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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페이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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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페이즐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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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前 축구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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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페이즐리
Bob Paisley
<colbgcolor=#eeeeee,#191919> 본명 로버트 페이즐리
Robert Paisley, OBE[1]
출생 1919년 1월 23일
잉글랜드 더럼주 히튼레홀
사망 1996년 2월 14일 (향년 77세)
잉글랜드 머지사이드주 리버풀
국적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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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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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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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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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직업 축구선수 (레프트 하프 / 은퇴)
축구코치, 축구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비숍 오클랜드 (1937~1939)
리버풀 FC (1939~1954)
지도자 리버풀 FC (1959~1974 / 코치)
리버풀 FC (1974~1983 / 감독)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선수 경력2.3. 코치 경력2.4. 감독 경력2.5. 은퇴 후 말년
3. 평가4. 어록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2. 감독
5.2.1. 대회 기록5.2.2. 개인 수상
5.3. 서훈
6. 여담7.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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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버풀은 나의 삶 그 자체였다. 만약 구단이 내게 나가서 거리를 쓸라고 한다면, 나는 리버풀을 위해 자랑스럽게 응할 것이다.
This club has been my life. I'd go out and sweep the street and be proud to do it for Liverpool FC if they asked me to.

영국(잉글랜드)축구선수 출신 감독. 1974년부터 1983년까지 리버풀 FC 감독을 맡았다.

리버풀에서 오랜 선수 경력을 보내며 주장이기도 했던 밥 페이즐리는 1954년 선수 생활을 은퇴한 뒤 리버풀의 리저브팀 코치와 팀 물리치료사를 맡았고, 빌 샹클리가 1959년 12월 리버풀의 감독으로 부임한 뒤, 조 페이건, 루벤 베넷과 함께 팀의 1군 핵심 코치진 그룹인 '부트 룸(Boot Room)'[2]에 합류했던 레전드 코칭 스태프다. 이후 빌 샹클리 감독의 바통을 이어 받아, 리버풀의 감독으로 부임해 '붉은 제국'이라고 불린 리버풀 최고의 전성기를 이끈 페이즐리는, 리버풀 구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낸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재임 시절 풋볼 리그 디비전 1에서 6회 우승, 유러피언컵 3회 우승, 풋볼 리그컵 3회 우승 등 엄청난 커리어를 쌓으며, 현재의 리버풀이 유럽 최정상의 명문 클럽으로 불리울 수 있게 만든 장본인으로, 현재까지도 빌 샹클리와 함께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룬 리버풀 레전드 감독으로 추앙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잉글랜드 감독 중 가장 성공한 감독이자 잉글랜드 팀을 지휘한 감독 역사상 유럽 무대에서 가장 성공했으며 커리어 평균 고점이 가장 뛰어난 감독으로도 평가 받는다. 그는 감독 커리어 총 9시즌 동안 20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려 시즌 당 2.2회 우승이라는 압도적인 우승 커리어를 보유하고 있으며[3], 2022년 카를로 안첼로티가 4번째 빅이어를 들어올리기 전까지 41년 동안 유러피언컵 최다 우승 감독이기도 했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페이즐리는 1919년 1월 23일 목요일 선덜랜드에서 7마일 떨어진 더럼주의 히튼레홀에서 4남 2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고향 마을은 작은 탄광촌이었으며 페이즐리는 자신의 고향에 대해서 "석탄이 왕이고 축구가 종교인 곳"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는데, 당시 잉글랜드의 지역 소도시들이 으레 그러했듯이 그 또한 부유하지 못한 동네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 샘 페이즐리는 광부였고 어머니 에밀리는 주부였는데, 그들은 석탄 분진을 모으기 위해 슬래그 더미를 넘나들며 생계를 유지해야했다. 페이즐리의 가족은 작은 계단식 주택에 살며 빠듯한 생활을 이어갔으며 그는 13살 때까지 지역 학교인 애플턴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여기에서 그의 축구가 시작되었다. 페이즐리는 학교에서 뛰어난 레프트-하프[4]였고 4년 동안 학교 팀이 17개의 트로피를 차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페이즐리는 14살에 학교를 떠나 광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와 그의 아버지와 함께 갱도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가 지하 갱도에서 사고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 사건으로 그는 5년 동안 광산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후 페이즐리는 생계를 위해 벽돌공이 되려고 직업 훈련을 받기도 했다.

