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ff>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Československé legie Československé légie Czechoslovak Legion | ||||||
창설일 | 1914년 | |||||
해체일 | 1920년 | |||||
국가 | [[틀:깃발| | ]][[틀:깃발|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
소속 | 체코슬로바키아 국가평의회 프랑스군 러시아 제국군(백군) 이탈리아 왕국군 | |||||
규모 | 프랑스: 9,600명 이탈리아: 병사 13,653명 장교 489명 러시아: 약 50,000명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
[clearfix]
▲ 열차에 오른 러시아 체코 군단 병사들. 기차 상부에 맥심 기관총과 브라우닝 기관총을 설치하고 사주 경계 중이다. 오른쪽의 병사는 자신의 기관총에 문제가 있는지 해체하여 정비하고 있다.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및 러시아 내전 당시 체코인들과 슬로바키아인들이 결성한 독립군이자 외인부대이다. 체코슬로바키아군의 직접적인 전신이다.2. 분파
2.1.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외인부대에는 체코인들이 모여들었고, 곧 체코인들로만 구성된 부대가 외인부대 모로코 사단 산하에 1개 중대 규모로 창설되었다. 이 부대는 1년간 다양한 전투에 참여했지만 서부전선의 막대한 병력 소모율을 감당하지 못했고, 1915년에 해체되어 부대원들은 각기 다른 부대로 분산되었다. 이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 국가평의회는 러시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서부전선으로 이동시키고자 시도하지만,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전혀 뜻밖의 상황에 마주하게 된다. 이는 밑의 러시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단락에서 설명한다.어쨌든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인 부대의 재창설은 1917년에야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프랑스 육군 보병사단 휘하에 두 개 연대 규모로 창설되었다. 이듬해 6월에 프랑스 정부가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받아들여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을 공식적으로 지지하면서, 이들은 상위 프랑스 사단들로부터 분리되고 신설된 체코슬로바키아 여단으로 배속되었다. 이 날이 6월 30일인데, 현 체코군은 이 날을 창군일로 지정하여 매해 기념 행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규모는 군단의 세 개 지파 중 가장 작았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접하지 않았기에, 체코인 포로를 지속적으로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쟁이 끝나자 곧바로 신생 체코슬로바키아로 금의환향했다.
2.2. 러시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 러시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행적을 표시한 지도. 세계를 한 바퀴 돌았다.
1918년에 시베리아에서 촬영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모습. 기차 앞에서 깃발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 병사들, 당시 사령관 미하일 디테리흐스[1]와 그 참모들의 모습, 도열한 병사들과 군마들, 야포들의 모습이 보인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으로서 참전했다가 러시아군의 포로로 잡힌 체코인, 슬로바키아인들과 재러 체코인, 슬로바키아인들이 모인 부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들 중 가장 거대했으며, 총병력 5만의 군단급 규모였다. 또한 가장 유명한 군단이기도 한데, 원치 않게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며 러시아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온갖 에피소드들을 만들어냈던 그들의 여정은 지금까지도 자주 회자된다.
이들은 러시아 제국군 소속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맞서 싸웠지만,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하고 신생 소비에트 정부가 동맹군과 강화를 맺어 1차 대전에서 빠지면서 위치가 붕 뜨게 된다. 마침 상술한 대로 프랑스 체코 군단이 거의 해체 수준까지 소모되자 연합국과 체코슬로바키아 국가평의회는 러시아 체코 군단을 서부전선으로 불러오고자 했다. 체코 군단은 러시아의 내전에 중립을 선언했고, 소비에트 정부와 협약을 맺어 블라디미르 레닌이 주선한 경로를 따라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다. 당시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인해 독일과 오스트리아군이 서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향해 진격하고 있어, 서부 유럽 러시아 지역의 항구를 통해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은 동맹국 최후의 불꽃이라 할 수 있는 파우스트슐라그 작전(Operation Faustschlag)을 단행하며 러시아 서부 전역을 점령할 기세로 물밀듯이 밀려들고 있었다.
▲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직후의 동유럽. 발트 3국, 폴란드, 우크라이나, 핀란드가 전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점령하에 놓였다.
