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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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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산하
스포츠단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B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페메니노
파일:아틀레티코 오타와 로고.svg 아틀레티코 오타와 | 파일:아틀레티코 산 루이스 로고.svg 아틀레티코 산 루이스
선수단 스쿼드 | 스쿼드(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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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역대 감독 | 엔리케 세레소 | 미겔 앙헬 힐 마린 | 안드레아 베르타
문화 응원가
더비 매치 파일:레알 마드리드 CF 로고.svg 데르비 마드릴레뇨
구단 시설 경기장 에스타디오 메트로폴리타노 데 마드리드1923~1966 | 에스타디오 비센테 칼데론1966~2017 | 시비타스 메트로폴리타노2017~현재 | 에스타디오 세로 델 에스피노B팀
훈련 시설 시우다드 데포르티바 아틀레티코 데 마드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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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단

1903년 4월 26일에 마드리드에서 공학을 배우던 바스크인 3명이 모여 창단했는데, 이 과정은 바르셀로나의 RCD 에스파뇰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1] 마드리드로 돈을 벌러 이주한 바스크인들이 바스크 지역에 있는 축구 클럽들을 응원하러 매주 긴 거리를 이동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응원했다. 마드리드에 위치해 있지만, 응원하는 팬층이 대부분 카스티야인들이 아니기도 하고 창단 목적이 카스티야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마드리드에서는 그다지 사랑받지 못하는 클럽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아틀레틱의 위성구단으로 있었다.

바스크인들이 세운 구단이기에 구단명이 초창기에는 Atlético de Madrid가 아닌 Athletic Madrid였다. 스페인과의 차별화 및 분리독립을 추구하는 바스크인들의 특성상 영어로 구단명을 지은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바스크 민족의 구단'이라는 정체성이 사라져가고 '마드리드 연고지의 구단'이라는 정체성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구단명을 영어에서 표준 스페인어로 변경하였다. 현재는 카스티야인이 팬의 대부분이며 스페인 현지 팬들도 웬만하면 마드리드 거주자들이다. RCD 에스파뇰과 비슷한 경우이다.[2]
파일:Atleticomadrid_History.jpg
유니폼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아틀레틱 클루브 산하에 있던 시절 아틀레틱 클루브의 파란색과 흰색의 줄무늬 상의와 파란색의 하의 유니폼을 그대로 착용하였다.[3] 이 동일한 유니폼 전통은 1921년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아틀레틱 클루브에서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나서도 이어진다. 그러나 1910년, 아틀레틱 클루브 측에서 블랙번의 유니폼을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차선책으로 사우스햄튼 FC의 유니폼을 스페인으로 가져온 아틀레틱 클루브는 아예 팀 유니폼 자체를 사우스햄튼처럼 빨갛고 흰 줄무늬의 상의와 검정색 바지로 바꾸기로 한다.[4]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빨갛고 흰 줄무늬 상의만 받아들이고 파란색의 하의는 유지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는 현재 팀 컬러의 바탕이 되었다.

2. 20세기

1939년 사라고사의 아비아시온 나시오날과 합병해 '아틀레틱 아비아시온 데 마드리드'로 이름을 변경했고, [5] 1941년에 독재자 프랑코 총통이 스페인어만 쓰도록 강요해서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 데 마드리드'가 됐다. 1947년 현 명칭으로 개칭한 후 점차 상승세를 보여 1949/50, 1950/51 시즌에 라 리가를 연속으로 제패했고, 1961년에 유러피안 컵 위너스 컵을 우승하는 등 1974년까지 리그 우승 5번, 코파 델 레이 우승 4번, 유럽대항전 우승 1회를 각각 기록했다. 루이스 아라고네스 등이 이 시기를 빛내기도 했다.

1974년에 아라고네스가 감독으로 돌아와 2003년까지 총 7번이나 감독직을 왔다갔다하며 팀의 체계를 다시 다듬기도 했으나, 줄곧 연고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 CF와 동부 지역의 FC 바르셀로나에 가려져 조용히 지내다가 85년 컵위너스 컵 준우승[6]을 거두기도 했으며 그나마 코파 델 레이는 몇 번 우승했다. 그 사이 비센테 칼데론 회장이 1987년에 타계하고 그 자리에 헤수스 힐[7]이 선임되었다.