페이즐리는 1933년 학교를 떠난 뒤에도 헤튼 풋볼 클럽이라는 지역 팀에 가입하여 주니어 팀에서 계속해서 축구를 해오고 있었다. 그는 팀에서 주목받는 선수였고 헤튼은 팀 내 최고의 선수였던 페이즐리를 근처 최고의 팀이었던 선덜랜드 AFC에 추천해주기도 했다. 선덜랜드 근처 지역에서 태어난 페이즐리는 선덜랜드 선수가 되고 싶다는 어린 시절의 꿈을 가지고 있기도 했으나, 선덜랜드는 페이즐리의 몸이 너무 작다는 이유로 그를 거절했다. 그럼에도 페이즐리는 결국 축구의 끈을 놓지 못했고 1937-38 시즌 전에 비숍 오클랜드 FC와 계약을 체결한 뒤 아마추어 축구 선수로의 경력을 시작하게 된다.

2.2. 선수 경력

페이즐리는 1937년 당시 잉글랜드 최고의 아마추어 축구 팀 중 하나였던 비숍 오클랜드에 입단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팀을 "아마추어 축구의 왕"이라고 자찬하며 팀을 노던 리그, FA 아마추어 컵, 더럼 카운티 챌린지 컵 우승으로 이끌어 3관왕을 달성했고 특히 FA 아마추어 컵 결승전에서 상대를 3-0으로 꺾으며 우승을 차지할 때 팀에 혁혁한 공을 세우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이에 페이즐리는 두 번째 시즌 도중 리버풀의 당시 감독이었던 조지 케이 감독에게 시즌 종료 후 이적 제의를 받게 되는데, 당시 그에게 한번 퇴짜를 놓았던 선덜랜드 AFC 또한 마음을 바꿔 그를 다시 영입하고 싶어했지만 페이즐리는 마음을 굳혀 리버풀로 입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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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시절의 밥 페이즐리

페이즐리는 리버풀로 넘어가 반세기 축구사를 주름잡을 무대인 안필드에 처음 입성한다. 그는 빌리 리델, 맷 버스비[5]와 함께 리버풀에서 본격적인 프로 축구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으나 1939년 9월 3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리그가 중단되었고 축구를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영국 정부는 축구 협회에게 안전한 지역에서 친선 대회를 개최할 수 있게 허용했고 페이즐리는 영국 육군에 입대하였지만 영국에 머무르며 1939년부터 1941년까지 34경기에 출전해 10골을 넣는 등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는 육군에 입대한 상태로 영국 전역의 여러 부대에 주둔했으나 주로 리버풀 근처 체셔주의 부대에 있었고 경기가 열릴 때 마다 허가를 받아 안필드로 가서 경기를 하곤 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달려 차를 얻어 타서 안필드에 도착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겨우겨우 경기를 치르곤 했으나, 빌리 리델, 맷 버스비와 함께 축구에 열정을 가지고 해당 시기 리버풀에 헌신했다.[6]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이 보이자 페이즐리는 다른 선수들 처럼 해외로 징집되어야 했고 전쟁 시기에 간간히 열리던 친선 리그에도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1941년 8월 영국을 떠나 1944년까지 북아프리카에 있었고 이후 1945년까지는 이탈리아 포병 부대에 있었다. 페이즐리는 여러 나라를 전전하는 동안에도 연합군 축구팀에서 뛰며 축구를 놓지 않았다. 그는 이집트에서 근무할 당시 리버풀의 감독이던 조지 케이로 부터 프레스턴 노스 엔드[7]와의 개막전 경기에 참여할 수 있겠느냐는 편지를 받기도 했지만, 영국에서 축구를 하고 싶은 마음을 속으로만 삭혀야만 했다. 그래도 이 당시 페이즐리는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축구 외에도 크리켓과 하키, 복싱[8] 등의 다양한 스포츠를 경험할 수 있었다. 이후 페이즐리는 1945년 전쟁이 끝난 뒤에야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군을 전역한 뒤 1946-47 시즌에서야 리그가 부활하며 축구 경력을 다시 이어나갈 수 있었다.

