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로이 에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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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바클레이 ☆ | 2대 맥케나 ☆ | 3대 왓슨 ★★☆ | 4대 애시워스 ★ | 5대 맥퀸 ★ | |
6대 패터슨 | 7대 케이 ★ | 8대 웰시 | 9대 테일러 | 10대 샹클리 (샹클리 체제) ★★★☆ ★★★ | |
11대 페이즐리 (페이즐리 체제) ★★★★★★ ★★★★★★★★ | 12대 페이건 (페이건 체제) ★★★ | 13대 달글리시 (달글리시 체제(1기)) ★★★ ★★ | 14대(대행) 모란 (모란 체제) | 15대 수네스 (수네스 체제) ★ | |
16대 에반스 (에반스 체제) ★ | 16&17대 에반스&울리에 (에반스&울리에 체제) | 17대 울리에 (울리에 체제) ★★★★★ | 18대 베니테스 (베니테스 체제) ★★★ | 19대 호지슨 (호지슨 체제) | |
20대 달글리시 (달글리시 체제(2기)) ★ | 21대 로저스 (로저스 체제) | 22대 클롭 (클롭 체제) ★★★★ ★★★ | 23대 슬롯 (슬롯 체제) | ||
★프리미어 리그 / ★FA컵 / ★EFL컵 / ☆EFL 챔피언십 ★UEFA 챔피언스 리그 / ★UEFA 유로파 리그 / ★UEFA 슈퍼컵 / ★FIFA 클럽 월드컵 |
[[로이 에반스|]] | |
제16대 감독 로이 에반스 | |
<colbgcolor=#d00027><colcolor=#fff> 감독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로이 에반스 / 제16대 감독 |
코치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로니 모란 (수석 코치)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더그 리버모어 (수석 코치)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조 코리건 (골키퍼 코치) [[스코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론 예이츠 (스카우트) |
주장 | [[웨일스| ]][[틀:국기| ]][[틀:국기| ]] 이안 러쉬 / 제41대 주장 (1993~1996)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존 반스 / 제42대 주장 (1996~1997)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폴 인스 / 제43대 주장 (1997~1999) |
계약 기간 | 1994년 1월 31일 ~ 1998년 7월 16일[1] (4년 6개월/ 1628일) |
계약 종료 (공동 감독 체제 출범) | |
연봉 | 미상 |
전술 스타일 | 패스 & 무브에 기초한 공격 축구 ┗ 3-4-1-2, 3-5-2, 4-4-2 포메이션 ┗ 3백과 공격적인 좌우 윙백 활용 ┗ 투톱과 공격형 미드필더의 유기적인 공격 |
역대 전적 | 226경기 117승 56무 53패 (승률 51.77%) |
우승 경력 | 1994-95 풋볼 리그 컵 (우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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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버풀 FC의 제16대 감독 로이 에반스 체제를 정리한 문서.2. 감독 선임 과정
그레이엄 수네스 감독 아래에서 리버풀은 계속된 부진을 겪었고, 프리미어 리그 시대 개막 이후 유럽 대항전과 멀어지며 침체기에 들어서고 말았다. 결국 부진 끝에 보드진은 수네스 체제를 끝내기로 마음먹었고, 리버풀은 새로운 방향으로 불안하게 표류하기 시작했다.리버풀 보드진은 다시 한 번 내부에서 해답을 찾고자 했다. 리버풀은 빌 샹클리 시대 이후 계속해서 내부 코치 승격과 팀 레전드들을 감독으로 선임하며 '리버풀 웨이'라고 불리는 연속성을 상당히 중시하고 있었고, 붉은 제국 시대를 겪으며 구단 내부에서 선수와 코치로 계속해서 경력을 쌓아온 로이 에반스가 자연스러운 다음 주자였다. 그러나 에반스가 선택된 이유는 단순히 그가 구단 출신 선수였고, 1974년부터 오래 코치진에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에반스가 수네스 체제에서 삐걱거리던 팀을 안정시킬 만한 능력이 있다고 평가받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수네스 체제에서 리버풀은 이전의 시스템과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체계를 도입했다가 선수단과 코치진의 불만을 야기하고 있었기에, 샹클리시대부터 쭉 구단을 지켜온 상냥한 마음씨의 에반스는 다시 팀 분위기를 정상화시킬 수 있는 적임자로 여겨졌다.