1995년 라도미르 안티치 감독 부임 후, 임기 첫 시즌이던 1995/96 시즌에 19년 만에 프리메라 리가 우승을 차지하며 팬들을 기쁘게 했으나, 이후 중상위권에 머물다 99-00 시즌에 들어 충격의 강등을 당한다. 이 당시 멤버 수준은 이름 값만 따지면 강등이 아니라 오히려 우승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8] 네덜란드 출신의 스트라이커 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9], 스페인 대표팀의 키코, 바라하, 발레론 그리고 카프데빌라, 아르헨티나 출신의 솔라리, 파라과이 대표팀 주전 수비수 아얄라와 가마라 콤비에 스페인 No. 2 골키퍼 몰리나 같은 선수들에 감독은 클라우디오 라니에리였다. 원인은 탈세로 징역을 산 경험도 있었던 막장 구단주 헤수스 힐에게 있었는데, 방만한 투자에 손실을 입은 구단주가 선수단의 주급을 일방적으로 체납하면서 선수단 분위기가 와해 지경에 이르렀던 것.

3.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 부임 이전의 시기

2000/01 시즌에는 2부리그인 세군다 디비시온에서 4위를 기록하며 승격에 실패했으나, 루이스 아라고네스 감독이 7번째로 감독직에 복귀한 후 페르난도 토레스의 맹활약에 힘입어 세군다 디비시온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승격에 성공했다.

2002/03 시즌에는 헤르만 부르고스와 페르난도 토레스의 활약으로 승점 47점을 기록해 오사수나와 동률을 이뤘으나, 골득실에서 밀려 12위로 마무리했다. 당시 득점은 51점으로 나쁘지 않았으나, 56점을 실점했을 만큼 수비가 빈약했다.

2003년에 팀 지휘봉을 이어받은 그레고리오 만사노 감독은 아르헨티나 리버 플레이트에서 마티아스 레퀴를 1년 임대 영입했고, 라치오에서 디에고 시메오네를 복귀시킨 후 말라가에서 키키 무삼파까지 영입하며 포부를 드러냈지만 중위권만 맴돌 뿐이었고, 결국 만사노 감독이 1년만에 경질된다.

2007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토레스를 리버풀 FC로 떠나보낸 뒤 비야레알 CF로부터 유러피언 골든슈와 피치치상[10]을 수상했던 스트라이커 디에고 포를란을 영입함과 동시에 벤피카 출신의 시망 사브로사, 아스날 출신의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를 영입하는 등 활발한 이적시장을 보냈다. 이후 07/08 시즌 하비에르 아기레 감독의 지휘 아래 리그를 4위로 마무리하며 1996/97 시즌 이후 팀의 두번째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성공한다.[11]

2008/09 시즌에는 전반기에 챔피언스리그 16강 진출에 성공하고 리그에서도 가공할만한 공격력을 앞세워 챔스권을 수성하는듯 했으나 2009년 들어 성적 부진으로 인해 아기레 감독을 경질했고 아벨 레시노 감독을 선임했다. 팀의 주전 공격수인 디에고 포를란-세르히오 아구에로로 이루어진 투톱 라인이 수준급의 활약을 보여주면서 극심한 수비불안에도 불구하고 발렌시아 CF, 비야레알 CF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리그 4위를 달성해 2년 연속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성공했다. 포를란은 엄청난 골결정력을 보여주며 라리가 득점왕을 달성했고, 아구에로는 리오넬 메시와 함께 아르헨티나의 신성이라고 불리며 상위 팀들이 이적시장마다 노리는 선수가 되었다.

3.1. 2009/10 시즌


2009/10 시즌에는 아구에로, 포를란 같은 수준급의 선수들을 갖고 있으면서도 최악의 수비력 때문에 한때 강등권까지 내려가는 등 꽤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중 챔피언스 리그 조별예선에서 첼시 FC에게 4-0의 스코어로 패배하면서 아벨 레시노 감독이 경질되고 키케 플로레스 감독이 선임되게 된다.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에서 3위의 성적을 거두며 UEFA 유로파 리그로 진출하게 되었고 32강부터 스포르팅 CP, 갈라타사라이 SK, 발렌시아 CF, 리버풀 FC를 연달아 꺾으며 결승까지 진출하게 된다. 코파 델 레이에서 결승전까지 올라갔으나 세비야 FC에 2-0으로 져서 준우승했다. 우승팀 세비야가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확보한 덕분에 리그에서 9위로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시즌 유로파리그 진출권은 확보된 상태였다.[12]
파일:UEFA 유로파 리그 로고 (2009-2012).svg
2009-10 UEFA Europa League Final
2010. 05. 12
폴크스파르크슈타디온 (독일, 함부르크)
파일: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로고(1970~2016).svg
2 : 1
파일:풀럼 FC 로고.svg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풀럼 FC
32' 디에고 포를란
116' 디에고 포를란
파일:득점 아이콘.svg 37' 시몬 데이비스
Man of the Match: 디에고 포를란
결승전에서 연장전까지 접전을 펼치며 풀럼 FC를 2-1의 스코어로 꺾고 구단 첫 UEFA 유로파 리그 우승을 달성하였다.[13][14]