1946-47 시즌 페이즐리는 FA컵 3라운드 체스터와의 원정 경기에서 첫 공식 복귀전을 치렀다. 그는 그 경기에서 2-0으로 승리하는데에 일조했다. 페이즐리의 리버풀 공식 첫 골은 1948년 5월 1일 안필드에서 열린 울버햄튼과의 리그 경기에서 나왔다. 전반 22분에 터진 그의 골은 2-1 승리의 결승골이 되었다. 전후 첫 풀시즌이었던 1946-47 시즌에 리버풀은 그의 활약에 힘입어 24년 만의 리그 우승을 달성한다.[9] 그는 42경기에서 34번 출전했고 팀의 주전으로 뛰었다. 1948년 리그 경기에서 충돌로 인해 의식을 잃었지만 10분만에 그라운드로 다시 뛰어들어와 헤딩을 위해 머리를 날릴 정도로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던 그는 다음 시즌과 그 다음 시즌까지도 매 시즌 30경기 이상 출전하였고 1949-50 시즌에는 FA컵 준우승에도 기여하였다. 1950-51 시즌 페이즐리는 팀의 주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1954년까지 리버풀에서 선수 경력을 이어가다가 은퇴를 결심한다.

2.3. 코치 경력

1954년 리버풀에서 선수 생활을 정리한 페이즐리는 리버풀의 코치진에 합류한다. 그의 첫 직책은 리저브 팀 코치였는데, 그는 독학으로 물리치료를 공부하여 부상 여부를 진단하는데에도 능력을 보였기에 팀의 물리치료사 역할도 겸하게 되었다. 그는 1959년 팀의 1군 코치였던 엘버트 셸리가 은퇴하면서 1군 코치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빌 샹클리가 리버풀의 감독으로 부임하였고 클럽의 명운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샹클리는 부임 첫 날에 1군 코치들이었던 페이즐리, 조 페이건, 루벤 베넷을 불러다 놓고 자신의 코치들을 구단에 데려오지 않고 기존의 팀 코치들을 기용할 것이라 밝히며, 자신의 훈련과 전략을 돕고 서로와 구단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함께 일할 것을 요구했다. 페이즐리는 샹클리가 도착한 순간부터 그에게 매료되었고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전 감독이던 필 테일러 시절에 리버풀의 훈련은 육체적인 노동에 가까운 로드 러닝 등의 고전적인 훈련에 지나지 않았으나, 샹클리는 클럽에 공을 활용한 다양한 세션과 기능적 트레이닝을 접목했고 페이즐리는 이러한 훈련 방식을 상당히 환영했다. 페이건과 베넷 또한 새로운 시스템을 실행하는 것에 보람을 느꼈고 페이즐리와 코치진들은 샹클리를 믿고 따를 수 있었다. 샹클리와 페이즐리 그리고 코치진들은 이에 그 유명한 '부트 룸'을 탄생시키며 전설적인 그 공간에서 매일 회의를 열고 전략, 전술, 훈련, 그리고 선수들에게 대한 논의를 하며 팀을 끌어나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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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의 위대한 '부트 룸' 코치진들
,좌측부터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로니 머랜, 루벤 베넷, 톰 손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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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헤이웨이를 처치하고 있는 코치 시절의 밥 페이즐리

페이즐리는 이 당시 샹클리의 훈련과 운영 방식에 배움을 얻음과 동시에 상호 소통하며 샹클리의 시스템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샹클리는 선수들의 부상을 방지하고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위해 훈련 후 시스템도 고안하고 싶어했는데, 페이즐리가 훈련 후 목욕이나 샤워를 하기 전에 몸을 식히는 것의 중요성을 주장하여 샹클리가 이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은 실제로 리버풀 선수단의 부상 방지에 상당히 기여하여 1965-66 시즌에 리버풀은 리그 우승을 하고 컵위너스컵에 진출하면서도 전체 시즌 동안 14명의 선수만 기용했을 정도였다. 이외에도 페이즐리는 샹클리의 수석 전략가이기도 했다. 그는 샹클리의 권위를 전혀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경기장에서 현명한 조언을 제공했다. 페이즐리는 샹클리에게 겸손한 조수이기도 했지만 당시의 리버풀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전략가였던 것. 리버풀 내부에서는 샹클리가 팀을 이끄는 동기부여를 맡지만, 팀의 두뇌는 페이즐리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후 15년간 샹클리 감독의 수석 코치로서 페이즐리는 2부 리그에서 팀을 승격시킨 것에 이어 1부 리그 3회 우승과 FA컵 2회 우승, UEFA컵 1회 우승으로 이어지는 리버풀의 첫 번째 전성기를 이끌었다.