발트해의 경우 주요 항구인 리가나 탈린 등은 독일의 수중에 떨어졌고, 내전 중인 핀란드에도 독일군이 상륙해 핀란드 백군을 지원하며 북러시아 지역을 위협했다. 발트해 항구 중 소비에트 러시아에 남은 건 상트페테르부르크 하나였지만 이미 발트 해 전체가 막스 호프만 소장이 이끄는 독일군의 영향권에 들어온 이상 체코군이 여기로 나올 수는 없었다. 나온다 한들, 발트해는 사실상 강대한 독일 제국 해군의 안마당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의미가 없었다.
흑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흑해로 나와도 프랑스로 가려면 적국인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해야만 했다. 사실, 흑해로 나오는 건 둘째치고 해안가에 접근하기조차 힘들었다. 러시아 남부의 가장 큰 항구인 오데사에는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원수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뵘에르몰리 집단군의 사령부가 자리를 잡았고, 돈강의 끝자락인 로스토프까지 동맹군이 진출했다. 그리고 독일군과 우크라이나 인민군이 연합해 크림 반도로 돌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백해와 면한 북러시아의 지역의 아르한겔스크와 무르만스크는 썩 좋은 항구도 아니었다. 아르한겔스크는 겨울만 되면 수개월 가량을 얼어붙는 항구였고, 무르만스크는 부동항이기는 했으나 건설된 지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지역들은 상술한 대로 내전 중인 핀란드에 상륙한 독일군의 위협을 받았고, 적군의 세력권이 아니라 영국의 지원을 받는[2] 러시아 백군의 세력권에 놓여 있어 볼셰비키와 백군 간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결국 가까운 항구들을 전부 쓸 수 없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시베리아 철도로 태평양 연안의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3월에 철도 요충지인 우크라이나 바흐마치[3]에서 요하네스 폰 에벤 보병대장의 독일 제국군과 프란츠 로어 폰 덴타 원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게 공격을 받았다. 그러자 붙잡히면 오스트리아의 반역자로 취급받아 총살당할까 우려했던 군단은 격렬히 저항했다. 실제로 오스트리아군은 체코 군단 병사가 생포되면 그대로 총살해버리거나 약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하고 교수대에 단체로 매달아버렸기 때문에, 이들의 우려는 근거가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죽기살기로 덤벼든 군단은 자신들이 입은 피해의 두 배에 달하는 피해를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에게 안겨주었다. 별다른 충돌 없이 진격하다 큰 타격을 입은 동맹군은 이들과 충돌하는 것이 무익함을 알고 그들이 첼랴빈스크로 떠날 수 있게 보내주었다.
2.2.1.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반란 사건
문제는 볼셰비키 적군이 이들을 상당히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우선 체코 군단은 당시 러시아 내에서 가장 잘 단련되고 잘 조직된 무장 세력, 그것도 군단급 세력이었기에 이들이 러시아 내에 방치되다가, 또는 이동하다가 백군에 가담한다면 내전의 판세가 뒤집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외세, 특히 이들이 가담하고자 하는 협상국이 군단의 보호와 볼셰비키의 친독적 노선을 명목으로 내전에 개입해 혁명을 무너뜨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팽배했다.한편, 군단도 군단 나름대로 독일과 조약을 맺어 혼자 세계대전에서 이탈한 배신자 볼셰비키를 불신했다. 우선적으로는 독일이 볼셰비키에게 압력을 넣는다는 의혹이 있었다. 원래 체코슬로바키아 국가평의회는 볼셰비키와 협상해 무장을 해제한다는 불만족스런 조건으로 안전하고 수월한 통행을 보장받았는데, 여기에 체코 군단을 무장 해제시키고 서부로 넘어가지 못하게 최대한으로 억류하려는 독일의 의도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는 군단 내의 공산주의자들이 볼셰비키와 내통하여 군단을 무너뜨리려 시도할 우려가 있었다. 거기다 레닌에게서 일부 무장해제를 조건으로 안전을 보장받았지만 통신문제인지 적군의 체제가 일원화되지 않았던 탓인지 역마다 지역 공산당과 다시 개별교섭을 하면서 볼셰비키측이 무장 양도를 요구하는 양도 늘어났다.