이에 수네스 감독이 상호 협약 해지로 팀을 떠난 1994년 1월 31일, 에반스가 리버풀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3. 연혁
3.1. 1993-94 시즌
수네스를 대신하여 리그 27라운드부터 에반스가 부임했으나, 수네스 체제에서 방향성을 잃은 팀은 더 악화되기 시작했고, 에반스는 리그 마지막 16경기를 5승 2무 9패로 마감. 리그 8위를 기록했다.수네스 체제에서 에반스 체제로까지 넘어온 1993-94 시즌, 리버풀은 17승 9무 16패 승점 60점의 끔찍한 리그 성적을 기록했으며, 득실차는 단 4골에 불과했다. 리그 8위는 빌 샹클리가 2부 리그에 있던 팀을 이끌고 승격한 직후 시즌이었던 1962-63 시즌 이후 최저 성적이었으며, 해당 시즌은 60년대 1부 리그 승격 후 최악의 시즌이되었다.
3.2. 1994-95 시즌
케니 달글리시로까지 내려온 붉은 제국의 유산은 수네스 체제에서 제대로 리빌딩 되지 못했고, 에반스는 새로운 전술을 이식하며 시즌을 준비했다. 에반스는 수비수 존 스케일스와 필 밥, 젊은 윙어 마크 케네디를 영입하여 팀을 강화했고, 이 시즌 로니 웰런, 스티브 니콜 등의 베테랑들을 떠나보냈다. 당시 리버풀은 리그에서 부진을 겪고 있었으나 스티브 맥마나만, 제이미 레드냅, 로비 파울러로 이어지는 훌륭한 유망주들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에반스는 이들을 활용하여 새로운 판을 짜기 시작했다. 에반스는 샹클리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4-4-2를 폐기하고 3-4-1-2(3-5-2)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들고나왔다.에반스호는 개막 후 리그 3연승을 거두며 괜찮은 출발을 보였다. 3백과 공격적인 윙백을 두며 존 반스와 제이미 레드냅을 중원에 배치하고, 로비 파울러와 이안 러쉬를 투톱에, 그리고 그 아래 스티브 맥마나만에게 프리롤을 부여하는 새로운 시스템은 신선한 상승세를 불러왔다. 물론 시행착오를 거쳐야했고, 전력이 완벽하지는 않았기에 리그 우승 경쟁에는 합류하지 못했지만, 에반스의 리버풀은 이 시즌 젊은 잉글랜드 코어 유망주들의 활약과 노장 러쉬의 고군분투에 힘입어 상위권을 지켰다. 결국 리버풀은 21승 11무 10패로 리그 4위를 수성, 달글리시 체제 이후 처음으로 4위권 이내에 안착했다.[2]
FA컵에서는 재경기들을 극복하며 꾸준히 올라갔지만 6라운드 토트넘 홋스퍼에게 일격을 맞으며 탈락했다. 하지만 리그컵에서는 좋은 성적을 구가했다. 리버풀은 리그컵 2라운드부터 전승을 거두며 준결승까지 통과했고 결승에 올랐다. 1995년 4월 2일에 치러진 결승전 상대는 볼턴 원더러스. 리버풀은 해당 리그컵 결승전에서 스티브 맥마나만의 멀티골에 힘입어 통산 5번째 리그컵 우승을 차지했다.
해당 시즌 에반스호는 리그 25골, 시즌 31골을 넣은 로비 파울러의 폭발적인 성장과, 리그 12골, 시즌 19골로 클래스를 보여준 노장 이안 러쉬의 분투, 존 반스와 스티브 맥마나만, 제이미 레드냅으로 이어지는 테크니컬한 중원 트리오에 힘입어 부진을 씻고 다시금 경쟁력을 보여주며 팀의 반등을 선언했다. 또한 1991-92 시즌 이후 다시금 UEFA컵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달글리시 체제 이후 최고의 성적이었다.