2.4. 감독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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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은퇴 후 말년

페이즐리는 코치 시절 동료이자 그의 조력자였던 조 페이건에게 감독직을 넘겨준뒤 정들었던 리버풀에서의 공식적인 커리어를 종료했다. 그는 은퇴한 해, 대영제국 훈장인 OBE와 PFA 메리트 상[10]을 수상했으며 이듬 해에는 FWA에서 공로 상을 받았다. 또한 그는 1992년까지 리버풀의 고문으로 재직하며 1985년에 케니 달글리시를 감독직에 앉히는데 공헌하기도 하는 등 은퇴 이후에도 끊임없이 리버풀 곁에 머물렀다. 심지어 선수 겸 감독으로 리버풀을 이끌게 된 케니 달글리시를 위하여 2년 동안 비공식적인 달글리시의 컨설턴트 겸 고문을 자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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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케니 달글리시와 함께

그러다 말년인 1992년, 안필드에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억이 나지 않는 증세를 겪은 뒤, 그는 알츠하이머 증세가 있음을 확인받았고, 결국 77세의 나이로 머지사이드 양로원에 입원한 뒤 몇 주 지나지 않아 1996년 2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페이즐리는 리버풀 남동쪽의 울튼에 있는 성 베드로 교회에 안장되었다. 이후 페이즐리의 기념비가 그의 고향인 히튼레홀의 메인 파크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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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즐리 게이트(Paisley Gates)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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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에 새겨진 페이즐리의 위대한 커리어

그의 사후 1999년, 리버풀은 위대한 감독이었던 밥 페이즐리를 기리기 위해 홈구장 안필드에 페이즐리 게이트를 세웠다. 이 페이즐리 게이트에는 그가 재임 시절 3차례 유러피언 컵 우승을 따낸 것을 상징하는 영광스러운 3개의 빅 이어가 들어가 있으며, 그의 얼굴과 함께 그가 리버풀에서 이룩한 위대한 업적[11]들이 새겨져있다. 이로서 페이즐리는 빌 샹클리와 함께 본인의 이름을 딴 안필드 게이트를 가진 유이한 인물로 남게 되었다.

이후 2002년에 밥 페이즐리는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빌 샹클리와 함께 헌액되었으며, 2008년에는 유럽 축구 명예의 전당에도 입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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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공개된 밥 페이즐리 동상

이후 2020년에는 클럽에 대한 페이즐리의 공헌을 기념하여 안필드에 밥 페이즐리의 동상이 세워졌다. 이 8피트 규모의 동상은 페이즐리가 1968년에 부상 당한 엠린 휴즈를 직접 업고 피치 밖으로 나오는 상징적인 모습을 본떠서 제작하였다고 한다. 동상의 주춧돌에는 "리버풀은 나의 삶 그 자체였다. 만약 구단이 내게 나가서 거리를 쓸라고 한다면, 나는 리버풀을 위해 자랑스럽게 응할 것이다.(This club has been my life. I'd go out and sweep the street and be proud to do it for Liverpool FC if they asked me to.)"라는 팀을 향한 충성이 담긴 페이즐리의 생전 명언이 새겨져 있다. 동상은 이안 러시, 케니 달글리시, 필 톰슨 등 그가 지도했던 제자 선수들에 의해 공개되었고, 리버풀의 CEO 피터 무어는 "그의 유산에 대한 적절한 찬사가 될 것."이라는 말로 동상의 공개를 기념하였다. 이로써 페이즐리는 빌 샹클리와 함께 안필드 내 자신의 동상을 보유한 유이한 팀 감독이 되었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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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역사상 가장 압도적이었던 밥 페이즐리의 커리어
빌 샹클리안필드의 선봉장이었다면, 밥 페이즐리는 스스로 제국을 건설할 준비가 되어 있는 벽돌공이었다.
토미 스미스

