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08:42:42

야구/기원



1. 개요2. 미국의 야구 창안 주장
2.1. 엉터리 애브너 더블데이 창안설2.2. 알렉산더 카트라이트2.3. 반전, 닥 애덤스
3. 다른 나라들의 반론과 야구 기원에 대한 주장
3.1. 영국3.2. 아프리카3.3. 루마니아3.4. 폴란드3.5. 러시아/핀란드3.6. 쿠바3.7. 아메리카 원주민3.8. 그밖에
4. 베이스볼 이름의 원조5. 2000년대 와서 수정된 미국야구 기원설6. 결론
6.1. 세계화의 실패 원인6.2. 반론

1. 개요

야구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분분하지만 뚜렷한 결론은 없다. 다만 야구 종주국임을 자처한 미국이 저지른 억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반론이 나와 있는 상태다.

2. 미국의 야구 창안 주장

2.1. 엉터리 애브너 더블데이 창안설

미국에서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1839년에 당시 장교 후보생이던 애브너 더블데이 장군(1819~1893)이 뉴욕쿠퍼스타운이란 곳에 있던 사관학교 분교에서 동기들과 같이 야구에 대한 규칙을 창안했다면서 미국에서 만들어진 스포츠라고 홀로 주장해왔다. 아무런 증거가 없이 말이다.

미국은 국가의 역사가 타 선진국들보다 비할 바 없이 짧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전통이 될만한 것들에 대한 집착이 큰데, 야구가 이에 해당되었던 것.[1]

20세기 초 야구계에서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하던 사업가 앨버트 굿윌 스폴딩(Albert Goodwill Spalding/1850~1915)[2]은 미국의 국기가 되어가고 있는 야구가 다른 나라 경기를 모방한 것이라는 의견에 미국민으로서 자존심상 참을 수가 없었다. 1890년대 미국 야구 선발 팀이 영국이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경기를 했는데 이 와중에 영국에서는 크리켓을 비롯한 여러 구기종목을 이거저거 따온 스포츠가 저 미국의 야구라는 종목이라고 보도한 것에 스폴딩은 발만 동동 굴렀다.

미국 선발팀이 유럽 각지에서 그 미국 원조설의 방해물인 유럽 각 구기종목을 대표하는 선수들과 경기도 벌였지만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들이 미국으로 돌아올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나 마크 트웨인 같은 유명인들이 손수 항구로 나가 환영할 정도로 열광했다. 하지만 스폴딩은 이를 보며 야구는 미국만이 원조라는 걸 사람들에게 일깨워야 한다는 다짐을 굳힐 뿐이었다.

참고로 이 스폴딩은 야구 초창기 시절 유명 투수였으며[3] 사업수완도 뛰어나 그가 세운 스포츠 용품 회사 스폴딩[4]은 1901년부터 1976년까지 메이저리그 공식 시합공을 독점 공급했을 정도였다. 그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어 상원의원 두 명을 포함한 쟁쟁한 인물들로 야구의 기원을 찾기 위한 특별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전 내셔널 리그 회장 밀스가 위원장을 맡았다. 1907년, 밀스 위원회는 후원자의 입맛에 맞는 결론을 발표했다. 그것이 위에 나온 애브너 더블데이가 야구에 대한 모든 것을 창안했다는 억지였다.

그러나 미국인이지만 야구에 대하여 무수한 나라들에서 오래전부터 기원이 비슷한게 있다던 헨리 채드윅[5](Henry Chadwick/1824~1908) 같은 거물 야구계 인사들은 터무니없는 헛소리로 왜곡한다고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스폴딩이나 미국 다수 야구계는 이런 부정적인 태도를 무시하고 세계적으로 야구는 미국이 모든 걸 다 만들었다는 억지 주장을 했다.

2.2. 알렉산더 카트라이트

실제로 현대 야구랑 거의 비슷한 경기로 발전시킨 사람이라고 굳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알렉산더 카트라이트(Alexander Cartwright 1820~1892)로, 1845년 뉴욕에서 세계 최초 야구팀인 닉커보커스(Knickerbockers)를 조직했고 니커보커 규칙을 만들어서 다이아몬드형 경기장을 고안하여 경기 인원을 9명으로 하였고, 3스트라이크가 1아웃이 된다는 근대야구 규칙을 공식화[6]하였다. 그럼에도 카트라이트가 아닌 더블데이가 현대 야구 창시자가 된 것에 분노한 손자 브루스 카트라이트는 명예의 전당 설립추진위원회에 반론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이러니 메이저리그는 재조사를 실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조사결과 더블데이는 1839년에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2학년이었으며 그 때 여름 방학도 없었고 그의 일기장 어디에도 야구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타나지 않는 등 특별위원회의 결론이 조작이라는 증거가 속속 드러났다. 특별위원회 위원장 밀스는 절친한 친구인 스폴딩의 입맛에 맞는 결론을 만들기 위해 7인으로 구성되었던 위원들과의 상의없이 단독으로 최종 보고서를 썼다. 당시 위원회가 증거로 내세웠던 것은 더블데이의 어렸을 때 친구였다는 애브너 그레이브스(Abner Graves)라는 노인의 진술이 유일했으며 다른 증거자료는 위원회가 입주해 있던 건물이 불에 타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왜 이렇게까지 조작하면서 더블데이를 현대 야구 창시자로 보며 찬양했던 까닭은 아주 간단했다. 찾은 기록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고 저거 하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찾아보자면 미국에서 야구 비슷한 여러 스포츠를 더 오래전인 18세기에도 얼마든지 했지만 그 기록들은 크리켓이나 영국인들과 같이 했다는 점이 있기에 이걸 모조리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미국인이 만들고 미국인이 한 것만 찾은 끝에 찾은 것은 저 노인의 진술 하나 뿐이었다.