3.2. 2010/11 시즌


2010년 8월에는 유로파리그 우승팀의 자격으로 09/10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인 인테르UEFA 슈퍼컵에서 만나게 되었고 레예스아구에로의 활약으로 팀의 첫번째 슈퍼컵 우승을 경험했다.
파일:UEFA 슈퍼컵 로고 (2006-2012).svg
2010 UEFA Supercup
2010. 08. 27
스타드 루이 2세 (모나코, 퐁뷔에유)
파일: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엠블럼(2014~2021).svg
0 : 2
파일: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로고(1970~2016).svg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파일:득점 아이콘.svg 62'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
83' 세르히오 아구에로
Man of the Match: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

2010/11 시즌에는 실망스러운 시즌을 보내며 리그 7위에 머물렀고 코파 델 레이 8강전과 UEFA 유로파 리그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충격적인 결과[15]로 인해 지난 시즌 트로피를 들어 올렸던 키케 플로레스 감독이 시즌을 마치자마자 경질됐다. 그레고리오 만사노 감독이 대체 감독으로 복귀했다. 시즌 종료 후에는 팀의 핵심이었던 세르히오 아구에로디에고 포를란[16]이 각각 맨체스터 시티 FC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이적하게 되고, 2시즌 동안 골문을 지켰던 다비드 데 헤아 또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한다.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티보 쿠르투아첼시 FC에서 임대 영입했고 갈라타사라이 SK에서 활약하던 아르다 투란에 이어 4000만 유로라는 엄청난 금액으로 유로파리그에서 무려 17골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우며 득점왕을 차지하고 미니 트레블을 이끈 라다멜 팔카오FC 포르투에서 영입한다.

2011/12 시즌 도중인 2011년 12월, 만사노 감독 또한 리그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으로 중위권에 맴도는 성적부진으로 경질되고 후임 감독으로 현재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입지를 바꿔 놓은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이 부임한다.

4. 디에고 시메오네의 시대

4.1. 2011-12, 2012-13 시즌

11/12 유로파 리그 48강 본선 조 추첨에서 우디네세 칼초, 스타드 렌 FC, 셀틱 FC와 같은 조를 이루게 되었다. 이후 조 1위로 32강에 진출하며 SS 라치오와 맞붙게 되었다. 원정 1차전 경기에서 3:1, 홈 2차전 경기에서 1:0 승리를 거두며 종합 스코어 4대1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다. 16강 상대인 베식타스 JK와의 경기 또한 홈 1차전에서 3:1으로 승리했다. 그리고 원정에서도 3:0으로 완승을 거뒀다.

8강 상대는 하노버 96으로 추첨이 이뤄졌다. 1,2차전 2경기 모두 2:1로 승리하며 4강에 진출해 같은 리그의 발렌시아 CF와 결승 진출을 다투게 되었다. 1차전 홈 경기에서 4:2로 승리를 가져오면서 결승 진출에 유리해졌고, 이어진 원정 2차전에서도 1:0으로 승리하면서 팀 역사상 두번째로 유로파리그 결승에 진출해 같은 리그 팀인 아틀레틱 클루브와 결승전을 치르게 되었다.
파일:UEFA 유로파 리그 로고 (2009-2012).svg
2011-12 UEFA Europa League Final
2012. 05. 09
아레나 나치오날러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파일: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로고(1970~2016).svg
3 : 0 파일:아틀레틱 클루브 로고.svg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아틀레틱 클루브
7' 라다멜 팔카오
34' 라다멜 팔카오
85' 지에구
파일:득점 아이콘.svg
Man of the Match: 라다멜 팔카오
유로파 리그 결승전에서는 점유율에서 밀렸지만 라다멜 팔카오가 전반에 첫 두 슈팅을 완벽하게 골로 연결시키며 승기를 잡았고 지에구가 85분에 쐐기골을 넣으면서 초대 유로파 리그 챔피언다운 모습을 보였다.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던 페르난도 요렌테와 비교되는 팔카오의 결정력, 지쳐있던 빌바오의 수비수와는 달리 탄탄한 수비 집중력을 보였던 아틀레티코의 경기력이 빛나는 경기였다.

아틀레티코는 2시즌만에 유로파리그 트로피를 다시 들어올렸고, 팔카오는 FC 샬케 04클라스얀 휜텔라르를 제치고 2년 연속 유로파 리그 득점왕이 되었다.