밥 페이즐리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리버풀 붉은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명장. 페이즐리는 9년의 리버풀 재임 기간 동안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조직력과 강력한 전술, 전략을 팀에 불어넣으면서, 리그 우승 6회, 유러피언 컵 우승 3회, UEFA 컵 우승 1회, 리그 컵 우승 3회, 채리티 실드 우승 6회, UEFA 슈퍼컵 우승 1회라는 압도적인 우승 기록을 달성했다. 페이즐리의 리버풀은 1978년과 1981년 사이 안필드 63경기 무패 행진[12]을 이어가는 등, 첫번째 전성기를 이끈 샹클리호보다도 더 월등한 모습으로 잉글랜드의 어떤 클럽도 리버풀의 위상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으며,[13] 잉글랜드를 넘어 유럽 전역을 호령하는 명성을 떨쳤다.

페이즐리는 9시즌을 감독으로 보내는 동안 리버풀에서 총 20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으며, 9년의 시간 동안 시즌마다 트로피 한개씩은 무조건 따내 트로피 진열장을 채워놓는 무서운 저력을 보였다. 그는 감독 커리어 동안 시즌 당 트로피를 평균 2.2개씩 들어올린 셈이며, 이는 잉글랜드 리그 역사상 시즌 당 최다 평균 우승 횟수이다.[14] 그의 커리어가 더 대단한 점은 단순히 트로피의 갯수만 많은게 아니라는 것. 페이즐리의 리버풀은 9시즌 중 6번의 리그 우승을 챙긴데다가 1978-79 시즌엔 42경기 30승 8무 4패[15]에 단 16실점[16]을 기록했을 정도로 절정의 리그 운영력을 보여줬음은 물론, 유럽 무대에서도 9시즌 간 77년, 78년의 유러피언 컵 2연패를 비롯하여 세 차례나 빅이어를 들어올렸고 UEFA컵과 슈퍼컵을 포함해 5개의 타이틀을 따내는 대단한 지배력을 보여줬다. 심지어 그는 2022년 카를로 안첼로티가 기록을 경신하기 전, 41년간 유로피언 컵 최다 우승 감독 기록이기도 했다. 즉, 페이즐리는 비교적 수월한 국내 컵 대회 뿐 아니라 팀에게 최대의 메이저 무대인 리그와 유럽 대항전을 모두 휩쓸었던 감독. 이에 그는 10년이 채 안되는 리버풀 커리어를 보냈음에도 명실상부 리버풀 역사상 가장 성공한 감독임은 물론 역사상 모든 잉글랜드 국적 감독을 통틀어 가장 성공한 감독으로 평가받는다.[17][18]