특별위원회 위원 가운데 유일하게 초창기 야구 역사를 증언할 만한 인물로 조지 라이트가 있었는데 그는 단 한번도 위원회에 참석하지 않았었다. 만일 그가 한번이라도 참석했었다면 희대의 사기극은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는 1840년대 뉴욕에서 진짜 현대 야구 창안자라고 할 수 있을 카트라이트의 닉커보커스 구단과 시합을 해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지 라이트는 당시 83살이며 병을 앓아서 제대로 위원회에서 활동할 수 없었기에 그를 비난할 수도 없었다. 되려 지금와서는 환자인 라이트를 위원회에 대충 올려둔 것이 적당히 닉커보커스 팀에서 활동한 인물을 넣어 위원회를 겉으로 그럴듯하게 꾸민 것이라는 비난도 듣고 있다.

게다가 중요한 증인이라는 애브너 그레이브스라는 노인은 살아생전 광산기술자, 서커스단 가수 같은 일로 벌어먹었으며 아내를 총으로 쏴죽이고 발광하여 콜로라도 주 시립정신병원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람이었다. 1907년 당시 그레이브스는 살아있었으나 정신병원에 갇혀있던 몸(참고로 그는 90살 장수를 누렸다)이라 증인으로 효력은 전혀없었다. 하여튼 이런 자가 한 말 1마디가 증거라고 하니 어이없는 일이었고, 미국야구계는 더블데이에게 모든 촛점을 맞추고 이 그레이브스에 대한 건 덮어버렸다.

야구 역사가인 해롤드 피터슨(Harold Peterson)은 그의 저서 ‘The man who invented baseball(1973)’에서 애브너 더블데이가 야구를 만든 것이 아니고 야구가 애브너 더블데이를 만들었다”는 말로 이 희극적 사건을 표현했다.

그럼에도 메이저리그나 스폴딩이나 밀스나 저런 조작 사실을 덮어버리고 결국은 야구는 더블데이가 창안했다는 억지 주장를 굽히지않고 오로지 전세계에서 미국만이 이렇게 100년 가까이 외쳤다. 1939년에 야구 창안 100주년 기념 우표를 만들고 야구계 인사들은 더블데이 장군 무덤에 가서 해마다 을 바치며 야구의 시조라고 찬양하기에 급급했다.

물론 전세계적으로 미국 말고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런 억지를 비웃던 헨리 채드윅은 한탄했다.
나도 야구가 좋은 야구계 인물이지만 이런 억지와 조작으로 그렇게까지 야구를 모든 게 미국인이 만들고 미국의 스포츠라고 주장한다고 해봐야 과연 그게 영원히 갈까? 그리고 언젠가 이로 인하여 같은 미국의 다른 스포츠에게조차 비웃음당해도 그땐 이런 억지가 드러나면 어찌될지 걱정된다.

그리고 채드윅의 이런 한탄은 세월이 지나 에누리없이 들어맞게 된다.

그나마 1953년 6월 3일, 미국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알렉산더 카트라이트가 현대 야구 창시자인 것이 공표되었다. 문제는 이랬음에도 명예의 전당 측은 여전히 더블데이가 원조라고 새긴 걸 고치지 않았으며 또한 매해 더블데이의 무덤에 가서 성묘하고 현대 야구 시조라고 찬양했기에 카트라이트 후손들이 분노했다.

2.3. 반전, 닥 애덤스

그런데 또 다른 반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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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SCP 경매사에 오래된 희귀 서류가 매물로 나왔는데 이 서류의 이름은 ‘야구의 법칙(Laws of Base Ball)’. 그런데 이 서류의 내용을 보면 카트라이트가 1845년에 기초를 잡고 1860년 애덤스가 완성했던 규정집 ‘Knickerbocker Rules’과 내용이 거의 다 일치한다. 베이스 간의 거리, 9이닝 경기와 팀 당 9명의 정원 등이 모두 담겨져 있던 것이다. 메이저리그 공인 역사가인 존 쏜 등 전문가들도 이 서류의 중요성과 진품 사실을 인정했다.

이 서류가 큰 관심을 끄는 가장 큰 이유는 완성된 해가 1857년, 즉 현재까지 인정돼 왔던 1860년에 완성된 규정집보다 3년이나 앞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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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 애덤스(1870년) 당시 사진.

