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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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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년기3. 키스턴 ~ 뮤추얼 시기4. 퍼스트 내셔널 ~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시기5. 말년6. 사망

1. 개요

찰리 채플린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유년기

정확한 출생지는 호적 기록이 없어서 불확실하지만, 채플린 자신이 자서전에서 회고하기로는 사우스 런던의 빈민촌인 월워스(Walworth)라고 한다. 할머니가 롬(Rom)족, 흔히 말하는 집시라서 채플린에게도 집시의 피가 흐르는데, 채플린은 이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사후에 채플린이 쓰던 책상 서랍에서 발견된 편지에 따르면, 채플린은 1889년 남부 런던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웨스트 미들랜즈 지방의 집시 캐러번에서 태어났다. 편지에는 '당신(찰리 채플린)은 버밍엄에서 가까운 스메스위크의 블랙 패치(Black Patch) 지역 집시 퀸에 속한 캐러번에서 태어났다.'라는 글이 담겼다. 채플린이 태어난 1880년대에 그곳은 버밍엄 변두리 산업지대 집시족 마을이었고 따라서 이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채플린은 집시의 피가 흐르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한 집시인 셈이다.

부모가 모두 무대 연예인이었는데, 아버지인 '찰스 채플린(Charles Chaplin Sr., 1863년 3월 18일~1901년 5월 9일)'은 런던 뮤직홀에서 약간 이름난 가수였고, 어머니 '해너 채플린(Hannah Chaplin, 1865년 8월 11일~1928년 8월 28일)'[1]은 이런저런 연극에서 하녀나 잡역 등 단역을 도맡아하는 직급 낮은 배우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내 뮤직홀 배우들의 고질병인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되었고, 어머니는 남편이 미국에 순회공연간 사이 조지 윌러라는 다른 배우와 불륜을 저지르는 바람에 결국 부부관계가 나빠져 별거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한 후 루이스라는 여자와 재혼하였다. 아버지는 법정으로부터 자식을 양육하라는 책임을 졌음에도 전처랑 형인 시드니와 찰리에게 파운드화 지폐는 고사하고 동전 한 푼조차 주지 않았고, 어머니인 해너가 정신병원에서 나와 찰리 & 시드니와 재회한 후에서야 약간씩 돈을 보내줬다고 한다. 또한 찰리는 아버지가 죽기 몇 주 전에 술집에서 아버지와 만났는데 아버지가 (아마도 술김에) 일평생 유일하게 아들을 껴안고 키스했다고 회고했다. 찰리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3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뮤직홀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이 매상을 올리기 위해 공연 중 술을 마셔야 했는데, 이게 알코올 중독으로 이어진 것. 그래서 찰리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아버지 찰스를 아버지라는 자각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고 악평했을 정도였다.

한편 어머니 해너는 이혼 이후 목이 상해, 몇 번씩 극단을 옮겨다니다가 결국 연극 일을 포기하고 재봉사로 일하며 근근이 생계를 잇는 지경이 되었다. 채플린은 이 시절 겪은 배고픔을 평생 잊지 못했고, 이때의 경험이 훗날 영화들에 반어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채플린의 자서전에서 말하길,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극단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았다고 한다. 어느 날은 어머니가 상한 목으로 노래하다 삑사리가 나서 욕을 먹었고 그런 어머니를 대신하여 무대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때 채플린은 어머니의 쉰 목소리를 흉내낸 연기를 하여[2] 주점의 군인들한테 돈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다만 채플린은 이런 연기를 한 것에 대해 어머니에게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3]

어머니는 생활고로 인해 마음고생을 하여 1895년부터는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나머지 정신질환에 걸리고 말았다. 어머니의 정신질환은 심각하여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며 수시로 정신병원에 들락거렸고, 찰리는 형과 함께 보육원에 맡겨지거나 아버지와 잠시 지내다가 계모의 학대를 못이겨 다시 나오는 등 상당히 불안정한 생활을 해야 했다. 1912년에 어머니를 만났을 때의 일화가 자신의 자서전에 적혀져 있다.
어머니께서 편찮으셨기에 우울한 하루였다. 어머니께선 찬송가를 부르며 날뛰시던 시기를 막 지나서 방에 격리되신 상태였다. 이에 대해 사전에 간호사가 우리에게 경고했다. 시드니(찰리의 형)는 어머니를 뵈러 갔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없어서 기다렸다. 형은 침울해져서 돌아오더니, 어머니가 얼음처럼 차디찬 샤워로 충격 요법을 받으셔서 얼굴이 새파랬다고 말했다.[4] 그래서 우린 어머니를 사립 시설로 모셔오기로 결정했다. 지금은 그럴 여유가 있었으니까.
It was a depressing day, for she was not well. She had just got over an obstreperous phase of singing hymns, and had been confined to a padded room. The nurse had warned us of this beforehand. Sydney saw her, but I had not the courage, so I waited. He came back upset, and said that she had been given shock treatment of icy cold showers and that her face was quite blue. That made us decide to put her into a private institution - we could afford it now.
참고로 해너는 일찍 죽은 남편 찰스와 달리 아들 찰리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기에[5] 그녀의 장례식은 할리우드에서 치러졌고, 채플린 어머니의 묘소는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한 호숫가에 있다.