또한 페이즐리는 본인을 스스로 전술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리버풀이 최절정의 전성기를 누리는 동안에 샹클리 시대에서 더 발전한 전술을 도입함으로써, 현대적인 축구를 개발한 감독이기도 했다. 그는 샹클리가 마지막 시즌에 유러피언컵에서 FK 츠르베나 즈베즈다를 상대로 패배하는 것을 지켜본 뒤, 감독으로 부임하여 리버풀에 대륙 축구의 후방 빌드업과 포제션 축구를 처음 제시한 선구자적 감독이었고, 고전적인 피지컬 플레이 중심의 수비진에서 탈피해 미드필더 출신의 엠린 휴즈, 필 톰슨 등을 센터백으로 기용하고[19] 브루스 그로벨라와 같은 스위퍼 키퍼를 활용하는 등 당대로서는 혁신적인 후방 조합을 사용했다. 이러한 변화에 의해 리버풀은 좀 더 점유와 정확한 빌드업을 중심으로 샹클리의 패스 앤 무브먼트 전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또한 페이즐리는 공격수였던 레이 케네디를 왼쪽 미드필더로 돌려 재능을 만개시키고 케니 달글리시를 스트라이커보다 약간 처진 위치의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기용하여 이안 러시와의 강력한 투톱 조합을 구축하였으며 테리 맥더모트-그레이엄 수네스 투미들 라인을 공격적으로 활용하여 공격진의 부진을 극복하고 득점력을 유지하는 등, 선수들의 장점에 맞는 부분 디테일 활용과 적재적소의 기용 및 판단에도 상당히 능했다. 특히 상대 전술에 맞는 맞춤 전술을 짜서 나오는 능력도 탁월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전임자인 샹클리[20]보다도 더 칼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어 전성기에서 지난 선수들의 방출에 엄청나게 냉정한 모습[21]을 보여주는 등, 스쿼드에 대한 판단이 매우 우수했고, 케니 달글리시, 앨런 한센, 그레이엄 수네스와 같은 전설적인 영입 성공을 연달아 터트리는 등 대체 선수 영입 판단과 선수 발굴에도 매우 능한 감독이었다. 그러나 페이즐리는 선수들과의 의사소통에 능숙한 감독은 아니었고, 앞으로 직접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던만큼 언론 대응에도 좋은 능력을 가진 감독은 아니었다. 이에 데이비드 존슨이 페이즐리의 의중을 읽기 힘들어 팀에 영입된 이후 답답함을 토로했던 사건[22]도 있었고, 샹클리처럼 대외적으로 유명한 인터뷰나 강한 라커룸 토크의 일화도 거의 전해지지 않는 편. 이러한 지점은 페이즐리의 유일한 단점으로 꼽히며 전임자인 샹클리와 가장 대비되는 지점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페이즐리는 샹클리와 같은 카리스마와 달변가적 능력을 보유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대의 주장 엠린 휴즈가 부상을 당하자 피치로 들어가 직접 그를 업고 나오는 등 나름의 부드러운 리더십을 보유한 인물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페이즐리는 감독 뿐 아니라 선수와 코치로도 리버풀에 엄청난 기여를 했던 인물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팀에서 줄곧 핵심 선수로 활약했고 빌 샹클리의 수석 코치로도 리버풀을 이끌었다. 그는 선수로 활약한 기간 동안 24년만의 팀의 1부 리그 우승에 공헌했으며, 경기 중 충돌로 정신을 잃었음에도 곧장 그라운드로 복귀하여 헤딩을 위해 머리를 날렸을 정도로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선수로 유명했다. 그는 팀의 주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이에 현역 시절에도 전후 시기 팀을 지탱한 레전드급 선수로 평가받는다. 이후 코치 시절에는 샹클리 사단의 두뇌로서 팀의 전술과 운영에 있어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한 능력있는 핵심 코치로서 알려졌다. 샹클리가 리버풀 감독으로 부임하던 때, 팀의 동기부여 측면은 샹클리가 담당하고 세부적인 전술은 페이즐리가 담당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이렇게 코치 시절에 키워온 전략적 능력이 감독으로 발현되어 상기 언급했듯이 리버풀 역사에 있어 손 꼽히는 전술가가 되었다. 그는 선수와 코치 시절만 해도 1부 리그 3회 우승, 2부 리그 1회 우승, FA컵 2회 우승, 채리티 실드 3회 우승, UEFA컵 1회 우승이라는 레전드급 커리어를 보냈다.

종합하자면, 선수, 코치, 감독으로서 44년을 팀에 헌신하며, 리버풀을 2부 리그에서부터 유럽 최정상의 위치까지 올려놓는 과정에 모두 기여한 전설적인 인물. 선수와 코치로서는 팀의 도약기를 이끌었고 감독으로서는 팀의 최고점을 지도했다. 이에 그는 빌 샹클리와 함께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레전드이자 샹클리의 팀을 진일보시킨 감독이자 전술가로 평가받으며, 모든 리버풀 커리어에서 그는 총합 1부 리그 10회, 2부 리그 1회, FA컵 2회, EFL컵 3회, 채리티 실드 9회, 유러피언 컵 3회, UEFA컵 2회, UEFA 슈퍼컵 1회 우승의 기염을 토했다. 빌 샹클리가 구단의 정체성을 다지고 팀의 시스템을 창조한 선구자 격의 감독이었다면, 페이즐리는 명실상부 유럽을 지배한 구단 역사상 최강의 팀을 이끌었던 감독. 이에 리버풀 클럽 한정으로는 샹클리가 최고의 감독일지언정, 외부적으로는 페이즐리가 더 굵직한 감독으로 평가받기도 한다.[23]