이 서류를 작성한 사람은 바로 대니얼 루시우스 ‘닥’ 애덤스(Daniel Lucius "Doc" Adams, 1814~1899). 그러니까 카트라이트의 위업을 이어받아 1860년에 집대성했다는 근대 야구의 규정집은 실은 1857년에 애덤스가 단독으로 집필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일으키고 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야구의 아버지는 카트라이트가 아니라 애덤스로 역사를 다시 써야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까지 대두되고 있다. 야구 역사가 쏜도 AP와 인터뷰에서 “아마 일반인들은 들어본 적이 없을지 모르지만, 야구의 아버지는 알렉산더 카트라이트가 아니라 대니얼 애덤스일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명예의 전당 멤버인 카트라이트는 1857년의 야구 규정집을 만드는데 는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이 서류의 소유주는 1999년 다양한 역사적인 서류와 책 등을 판매하는 경매에서 이 서류를 1만 2000 달러에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불과 6개월 전까지도 이 서류를 책상서랍에 넣어 놓고 존재를 잊고 있다가 다시 발견해 감정을 받는 과정에서 서류의 중요성이 점점 드러났다. 결국 SCP를 통해 경매에 내놓게 됐는데, 경매 초반부터 즉각 5명이 구매의사를 밝혔으며 이미 첫 주 만에 경매가가 소유주 구입가의 열배 이상을 홋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야구의 시작에 대한 역사책은 또 새롭게 쓰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미국이 야구의 기원이라는 주장이 근거가 없다는 점은 바뀌지 않겠지만 말이다.

3. 다른 나라들의 반론과 야구 기원에 대한 주장

야구가 미국의 순수 창작 스포츠라는 주장에 다른 나라들은 철저하게 비웃고 미국의 이런 주장을 누구도 듣지 않았다. 되려 전세계적으로 서로 야구 원조는 우리라는 무수한 스포츠에 대한 기록이 우르르 쏟아졌다.

게다가 경악스럽게도 9회에 걸쳐 경기를 진행한다든지, 투수와 포수의 차이, 파울 존재 여부 같은 미국이 그나마 현대적으로 만들었다는 야구 규칙도 이미 오래전부터 있던 게 드러났다. 물론 이런 반론에 대하여 메이저리그 측은 귀를 틀어막고 못 듣은 척 했지만.

현대야구는 미국이 본고장이 맞지만, 여러 종목 영향을 받았다는 걸 거부하고 모조리 미국에서만 나온 것이라고 왜곡하고, 엉터리로 연도와 인물을 내세우는 왜곡 행위는 욕먹을 수밖에 없다. 중국이 축구 원산지라고 외치지만 인류 역사상 무수히 많은 국가들이 비슷하게 경기를 했던 기록들이 있었고 현대 축구의 종주국은 결국 영국이라고 인정받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영국도 스스로를 현대 축구의 본고장이라고 자랑하지만 미국야구계가 하는 것처럼 닥치고 축구의 기원까지 모조리 왜곡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미식축구계조차도 럭비나 여러 종목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는데 미국야구계는 그 기원을 모조리 왜곡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 받는 것이다. 현대 야구 시초야 미국이라는 게 당연하지만 왜곡된 인물과 역사를 내세우며 미국이 야구 원조라고 주장하는 건 중국이 하는 짓이랑 다를 것이 없다.

3.1. 영국

미국의 주장에 세계화된 많은 근대 스포츠의 종주국이자 미식축구와 같은 미국 스포츠의 탄생에 모티브를 제공한 나라인 영국에서 가장 격분했다. 특히 야구와 비슷한 스포츠면서 먼저 탄생한 크리켓계가 반발했다. 그밖에 영국 각 지방에는 스툴볼(stoolball), 트랩볼(trapball), 올드 캣(old cat), 팁 캣(tip cat)[7] 등 비슷한 방식의 구기 종목이 많았기 때문에 미국의 원조 주장은 먹히지 않는 분위기였다. 예컨대, 한손으로 휘두를 수 있는 작은 배트를 들고 베이스를 4개까지 두는 라운더스(rounders)를 즐기던 영국인들 입에서는 "저게 긴 배트 갖고 하는 라운더스지, 뭔 미국 고유의 스포츠란 말이냐?"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영국인들은 "베이스볼이란 이름 자체가 영국에서 하던 구기종목 이름인데 미국이 원조라니?" 통렬하게 비웃으며 "그럼 이름부터 바꾸고 미국이 원조라고 우기든가 해라"라며 깠다.

3.2. 아프리카

1937년 이탈리아 학자 코라도 지니(Corrado Gini/1884~1965)는 이탈리아 지배하에 있던 리비아에티오피아 같은 나라를 둘러보고 충격에 빠졌다. 놀랍게도 이 북아프리카 사막에 살던 유목민들 베르베르 족이나 투아레그족, 앙헬 족 같은 현지인들이 야구 비슷한 경기를 했기 때문이다. 이걸 백인, 미국인이나 유럽인이 전해준 것도 아니다.
베르베르인들은 타 쿠르트 옴 엘 마하그(ta kurt om el mahag: 순례자 어머니의 공)라는 이름으로 이 공놀이를 즐겼는데 투수가 던지는 가죽 공을 막대기를 든 타자가 치고 포수가 가죽으로 만든 글로브로 공을 받으며 시간은 선수들의 뜻대로 자유롭게 하긴 하지만 이들은 9회에 걸쳐 경기를 진행한다. 자신들이 모두 창안했다고 억지부리는 미국인들의 현대 야구 규칙과 비슷한게 많지만 이들은 그들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아주 오래전부터 해왔다고 할 뿐이었다.

