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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수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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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colbgcolor=#bf1400> 창덕궁 수강재
昌德宮 壽康齋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건축시기 1785년 (창건)
1847년 (중수)
파일:창덕궁_낙선재_수강재_전경.jpg
<colbgcolor=#bf1400> 수강재[1]
1. 개요2. 역사3. 구조

[clearfix]

1. 개요

창덕궁 낙선재 권역에 있는 건물. 석복헌의 동쪽에 있다. 낙선재 권역에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이름은 태조# 시절 옛 수강궁 터였던 데에서 유래했다.

이 기사의 원문에서는 '태조조'라고 했지만, 수강재 영역이 예전에는 창경궁이었고, 창경궁의 전신 수강궁이 세종이 상왕 태종을 모셨던 곳[2]임을 감안하면 '태종조'가 맞는 듯하다. 단종도 즉위 1년차에는 누이의 사저에 살다가 이듬해에 수강궁으로 옮겼는데, 여기서 계유정난을 당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만다.

2. 역사

1785년(정조 9년)에 처음 지었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경궁자경전을 지으면서 공사하고 남은 자갈벽돌을 모아 가짜 을 만들었는데 이를 철거하고 지은 것이 수강재이다.

원래는 임금서재, 또는 세자공부하는 곳으로 지은 듯 하며, 순조 시기 효명세자대리청정을 할 당시 이 곳을 별당으로 사용했다. 그러다 헌종 때 이 일대에 낙선재를 지으면서 낙선재 권역으로 편입시킨 뒤 고쳐지었고 이후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머물렀다.

광복 이후 1962년에 일본에서 고종의 딸 덕혜옹주가 돌아온 뒤 1989년 4월 21일 서거하기 전까지 이 곳에서 살았다.

3. 구조


파일:동궐도 수강재.png}}} ||
<colbgcolor=#bf1400> 《동궐도》 수강재
낙선재보다 먼저 지은 건물이라 그런지, 자세히 보면 다른 낙선재 권역의 건물과 다르게 단청을 칠했던 흔적이 보인다. 《동궐도》에도 단청을 입힌 모습으로 나온다. 다만, 현재는 너무 색이 바래서(...) 쉽게 알아보긴 어렵다.
  • 한단 반의 장대석 기단을 설치한 뒤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팔작 지붕이고 홑처마 양식건물이다. 정면 6칸으로 동쪽에 대청을 두고 가운데에 온돌방을 두었으며 제일 서쪽 칸은 창고로 조성했다. 서북쪽에 온돌방이 더 있으며 이 서북쪽 온돌방을 통해 복도를 거쳐 석복헌으로 갈 수 있다. 제일 동쪽 칸은 행랑채와 통한다. 정면에서 볼 때 기준으로, 대청쪽 온돌방은 툇마루를 밖으로 내었으나 다른 온돌방은 툇마루를 막아놓고 창을 세웠다.
  • 창호는 낙선재, 석복헌과 달리 단순한 정(井)자 살과 띠살 창호로 꾸몄다.

파일:창덕궁 수강재 창고.png}}} ||<width=309>
파일:창덕궁 수강재 창고2.png
||
<colbgcolor=#bf1400> 수강재 동쪽 창고
수강재 동쪽에는 서향(西向)한 2채의 창고가 있다. 각각 지붕의 모양이 다르다. 한 채는 팔작지붕 형태이고, 다른 한 채의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그 북쪽엔 넓은 뜰이 있다. 그 곳에서 동북쪽을 바라보면 궁궐 지붕들이 보이는데 바로 창경궁의 건물들이다.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2] 조선왕조의 정궁은 경복궁이었지만, 태종은 왕자의 난이 일어나 스스로의 손으로 형제들을 주살했던 기억이 있는 경복궁에서 사는 것을 탐탁찮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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