4. 어록

리버풀은 나의 삶 그 자체였다. 만약 구단이 내게 나가서 거리를 쓸라고 한다면, 나는 리버풀을 위해 자랑스럽게 응할 것이다.
This club has been my life. I'd go out and sweep the street and be proud to do it for Liverpool FC if they asked me to.
나도 나쁜 시간을 겪었던 때가 있다. 어느 해에는 우리가 2등이었으니까.
I’ve been here during the bad times too – one year we came second.
긴 패스냐 짧은 패스냐는 중요하지 않다. 정확한 패스가 중요하다.
It’s not about the long ball or the short ball, it’s about the right ball.
리버풀 감독으로서 한 달에 한 번씩 벨스(Bell's) 한 잔, 시즌이 끝난 후 큰 병으로 한 병과 오픈 버스를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도는 데 만족한다.
I said that when I took over that I would settle for a drop of Bell’s once a month, a big bottle at the end of the season and a ride round the city in an open top bus.
내 인생 내내, 리버풀의 서포터들이 원했던 것은 정직함이었다. 그들은 세련된 축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100%를 다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졌다.
The whole of my life, what they wanted was honesty. They were not concerned with cultured football, but with triers who gave one hundred percent.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2. 감독

5.2.1. 대회 기록

5.2.2. 개인 수상

  • 잉글랜드 올해의 감독[25]: 1975–76, 1976–77, 1978–79, 1979–80, 1981–82, 1982–83
  • 유럽 올해의 축구 감독[26]: 1981
  • 유럽 시즌의 축구 감독: 1977-78
  • PFA 메리트상: 1983
  • FWA 공로상: 1984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2
  • 유럽 축구 명예의 전당: 2008

5.3. 서훈

6. 여담

  • 페이즐리는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20살이었는데, 당시 영국 육군 왕립 포병대로 징병 소집된 바 있다. 후에 육군 제7기갑사단으로 옮겨갔다.
  • 감독시절 선수들이 '사막쥐'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이유는 2차 대전 중에 근무한 영국 육군 제7기갑사단의 별명이 사막쥐였기 때문.
  • 리버풀의 응원가 Allez, Allez, Allez 가사에 빌 샹클리 감독과 함께 등장한다. 구단의 전설적인 명장들 이름을 가사로 넣을만큼 그들에 대한 리버풀 팬들의 애정과 자부심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7. 같이 보기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d00027><tablebgcolor=#d00027> 파일:리버풀 FC 라이버 버드 로고(화이트).svg리버풀 FC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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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555555,#aaaaaa
1888년 ~ 현재
초대
바클레이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2대
맥케나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3대
왓슨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
4대
애시워스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5대
맥퀸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6대
패터슨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7대
케이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8대
웰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9대
테일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0대
샹클리
(샹클리 체제)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
★★
11대
페이즐리
(페이즐리 체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
★★★★★★
12대
페이건
(페이건 체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3대
달글리시
(달글리시 체제(1기))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
★★
13대(대행)
모란
(모란 체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4대
수네스
(수네스 체제)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15대
에반스
(에반스 체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5·16대
에반스·울리에
(에반스·울리에 체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svg
16대
울리에
(울리에 체제)
파일:프랑스 국기.svg
★★
17대
베니테스
(베니테스 체제)
파일:스페인 국기.svg
18대
호지슨
(호지슨 체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대
달글리시
(달글리시 체제(2기))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20대
로저스
(로저스 체제)
파일:북아일랜드 국기.svg
21대
클롭
(클롭 체제)
파일:독일 국기.svg