이 주장에 미국 야구계는 외면하면서도 야만인같이 무시하던 북아프리카 유목민들이 오래전부터 해왔던 것에 충격을 받았다. 되려 파시스트적인 우익 학자인 지니가 조작한 게 아닐까 의심도 했다. 참고로 지니도 이런 야만인이 이런 수준높은 구기종목을 창안할 리 없고 여긴 아득한 옛날 로마 제국 땅이었으니 고대 로마 시절때부터 전해온 게 남은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했고 역시 씹혔다.

1938년 4월, 미국 야구계 인사인 데이빗 블록이 손수 리비아와 북아프리카를 가서 그들을 만나서 이 스포츠를 확인했는데 그는 미국에 와서 '유감이지만 조작은 아니다. 그들의 경기 모습을 봐도 도저히 단기간에 이뤄져 한 게 아니다. 70이 넘는 노인들도 젊은 시절 즐겨했다며 규칙을 신나게 설명했다. 현대 미국야구 규칙과 상당히 비슷한 건 우연이겠지만 적어도 조작은 아니다. 그들의 순수한 규칙이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것이다.'라고 인정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반론하며 덴마크 학자 페르 마이가르드(Per Maigard)가 북아프리카 유목민들의 공놀이는 되려 바이킹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유럽에 롱볼이라는 공놀이가 야구 및 크리켓과 상당히 비슷한데 게르만계 반달족을 통하여 유럽 및 아프리카까지 이어진 것이란 주장을 1938년에 했다.

이런 주장에 이집트에서도 반론하기 시작했다. 무려 지금으로부터 3500년도 더 된 하트셉수트 신전에 그려진 투트모세 3세 벽화에 공을 던지고 치는 그림이 그려져있기에 이거야말로 야구의 원조가 아니냐는 주장을 한 거였다. 다만 이 그림에서는 길쭉한 작대기 같은 배트였고 공도 큼직하고 둥근 공을 가까이서 던지기에 좀 다른 점도 있다.

3.3. 루마니아

15세기부터 기록되어 있는 오이나(oina)라는 루마니아 고유 공놀이가 야구와 비슷하다. 오이나는 말갈기를 가득 채운 가죽공을 투수가 던지면 타자가 치고 포수가 역시 말갈기를 채운 글로브로 공을 받는다. 또한 더불어 오이나는 공을 타자가 친 다음 9개 필드를 돌아서 점수를 따는 규칙이 있어 이거야말로 야구에게 크나큰 영향을 준게 아니냐고 한 것이다.

3.4. 폴란드

이에 질세라 폴란드에서도 반론하기 시작했다. 폴란드에서도 오래 전 중세 시대부터 필카 팔란토와(pilka palantowa)라는 가죽공을 치고 베이스를 도는 스포츠가 있었는데, 이게 오이나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3.5. 러시아/핀란드

러시아에서도 라프타(лапта́)라는 비슷한 스포츠가 있다. 러시아 옆의 핀란드에도 페새팔로(pesäpallo)라는 스포츠가 있는데 역시 야구와 유사하다. 이쪽은 1920년대에 핀란드 고유 놀이에 미국의 야구를 접목하여 현대화된 스포츠가 됐다.

3.6. 쿠바

쿠바에서는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기록을 바탕으로 과거에 쿠바 원주민이 즐기는 놀이가 야구와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콜럼버스가 쿠바에 상륙했을때 원주민들이 나뭇가지를 들고 딱딱한 열매를 치는 바토스(batos)[8]라는 게임을 했었다고 기록해 놨는데 현재 야구와는 다르지만, 긴 방망이로 열매를 친다는 방식은 야구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3.7. 아메리카 원주민

또한 미국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더 먼저 야구의 기원격인 스포츠를 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만 그룩"이란 원주민들의 여러 공놀이가 있는데 "채아 만 그룩"은 현대 축구와 매우 비슷하며 "이햐 만 그룩"이 바로 막대기로 공을 치며 3각으로 달려서 베이스를 돌고 도는 게 그야말로 야구의 원조라는 것이다. 백인이 아니라도 미국 땅에 살던 원주민이고 그들 영향을 받았으니 야구는 미국인이 원조라는 주장이라는 거였다.

3.8. 그밖에

그밖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그림도 증거로 나왔다. 14세기 프랑스벨기에근처에서 유행했다는 공놀이가 있는데 이 스포츠 이름이 전해지지 않지만 대신 1301년 날짜로 된 플랑드르에서 발행된 기스텔레스 시간달력에 나온 그림에 오늘날 배트랑 매우 비슷한 걸 들고 공을 치는 타자가 그려져있다.