이렇게 양측의 불신으로 갈등의 골이 깊어지던 중, 결국 사건이 발생한다. 1918년 4월, 군단은 첼랴빈스크를 지나던 도중 본국으로 송환되던 헝가리인 포로들과 기차역 한복판에서 만나게 된다. 독일의 포로 송환 요청에 따라 본국으로 이송되던 오스트리아군 포로들이었다. 독일인들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양대 지배 민족이었던 헝가리인 포로들, 그리고 그들의 피지배 민족인 체코슬로바키아인들로 구성되어 그들을 무너뜨리고자 전쟁에 참전한 군단의 사이가 좋을 리는 당연히 없었다. 그 중에서도 슬로바키아는 헝가리 성 이슈트반 왕관령의 직접적인 관할 지역으로서 많은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슬로바키아인들은 헝가리인들과 사이가 특히 더 안 좋았다.
당연히 분위기는 곧바로 험악해졌고, 양측의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했다. 사태를 중재하기 위해 볼셰비키 적군이 중재를 위해 개입했지만, 이들은 독일과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맺었기에 체코 군단만을 체포해 조사하고 일부를 총살해버렸다. 이런 볼셰비키의 모습에 폭발해버린 체코 군단은 봉기를 일으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장악한다. 5만에 달하는 군단 전체가 철도를 따라 이미 죽 늘어서 있었기에 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백군의 편에 서서 러시아 내전(시베리아 내전)에 가담해 독일과 강화한 볼셰비키 적군과 싸우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볼셰비키의 우려대로, 이로 인해 협상국도 이들을 지원할 것을 천명하며 러시아 내전에 개입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7만의 일본군을 중심으로 5천 명 가량의 미군과 800명 가량의 영국군, 1400명 가량의 이탈리아군, 그리고 100명 가량의 프랑스 식민지군[4]이 들어왔다.
▲ 체코 군단의 핵심 전력 중 하나였던 장갑열차 오리크(Orlik). 원래 러시아 제국군의 장갑열차 자무레츠(Заамурец)였다.[5]
체코 민족주의로 똘똘 뭉친 이들 군단은 장갑열차와 연합군의 보호, 미국 군수산업체에서 위탁 생산한 러시아 무기들을 바탕으로 동유럽의 카잔에서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늘어선 철도와 보급선을 지키면서 동러시아, 시베리아 지역 백군 세력을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한 군사 집단이 되었다. 특히 그들의 장갑열차는 자족 기능을 탑재하여, 열차 내부에서 신문도 발행할 수 있었다. 이 신문이 바로 하술할 '체코슬로바크 덴니크' 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중장갑열차가 바로 '자무레츠'인데, 2개의 포탑에 달린 76mm 사단포와 두꺼운 장갑을 가지고 최후미에서 군단의 철수 행렬을 엄호했다. 이 열차는 원래 러시아 제국군이 갈리치아 전선에서 사용했던 것인데, 군단이 노획하여 이름을 오리크라 바꾸고 잘 써먹었다.
한때 적군이 수월하게 전 러시아를 장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체코 군단이 철도를 점거하면서 볼셰비키는 시베리아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그 결과 시베리아와 러시아 극동의 대다수 지역이 백군 소속으로 넘어갔다. 시베리아 백군은 서부의 유데니치군, 남부 안톤 데니킨의 남러시아군과 함께 삼면에서 적군을 포위했다.