그러던 중 아들의 재능을 간파한 아버지가 1898년에 자신의 친구가 경영하는 에이트 랭커셔 래즈(Eight Lancashire Lads)라는 아동 극단에 찰리가 입단하도록 주선했고, 그는 여기서 처음으로 코믹 연기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이 극단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배우의 길을 걷는 것을 반대한 어머니가 1901년에 강제로 그를 퇴단시킨 것이다. 한편 형인 시드니는 여객선의 나팔수 겸 급사로 취직했고, 이후 동생과 마찬가지로 연기에 재능을 보이면서 찰리보다 먼저 연예계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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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셜록 홈즈'에서 꼬마 급사 '빌리'를 연기하는 채플린, 1903년~1906년경)[6]

어머니가 정신질환이 재발하여 다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한 1903년에는 형의 권유로 '블랙모어 극단'에서 나이를 14세로 속여 오디션을 보았고, 여기서 '셜록 홈즈' 연극에 꼬마 급사로 출연해 호평을 받았다. 무려 3개국을 돌아다녔으며, 나중에는 런던으로 가서 연극 '셜록 홈즈'의 원작자(정확히는 아서 코난 도일과 공동집필)이자 연극에서 최초로 셜록 홈즈를 연기한 배우인 '윌리엄 질렛'(William Gillette)[7]과 함께 연기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채플린 본인은 "하늘에서 내려온 소식 같았다"라고 표현했다.

1906년 시드니는 당대 거물급 희극단 중 하나였던 프레드 카노(Fred Karno)의 희극단에 입단했고 찰리도 2년 뒤인 1908년에 같은 극단에 들어갔다. 처음에 카노는 찰리를 '너무 소심해 보여서 연기를 못 할 것 같은 청년'이라고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찰리는 카노 극단에서 주정뱅이나 건달 등 뒷골목 인물들을 실감나고 코믹하게 묘사하면서 단시간에 큰 호응을 얻기 시작했고, 1910년에 극단이 미국 순회공연을 할 때도 주역으로 발탁되었다.

이때의 성공으로 찰리는 영국보다는 미국 활동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8], 1912년에 두 번째로 미국 공연을 갔을 때 맥 세닛(Mack Sennett)이 속한 키스턴 영화사의 전속 계약 제의를 받고[9] 희극 영화배우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이때 찰리는 세넷이 자신의 연기를 안 좋게 본 것 같아서 "난 안 될 거야 아마"라며 가기를 주저했는데, 계약을 맺은지 3일째 되는 날에 "왜 안 오느냐!"라며 재촉하는 전화가 걸려와서 당장 갔다는 루머가 있다.

3. 키스턴 ~ 뮤추얼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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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비 벌기(Making a Living, 1914년작)"에서. 왼쪽이 채플린. 아직 그 '방랑자' 컨셉이 등장하기 전 영화다.

그러나 고액의 봉급에 끌려서 들어간 키스턴의 촬영과 연출 방식은 대단히 원시적이고 조잡했다. 너무 웃기는 것에만 집착해 줄거리가 미칠듯이 허접한 건 예삿일이었고, 심지어 어떤 행사에 가서 몇 가지 웃긴 동작을 한 걸로 영화를 하나 만드는 등의 작업까지 했다.

당시 키스턴 사의 최대 인기 배우는 포드 스털링(Ford Sterling)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도 기껏해야 와당탕 넘어지거나 파이 몇 번 맞는 게 전부였다. 그에 비해 채플린은 24살치곤 너무 어려 보여서 계약이 파기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몸개그 전문인 키스턴 영화사는 웃기게 생기든지 해야 인기가 생긴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914년에 헨리 레만(Henry Lehrman)[10]이 감독한 '생활비 벌기(Making a Living)'라는 영화에 콧수염+외알 안경+중절모+프록코트라는 고전적인 사기꾼 분장을 하고 공식 데뷔하긴 했지만 정작 채플린 본인은 이 영화를 무진장 싫어했다. 그나마 비평가 중 한 사람이 '1급 코미디언'이라고 언급해 주긴 했다. 그러자 채플린은 제대로 웃겨보기 위해 그 유명한 '떠돌이(The tramp)'라는 캐릭터를 만드는 신의 한 수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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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에서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Kid Auto Races at Venice, 1914년작)"[11]에서. 채플린의 떠돌이 캐릭터 분장을 하고 찍은 두 번째 영화로, 대외적으로는 찰리 채플린의 떠돌이 기믹이 여기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 캐릭터는 통 크고 지나치게 헐렁한 바지, 짧고 꽉 끼는 웃도리, 대나무 지팡이, 너무 작은 모자, 칫솔 모양 콧수염[12] 이라는 괴상한 조합으로 만들어졌는데, 항상 아이디어가 넘쳤던 채플린이 전부 자기 주변 및 동료들에게서 빌린 도구들로 완성한 것이다. 바지는 스승이었던 뚱보 희극배우 로스코 아버클에게서 빌려 입었고, 초기에는 골판지를 이용했다가, 후에 가발을 다듬어 콧수염을 만드는 등의 노력을 했다. 그의 도구들 중 채플린 자신의 것은 대나무 지팡이 밖에 없었으며, 대나무 우산살을 이용했다. 이렇게 탄생한 떠돌이는 채플린만의 전매 특허로 수십년간 자리잡게 되었고 현재도 채플린은 이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참고로 사실 이 전설의 떠돌이 기믹은 원래 키스턴의 최고 스타이자 당대 인기 여배우였던 메이블 노먼드(Mabel Normand,1893 ~ 1930)[13]와 함께 한 '메이블의 이상한 곤경(Mabel's Strange Predicament)'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기믹이지만, 대형 영화를 개봉하기 직전 조그마한 소품을 제작하여 간을 보는 키스턴 사의 관례로 인해, '메이블의 이상한 곤경'이 개봉되기 이틀 전, 실제 자동차 경주장에서 단 하루 동안 촬영한 '베니스에서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Kid Auto Races at Venice)'라는, 정말 경주장에서 민폐만 끼치는 7분 남짓한 작품에서 먼저 공개되었다.