이밖에도 유럽 각지에서 우리도 비슷한 거 있다며 미국에 반론 자료를 우르르르 내보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여튼 전세계적으로 비슷한 게 엄청나게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심지어 한국에도 공을 사용하지 않고 투수가 없지만 다른 룰이 유사한 자치기가 있다. 이런 주장이 속사포같이 마구 나옴에도 미국 메이저리그 측은 2000년 초반까지 굳세게 더블데이의 창안으로 이뤄진 미국 기원설 주장을 굽히지 않고 다른 주장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4. 베이스볼 이름의 원조

그러나 그 미국도 결국은 인정하던 게 야구, 즉 베이스볼이란 이름의 원조는 확실히 영국이란 점이었다. 이 점을 앨버트 스폴딩도 굉장히 아쉬워했다. 도저히 베이스볼이라는 이름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국에게 줄곧 이름이라도 바꾸고나서 미국이 원조라고 우기라는 식으로 계속 비웃음을 당했다. 일부 미국인들은 아메리카볼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자는 건의도 했지만 당연히 무시당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야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700년 영국 메이드스톤의 성공회 신부 토머스 윌슨이 쓴 일기의 "주말에 마을에서 베이스볼(baseball)을 했는데 방망이가 부러졌다."라는 부분이다.

그리고 1744년 존 뉴베리(John Newbery, 1713~1767)라는 동화작가가 쓴 영국 그림동화책 <작고 귀여운 포켓북(A Little Pretty Pocket-book>[9]43페이지를 보면, 세 명의 소년이 각자 말뚝 같은 것 앞에 서 있고 그 중 한 명이 배트를 휘두르고 있는 삽화와 함께 "어린 K가 베이스볼을 하네. 공이 소년에게서 정해진 기둥까지 날아가네. 그리고 즐거움을 안고 돌아가네."[10]라는 글귀가 보인다.

이 뿐만이 아니라 1748년 웨일스 공작 해리슨 터너가 일요일에 사우스위든 백작과 베이스볼을 하자는 편지를 보낸 기록 등 영국에서는 베이스볼이란 이름이 우리가 원조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상당히 많다. 도저히 미국에서 조작을 한다고 해도 이보다 더 오래된 기록을 만들 수가 없거니와 이 당시 미국이란 나라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행여나 17세기 초기에 미국에 온 이민자들의 기록이라며 조작한다고 해도 결국은 당시 이민자들은 주로 영국에서 온 사람들인만큼 야구의 영국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자폭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미 베이스볼이란 이름은 깊게 자리잡아서 도저히 이름을 새롭게 바꿀 수도 없는 상태였기에, 메이저리그 측도, 명예의 전당도 베이스볼이란 이름이 영국에서 유래된 사실만큼은 이미 20세기 초부터 마지못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5. 2000년대 와서 수정된 미국야구 기원설

그러나 2000년대 와서 메이저리그와 명예의 전당도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앞서 나온대로 미국의회조차도 인정했음에도 미국야구계가 외면하니 분노한 카트라이트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가며 계속 반론했고 더블데이 집안 후손들 또한 엉터리 공로로 이렇게 꽃다발을 받아야할 필요가 없다며 메이저리그에게 계속해서 시정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위에 나온 무수한 나라들의 비슷한 경기 및 오래된 규칙과 비슷한 점 때문에 미국이 죄다 만들고 죄다 규칙을 창안했다고 억지를 부릴 수도 없었다. 인터넷도 활성화되면서 결국 명예의 전당도 이전에 더블데이와 미국 기원이라고 새겼던 글귀를 무수한 스포츠들이 기원설이 있고 현대 야구는 더블데이가 아니라 알렉산더 카트라이트가 창시자라고 비로소 글을 뜯어고치며 꼬리를 내려야 했다. 50년이나 배쨌다

야구광으로 유명했던 스티븐 제이 굴드[11]는 살아생전 더블데이 야구기원설을 무시하면서 이렇게 깠다.
사람은 정확한 증거와 자료를 믿지 않고 그저 신화만 믿고 그것으로 거짓 조작으로 내세우기 마련이다. 종교도 그렇고 야구조차 그러고 있다.[12]
하지만 지금도 미국 야구계에서는 여전히 이 더블데이와 미국 기원설을 믿고 싶어한다. 바로 1998년부터 2013년까지 MLB 커미셔너로 재임했던 버드 셀릭만 봐도 알 수 있다. 지난 2010년 버드 셀릭은 "나는 여러 역사학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는데 더블데이의 미국기원설을 믿는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 미국 고고학자, 역사학자, 더불어 스포츠컬럼니스트인 존 폭스는 "아직도 미국에서는 야구가 1839년 더블데이라는 미국인이 창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더라."라며 비아냥거렸고 샐릭의 이 말을 두고 "대관절 그 역사학자가 누군지나 공개해라, 십자군전쟁이 위대한 성전이라고 떠벌리는 자칭 역사학자 같은 작자는 아니겠지?" 라고 샐릭을 깠다. 환빠류?