2.2.2. 가이다 봉기와 철수
하지만 1918년 말 1차 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귀국을 종용하자 이들은 1919년부터 하나 둘씩 본국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이때쯤 되면 서부 지역의 백군이 일소되고 시베리아에서도 점차 백군이 수세에 몰리는 상황이었는데,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이끄는 시베리아 백군의 주축인 전러시아 임시정부의 가혹한 정책은 현지인들뿐만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게도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1차 대전도 끝났고 조국도 독립했겠다, 이미 남의 나라 내전에서 싸울 이유를 잃고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라돌라 가이다 장군 이하 군단원들은 콜차크의 백군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6]지만 백군과 미군, 일본군에게 진압당했다. 그러자 군단원들은 백군이야 어떻게 되든 적군과 협정을 맺고 내전에 중립을 선언한 후, 자신들이 장악한 노선을 따라 퇴각하는 콜차크를 이르쿠츠크에서 적군에게 넘겨버린[7] 대가로 안전한 퇴각을 보장받았다.[8] 이들이 퇴각하자 연합군도 일본군을 제외하고는 전부 물러갔고, 백군 또한 급속히 무너져내렸다. 후에 본국으로 돌아온 이들 군단의 주요 인사들은 신생 체코슬로바키아의 요직을 맡았지만, 2차 대전 후 체코가 공산화되자 볼셰비키 혁명에 대항했다는 이유로 언급이 금기시되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90년대 이후에나 다시 시작되었다.
한편 세르게이 보이체호프스키 등 일부 친 백군파는 귀국하지 않고 계속 시베리아에 남아 백군과 함께 싸우는 쪽을 택했다.
2.3.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이탈리아 전선에서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결성되어 이탈리아 왕국군 소속으로 싸웠다. 다만 그 결성은 1918년 1월로 상당히 늦었다. 원래 이탈리아 내에 거주중인 체코 및 슬로바키아인들이 그리 많지 않았던데다, 이탈리아의 전쟁 참여도 늦었기에 초중반에는 체코인 포로들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이탈리아는 달마티아 지역을 노리고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여기는 체코, 슬로바키아인들과 같은 슬라브 계통인 크로아티아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이탈리아 정치계는 슬라브계인 체코인들을 지원하는 것을 꺼렸다.다만 이 상황 속에서도 체코, 슬로바키아인들의 이탈리아 지원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1916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프란티셰크 흘라바체크라는 체코인 장교가 탈영해서 이탈리아 측에 귀순, 고리치아 지역의 상세한 정보를 이탈리아에 불어버림으로써 11차 이손초 전투에서 이탈리아가 승리하는 데 기여한 뒤로는 이탈리아 정계의 체코군단 논의가 더 활발해졌다.
그리고 12차 이손초 전투(카포레토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이 괴멸적인 패전을 겪은 뒤, 급해진 이탈리아는 체코인들과 슬로바키아인, 그리고 슬로베니아인들을 한데 묶어 5개 연대를 새로 창설했다. 이후 이들은 많은 전투에 참여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숨통을 끝장내버린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도 예비대로 참여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로는 하나 둘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해산하지는 않았다. 당시 신생 체코슬로바키아와 주변국 간의 갈등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부실한 군대를 가지고 있던 체코 정부는 이탈리아군 사령관들의 지휘를 받는 이들 이탈리아 체코 군단을 주변국과의 전쟁에 투입했다. 이들은 폴란드, 헝가리와의 국경 분쟁과 전쟁에 참여해 브라티슬라바와 테신 지방[9]을 지켜냈다. 이후 프랑스 군사고문단이 체코군 창설을 지원하기 위해 들어오자,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들 연대들의 이탈리아인 사령관들을 프랑스인들로 교체하고 체코군 편제에 편입시켰다.