이처럼 키스턴의 감독들은 우리나라 드라마쪽대본보다 심할 정도로 대충대충 영화를 제작했고 채플린은 이런 제작 방식에 계속 불만을 표하면서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를 직접 감독하고 싶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채플린의 11번째 영화인 '메이블의 운전(Mabel at the Wheel, 1914년작)'에서는 영화의 감독도 맡고 있던 메이블 노먼드와 싸우는 바람에[14] 계약이 해지될 뻔하기도 했다.

맥 세닛은 어떻게든 채플린을 억눌러두려고 했지만, 영화 상영업자들이 채플린의 작품을 계속 원했기에 어쩔 수 없이 채플린으로부터 영화가 망했을 시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1500달러를 받은 뒤에야 채플린에게 직접 감독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영화가 바로 사랑의 20분 (Twenty Minutes of Love, 1914)이다.

이후 채플린은 거의 일주일에 한 작품 꼴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고 점차 영화를 감독하는 노하우를 터득해 갔다. 한편 채플린은 1914년 11월 개봉한 키스턴 최초의 장편 코미디 영화인 '틸리의 무너진 로맨스(Tillie's Punctured Romance)'에도 주연으로 출연하였는데[15] 이 영화도 초대박을 치면서 채플린은 키스턴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가 되었다. 채플린은 훗날 이 시기가 자신의 영화 인생에서 가장 재밌던 때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키스턴의 하드코어한 스케줄에 지친 채플린은 결국 1915년, 키스턴에서 독립했으며 이후 에세네이, 뮤추얼 등 상대적으로 나은 조건을 제공하는 영화사들을 차례로 전전하면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시간의 여유가 생긴 채플린은 당시 그리 보편적이지 않았던 재촬영을 적극적으로 실시[16], 자신이 만족할 장면이 나올 때까지 계속 작업에 몰두하는 근성을 발휘하였고 당시 코미디 영화의 관객들이 주로 가난한 사람들[17]이었다는 점을 노려서, 영화에서 당하는 사람들을 부잣집 신사, 콧대높은 여성, 차별적인 경찰관 등으로 설정했다.

이러한 그의 전략은 먹혀 들어가서 1910년대 중반, 채플린은 인형, 담배, 보드게임, 만화 등 자신을 모델로 한 각종 상품들이 만들어지는 것은 기본이고, 자신을 흉내내는 대회[18] 등이 수시로 열릴 정도로 최고의 코미디 스타로서 엄청난 인기를 얻게된다. 심지어 다른 배우들이 채플린의 연기를 무단으로 베끼거나 짝퉁 채플린 영화를 만드는 등의 문제까지 생겨서 골치를 썩기도 했다.

결국 채플린은 법률 고문으로 형 시드니를 고용하였고 그는 동생을 도와서 복잡한 계약이나 법률 문제 해결에 관여했다. 이후 채플린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는 해럴드 로이드도 영화 인생 초반에 외톨이 루크(Lonesome Luke)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출연했는데, 채플린 측에서 자신의 떠돌이 캐릭터를 카피한 것이라며 소송을 거는 바람에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해야 했다.[19]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캐릭터가 바로 해럴드 로이드를 스타덤에 오르게 해준 안경잡이(Glasses) 캐릭터였다.[20]

4. 퍼스트 내셔널 ~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시기

1917년 뮤추얼 영화사와 우호적으로 계약을 끝낸 채플린은 퍼스트 내셔널 영화사로 이적했는데, 이때부터는 감독과 각본을 담당한 것도 모자라서 아예 자기가 마음대로 돌릴 수 있는 스튜디오까지 지어놓고 작업하기 시작했다.[21] 또한 퍼스트 네셔널 시절부터 그는 당시로서는 꽤 참신한 특수 효과 등을 동원해서 더 짜임새 있는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어깨총(Shoulder Arms)'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현시창 참호전을 소재로 쓰기도 했다.[22] 다만 채플린 본인은 군인들의 참담한 실상을 자세히 묘사하지 못했다며 영화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이 시기 채플린은 첫 번째 부인인 밀드러드 해리스가 아이를 유산하자 밀드러드에 대한 애정이 식어서 그녀와 늘상 다투는 등 불안정한 사생활 때문에 슬럼프에 빠져서 다소 매너리즘에 빠진 범작들을 많이 내놓았다. 이 무렵 찍은 <양지 바른 쪽(Sunnyside)>(1919) 촬영장에 헬렌 켈러가 방문하기도 했다.#