그리고 위에 나온대로 야구농구도 있지만와 더불어 미국 스포츠의 자존심으로 자처하는 미식축구계는 대놓고 비웃었다. 2006년 NFL에서 리그 홍보책자를 내면서 "미식축구는 럭비나 무수한 스포츠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걸 미국에서 새롭게 다르게 발전했기에 그야말로 미국의 역사와 미국의 자존심이다. 어디처럼 엉터리 조작과 억지로 미국의 자존심 운운하지 않는다."라고 통렬하게 미국 메이저리그와 야구계를 깠다.

6. 결론

위에 나온대로 이젠 메이저리그 측이나 명예의 전당도 야구는 오래전부터 전해오던 많은 여러 스포츠 영향을 받은 걸 미국에서 현대야구로 개편한 것으로 쓰고 있다.

6.1. 세계화의 실패 원인

이에 대하여 존 폭스는 쓸데없는 자존심을 위하여 억지를 부리다가 되려 야구의 세계화에도 타격을 준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나마 이제라도 사실대로 바로잡은 게 다행이긴 하지만. 100년전 미국이 야구는 미국이 원조이며 모든 걸 미국이 만들어냈다는 고집으로 세계 각국에서 야구에 대한 반감을 심어준 것이 야구를 미국만의 스포츠로 만들었다는 논리였다. 세계 여러 나라에 존재하는 비슷한 구기종목에 대해서, 당신들이 하는 그런 놀이를 미국에서 현대적으로 개량한 게 야구라는 식으로 그 나라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주면서 각국의 유사 야구를 즐기던 사람들에게 야구 용품도 지원하고 그랬더라면 세계에서 야구의 위상은 지금과 전혀 달라졌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1890년대 미국 선발팀이 최초로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야구 경기를 할 당시 유럽 각지에서 반응은 "우리가 하는 거랑 비슷하네?"라며 반가워 하는 것이 주를 이뤘다. 이후로도 유럽이나 여러 나라에서 야구 시범경기가 열렸을 당시 유럽인들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예를 들어 1924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뉴욕 자이언츠가 프랑스에서 시범경기를 진행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열광했고 이는 프랑스 야구협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상식적으로 미국이나 유럽이나 사실상 동일한 문화권인데 미국인들이 재밌어 하는 걸 유럽인들이라고 무조건 배척할 리는 없다. 어차피 공을 손으로 주고 받고, 막대기 같은 것으로 공을 치고 하는 놀이야 어디에나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특별히 야구에 반감을 가질 만한 이유가 있지 않는 이상.

축구의 경우, 영국 군인들이나 선원, 상인들이 근대 여러 나라로 가서 축구하는 걸 현지인들이 '쟤들도 우리가 하는 공놀이를 하는구나' 하는 식으로 친숙하게 받아들여 금방 현지에 전파될 수 있었고, 바로 이 점이야말로 축구 세계화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서는 축구를 칼초(calcio)라고 부르고 이는 여러 축구 구단 이름에도 반영되어 있는데, 사실 원래 칼초라고 불렸던 종목은 영국인들이 19세기에 규칙을 정립한 어소시에이션 풋볼이라는 물건과는 기원적으로 뿌리가 같은지조차 불분명한, 별개의 스포츠다. 특히 피렌체 지역에 전래되는 '칼초 스토리코 피오렌티노' 같은 것은 도대체 공을 갖고 한다는 것 말고 축구라고 부를 만한 부분이 뭐가 있나 싶을 정도로 근대 축구와는 이질적이다. 하지만 19세기 이탈리아인들은 영국인들이 보여주는 football을 자신들이 즐기던 칼초의 한 방식으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도입된 지 10년도 안되는 1898년에 이미 전국 선수권 대회가 개최될 정도로 성행하게 되었다. 영국인들이 축구에 대해서 '영국만의 것'임을 강조하며 오만한 모습을 보였다면 일어나기 힘들었을 일이다.

남아시아 지역에서 크리켓이 가진 위상을 보더라도, 장비가 많이 필요하다느니 룰이 복잡하다느니 하는 것은 야구 세계화 실패의 근본 원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6.2. 반론

하지만, 위의 설명은 비슷한 기원을 가진 크리켓이 세계화에 실패한 것[13]이나, 반대로 축구농구, 배구가 세계화에 성공한 이유를 설명하기엔 설득력이 부족하다.

농구야구처럼 미국이 원조임에도 불구하고, 냉전 기간 중에 유럽에 대대적으로 보급되었으며, 심지어 철의 장막 반대쪽의 소련 등 동구권에서도 그랬다.[14] 그 결과,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축구 다음가는 국민 스포츠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NBA 다음으로 시장성이 큰 프로 농구 리그가 스페인 프로농구 리가 ACB이며, 그리스러시아에서는 프로리그나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마다 농구장에 관중들이 꽉 들어차는 상황이다. 아프리카도 의외로 농구에 관심을 쏟는 나라들이 많다. 이는 탄자니아케냐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는 한국인들이 쓴 책에서도 언급한 바로는, 집 근처 공터에 우연히 고물상에서 거저 얻게 된 림을 나무에 못질하여 두었더니만, 동네 청년들이 엄청 몰려와 덩크 슛도 하면서 농구를 신나게 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고 한다.