3. 한국 독립군과의 관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주요 사령관 세 명의 모습. 영상 24초 중간에 프랑스군 케피를 쓴 사람이 밀란 라스티슬라우 슈테파니크, 그 왼쪽에 애꾸눈 장군이 얀 시로비, 그 왼쪽의 키 큰 사람이 라돌라 가이다. |
러시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한국독립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접촉한 적이 있으며, 독립군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게서 신형 무기를 구입해 청산리 전투를 치른 것은 유명한 일화다. 군단은 북로군정서에 모신나강 소총을 팔았으며, 중화기로는 맥심 기관총과 호치키스 기관총 등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장군들과 상해 임시정부의 대표들은 많은 접촉과 소통을 유지했으며, 임시정부의 이승만 대통령이 은색 꽃병에 한국 독립을 위해 기여한 것에 대한 감사의 글을 적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총사령관 라돌라 가이다 장군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 참고로 출처는 한국-체코 관계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주한체코대사 야로슬라브 올샤 2세. 이외에도 체코군단 후손의 집에 가면 은비녀나 금비녀 한국식 가락지 같은 당시 쓰였을 법한 유물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한국 독립군과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접촉했던 시점 자체가 타이밍이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당시 체코군단의 상황을 보자면 적군과 휴전협약을 맺고 사실상 콜차크를 넘겨버린 일로 백군에게는 배신자 취급을 받고 있었고, 원래 동맹이었을 일본 제국은 적군으로부터 완충지대를 보호하기 위해 바이칼-시베리아 군벌들을 지원하고 역으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철수를 지연시키고 있었기에 불편한 관계에 가까웠던 상황이었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의 도달한 체코군단은 배편을 마련하기 위해 가진 무기를 처분해 자금을 마련해야할 상황이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 중립-우호적인 여러 군벌들에게 비공식적으로 무기를 밀거래했으며, 그 거래 대상 중에 한국 독립군도 포함이 되어 있었던 것.#
3.1. 오해
다만 그렇다고 해서 세간의 인식처럼 체코 군단이나 가이다 장군이 한국의 독립 정신에 감화되어 적극적으로 도왔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일본군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군의 지원을 받았기에 자신들의 스폰서인 일본에 저항하는 한국 독립군을 공식적으로 지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군단 사령부 내부 문건에는 한국인들과의 무기 거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본 제국 또한 여러 정보원들을 통해 체코 군단이 한국 독립군에게 무기를 넘긴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이를 불쾌하게 생각하며 이 행위가 지속될 경우 개입하겠다고 군단 측에 은밀히 압박을 넣었다. 1920년 4월 7일 군단 일원인 밀로스 헤스(Milos Hess) 중령이 얀 시로비 장군에게 보낸 전보와 동년 3월 7일 체코슬로바크 데니크[10] 기사에 따르면 군단 측은 이 점을 매우 우려하고 있었다.따라서 종합해보면 북로군정서와의 무기 밀매는 군단 사령부의 공식적 승인 없는 일부 군인들의 일탈적인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유 또한 똑같은 피지배 민족으로써 동질감을 느껴 지원해준 것이라기보다는 급전을 마련하기 위함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군단원들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러시아인 가리지 않고 무기를 팔았기 때문이다. 당장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장쭤린의 봉천군벌에게는 프랑스로부터 지원받은 르노 FT 전차 36대 가량을 팔아치웠다.
그리고 그들이 보유하고 있다가 팔았다는 무기 또한 흔히 생각하는 "우수한 체코제 무기"가 아니었다. 모국인 체코가 보헤미아 왕국과 모라비아 변경백국이란 이름으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본국인 체코 무기로 무장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체코제 무기는 군단의 적인 오스트리아인들이 썼고, 군단은 러시아 제국군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후에는 백군, 연합군의 지원을 받고 싸웠기에 러시아제, 미제, 영국제, 일제 등의 타국 무기로 무장했었다. 특히 미국에서 위탁 생산한 모신나강 소총이 주력이었다.[11] 북로군정서에 넘겨준 것도 당연히 이것들.
시베리아의 용사로 체크국 건국 원훈(元勳)으로 이름을 세계에 떨친 가이다 장군이 해삼위 혁명사건으로 실각하여 횡포한 콜차크 제독에게 원한과 증오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다시 탄생한 조국의 품으로 가던 길에 상하이에 들러 수십 일간 아스터 여관에 체재하다가 일전 출발 귀국의 길에 올랐다. 기자는 작년 12월 중순에 가이다 장군이 상해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곧 서신을 보내 면회를 청하였더니 2일 후에 호의로서 승낙하는 회신이 왔다.
약속한 날에 장군을 여관으로 방문한 즉 용모 준수한 한 청년 장군이 미소로서 기자의 손을 잡으니 실로 일면여구(一面如舊)라. 들은 즉 장군은 지금 28세의 청년이라. 육군 소위로 출정하였다가 1918년에 시베리아군의 사령관이 되고 이로 인하여 다시 탄생한 조국 체크민국의 육군총장이 되었다. 추운 날씨에 대한 의례적인 인사가 오간 뒤에 장군은 극히 성의 있는 태도로 아래와 같은 담화를 우리나라에 보냈다.