1919년 1월 15일, 채플린은 아역배우 재키 쿠건을 공동 주연[23]으로 발탁, 희극과 비극을 섞은 참신한 구성의 새 영화 키드를 크랭크인 했다. 영화는 1919년 11월 14일에 촬영이 완료되었다. 1920년 11월 13일 첫번째 아내 밀드러드 해리스와의 이혼 소송을 마무리한 채플린은 1921년 2월 6일, 마침내 《키드》를 개봉시켰고 영화가 250만 달러의 흥행을 거둠으로써 성공적으로 재기하였다. 1922년에 개봉된 '순례자'는 개신교의 맹목적인 전도 행위를 풍자하여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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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창립 모습. 좌측부터 현대 영화 문법의 기틀을 닦은 영화감독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David Wark Griffith) 감독, 무성 영화 시절 톱스타 메리 픽포드(Mary Pickford, aka 'Little Mary'),[24] 채플린(앉아 있는 사람), 채플린의 절친이자 초대 영화판 조로를 연기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Douglas Fairbanks)이다.[25] 뒤의 두 사람은 이를 증빙하는 변호사들.

한편으로 채플린은 1919년 2월 5일, 기존 거대 영화사들의 대병합에 대항하기 위해 메리 픽포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등 동료 영화인들과 함께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라는 신흥 영화사를 창립한다는 발표를 하였다.

1923년 본인은 영화에 출연하지 않고 희극적인 요소도 완전히 배제된 《파리의 여인》을 발표하면서 채플린은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에 본격적으로 둥지를 틀었다. 파리의 여인은 비평가들로부터는 대단한 호응을 얻었지만, 코미디 스타가 아닌 영화 감독 찰리 채플린이라는 포지션을 받아들이지 못한 관객들로부터 흑역사 취급당하면서 그때까지의 채플린 영화 중 최악의 흥행 성적을 냈다. 후에 다시 발성 영화로 재개봉했으나 역시 흥행하지 못했다.

결국, 코미디언으로 복귀한 채플린은 작정한 듯이 영화 작업에 몰입하며 《황금광 시대》(1925), 《서커스》(1928), 《시티 라이트》(1931), 《모던 타임즈》(1936), 《위대한 독재자》(1940) 등의 걸작들을 차례로 선보이면서 경력상으로는 제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기부터 채플린 개인에게 있어서는 멘탈이 파탄 지경에 이르러도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큰 사건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채플린을 덮쳤다.

우선 1926년 1월 11일 크랭크인을 한 《서커스》는 한 달 동안 촬영한 분량이 현상실의 실수로 흠집이 생겨서 전부 폐기한 뒤 재촬영을 해야했고[26] 같은 해, 9월에는 스튜디오에 원인 불명의 화재가 발생하여 촬영이 한 달간 전면 중단되었다.[27] 1927년 1월 10일에는 채플린의 두 번째 부인 리터 그레이가 채플린에게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리터 그레이는 재판장에서 채플린이 자신에게 세 명이 함께 성관계를 갖자는 등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성적 요구를 강요했다는 증언을 하면서 채플린에게 막대한 위자료를 요구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이혼 소송이 진행되는 중인 1927년에는 갑자기 미국 정부가 100만 달러 이상의 탈세 혐의로 채플린을 기소했다. 게다가 서커스가 개봉되기 직전인 1927년 10월, 《재즈 싱어》가 개봉되면서 본격적으로 유성영화의 시대가 개막되었다.[28]

1928년 1월 6일 개봉한 《서커스》의 흥행은 성공적이었지만 영화계의 판도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바뀌는 것을 보고 무성영화 시대의 다소 과장됐지만 그만큼 풍부하고 감수성 있는 몸짓 연기를 몹시 사랑했던 채플린은 "영화는 끝났다. 더 이상 사람들은 상상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영화계 은퇴 선언을 한다. 실제로 이 당시에도 유성영화가 등장하자 유성영화에 꼭 들어가야 할 목소리가 지금까지의 이미지가 도저히 어울리지 않아서 반강제로 영화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배우들이 정말 많았다.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의 여주인공 조지아 헤일, '위대한 무표정'이라는 별칭의 전설적인 무성 영화 배우 버스터 키튼, 안경을 쓴 도시청년 캐릭터로 유명한 해럴드 로이드 등이 대표적이다.[29]

이후 채플린은 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새 영화 《시티 라이트》를 무성영화로 만들어 1931년 5월 7일에 개봉시키면서 무성영화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초반부의 조각상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지직거리는 백색소음으로 처리함으로서 당시의 조악한 녹음 기술을 조롱하였다. 《시티 라이트》의 첫 시사회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박사까지 참석했고 찰리 채플린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 받았다.

그러나 이미 무성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고, 시대의 변화를 수용한 채플린은 1936년 2월 12일에 개봉한 《모던 타임즈》에서부터 조금씩 유성영화의 가능성을 시험하면서[30] 동시에 기계화/자동화로 인한 실업 문제라는 사회 현실을 적극적으로 풍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채플린의 모습은 나치로 인한 제2차 세계 대전의 징조, 소련의 대두 등의 외부적 문제와 결부되어 채플린이 '공산주의자'라는 오명을 쓰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1938년, 채플린은 자신과 히틀러의 외모가 비슷하다는 것을 이용하여 '아데노이드 힝켈'이라는 독재자와 유대인 이발사라는 1인 2역으로 나치를 풍자한 《위대한 독재자》 제작에 들어갔으며 1940년 10월 15일에 《위대한 독재자》를 완전 발성영화로 선보이는데 영화의 마지막의 연설 장면으로 인해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던 미국 정부로부터 찍히게 된다.

