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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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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제1무임소장관과 제2무임소장관으로 분리 개편
(정무 담당: 제1무임소
경제 담당: 제2무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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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대한민국 제6대 무임소 장관
손도심
孫道心 | Son Do-sim
파일:손도심.webp
출생 1920년 10월 7일
경기도 수원군 (現 화성시) 서신면[1]
사망 1979년 8월 18일 (향년 58세)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6가 국립의료원
재임기간 제6대 무임소 장관
1959년 1월 30일 ~ 1960년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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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학력 한성상업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 / 학사)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3, 4
경력 전국학연중앙위원회 위원장
자유당 화성갑지구당 위원장
제6대 무임소장관
서울신문사 사장
자유당 중앙당 선전부위원장
한국장기협회 회장
}}}}}}}}}
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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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언론인이다.

2. 생애

1920년 10월 7일 경기도 수원군 서신면(현 화성시 서신면)에서 태어났다. 한성상업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 총학생회장으로서 고려대학교의 이철승과 함께 전국학생연맹에 속하여 신탁통치 반대를 중심으로 한 우익 학생 운동을 주도했다. 그리고 전국학생연맹에서는 중앙위원장을 역임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대한 학도 의용대 호국단 총본부 대장을 맡으며 휘하에 김영삼 등을 두었다.

1954년 잠시 단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강사를 지내다 같은 해 치러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기도 화성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1공화국 정치인이자 자유당 소장 강경파의 한사람으로 당원의 이론무장에 크게 기여 하였다. 1956년 미국 국무성 초청 국회의원 시찰단으로 민관식, 박영출, 정준모, 황성수와 함께 95일간 미국시찰을 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자유당의 입으로 불리며 황성수 등과 주요 연설 논객으로 활동하였다.

1959년 서울신문 사장을 겸직하였다.

1960년 4월 11일, 자유 소속 국방의원이던 손도심 의원은 국회 본본회의 시작과 더불어 신상발언을 신청해 훗날 대통령이 되는 전두환장인어른대한민국 육군본부 경리감 이규동 준장 및 헌병감 이규광 준장의 부정부패를 폭로하였다. "육군 헌병관 이규광 준장과 그의 친형인 육본 경리감 이규동 준장이 막대한 국고를 유용하고, 부정 사실을 은폐하고, 부정 축재를 자행하고 군을 혼란시키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규동은 훗날 대통령이 되는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의 부친이다. 손의원은 이와 더불어 이들의 부정을 제보한 영관급 장교들의 투서와 증거서류 원본을 공개했다. 그 증거서류에는 거액의 예금통장과 각종 영수증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규동씨가 장군 진급을 위해 국고금 4000만환을 빼돌렸는데 이를 감시할 위치에 있는 이규광씨가 형의 비리사실을 은폐했다는 것이다. 훗날 이규동은 자신의 비리를 폭로한 손도심 의원에게 보복할 목적으로 부하를 시켜 집에 화염병을 던져 방화케 한 혐의로 1961년 4월 구속됐다.

이후 4.19 혁명으로 신도환, 박만원 등과 3.15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의원직을 자진 사퇴하였다. 손도심은 사퇴이유서에서 “본인에 대하여 3.15 부정선거 책임으로 사퇴를 권하는 국회 결의가 있었으나 선거부정에 하등 관여가 없었으므로 책임은 질 수 없다. 그러나 자유당원으로서 당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여 오던 바 3.15 부정선거와 4.19 사태에 접하여 국민 앞에 자책되는바 크므로 의원직을 사퇴코자 한다”고 사퇴이유를 밝혔다.『조선일보』 1960. 4. 30 조1면.
가담을 이유로 1961년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공민권이 제한되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추가로 정치정화법에 묶였다가 1968년에야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다. 3.15 부정선거 투표용지 서울신문사 연관설로 조사받았으나 무혐의 처리되었다. 사사오입 개헌에 관련하여 "이 얼마나 구차스러운 이론 이었으며, 이 얼마나 자유당이 수모받는 끔찍끔찍한 단어인가?"라는 말을 남겼다. 남전노조 노동조합 운동을 함께 지원한 정대천은 사측에 노조를 인정하고 해고자를 복직시키게 건의하던 중 "손도심의원의 중역진에 대한 호통은 대단했으며 불의에 대한 절개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기개였다."라고 하였다.

1966년 자유당 정권의 국회의원으로 국민에게 사죄하는 의미로 가장 낙후되어 있던 전남 화순군 탄광지역 등을 돌며 대한성서 공회의 협찬으로 무료 쪽복음으로 전도하였다.

1970년 자유당계 구 정치인들과 신민당에 입당하였다가 다시 탈당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공화당에 경기도 화성군 선거구로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홍사승에 밀려 탈락하였다. 1975년부터 건설공제조합 이사, 감사 등을 역임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일당 후보로 경기도 수원시-화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이병희 후보와 신민당 유용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한국 장기협회를 창설,초대 이사장 역임하였고, 고려 청기와를 연구하는 데 몰두하기도 하였다.

1975년부터 건설 공제 조합 이사, 감사 역임을 하였고, 골동품과 고미술에 대한 심미안으로 골동품 콜렉터로 일가를 이루었으며 '고미술협회'를 창설하였다. 난민정착사업으로 황해도 실향민들이 안산사리 마을에 살수있도록 소와 농사 지을 땅을 주어 도왔다.

저서로는 '경세가와 정략가' '원수는 없다.' '세계의 국기' '호랑이' '지렁이 흉내' 등이 있다.



1979년 8월 18일 오후 8시 40분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6가 국립의료원에서 고혈압으로 별세했다.

3. 둘러보기

파일:구 경기도 휘장(백색).png 경기도 제3대 민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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