배구 같은 경우는 유럽,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상당수 국가에서 인기 스포츠의 끝자락 정도를 차지하는 준 메이저 종목이다. 물론 농구와 달리 아프리카에서는 인지도가 매우 부족하지만, 그래도 말리노우모리 케이타, 우간다다우디 오켈로 등의 선수가 아프리카 대륙 출신으로서 한국 프로배구에서 활약하는 선수를 배출할 정도의 보급은 이루어진 상태다. 우리가 아프리카 출신의 야구인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떠올려 보라.

그리고 이렇게 세계화된 미국 스포츠[15]와 야구와 결정적인 차이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미국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똑같이 세계화에 성공한 축구와 농구, 배구의 공통점, 그리고 이들 스포츠와 야구의 차이점은 단연 규칙의 단순/복잡성이다.

룰을 세부적으로 파고들면 어려운 것은 어느 종목이나 똑같지만, 야구는 기본적인 경기 운영부터 직관적인 이해가 어려워서 애초에 진입장벽이 너무 높다. 기본 규칙이 간단하기로 유명한 축구의 경우, 공을 발이나 머리로 골대 안에 집어넣으면 득점이란 것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농구 역시 공을 던져서 바스켓 안에 집어넣으면 득점이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누가 따로 설명해 주지 않아도 대번 알 수 있다. 로테이션이란 게 있어서 축구나 농구에 비해 기본적인 경기 운영을 이해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배구만 해도, 공을 네트 위로 넘겨서 상대 코트에 떨어뜨거나 상대 선수 맞춰서 선 밖으로 나가게 하면 득점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반면에 야구는 점수를 어떻게 내는지부터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야구가 초심자에겐 어렵니 해도 그래 봤자 스포츠지 심오한 과학 이론이 아닌만큼 맘 먹고 시도하면 이해가 아주 어려운 것은 아니다. 야구의 득점 방식도 '출루한 선수가 홈베이스를 밟으면 1점'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야 있다. 하지만 타자가 출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출루한 선수는 어떤 식으로 움직여서 홈에 돌아올 수 있는지를 알아야 야구의 득점 방식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지 딸랑 저것만 안다고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이해하는 데만 해도 이런저런 설명이 잔뜩 붙게 된다. 그러므로 어지간히 야구에 노출되어 있는 환경이 아닌 이상, 야구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룰을 익히다 흥미를 잃을 가능성이 크다.

정리하자면, 이해하기가 아주 어렵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구기 종목에 비해 직관적이지 못하고, 점수를 내기까지 여러 단계와 조건이 있는 것이 진입장벽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또 당장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어린이, 청소년들이 야구를 즐기는 것도 쉽지 않다. 야구는 다른 스포츠에 필수 장비가 많은 편이기 때문이다. 축구야 공 하나와 골대만 있어도 되지만, 야구는 아무리 약식으로 하려고 해도 배트와 글러브 정도는 있어야 한다.

이렇게 그냥 눈으로 보기만 해서는 뭐가 뭔지 모르겠고 직접 하려고 해도 준비할 게 많은 스포츠가 대중화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미국이야 애초에 스포츠의 상업화란 것이 야구에서 시작했으니 시장 선점을 바탕으로 대중에게 까다로운 룰을 '교육'시키는 것이 가능했지만, 축구를 비롯한 풋볼 계열의 스포츠가 자리잡은 유럽이나 기타 대륙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했고, 결국 보급에 실패했던 것이다.

야구보다도 기원이 오래된 크리켓영연방 국가들만의 스포츠가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16]. 크리켓이 영연방 국가들만의 스포츠가 된 것은 순전히 이들 국가들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까닭에 그 영향을 깊게 받은 탓이 크다. 그래서 똑같은 영연방 국가라도 모잠비크와 같이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 나라에서는 크리켓은 듣보잡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야구도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인접국이나 위성국, 식민지 및 보호국에만 전파되어 인기를 끌었는데, 역시 미국의 영향을 짙게 받았음을 간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미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적이 있던 필리핀은 식민지 시기만은 못해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야구를 즐기는 상황이다.

게다가 운때도 맞지 않았다. 야구가 유럽에서 잠깐 인기를 끌었을 때가 1920, 30년대 무렵이었는데, 당시는 그 유명한 세계 대공황제2차 세계 대전을 앞두고 있었을 시기다. 대공황과 세계 대전이라는 2연타를 얻어맞은 다음의 유럽은 전통적인 인기 스포츠인 축구의 인기도 잠시 주춤하는 상황을 맞았는데, 이제 막 소개된데다가 위에서 언급한대로 진입장벽이 높기까지 한 야구라면 전후 복구에 여념이 없는 유럽인들한테 강하게 어필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17] 더군다나 각국의 야구리그가 세미프로나 아마 상태에서 겨우 태동기를 맞을 때에 이런 불운을 겪으면서 야구 인기가 주춤하게 된 것이다. 반면에 농구유럽에서 경제발전이 한창이던 냉전 시대에나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해서 그와 같은 불운을 겪지 않았다[18].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메이저리그 사무국을 위시한 미국 측이 종주국 주장을 고수하며 각국 사람들에게 거리감을 준 것이 야구의 세계화 실패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더라도, 이는 부차적인 원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역시 야구 종목 특성에서 찾아야 함이 옳다.