또한, 위대한 독재자 개봉 직후, 미국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을 위한 원조를 부탁하는 연설회'에서 채플린이 후두염에 걸린 소련 대사 대신 연설을 하여 "동무(Comrade) 여러분!"이라는 말과 함께 소련을 도와주자는 발언을 하자 미국인들 또한 채플린을 '국민을 선동하는 공산주의자'로 인식하게 된다. 그래도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인들은 공산주의에 대해 딱히 관심도 없고 적대감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그렇게 큰 논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새로운 떡밥으로 등장함에 따라 매카시즘으로 대표되는 빨갱이 사냥 열풍이 미국 전역을 휩쓸기 시작하면서 당대 미국인들 사이에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의 자유주의를 위협한다"라는 여론이 강해지기 시작했고. 특히 부하들을 시켜 불법적으로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캐서 그들을 조종하는 것으로 유명한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 국장까지 채플린에게 이상할 정도의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31]

FBI영국MI5에 채플린의 과거에 대한 뒷조사를 의뢰하는가 하면,[32] 조앤 배리라는 여자와 접촉하여 채플린이 자신을 강간해 임신했다며 소송드립[33]을 펼치게 하는 등 사방팔방으로 압박을 가했다.

2012년에 비밀해제된 MI5 자료에 의하면, FBI의 채플린 파일(Charlie's FBI file)은 무려 1,900페이지에 달했고, 그를 공산주의자와 연관시킨답시고 그의 본명이 이즈리얼 손스타인[34]이라거나 프랑스 퐁텐블로에서 태어났다거나 사회주의자 계열의 유대계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다는 의심까지 했다.[35]

조앤 배리와의 소송을 끝낸 채플린은 오슨 웰스프랑스의 연쇄 살인범 앙리 데지레 랑드뤼의 범행을 소재로 집필한 각본을 사들여서 당시 미국의 높으신 분들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 영화 《살인광시대》(1946)[36]를 완성하고 개봉했다. 그러나 주인공 베르두가 돈 많은 여성들과 결혼, 살해하여 재산을 빼앗는다는 내용을 문제삼아서 영화 검열 위원회와 가톨릭 풍기 위원회 등은 물론, 조앤 배리 사건과 영화를 연관시킨 관객들마저 채플린을 비난했고 채플린의 인기는 급락하게 된다. 또한 부자들의 모순을 비웃는다는 점을 부유층에 대한 혐오, 즉 공산주의 옹호로 해석하여 매카시즘의 사냥감이 되기에도 충분했다.

이 때문에 반미활동조사위원회[37]에서 찰리 채플린에게 소환장을 보냈지만, 채플린은 소환에 불응하는 대신 '나는 특정 이념보다는 자유를 더 중시한다'라는 편지로 대답했다. 이후 미국 활동에 염증을 느낀 채플린이 일종의 회고 영화인 《라임라이트》(1952)를 완성한 뒤 휴식 차 가족들과 고향인 영국을 방문하려고 미국을 떠나자, 연방정부는 여객선이 아직 영국에 도착하지 않았음에도 찰리 채플린의 재입국 허가를 무효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채플린은 미련없이 유럽으로 활동 거점을 옮겼다.[38]

5. 말년

라임라이트는 미국을 제외한 세계 각지에서 크게 흥행했고, 채플린은 스위스에 머무르며 영국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식으로 생활했다. 영국에서 제작한 첫 번째 영화인 《뉴욕의 왕》(1957)에서 채플린은 로큰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면서 미국 대중문화의 방종과 퇴폐를 비판하였고 후반부에는 자신의 부모님을 위해 동료들의 이름을 밀고하는 소년을 통해 매카시즘을 비판하는 등 대놓고 미국까의 기질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할리우드에서처럼 자신이 영화 제작에 관한 전권을 위임 받는 시스템이 아니다보니 특유의 개그 센스도 위축되었고 미국을 너무 편협하게 묘사하였다는 평론가들의 비판을 받았다.

1959년부터 1964년까지는 방대한 분량의 자서전을 집필했고, 마지막 영화이자 유일한 컬러 작품인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1967)을 제작 및 감독했다. 그러나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은 말런 브랜도소피아 로렌이라는 주연에 유니버설 픽쳐스라는 거대 영화사의 제작이라는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구식 로맨틱 코미디 취급을 받으며 망하는 신세가 되었다.