3.3. 1995-96 시즌
에반스는 이안 러시를 대체하고자 1995년 여름, 노팅엄 포레스트의 대형 공격수 스탄 콜리모어를 1,300만 유로의 거금에 영입하며 새로운 시대를 알렸고[3] 미드필더 제이슨 맥아티어를 영입하며 스쿼드를 강화했다. 파울러를 비롯한 잉글리시 코어들의 폼은 절정에 올라있었고 새로운 선수들을 수혈한 에반스호는 많은 기대를 받으며 시즌을 시작했다.리버풀은 개막전에서 새로운 공격수 콜리모어의 득점으로 승리하며 가뿐한 출발을 알렸다. 이후 7라운드까지 리버풀은 5승 2패로 괜찮은 리그 레이스 스타트를 끊으며 상위권을 수성했다. 11월에 들어서서는 4경기에서 1무 3패를 당하는 등 불안함이 있었지만, 박싱데이를 기점으로 다시 전력을 회복, 리버풀은 계속해서 2~3위권을 지키며 좋은 리그 레이스를 이어갔다. 특히 이 시즌 리그에서 로비 파울러는 28골을 득점하며 앨런 시어러 다음으로 많은 득점을 올렸고, 스티브 맥마나만은 리그에서만 15개의 도움을 기록하며 리그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리버풀은 퍼거슨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어러가 이끄는 뉴캐슬 유나이티드와 리그 우승 경쟁은 펼치지 못했고, 4위권과 승점을 여유롭게 벌린 3위에 그쳐야했다.
리그컵에서는 4라운드까지 무난하게 올라갔으나 4라운드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에게 1-0으로 패하며 아쉽게 탈락했다. 이후 FA컵에서는 준결승까지 대승을 연속하며 진출하여 아스톤 빌라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1996년 5월 11일에 열린 결승전 상대는 숙명의 라이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버풀은 경기 내내 치열한 승부를 이어갔으나 후반 85분 에릭 칸토나의 선제골이 터지며 허무하게 패배해 준우승에 머무르고 말았다.
오랜만에 진출한 UEFA컵에서는 1라운드부터 원정승에 힘입어 2라운드로 진출, 덴마크의 브뢴뷔 IF와 2라운드에서 격돌했다. 그러나 리버풀은 브뢴뷔 원정에서 답답함을 지속하며 0-0으로 비겼고, 이후 치러진 홈에서의 2차전에서 78분에 치명적인 실점을 허용하며 1-0으로 패배, 기다려온 유럽 대항전을 허망하게 마무리했다.
에반스호는 지난 시즌에 이어 리그 상위권을 수성하며 유럽 대항전 진출권을 또 다시 지켰고, 이번에는 3위로 순위를 올려 리그 우승 경쟁권 바로 아래에 랭크되는 꽤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또한 컵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이어나가 준우승에 그치긴 했으나 FA컵 결승에 진출하는 등, 팀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다만, UEFA컵에서의 이른 탈락은 아쉬움을 남겼다. 해당 시즌 로비 파울러는 시즌 36골을 득점하며 완전히 물오른 공격력을 뽐냈고, 맥마나만은 시즌 내내 25개의 도움을 올리며 팀의 에이스로 성장했다.