‘아아 나의 조국도 수백 년 노예의 치욕을 당하다가 지금 부활하였소. 작년 3월에 귀국이 독립을 선언하고 역사에 유례를 볼 수 없는 용기와 애국심을 발휘한 것을 볼 때 세계가 다 놀라고 칭찬하였지만 그중에 가장 기쁜 감동을 받은 것은 아마 우리(체크) 국민이었을 것이요. 그때로부터 나는 귀국 독립운동의 진행을 동정과 기도로써 주목하였더니 오늘 여기서 한국인을 만나 어찌 반가운지 모르겠소.’
‘나는 귀국의 전도(前途)를 혁혁한 희망으로 보오. 지금은 비록 일본이 압박 할지나 세계의 대세는 이미 일본의 군국주의를 용납할 시기가 지났소. 그러니까 귀국민이 통일과 인내와 용전(勇戰)으로 나아가면 독립을 완성할 날이 멀지 않을 것이오.’
‘나는 가장 친하여야 할 우국의 일인으로 귀국민에게 고하려 하오. 그것은 안으로 굳게 단속하고 밖으로 힘 있게 선전(宣傳)하여 용장(勇壯)한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라 함이오.’
장군은 그 청랑한 음성으로 한 시간 이상이나 담화를 계속하였는데 그 중에는 발표하기 어려운 구절도 있지만 최후로
‘나는 구라파에 가서 필로서 설로서 귀국의 독립운동을 선전하겠소. 같이 부활하는 국민의 청의(請誼)로서 인도와 자유를 위하여 인류의 의무로. 원컨대 나를 귀국의 동지로 알아주시오. 내 호의를 귀 동지들에게 전하여 주시오’ 하고 다시 만날 때는 피차에 영광 있는 독립국민으로 만나기를 약속하고 길게 악수하였다.
익일에 안창호와 장군과의 긴 시간의 담화가 있었고, 여운형씨와도 양차 회견하여 간담이 있었다.
출발 시에 부두에서 여운형씨가 온 것을 보고 통역을 대동하고 배에서 내려와 ‘성탄절에 주신 선물은 영원히 기념하고 나의 국민들에게 자랑하겠소.’ 하며 다시금 우리의 끝까지 건국하기와 자기는 우리의 동지로 구주에서 힘쓸 것을 약속하였다.
- 독립신문 제37호(1920년 1월 13일자 기사)[12]
약속한 날에 장군을 여관으로 방문한 즉 용모 준수한 한 청년 장군이 미소로서 기자의 손을 잡으니 실로 일면여구(一面如舊)라. 들은 즉 장군은 지금 28세의 청년이라. 육군 소위로 출정하였다가 1918년에 시베리아군의 사령관이 되고 이로 인하여 다시 탄생한 조국 체크민국의 육군총장이 되었다. 추운 날씨에 대한 의례적인 인사가 오간 뒤에 장군은 극히 성의 있는 태도로 아래와 같은 담화를 우리나라에 보냈다.
‘아아 나의 조국도 수백 년 노예의 치욕을 당하다가 지금 부활하였소. 작년 3월에 귀국이 독립을 선언하고 역사에 유례를 볼 수 없는 용기와 애국심을 발휘한 것을 볼 때 세계가 다 놀라고 칭찬하였지만 그중에 가장 기쁜 감동을 받은 것은 아마 우리(체크) 국민이었을 것이요. 그때로부터 나는 귀국 독립운동의 진행을 동정과 기도로써 주목하였더니 오늘 여기서 한국인을 만나 어찌 반가운지 모르겠소.’
‘나는 귀국의 전도(前途)를 혁혁한 희망으로 보오. 지금은 비록 일본이 압박 할지나 세계의 대세는 이미 일본의 군국주의를 용납할 시기가 지났소. 그러니까 귀국민이 통일과 인내와 용전(勇戰)으로 나아가면 독립을 완성할 날이 멀지 않을 것이오.’