특히 메소드 연기로 각광 받았던 브랜도의 경우 채플린이 시범을 보이고 배우가 그것을 따라하도록 하는 구식 연기 지도 방식을 매우 못마땅해하여 촬영 후반에 가서는 제작자였던 제롬 엡스타인이 채플린과 브랜도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까지 맡아서 겨우겨우 영화를 완성시켰다고 한다. 채플린을 크게 존경했던 소피아 로렌자서전에서 브랜도가 촬영장에서 아이스크림을 끝없이 먹어가며 생각없이 살을 불렸고 촬영과정에서 채플린을 전혀 존중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6. 사망


1970년대 들어서 다리 부상 등으로 인해 점차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한 채플린은 신작을 만드는 대신 그동안 감독했던 영화들에 음악과 색을 입혀서 재개봉하는 현재의 리마스터링과 같은 작업을 하였다. 이때 채플린은 그동안의 영화계에 공헌한 업적에 대한 각종 상과 직위를 수여받았다. 1972년에는 영화 예술 아카데미가 바치는 명예상 시상식을 위하여 약 20년 만에 미국을 다시 방문하여 아카데미 시상식 참석자 전원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명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때 감격에 겨운 채플린이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채플린은 말년에 뇌졸중을 앓게 되면서 더이상 걷지 못하고 휠체어를 타야 했고 의사소통조차 제대로 하지 못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다. 결국 채플린은 1977년 크리스마스에 스위스브베에 있는 자택에서 잠을 자던 중 숙환으로 타계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 88세였다. 생전 그의 소원에 따라 성공회식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유해는 자택 근처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사후에는 영화 같지만 아찔한 해프닝이 하나 있었는데, 장례 후 약 두 달 뒤 돈을 노린 두 명의 엔지니어가 무덤을 도굴하고는 채플린의 가족들에게 유해를 되찾고 싶으면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 어설픈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39], 채플린의 유해는 주네브 호숫가에 있던 한 농부의 옥수수 밭에서 발견되었다.[40] 이후 같은 묘지에 재매장되었는데, 이번에는 도굴 시도를 막기 위해 관 위에 방공호 수준의 두꺼운 콘크리트가 씌워졌다.