22대
슬롯
(슬롯 체제)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프리미어 리그 / FA컵 / EFL컵 / EFL 챔피언십
UEFA 챔피언스 리그 / UEFA 유로파 리그 / UEFA 슈퍼컵 / FIFA 클럽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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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영제국 훈장 4등급 수훈.[2] 리버풀 홈 구장인 안필드 내에 있었던 축구화 보관을 위한 장비실이다. 본래는 장비실이었지만 빌 샹클리를 비롯하여 그의 수석 코치였던 밥 페이즐리루벤 베넷, 톰 손더스, 조 페이건, 로니 모란 등의 코치들이 차를 마시며 전술 회의를 진행했던 비공식적인 코치 회의실로서, 리버풀의 전성기를 이끈 상징적인 장소로 유명하다.[3] 잉글랜드 리그 감독 중 시즌 당 평균 우승 최다 횟수이다.[4] 왼쪽 미드필더[5] 당시 리버풀의 핵심 선수였던 버스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적인 감독이 된다. 페이즐리는 버스비를 '우러러보며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6] 1940년 4월 1일 구디슨 파크에서 열린 당시 에버튼과의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3-1로 이긴 경기를 그는 후에도 추억하곤 했다.[7] 당시 빌 샹클리가 선수로 프레스턴에서 뛰고 있었다.[8] 빌 샹클리도 전쟁 기간 복싱 선수로 뛴 바 있다.[9] 팀의 다섯 번째 리그 우승.[10] PFA 공로 상[11] 채리티 실드를 제외한 메이저 대회 우승 연도와 리그 올해의 감독 수상 연도가 들어가 있다. 각각 14회와 6회.[12] 2020년 위르겐 클롭의 리버풀이 이 기록을 추월했다.[13] 리그에서 페이즐리의 리버풀은 1977년부터 1982년 사이 브라이언 클러프가 이끄는 노팅엄 포레스트와 론 손더스와 토니 바튼이 이끄는 아스톤 빌라와 경쟁했고, 1980-81시즌과 1981-82시즌에는 바비 롭슨이 이끄는 입스위치 타운, 1976-77시즌에는 토니 북이 이끄는 맨체스터 시티, 1975-76시즌과 1976-77시즌에는 토미 도허티가 이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 많은 다른 클럽들의 도전을 받았으나, 그 어떤 클럽도 이 시기 페이즐리의 리버풀을 상대로 우위를 보여주진 못했다.[14] 트로피를 밥먹듯이 수집해온 알렉스 퍼거슨펩 과르디올라의 경우에도 잉글랜드 무대에서 시즌 당 평균 우승 횟수가 2회를 넘지 못한다.[15] 당시엔 승리 승점이 2점이었다.[16] 42경기 기준 리그 최소 실점 기록이다. 38경기 기준으로는 첼시의 15실점이 기록. 홈 무패 홈에서 단 4실점.[17]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2010년대를 넘어가며 커리어를 완성하기 이전까지는 잉글랜드 리그 역사상 가장 성공한 감독이기도 했다. 재임 기간이 짧아서 그렇지 여전히 재임 기간 동안의 평균으로 따지면 리그 역사상 최고점을 보유한 감독이기도 하다.[18]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페이즐리는 FA컵을 우승하지는 못하였다.[19] 이후엔 발밑이 매우 부드러웠던 센터백 앨런 한센이 수비진의 주축이 되었다.[20] 샹클리도 대규모 리빌딩에 칼을 빼들었던 감독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선수들을 믿고 지켜보는 기간이 있었던 반면, 페이즐리는 최고의 활약을 펼친지 얼마 지나지 않은 테리 맥더모트가 전성기에서 지났다고 판단되자 즉각 팔아버리는 등 샹클리보다 훨씬 더 칼같았다.[21] 물론 본인은 이 작업을 즐기지는 않았다고 하나 무자비하다는 평을 들었을만큼 스쿼드 물갈이에 냉정했다.[22] 존슨은 "페이즐리와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고, 불안감이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라는 언급을 남겼다.[23] 실제로 샹클리는 상징성 때문에 팀 최고의 감독으로 꼽히는 케이스이기 때문에, 표면적인 커리어 자체는 개인 수상적 측면에서도 페이즐리가 더 뛰어나다. 페이즐리는 리그 올해의 감독을 6회나 수상했으며, 유럽 올해의 감독, 유럽 시즌의 감독도 각각 1회씩 수상했을만큼 개인 커리어도 뛰어나다. 페이즐리는 2013년 ESPN 선정 역사상 최고의 감독 순위 4위, 2013년 월드사커지 선정 역사상 최고의 감독 순위 8위에 선정되는 등 세계 축구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감독이다.[24] 당시 유러피언 컵을 3회 우승한 감독은 전무했고 2014년에 카를로 안첼로티가 이 기록에 타이를 이루기 전까지 페이즐리는 33년간 단독으로 최다 빅이어 보유 감독이었다. 이후 해당 기록은 2022년 안첼로티가 4번째 빅이어를 들어올리며 41년만에 추월되었다.[25] Manager of the Year Award[26] 제프 헤어베어거 어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