옷차림풍습(Custom of Korean costume: traditional knowledge, skills and social practices i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14])'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확정했다.# 이후 현지기준 2024년 12월 3일 등재됐다.@
연변지역의 조선족들 또한 한복을 '조선옷'이라 부르며 북한과 유사하게 전통요소의 보존이 잘 되어있다. 중국의 다른 소수민족들과 비교해 문화적 탄압이 심하지 않아서 외형보존에 수월했고, 조선족들의 방송이나 행사에서도 자유로이 입고 돌아다닐 수 있다. 이는 조선족자치주가 과거 만주 일대의 한국인들의 항일운동과 중국 '49년 혁명'에 대한 공로를 높이 사고 있고, 실제로 제2인터내셔널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사실이 있어 상당한 배려를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족들이 한복에 대해서 개량을 거치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10년대를 기점으로 어깨 부분부터 소매까지 직선 형태로 내려오는 형태를 반월 형태로 개량하는 형태가 유행했다. 연변라지오TV넷, 연변뉴스에서 이를 두고 "저고리소매를 양복화했다"며 지적했다.
한복 차림으로 오성홍기(중국 국기)를 흔드는 조선족들
한복을 차려입은 연변라지오TV방송국의 남녀 아나운서들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한복 차림으로 출연한 조선족 무용단
한복을 입고 춤추는 북한 주민들
2005년에 남한을 방문한 리설주 |
그러나 조선족이나 북한의 한복 또한 일제강점기 시절 서구 양식과 결합한 형태를 기반으로 하는 한복을 전통으로 보존하고 있다 보니 남한의 행사용 한복과 비슷한 부분도 상당수 존재한다. 오히려 21세기 들어서 한국에서는 전통 한복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상승하면서 조선 당시의 한복들을 현대에 표현하려고 노력하지만, 북한에서는 아직도 일제강점기의 서구 양식과 결합한 한복이 주류인 셈.
[1] 위는 저고리, 밑은 바지.[2] 위는 옷, 밑은 치마[3] 벽화를 보면 그때부터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의 치마 안을 보면 똑같이 바지를 입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동시에 스키타이의 영향인지 그들과 같은 점박이 무늬를 새겨만들어 즐겨입었다.[4] 어찌보면 이는 매우 당연한 이야기이다. 역사가 어느정도 있는 중국과 일본도 대표적인 이미지의 옷들을 제외하고도 세세히 따지면 그 수가 다양하다. 그저 자료가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이지 없는것이 아니다.[5] 재래시장 또는 마을처럼 여러인물들이 모이는 곳의 여성들을 보면 대부분이 이러한 양식을 입었으며, 후기양식보다 더 쉽게 찾아볼수 있다. 서구양식이 판치던 일제말기~6.25시절의 사진에서도 이 양식이 확인될 정도였으니, 다른 양식들에 비해 꽤나 인기있던 옷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6] [7] 토플리스 문서에 한 페이지를 할애할 정도로 왜곡 논란이 심하다. 심지어 연출 논란도 나왔다.[8] 가슴 등 여성성을 상징하는 부위의 노출은 (서양, 일본도 근대 이전엔 이런 모습이 있기도 했던건 차치하더라도)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주민들에게서 보던 것들이다 보니 부정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는 하술할 서구 양식의 등장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오히려 탈아입구를 추종하는 혐한들이 서양인과 대화해보지 못한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증거로, 정작 서양에서는 68 혁명 때부터 오히려 여성의 정조를 남자보다 특별히 강하게 강요하는 건 구시대적 고리타분한 억압이라고 비판해왔다. 오늘날 당장 부르카가 왜 유럽에서 미개한 여성억압의 상징으로 취급되는지 생각해보라. 거긴 여성의 부르카 착용 강요에 엄청 역정을 낸다.[15] 특히 유럽에서도 서구권에서는 남자의 가슴은 괜찮고 여자에게만 더 까다로운 심의규정으로 억압하는 건 차별이니 남자처럼 가릴지 말지 선택권이라도 달라고 까일 정도다.[9] 치마가 쭉 연결되어 가슴윗부분까지 덮어버리며 흉통보다 약간 짧은만큼 하얀 어깨허리부위가 드러난다. 저고리는 흰색의 어깨허리 만큼의 부위만을 가리다 보니 대부분의 서양식 저고리들은 흉통보다 약간 짧은 길이를 가지게 된다.[10] 치마의 경우 단순히 어깨에 걸치기만 하면 되고, 저고리는 기존의 고름 대신에 단추를 쓰기 때문에 편의성과 낮은 제조단가를 얻을 수 있었다.[11] 여성한복의 바지사진들을 보면 알겠지만 지금과는 다르게 꽤나 윗부분에서 바지허리가 위치한다. 이는 남성또한 동일하며, 이러한 구조에서 현재의 허리부분에 허리띠를 묶으면 그 위로 넗은 영역이 생겨나는데, 그렇게 남게된 윗부분들을 말거나 내려서 노출장식으로 삼는 것이다. 생긴건 비슷하지만 전혀다른 개념인것[12] 대표적으로 포졸복이나 장군복과 같은 드라마 속 의복문화 고증이라거나, 조선말기의 서구형 한복 복식이 전통한복의 전부처럼 인식되는 현상 등이 있다.[13]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2166[14] ※
[15] 물론 부르카도 그냥 여성의 정장이라고 취급하는 여성도 있어서, 무조건 외국 문물을 미개하다고 까는 것 또한 문화상대주의를 무시하고 중동 사람들을 무시하는 거라고 까이기도 하지만 부르카를 나쁘게 보는 사람들에 비해 아직 소수다. 어쨌듯 어떤 곳에서는 선택권도 없이 부르카 착용이 강제로 금지된 곳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수녀 들이 머리에 쓰는 건 경건하다고 하면서 부르카를 위시한 머리쓰개는 왜 이중잣대냐"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