[1] 혼인 전 이름은 해너 해리엇 페들링엄 힐(Hanna Harriet Pedlingham Hill)[2] 노래를 불렀는데, 당시 유행가였던 '잭 존스(Jack Jones)'라는 노래로, 돈 좀 벌었다고 잘난 척 하다가 결국 험한 꼴 당하는 잭 존스라는 사람에 대한 노래였다고 자서전에 나와 있다.[3] 이 일화는 채플린의 자서전을 토대로 만든 1992년작 영화 <채플린>에서도 묘사된다. 이 영화에서는 실제 해너의 손녀인 '제럴딘 채플린'이 자신의 할머니인 해너를 연기했다.[4] 이 시절의 영국은 구빈원이나 정신병원이 문자 그대로 개판이었다. 전두엽 절제술이 나타난 것도 이 무렵. 자세한 것은 정신병원 문서 참고.[5] 미국에서 살 때의 해너는 정신분열증의 영향인지 간혹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막무가내로 아이스크림을 권하는 기행을 보인 것 말고는 별 일 없이 천수를 누렸다고 한다. 정신 질환을 앓았어도 자식들과의 관계는 매우 좋았으며, 아이스크림을 권하는 행동 또한 가난했던 시절 푼돈을 모아 자식들과 함께 사먹었던 아이스크림에 대한 좋은 기억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6] 한국 나이로 초등학교 6학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열연을 펼쳤다. 그가 단순히 웃기는 연기뿐만 아니라 정극 연기는 이미 어린 나이부터 완벽하게 해낸 천재임을 나타내는 부분.[7] 흔히 셜록 홈즈하면 떠오르는 구부러진 담배 파이프는 이 사람이 '자신의 잘생긴 얼굴을 가리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사용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대의 명배우였으나 작위는 못 받았는데 그 이유는 이 사람은 미국인이었기 때문이다.[8] 실제로 찰리 채플린은 영국인인데도 영국 영화랑 별 연관이 없다. 말년에 영국 영화들을 몇 편 만들기 했지만,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9] 당시 채플린이 일하던 극단으로 '당신의 극단에 채핀 혹은 그와 비슷한 이름의 인물이 있다면 연락 바람'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이 실수는 몇십 년 후 한 번 더 반복되는데, 마지막 배우자인 우나 오닐과 결혼할 때 주례를 서 주었던, 채플린을 잘 모르던 작은 시골 교회의 목사가 그의 이름을 '채핀'이라고 기입한 것.[10] 채플린과는 훗날 좋지 않게 끝났다.[11] 베니스는 이탈리아의 도시 베네치아가 아니고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지역 이름이다. 리조트 지구라서 오락이나 여흥과 관련된 행사들이 많이 열렸다. 이 외에도 미국 지명 중에는 타국의 유명한 지명에서 따온 이름이 많다. 파리(텍사스 주 라마 카운티 소속), 런던(오하이오 주 매드슨 카운티 소속), 베르사유(켄터키 주 우드포드 카운티 소속, 실제 발음은 '버르세일즈'에 가까움) 등.[12] 수염 항목에도 있는 투스브러시(Toothbrush) 수염인데 19세기 말에 미국에서 잠깐 유행했다가 독일에 전파된후에 히틀러가 하고 다니는 바람에 요즘은 별로 안하는 수염이다. 채플린은 표정을 숨기지 않을정도의 크기이면서 웃긴다고 이 수염을 캐릭터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13] 키스턴 영화사의 간판 여배우로서 활동했던 배우로 찰리 채플린과 로스코 아버클 영화의 초기 여주인공이기도 했다. 1910년대 후반에는 키스턴에서 독립하여 자신의 스튜디오를 세웠을 정도로 잘나갔으나 1922년 남자친구이자 영화 감독인 윌리엄 데스먼드 테일러의 사망 사건에 연루된 것(메이블 노먼드는 심한 코카인 중독자였고 윌리엄은 그녀가 코카인을 끊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는데 코카인 공급책인 마피아들이 윌리엄 테일러로 인해 주요 고객인 메이블 노먼드를 잃게되자 앙심을 품고 윌리엄 테일러를 죽였다.)과 1924년에 석유 재벌 코틀런즈 다인즈가 총격을 당한 사건(메이블의 운전기사였던 그리어(Greer)라는 남자가 1924년에 석유 재벌 코틀런드 다인즈를 총으로 쐈다. 범행 사유는 그리어가 재판 출석을 거부함에 따라 끝내 밝혀지진 않았으나, 그리어가 메이블에 대해 이성적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질투심에 의한 우발적 범행이라는 설이 그나마 설득력이 있는 편이다. 물론, 고용주인 메이블은 이에 대해 부인했다.)으로 인해 순진한 재벌 남자들을 적당히 꼬시고 놀려고 했던 여자라는 여배우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고 결국, 1926년 결혼과 함께 연예계에서 은퇴하고 칩거 생활을 하다가 1930년, 결핵으로 36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14] 당시 대본 중 '악당들이 주인공 일행을 쫓아가면서 호스로 물을 뿌리는 장면'이 있었는데, 악당 역을 맡은 채플린이 '발로 호스를 밟은 상태에서 물이 안 나와 무슨 일인지 호스 입구를 바라보다 발이 떼지자 그대로 물줄기가 얼굴을 강타한다'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런데 메이블이 너무 뻔한 개그라며 반대했고 (그럴 만한 게 이 개그는 뤼미에르 형제 단편 영화에서도 시도된 적이 있다.) 이에 둘이 대판 싸웠다고 한다.[15] 여기에서 채플린은 떠돌이 캐릭터가 아닌 고전적인 사기꾼 캐릭터로 나온다.[16] 채플린은 우선 처음애는 자신의 구상대로 영화를 찍은 후 스탭들의 반응을 살폈고 찍은 장면이 생각보다 스탭들을 웃기지 못하면 더 재미있는 장면을 만들기 위해 잠시 영화 촬영을 중단하고 스탭들을 불러모아 회의를 하면서 웃긴 아이디어를 수집, 해당 아이디어들을 반영하여 영화를 재촬영했다. 이러한 관행은 그의 마지막 무성 영화인 <모던 타임즈>때까지 계속되었다.[17] 영화표 값이 싸지면서 노동자들도 자주 극장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것 때문에 영화계가 수난을 겪기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하는 건 모두 불건전하다"라는 얼토당토 없는 이유로. 실제로 한때 이러한 이유로 뉴욕시장이 명령을 내려 뉴욕의 영화관 전부(550여곳)가 폐쇄되기도 했다.[18] 이 대회에 본인이 출연해서 1등을 못 했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심심하면 나오는 이야기. 실제로 3등을 했다고 한다. 히든싱어2에서 신승훈이 우승을 못할 때도 이 이야기가 잠깐 나왔다.[19] 파일:external/cbsnews2.cbsistatic.com/harold-lloyd-as-lonesome-luke.jpg
외톨이 루크(Lonesome Luke)의 모습.
