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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 대한민국 제28대 법제처장 이석연 李石淵 | Lee Seok-yeon | |
출생 | 1954년 4월 25일 ([age(1954-04-25)]세) |
전라북도 정읍군 옹동면 오성리 제내마을[1] (現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
본관 | 전주 이씨 완풍대군파[2] |
현직 | 동서대학교 석좌교수 |
재임기간 | 제28대 법제처장 |
2008년 3월 6일 ~ 2010년 8월 11일 | |
학력 | 옹동국민학교 (졸업) 태인중학교 (졸업)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전북대학교 (법학 / 학사) 전북대학교 대학원 (법학 / 석사[3])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4] / 박사[5]) |
소속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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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 본관은 전주(全州).2000년대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신행정수도법안)'에 대한 위헌소송에서 법률 대응을 주도하며, 수도 이전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판결을 이끌어낸 것으로 유명했다.
2. 생애
1954년 4월 25일 전라북도 정읍군(現 정읍시) 옹동면 오성리 제내마을에서 태어났다. 옹동초등학교, 태인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이수하고 전북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 전북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91년 8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형사법 전공하고, 검찰권 행사의 문제점을 다룬 '검사의 불기소처분에 대한 헌법소원 연구'라는 논문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전북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1979년 제23회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하여 법제처 사무관으로 근무하였다. 법제처 근무 중이던 1985년 제27회 사법시험에도 합격하였다. 정훈장교로 군 복무를 마치고 이후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다시 법제처로 복귀하였다. 1989년부터 1994년까지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을 지냈다.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 중 제1호 연구관이라고 한다. # 헌법연구관으로 있으면서 현행법의 위헌적 요소들에 불만이 있었지만 현직에서 문제 제기를 하기에는 여의치 않아서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직을 나왔고, 1994년부터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97년에는 국회에서 국회의원 세비 30.6%인상과 국회의원 보좌관(4급 상당) 299명을 증원하도록 법을 개정한 것에 대해 헌법소원을 내서 위헌결정을 이끌어내 '정치권 장외 저격수'로 불리기도 했다. 1998년에는 군가산점 제도에 대한 헌법소원에서 청구인들의 대리인을 맡아 위헌결정을 이끌어 냈다.1999. 12. 23. 98헌마363 전원재판부 제대군인지원에관한법률 제8조 제1항 등 위헌확인 1999년 11월에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서 2년 임기의 사무총장을 맡았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로는 정부에 비판적인 스탠스를 취하며 뉴라이트 시민단체에 몸담았다. 법제처장 이석연, 뉴라이트 대표 법조인. 다만 본인은 이때만 해도 뉴라이트를 단순히 정치개혁 운동하는 단체인 줄 알았다고 하며, 뉴라이트의 개념도 잘 모를 때 가입한 것이며
이명박 정부 출범 후인 2008년 3월부터 2010년 8월까지 제28대 법제처장을 지냈다. 법제처장 시절 국무회의에서 유일하게 국가인권위원회의 권한 축소에 대해서 반대하였고, 미디어법에 대해서도 위헌성을 지적하며 이명박 정부의 주류 행보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행정부 안 '야당' 역할하는 이석연 법제처장.
2004년에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에서 소추위원(법사위장)측 대리인을 맡아 탄핵심판에 관여하였고, 여당 뿐만이 아니라 당시 야당도 찬성해서[7] 국회를 통과한 신행정수도 이전에 대하여 222인이 청구한 헌법소원 사건에서 법률대리를 맡아 소송을 이끌며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법률개정에 의한 수도이전은 관습헌법상 위헌"(...)이라는 논리를 관철시켰다. 2004년 오마이뉴스 기사. 자세한 내용은 관습헌법 참고할 것.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에 따라 세종특별자치시는 행정수도가 아닌 행정도시가 되었다. 그는 '행정수도 이전'은 국민을 기만하는 표현으로 실질적으로 이는 '천도(遷都)'라고 했다.
헌법재판소 판례에 대한 학문적인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헌재의 판례 자체를 무효화 시키려는 시도는 법치주의를 포기하는 것으로 더 이상 입헌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없다며, 대한민국 수도 이전은 헌법 개정 또는 국민투표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며 가장 현실적인 안은 국민투표라고 했다.
2023년 4월 5일 동서대학교 석좌교수에 임명되었다.#
3. 정치 활동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의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범보수 시민후보 출마를 선언하여 한때 한나라당을 긴장시키기도 했으나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높게 나오지 않는 바람에 결국 사퇴하였다.7년 후인 2018년 6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자유한국당의 서울특별시장 후보를 자처하고 홍준표 대표에게 허락을 받았으나 당선이 어려워보여 3월 18일 불출마 선언을 하고 잠적했다. 결국 김문수 후보가 대신 나섰으나 낙선했다.
2019년 3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전두환, 노태우도 사면되었으니, 국민통합(?)을 위해 이명박, 박근혜도 사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이석연은 "나를 진보진영에서는 '보수 꼴통'이라고 하고, 극우층에서는 '위장 보수'라고 하죠. 나는 헌법적 자유주의자일 뿐이에요."라고 주장했다.
2020년 1월 22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대비 자유한국당 공천관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200122 데일리안 기사.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여당의 압승으로 끝나자 "국민의 선택에 절망했다."는 발언을 하다가 마지막에 "정권 폭주에 대한 댓가는 국민이 책임져야 한다."는 국개론을 주장해 욕을 먹었다.#
2022년 윤석열 정부의 행정안전부의 경찰 통제 강화와 관련해 "경찰국 신설은 헌법적으로 용납이 안 된다며 법치주의의 일방통행이자 민주화의 퇴행"이라며 처음으로 보수 정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2023년 2월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 깜짝 출마한 천하람 변호사의 후원회장을 맡았다는 기사가 나왔다. #
2024년 12월,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해 '국민을 상대로 한 전쟁선포'라며 윤석열을 비난하였다.#
4. 여담
-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를 가지 않고, 검정고시를 통해 반 년 만에 합격했다. 이후 남는 2년 반의 시간 동안 김제 금산사 신원암에 들어가 독서만 했다고 한다. 500여 권에 이르는 책들을 읽었다고 하며, 자신 인생의 밑천은 이 시기에 쌓았다고 한다.
[1] #[2] 양도공 문중 21대손 연(淵) 원(源) 항렬. 이낙연 전 국무총리와 같은 항렬이다.[3] 석사 학위 논문 : 過失犯에 있어서 信賴의 原則에 관한 硏究(과실범에 있어서 신뢰의 원칙에 관한 연구, 1980).[4] 형사법 전공[5] 박사 학위 논문 : 檢事의 不起訴處分에 대한 憲法訴願 硏究(검사의 불기소처분에 대한 헌법소원 연구, 1991. 8).[6] 실제로 지금도 뉴라이트에 가입되어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명단에 자기 이름이 있는 경우가 있어서 먼저 욕을먹고(...) 자기도 모르고 가입되어있는 경우가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7]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 당론은 찬성 권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