11/12 시즌 리그에선 38라운드까지 4위인 말라가 CF와 경쟁했지만 결국 마지막 라운드에서 말라가가 스포르팅 히혼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아쉽게 5위에 머물게 되었고, 다음 시즌도 유로파 리그 진출로 만족해야 했다.
파일:UEFA 슈퍼컵 로고 (2006-2012).svg
2012 UEFA Supercup
2012. 08. 31
스타드 루이 2세 (모나코, 퐁뷔에유)
파일:첼시 FC 로고.svg 1 : 4
파일: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로고(1970~2016).svg
첼시 FC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75' 게리 케이힐 파일:득점 아이콘.svg 6' 라다멜 팔카오
19' 라다멜 팔카오
45' 라다멜 팔카오
60' 주앙 미란다
Man of the Match: 라다멜 팔카오

모나코에서 열린 UEFA 슈퍼컵11/12 시즌 챔스 우승팀이었던 첼시 FC와 붙게되었고, 팔카오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팀 통산 두번째 슈퍼컵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12-13 시즌엔 리그 15 라운드까지 FC 바르셀로나에게 3점차로 밀린 2위를 기록하면서 17년 만의 우승을 노릴 기회가 온듯 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에게 1:4로 대패하며 차츰 밀리기 시작하더니, 24 라운드에는 1위 바르셀로나와 무려 12점차로 밀려 있다. 설상가상으로 유로파 리그에서는 32강에서 FC 루빈 카잔에게 1승 1패를 기록하고 원정다득점 원칙에 의해 탈락했다. 그 뒤로 레알 마드리드 CF에게 추격을 허용하면서 3위로 내려갔지만 36 라운드까지 승점 72점으로 남은 2경기랑 상관없이 3위가 확실시 되면서 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확정지었다.

파일:_P7Q0783.jpg

2013년 5월 17일 열린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 CF를 연장 접전 끝에 2:1로 누르고 17년 만의 코파 델 레이 우승에 성공했다. 참고로 이 승리가 21세기 들어 레알 마드리드를 누른 첫 승리였다.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이 부임한지 약 1년 6개월만에 우승 트로피를 3개[17]나 들어올리며 리그 우승에 대한 기대를 갖게하였다. 그리고 다음 시즌에 모두를 놀라게 한 사건이 일어난다.

4.2. 2013-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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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2014-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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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2015-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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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2016-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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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2017-1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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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2018-1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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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2019-2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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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2020-2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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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2021-2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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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2022-2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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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2023-2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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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묘하게도 분명 소수민족인 바스크인들이 스페인 축구에선 상당한 지분을 차지한다.[2] 출처 : 세계 최대 규모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페이스북 팬그룹 Atlético de Madrid[3] 당시 아틀레틱은 블랙번 로버스 FC에서 유니폼을 일정량 지급받았다고 한다.[4]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인 이유가 당시에 빨간색과 흰색의 조합이 가장 저렴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매트리스를 제작하고 남은 천을 축구 유니폼으로 쉽게 변환할 수 있었기 때문. 그리고 이는 팀의 별명인 Los Colchoneros(매트리스 제작자)의 기원이 되었다.[5] 아비시아온 나시오날(Aviación Nacional)은 1939년 스페인 공군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들은 1939-40 시즌 동안 프리메라 디비시온에 자리를 약속받았으나, RFEF에 거절당해 합병상대를 찾던 중 레알 마드리드에 1차로 거절당하고 2차로 제안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제안을 받아들였다.[6] 우승은 FC 디나모 키예프[7] 1991~2002년까지 마르벨라 시장을 지내기도 했다.[8] 실제로 해당 시즌 코파 델 레이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면서도 강등되었다. 참고로 이때 우승은 에스파뇰이 차지.[9] 해당 시즌 리그 득점 2위로 24골을 기록했었다.[10] 라리가 득점왕[11] 오랜 유럽대항전 공백으로 인한 낮은 UEFA 점수 때문에 분데스리가의 강호 샬케 04를 3차 예선에서 만나 1차전 1:0 패배 후 2차전 4:0 대승으로 본선에 진출했다.[12] 다만 유로파리그에서 우승하면서 예선이 아닌 본선에 직행하게 됐다.[13] 기존의 UEFA컵이 유로파 리그로 개편된 첫 시즌의 우승이니 초대 챔피언의 칭호도 획득한 셈이다.[14] 여담으로 두 팀의 스폰서는 한국기업인 기아LG였다.[15] 그리스에서도 강팀 반열에 들지도 못하는 아리스에게 홈에서 패배한 것이 결정적이었다.[16] 포를란은 2010 월드컵에서 '자블라니 마스터'라 불리며 골든볼을 수상했던 활약이 무색하게 2010-11 시즌 내내 노쇠화가 왔는지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인테르에서도 활약이 그리 좋지 않아 1년 만에 브라질 리그 SC 인테르나시오나우로 이적해 유럽 무대에서의 커리어를 마감했다.[17] UEFA 유로파 리그, UEFA 슈퍼컵, 코파 델 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