‘나는 가장 친하여야 할 우국의 일인으로 귀국민에게 고하려 하오. 그것은 안으로 굳게 단속하고 밖으로 힘 있게 선전(宣傳)하여 용장(勇壯)한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라 함이오.’
장군은 그 청랑한 음성으로 한 시간 이상이나 담화를 계속하였는데 그 중에는 발표하기 어려운 구절도 있지만 최후로
‘나는 구라파에 가서 필로서 설로서 귀국의 독립운동을 선전하겠소. 같이 부활하는 국민의 청의(請誼)로서 인도와 자유를 위하여 인류의 의무로. 원컨대 나를 귀국의 동지로 알아주시오. 내 호의를 귀 동지들에게 전하여 주시오’ 하고 다시 만날 때는 피차에 영광 있는 독립국민으로 만나기를 약속하고 길게 악수하였다.
익일에 안창호와 장군과의 긴 시간의 담화가 있었고, 여운형씨와도 양차 회견하여 간담이 있었다.
출발 시에 부두에서 여운형씨가 온 것을 보고 통역을 대동하고 배에서 내려와 ‘성탄절에 주신 선물은 영원히 기념하고 나의 국민들에게 자랑하겠소.’ 하며 다시금 우리의 끝까지 건국하기와 자기는 우리의 동지로 구주에서 힘쓸 것을 약속하였다.
- 독립신문 제37호(1920년 1월 13일자 기사)[12]
사령관 가이다 장군의 경우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은 임정 인사인 여운형과 개인적으로 만났고, 그가 돌아가는 길에 자기 부관 한츠를 동행시켜 보낸 적이 있다. 일본의 영향에 놓인 체코 군단의 사령관으로써 이는 분명 이례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내전이 끝난 이후 귀국길에 상하이에서 이광수[13]로 추정되는 독립신문 기자와 인터뷰하고[14] 여운형과 다시 만나 오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을 만큼 한국 독립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그가 완전히 진심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관심을 표한 증거라고 믿기는 힘들다. 그는 독립신문과의 인터뷰와는 달리, 본국으로 돌아가 한국을 위해 뭔가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1920년 펴낸 자서전 《나의 기억들》에서 극동 한인에 대한 이야기를 짤막하게 언급하고, 1927년 자신이 해외에 체류하며 얻은 기념물을 전시할 때 상해 임정에게 받은 은컵[15]을 소개한 정도가 다이다. 자서전에서 가이다는 한인들과 중국인들이 일본에게 영토를 뺏기고 폭압적인 지배를 받고 있어 반일 감정이 크다는 사실을 알리긴 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 한인들과 중국인들을 자신의 "열광적인 추종 세력"이라고 소개했다. 가이다는 그 이유로 이들이 자신의 체코 군단이 '어떻게 일본의 음모를 물리쳤는지'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을 뿐더러, 가이다 봉기 당시가 아닌 내전의 전체적인 기간 동안 체코 군단이 일본군에 상당한 도움을 얻고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려운 주장이다. 그리고 또 가이다가 전시회에서 임정에게 받은 은컵을 소개할 때, 그 설명란에는 가이다 자신이 주도해 상해 임정을 설립했다는 잘못된 설명이 붙어 있었다.[16]
물론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자체는 공식적으로는 한국과 관련이 없었으나, 당시의 독립군의 사정상 이 정도로의 지지라도 고마운 것은 사실이며, 사령관 가이다를 포함한 군단원들 중 일부가 개인적으로 한국을 응원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자체가 신생 독립국이었기에 한국의 독립도 공감이 되었을 수 있고, 그들의 무기가 한국 독립군에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4. 장비
유라시아 전역을 아울렀던 그 특성상, 사용 무기는 지역별로 매우 다양했다.-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 만리허 소총 - 주로 노획품.
