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3 18:22:54

강세형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본명이 강세형인 걸그룹 베리굿의 멤버 세형에 대한 내용은 강세형(1998)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강세형
姜世馨
<colbgcolor=#808080><colcolor=#ffffff> 출생 1899년 6월 21일
전라북도 함열군
(현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1]
사망 1960년 8월 5일 (향년 61세)
배우자 김삼순
학력 부산공립상업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 / 학사)
조치대학 (수학)
베를린 대학교 (철학 / 박사)
의원 대수 3
파일:1939조선일보강세형.png
1939년 조선일보에 실린 젊은 시절의 모습
1. 개요2. 생애3. 의정활동4. 선거 이력5.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부인이 식물학자 김삼순이다. 제2대 국회의원김홍용의 매제이자 역시 제2대 국회의원인 김문용, 제6대~7대 및 9대 국회의원인 김성용의 자형이다. 이회창자유선진당 총재의 이모부이다.

2. 생애

1899년 6월 21일 전라북도 함열군(현 익산시 함열읍)에서 태어났다. 부산공립상업학교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조치대학에서 수학했다. 이후 독일로 유학해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31년부터 1935년까지 독일 베를린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과정을 다니면서 히틀러유겐트 소속의 발두어 폰 시라흐과 친분을 맺기도 했다.

이후 귀국해 도쿄 일본-독일 문화협회 주임, 독일통신사 부사장 등을 지냈다.

1939년 8월 13일 조선일보의 석간 신문에 [투쟁하는 독일 문화]라는 칼럼을 실은 적이 있다.

8.15 광복 이후 동국대학교 철학과 교수, 초대 국방부 정훈국장, 대한학술원 위원장 등을 지냈다. 1947년 6월에는 국회철학회를 창립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위 경력을 본다면, 이범석을 지원한 파시즘 추종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이범석에게 파시즘을 전해주었고 그 결과 이범석은 나치에 호의적이게 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북도 익산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국민당 윤택중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민주국민당 윤택중 후보에 설욕하고 당선되었다. 같은 해 자유당에 입당했고, 3대 국회 후반기에 대한민국 국회 외무위원회(현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한편 전라남도 담양군 지역구의 박영종 국회의원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이던 손아래처남 김문용이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전라남도 담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는데 박영종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기 때문이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윤택중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민주당 윤택중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제5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 지 얼마 안 된 1960년 8월 5일 별세하였다.

3. 의정활동

3.1. 제3대 국회 활동

  • 1954년 7월 8일 국무원 신임에 목매이지 말고 민생문제의 신경쓰자며 말하였다.
  • 1954년 7월 12일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이선근이 발표한 한글 간소화 방안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 1955년 5월 18일 오지리의 독립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내자는 주장을 "오지리는 중립국이니 보내지 말자"라며 반대하였다.
  • 1955년 6월 18일 박영종 의원에게 강도높은 비판을 하였다.[2][3]
  • 1955년 11월 1일 한동석 의원의 실언을 문제삼았다.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익산군 을) 무소속 3,516표 (11.49%) 낙선 (3위)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익산군 을) 무소속 15,169표 (40.51%) 당선 (1위)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익산군 을) 자유당 15,417표 (36.87%) 낙선 (2위)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익산군 을) 자유당 5,287표 (13.95%) 낙선 (2위)

5. 둘러보기

파일:전라북도 구 휘장(1969–1997).png 전라북도 제3대 민의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전주 군산 이리 완주 갑 완주 을
이철승김판술김춘호이존화손권배
진안 금산 무주 장수 임실
박정근
전임자: 이복성
유진산김상현정준모박세경
남원 순창 정읍 갑 정읍 을 고창 갑
양영주임차주김창수김택술정세환
고창 을 김제 갑 김제 을 옥구 익산 갑
신용욱송방용윤제술양일동소선규
익산 을 부안
강세형신규식
}}}
}}}}}}


[1] #[2] 이 사건은 당시에도 큰 화제가 되었다. 자세한 내막은 여기를 참고하자.[3] 여담으로 박영종 문서에서도 나와있지만 강세형과 박영종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