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4-21 17:05:24

창덕궁 가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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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colbgcolor=#bf1400> 창덕궁 가정당
昌德宮 嘉靖堂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건축시기 1925년 / 1897년 추정[1] (창건)
파일:가정당.png
<colbgcolor=#bf1400> 가정당[A]
파일:가정당 현판.png
가정당 현판[A]

1. 개요2. 역사3. 구조4. 여담

1. 개요

창덕궁의 건물. 대조전 북서쪽에 있다. 현재 비공개 구역이다.

2. 역사

일제강점기인 1925년 6월 경에 지었다. 1925년 6월 27일 자 《시대일보》 기사에 따르면, "(순종)과 왕비(순정효황후)가 재미있게 소풍을 즐길 목적으로 이왕직에서 건축비 수만 원을 들여 창덕궁 후원에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매일신보〉 기사에는 "요사이 후원 높은 곳에 새로이 가정당이란 정자를 지었다."고 적혀있다.

원래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에 있었던 건물을 창덕궁으로 옮겼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고종실록》과 순종 때 제작한 듯한 〈경운궁중건배치도〉에서 경운궁 가정당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정당 역시 한자 표기가 '嘉靖堂'으로, 창덕궁 가정당과 같다.

경운궁 가정당은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다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이 경운궁 중건 공사를 할 때 지었으며 석어당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4] 1904년(광무 8년)에 경운궁 대부분 건물들이 불에 탔음에도 무사했고#, 고종의 장례 때도 활용되었다. 그러나 1928년에 경성부에서 발간한 《경성부도시계획조사서》에 실린 덕수궁[5] 항공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름도 같고 창덕궁 가정당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난지 3년 후에 나온 자료에 덕수궁 가정당의 존재가 사라진 것을 볼 때, 충분히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아직까지는 추측일 뿐이다.

3. 구조

  • 기본 몸체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총 10칸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이며 대청을 중심으로 좌, 우에 온돌방이 있다.
  • 남향이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이며, 합각은 벽돌로 마감했다. 지붕 끄트머리에는 용두를 올렸다.
  • 1고주 5량가 형태에 공포가 없는 굴도리집이다. 도리는 굴도리이며 소로가 온돌방 쪽 창방과 도리를 받쳐주는 형태이다. 대청 전면의 3칸짜리 툇마루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벽면에 모두 머름과 을 달았으며 대청 툇마루 안쪽에는 분합문을 달았다. 일반적으로 대청과 온돌방 사이에는 장지문이 달려있는데, 가정당에는 없다. 그러니까 대청과 온돌방을 구분하는 문이 없다.
  • 제일 아랫 부분에는 장대석으로 기단을 2단으로 쌓았으며 기단 상부에는 전돌을 깔았다. 계단은 정면 기단에 3단 짜리 3개와 좌우 기단에 각각 2단짜리 1개 씩 놓았다.
  • 온돌방 외벽의 하단부는 장초석이 기둥을 받치고 초석 사이에 벽돌로 방화벽을 만든 형태이다. 그러니까 기단과 방바닥이 바로 붙어있지 않다. 아궁이는 남쪽 기단 벽돌벽 가운데 하단에 있으며 굴뚝은 북측으로 15m 떨어진 곳에 있다.[B]
  • 건물 앞에는 잔디가 깔려있으며 서남쪽으로 20m 즈음 떨어진 곳에 한반도를 본떠 만든 연못이 있다. 현재는 물이 고여있지 않다.[B] 이외에도 건물 주변으로 군데군데 괴석과 다양한 나무를 심어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내고 있다.

4. 여담

  • 2011년부터 문화재청은 가정당을 소규모 회의장이나 교육장으로 쓸 수 있게 기업이나 단체 등에 개방하기로 했다. 단, 문화재 보존 및 관리에 영향이 없고 궁궐의 역사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 한해서이다. 2011년에는 9월 ~ 10월, 2012년에는 5월 ~ 10월에 개방했으며 2013년부터 현재까지는 4월 ~ 10월에 개방한다. 사용료는 첫 1시간은 50만 원, 추가 1시간 당 25만 원이다. 창덕궁 입장료는 별개로 내야한다.# 자세한 내용은 이 곳을 참조. 2019년부터는 다자녀 부모[8]의 경우 사용료가 50% 감면된다.#
  • 2014년 10월에 주얼리 회사 민휘아트주얼리는 가정당에서 열린, The history of 后에서 주최한 캠페인 〈왕후의 연회〉를 통해 해외 인사들을 초청하여 궁중 장신구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 2015년 5월 문화재청한국문화재재단에서는 궁중문화축전 기간 동안 〈궁궐愛서, 소중한 하루를 선물하세요〉라는 행사를 진행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대상으로 ‘효(孝, 효행)’, ‘우(友, 우정)’, ‘애(愛, 사랑)’를 주제로 한 사연을 공모했으며, 이 중 '효(孝)' 사연을 채택받은 사람에게 가정당을 대여해주었다.#[9]
  • 2021년 11월 9일부터 12일까지 문화재청에서 오전 11시마다 가정당에서 〈국립국악원과 함께하는 창덕궁 풍류〉 행사를 개최했다. 전문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대조전 권역을 거쳐 가정당에서 전통 궁중 무용을 관람하는 프로그램이었다.

[1] 덕수궁에서 옮겨온 것이 맞을 경우.[A]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창덕궁_대조전 권역》.[A]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창덕궁_대조전 권역》.[4] 완전히 새로 지은 건물은 아니고 정황상 기록과 건물의 칸수로 봤을때 경복궁 흥복전 일대의 부속건물인 다경합을 옮겨 지은걸로 추정된다.[5] 1907년 순종 즉위 후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B] 김두현 著, 《창덕궁 가정당》, 《建築士 = Korean architects 1983 no.9 = no.174》에 수록, 문화재관리국, 1983, p.65 ~ 70.[B] [8] 만 13세 이하 막내 포함, 자녀가 2인 이상인 부모.[9] '우'는 덕수궁 준명당, '애'는 창경궁 대온실 앞 정원을 대여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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