-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5. 기타
5.1. 매체에서
[1] 발트 독일인 출신 러시아 장군으로, 조상이 체코에서 에스토니아로 이주한 사람이다. 1차대전 당시 참모로서 이름을 날렸고, 이후 내전이 벌어지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사령관을 거쳐 콜차크 정부에 가담했다. 콜차크가 무너진 이후에는 중국과 조선을 거쳐 도피했다가 백계 러시아인들이 모여 있는 하얼빈으로 돌아와서 표트르 브란겔이 유고슬라비아에서 설립한 러시아 전군연합 극동지부 사령관으로 활동했다. 1937년 상하이에서 사망했다.[2] 내전 이전인 1917년부터 영국은 같은 연합군인 러시아와의 무역로를 독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무르만스크에 함대를 파견했었다.[3] 키이우 북동부 체르니히우주에 있다.[4] 베트남인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5] 훗날 군단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철수하면서 잔존 백군에게 주고 갔으며, 백군이 패배하자 일부 잔당들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봉천군벌에 가담할 때 가져갔다. 이후 약 10년 가까이 장쭝창 휘하에서 봉천군의 최고 전력으로 쓰이다가 최종적으로는 만주국을 세운 일본 관동군이 접수했다. 게임 배틀필드 1에서 등장하는 장갑열차의 모델이기도 하다.[6] 가이다 봉기. 이때 독립운동가 한창걸 선생의 부대를 포함한 일부 적군 소속 한인부대도 체코인들의 봉기에 가담했지만, 봉기가 실패하자 일본군에 체포되어 고문을 포함한 갖은 고초를 겪었다.[7] 넘겨진 콜차크는 곧바로 처형당했다.[8] 이때 적군이 군단에 요구했던 것에는 콜차크 외에도 러시아 황실이 보유하고 있던 금괴 500톤(약 6억 4500만 루블 상당)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제국 정부가 동맹국에게 노획될 것을 우려해 후방인 카잔으로 이송한 것을 카잔을 장악한 적군이 접수해 임시로 보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군에 가담한 체코 군단이 열차 타고 카잔으로 진격해오자 적군은 금괴 챙길 새도 없이 카잔에서 허겁지겁 도망쳤고 주인을 잃은 금괴를 체코 군단이 접수한 것. 한시바삐 본국으로 가고 싶었던 체코 군단은 이 금괴를 적군 측에 넘겼는데 이때 적군이 넘겨받은 금괴는 300톤(약 4억 1천만 루블 상당)뿐이었고, 나머지 200톤(약 2억 3천만 루블 상당)은 현재까지 소재가 불분명하다. 이 논란에는 여러 설명이 있는데 일각에서는 이를 체코 군단이 다 넘겨주지 않고 본국에 가져가 은행을 세우는 데 썼다고 설명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마찬가지로 체코 군단이 일부 빼돌려 가지고 갔지만 바이칼 호에서 파르티잔의 공격을 받아 열차를 빠뜨려 잃어버렸다고 주장한다. 또는 애초에 금괴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9] 독일어로 테셴, 폴란드어로 치에신[10] 체코 군단이 열차 이동 도중 자체적으로 발행한 신문.[11] 여담으로 전시 체제하의 소련제보다 상당한 품질을 자랑했던 명성과 달리 이 당시 미제 모신나강들은 규격도 제각각이라 유지보수에 애로사항이 꽃피던 쓰레기였다. 의회에서 수출 금지를 먹인 후 악성재고들은 국내에 풀리거나 백군 지원 명목으로 처리되었다.[12] 황정식,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체코군단, 동국사학 제67집, 320~321에서 발췌[13] '무정'을 쓴 그 소설가 춘원 이광수 맞다. 1919년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계몽운동에 투신하는 독립운동가였고,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 휘하의 독립신문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친일파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은 1921년경부터이다. 귀국 이후인 1922년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면서부터는 확실하게 친일파로 변절한다.[14] 이 내용을 실은 기사가 위의 독립신문 37호 기사다.[15] 당시 전시 번호는 165번. 여운형이 상해 임정 명의로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을 축하하며 제작한 은컵이다. 정부가 정부의 독립을 축하하며 공식적으로 전달한 은컵이지만, 가이다의 행보를 조사하던 체코 정부 요인은 그저 '가이다가 한국인들로부터 은컵을 선물로 받았다'고 개인적인 선물을 받은 것으로 보고했다. 이는 당시 상해 임정이 한 국가의 정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고, 가이다는 체코 정부의 외교관으로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16] 황정식,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체코군단, 동국사학 제67집, 307~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