[20] 해럴드 로이드는 외톨이 루크(Lonesome Luke) 시절을 흑역사로 여겼기에 영화계에서 은퇴하며 자신이 찍은 원본 필름들을 모조리 수거해서 저택 창고에 보관했을 때 외톨이 루크(Lonesome Luke) 영화들은 수거하지 않았고 덕분에 외톨이 루크(Lonesome Luke) 영화들은 몇 몇 작품들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21] 나중에 채플린은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로 이적한 뒤 또 새로운 스튜디오를 만들었고, 퍼스트 내셔널 시절 건립한 스튜디오는 무성영화 코미디계의 또 다른 전설 중 한명인 버스터 키튼의 전용 스튜디오로 쓰였다.[22] 여담이지만 영화 도중 나무로 분장한 채플린과 뚱뚱한 독일군 병사의 추격전은 스튜디오가 아니라 야외(미국의 어느 황무지)에서 찍었는데, 독일군 병사가 파이프에 끼어버리자 도끼로 파이프를 부수고 빼낸다. 문제는 이 파이프가 미국 정부의 소유였다는 것. 말 그대로 빼도 박도 못할 공공기물파손죄이다. 웃긴 건 미국 정부는 채플린이 죽을 때까지 파이프가 파손된 걸 몰랐다고 한다(...)[23] 채플린은 친구 페어뱅크스의 제안으로 다른 극장에 연극을 보러 갔는데, 어른과 아이(재키 쿠건 부자(父子))가 나와서 연극을 하는 걸 보고 감명을 받아 '키드'를 구상했다. 그런데 '재키 쿠건'은 이미 다른 극장과 계약을 한 상태. 좌절하는 채플린에게 다음 날 캐스팅 매니저가 달려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 재키 쿠건, 아버지 쪽이랍니다." 그래서 당장 아들 재키 쿠건과 계약에 들어갔다고. 즉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이름을 쓰는 경우 때문에 생긴 해프닝. 그러나 이름이 같은 것과 달리 정작 쿠건은 쿠건 시니어의 친자가 아니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재키 쿠건이 '쿠건 법'의 주인공으로, 키드의 유명세로 얻은 막대한 돈을 쿠건의 부모가 싹 날려 버려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이로 인해 쿠건 법이 제정되어 아역 배우의 수입을 부모가 전부 낭비하지 못하게 되었다.[24] 메리 픽포드 같은 무성 영화시절의 톱스타들은 흔히 은막의 세대(Generation of silent)라고 부른다. 참고로 사진에 같이 찍힌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와는 잠깐 결혼했으나 16년 뒤에 이혼했다.[25] 페어뱅크스가 찍은 초대 영화판 조로는 1920년작 무성영화 "조로의 낙인(The Mark of Zorro)"이다. 또한 페어뱅크스는 "황금광 시대" 제작 중에 채플린에게 서부 개척자들에 관한 슬라이드(일종의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는 식으로 창작을 도와줬는데, 덕분에 채플린은 '너무 배고픈 나머지 구두를 삶아서 구두끈을 스파게티처럼 먹는다'는 명장면을 만들어냈다.[26] 그것도 가장 힘들었던 밧줄타기 장면이었다![27] 채플린 영화의 전속 카메라맨이었던 롤란드 토테로는 이 불타는 장면을 필름에 담았는데, 불타는 스튜디오와 낙담해 주저앉아 있는 채플린의 모습은 이후 예고편에서 잠시 활용되었다.[28] 다만 재즈 싱어는 부분 유성 영화였고, 최초의 완전 유성 영화는 "Lights of New York"라는 폭력물이었다.[29] 특히 키튼은 유성 영화를 반겨서 유성영화가 출현한 후 헐리우드의 대형 영화사 MGM과 계약했지만 자신의 캐릭터와 목소리가 안 어울린데다, MGM의 스튜디오 시스템과 계속 층돌하는 바람에 계약이 파기당하였고 그 여파로 알콜 중독에 걸리면서 첫번째 아내와도 이혼하는 등 몰락했다. 정작 유성영화를 부정적으로 여겨 은퇴 선언까지 한 채플린은 목소리가 그렇게 튀지 않은데다, 유성 영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색을 표현할 방법을 찾아냈기에 유성 영화에서도 성공을 거뒀다.[30] 영화는 전반적으로 무성영화이지만 회사 사장이 명령하는 장면 등을 통해 음성이 중간중간 들어간다.[31] 당시 FBI는 채플린의 옛 직원들부터 시작해서 전처 밀드러드 해리스까지 심문했는데, 무려 20시간 이상 걸친 조사에도 불구하고 해리스는 끝까지 채플린을 옹호했다고 한다.[32] MI5는 그가 런던 출신인지 그의 본명이 무엇인지를 판명하는 데 실패했다고 한다. '그는 영국에서 태어나지 않았거나, 태어날 당시의 이름이 제시된 것 중에 없다.'라고 결론내리고 조사를 종결했다. 결국 그의 출신은 오늘날까지도 미스터리인 셈이다. # 사실 그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빈민가 출신의 소년에 대한 출생 기록 등이 부실해도 딱히 이상할 것도 없다. 오늘날에도 병원에서의 출산기록은 있지만 출생신고는 되지 않은 무적자가 많다.[33] 처음엔 그냥 차비만 받고 돌아갔지만 이후 소송을 걸었다. 전기 작가 데이비드 로빈슨의 말을 빌리자면 그녀에게는 "장총을 든 어머니와 변호사 삼촌"이 있었다고.[34] Israel Thornstein. 전형적 유대인식 이름이다. 여담으로 당시 채플린의 가짜 전기들이 무수히 많이 돌아다녔는데 그 중 와일더 부인의 작품으로 알려진 채플린의 가짜 전기가 가장 유명했다. 퐁텐블로 출신설이나 유대인설은 이 전기에서 나온 내용이다.[35]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상당히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사회주의 활동을 했다. 그들 대다수는 나름대로 교육도 잘 받은 재원이었으며, 사회주의를 이상적인 이념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많았다. 실제로도 유대계 출신 공산주의자 중 굵직한 인물만 카를 마르크스, 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출신만 그랬을 뿐 문화적으로 상관없었고 자신들도 유대인이라는 생각이 없었다.[36] 원제는 그냥 '베르두 씨(Monsieur Verdoux)'였다. 국내 번역 당시 황금광 시대의 영향을 받은 듯 싶다.[37] 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약칭 HUAC. 미국의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적발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로, 설명을 봐도 알겠지만 공산주의자가 주된 목표가 되었다.[38] 이를 두고 시민권을 박탈한 것이 아닌가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찰리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상술한 반미활동조사위원회가 채플린을 반미주의자가 아니냐며 추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39] 공공전화를 통해 협박 전화를 걸었는데 처음에는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며 전화를 걸었으나 나중에는 귀찮다는 이유로 근처의 공중전화 몇 개만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를 눈치챈 경찰이 주변 공중전화를 모두 찾아 결국 체포했다고 한다. 당시 협상 담당은 제럴딘 채플린이었다고.[40] 이 해프닝은 2015년 자비에 보브와 감독이 '영광의 대가'로 영화화했다. 참고로 이 영화에서는 찰리 채플린의 손녀인 덜로리스 채플린이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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