[1] 2090년이 되어야 미국은 겨우 건국 300주년이 된다. 많이 봐줘서 독립선언일을 기준으로 잡아도 2021년 기준으로 아직 250주년도 되지 않았고, 300주년은 2076년으로 한참이나 멀었다. 이 때문에 애국심이 큰 일부 미국인들과 국가 브랜드 이미지 향상을 위해 힘쓰는 행정부는 조금이라도 타국 것이라도 출신성분이 애매한 것들이 있다면 전부다 미국의 것으로 포함시키려는 경향이 있다.[2] NBA 공식 농구공으로 유명한 스팔딩(Spalding)의 창립자.[3] 통산 기록 252승 65패 평균자책 2.13에 투구이닝 2886.1이닝이다. 메이저리그 풀타임 시즌은 딱 6시즌 뛰면서 저런 기록을 쌓은 것. 물론 데드볼 시대 이전 야구의 초창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기록이다.[4] 여담인데 이 스폴딩 사는 야구공 발전 뿐 아니라 농구공 개발 및 발전에도 기여했으며 1894년에 농구공을 개발했으며 농구리그 공인구로 여럿 쓰였다. 가장 최근인 1983~2007년까지 NBA 리그 공인구로 스폴딩 농구공이 쓰인 바 있다.[5] 채드윅은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귀화한 사람이다. 이래서 영국 기원설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 사람 또한 현대 미국야구에서 뺄 수 없는 거물로서 오늘날 통용되는 야구 기록법을 창안, 체계화하는 등 미국 야구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다. 더불어 1860년대에 현대 야구공과 비슷한 야구공 개발을 한 인물로서 미국 야구역사에 크나큰 영향을 끼쳐 그 또한 스폴딩,카트라이트와 마찬가지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6] 물론 이 모든 게 단번에 후다다닥 나온 게 아니라 30년 넘게 하면서 이거 바꾸고 새롭게 추가하고(물론 이 항목보면 세계 여러 나라 야구랑 비슷한 걸 이들도 참고한 게 아닐까 생각도 들지만) 이렇게 하여 1876년 메이저리그 개막으로 이어진 것이다.[7] 올드캣과 팁 캣에서는 공을 캣이라고 불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진짜로 고양이를 공으로 쓴 게 아니다[8] 쿠바 야구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의 글러브와 배트를 보면 batos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도 이를 기리기 위해서다.[9] 현대적인 아동 그림동화책 원조로 평가되는 책이다. 미국에서 1922년부터 수여하는 아동문학상인 뉴베리 상도 이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안데르센 상과 더불어 세계적인 아동문학상으로 알아준다.[10] The little k Play. Base-Ball. THE Ball once struck off, Away flies the Boy To the next destin'd Post, And then Home with Joy.[11] 보통 야구광이 아닌데 진화론 서적풀하우스에서 한 챕터를 할애해서 '왜 요즘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4할을 넘기 힘든가'를 설명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참조.[12] 출처는 존 폭스가 쓴 <더 볼>[13] 다만 영연방 국가에서 세계화를 이뤄냈다. 이원복현대문명진단에서 크리켓에 대해 영연방 위주로 퍼뜨리고 영국의 자랑이라고 한 탓에, 유럽에서는 프랑스를 비롯한 나라들에게 반발만 사서 세계화가 미흡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이 때문에 영국 이민시험에 크리켓 과목이 들어갈 정도다. 하지만 우습게도 영국이 종주국이라고 뻐기는 럭비프랑스에서도 인기가 좋고 프랑스 럭비는 럭비 월드컵 준우승도 3번이나 해본 세계적인 럭비 강호이다. 덤으로 럭비 월드컵에서 유일무이하게 영연방이 아닌 나라로 결승에 올라간 나라가 프랑스다.[14] 심지어 미국이라면 이를 가는 북한이나 중국에서도 농구의 인기가 높았다.[15] 배구는 야구, 농구, 미식축구 등과는 다르게 미국 스포츠라는 인식이 희미하지만, 엄연히 미국인 윌리엄 모건이 창안한 미국 스포츠다. 사실 인도어 리그 정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일 뿐, 생활체육으로서 인기, 비치 발리볼의 인기, 미국 국대의 전력 등을 감안하면, 미국은 지금도 여전히 세계 배구계를 선도하는 나라라 할 수 있다.[16] 크리켓야구와 규칙은 매우 비슷한데, 역시나 기본적인 룰을 이해하는데 애로사항이 많다고 지적받고있다.[17] 같은 시기 미국축구세계 대공황의 타격을 받고 몰락했다.[18] 배구도 사정은 비슷했다. 똑같은 미국 기원 스포츠이면서도, 한창 경제가 발전하던 시기에 처음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튀르키예같은 일부 국가에선 축구에 이은 제2의 국민 스포츠로 자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