3.4. 1996-97 시즌
1996년 여름, 리버풀은 팀의 전설적인 스트라이커였던 이안 러쉬를 떠나보내고, 강력한 왼발을 자랑하는 파트리크 베르게르를 영입해 공격진을 강화했다. 로비 파울러-스탄 콜리모어-파트리크 베르게르-스티브 맥마나만으로 이어지는 리버풀의 공격진은 리그에서 주목받았고, 팬들의 기대감을 불러보으기에 충분했다. 또한 이 시기 제이미 캐러거가 1군에 데뷔하여 수비진에 힘을 보탰다.리버풀은 리그 개막 후 8라운드까지 6승 2무를 거두면서 리그 1위로 뛰어올랐고, 이전 시즌보다 더 좋아진 경기력을 선보이며 좋은 상승세를 보여줬다. 그러나 9라운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원정에서 덜미를 잡혔고, 이후 계속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밀려 2~3위권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와 치열하게 순위 경쟁을 펼쳤다. 하지만 리버풀은 지난 시즌과 다르게 승점을 계속해서 방어해냈고, 21라운드 크리스 마스 전후로는 기어코 다시 1위를 탈환하는 기염을 토하며 첨예하게 리그 레이스를 끌고나갔다. 그렇게 리버풀은 리그 중후반까지 우승 경쟁을 펼칠 자격이 있는 상당히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줬다. 파울러와 콜리모어의 투톱 듀오는 화력을 뿜었고, 맥마나만은 리그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활약을 이어갔다. 그러나 1997년에 접어들자 리버풀은 이상하게 경기력을 잃기 시작했다. 당시 주전 골키퍼 데이비드 제임스는 이상한 실수를 연속하며 허망하게 실점을 허용했고, 수비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우승 경쟁은 2월을 넘어가며 더 힘겨워졌다. 리버풀은 리그 4경기를 남긴 시점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홈으로 불러들여 해당 경기를 이긴다면 1위로 단번에 다시 뛰어오를 수 있는 결정적인 찬스를 잡기도 했으나, 희망은 이 경기에서 패배하며 사라지고 말았다. 심지어 파울러는 마지막 4경기에서 출장 정지 징계로 경기에 나오지도 못했고, 이렇게 리그 우승 경쟁은 허무하게 끝났다. 심지어 리버풀은 최종전에서 비기며 골득실에 밀려 2위에서 4위로 떨어지며 리그를 마감했다.[4]
FA컵에서는 4라운드에서 첼시 FC에게 패배해 탈락했고, 리그컵에서는 8강까지 올랐으나 미들즈브러 FC에게 떨어져 고배를 마셨다. 지난 시즌 FA컵 준우승 자격으로 진출한 컵위너스컵에서는 오랜만에 유럽 대항전에서의 좋은 모습들을 선보이며 준결승까지 무난하게 진출하였다. 그러나 준결승에서 파리 생제르망을 만나 원정에서 3-0으로 패배한 뒤, 이후 홈에서 2-0으로 승리했으나 합산 스코어 3-2로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
해당 시즌 리버풀은 리그 우승의 기회를 잡았으나 후반기의 이상한 부진과 홈에서의 결정적인 패배들로 어이없게 기회를 날려보냈고, 유럽 대항전에서도 아쉬운 결과를 안고 무관에 그쳤다. 이 시즌 파울러와 콜리모어는 각각 리그 18골과 12골을 넣었고, 시즌 내내 합산 47득점을 올리며 좋은 화력을 보였으며, 맥마나만과 제이미 레드냅, 베르게르, 존 반스도 괜찮은 활약을 선보이며 공격력을 더해 에반스호는 팬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매력적인 공격 축구를 구사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어이없는 수비 실수들과 집중력 부재로 시즌 막판 미끄러지며 중요한 성과는 내지 못해 아쉬운 시즌에 그치고 말았다.[5] 또한 이 시즌부터 파울러, 레드냅, 콜리모어, 제임스, 맥마나만 등 잉글랜드 주축 선수들의 화려한 사생활이 지적되며 리버풀에 '스파이스 보이즈'라는 별명이 붙여지는 등, 팀의 좋은 전력에도 불구하고 팀의 문란한 기강에 의해 성과는 내지 못해 리버풀 팬들은 아쉬움만 삼켜야했다.
3.5. 1997-98 시즌
에반스는 문란한 사생활로 구설수에 오른 스탄 콜리모어와 사이가 틀어져 그를 1997년 여름 이적 시장에서 팔아버리고, 아카데미에서 발굴된 신예 마이클 오언와 제이미 캐러거를 새 시즌부터 더 많이 기용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리버풀은 인터 밀란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출신의 폴 인스를 영입해 공격진을 보강했고, 중원에 대니 머피를 추가해 전력을 다졌다. 또한 지난 시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끈 스트라이커 카를하인츠 리들레도 영입되었다. 겨울에는 데이비드 제임스를 대체하기 위해 미국 출신의 골키퍼 브래드 프리델이 영입되었다.그러나 리그의 출발은 순탄치 못했다. 리버풀은 개막전부터 비기더니 3라운드까지 승리없이 리그 16위로 추락했다. 이후엔 승리를 추가하며 8라운드 시점에는 다시 5위권으로 올라왔으나 지난 시즌 리그 우승 경쟁을 펼치던 경기력은 사라진 뒤였다. 리버풀은 17라운드부터 연승을 달리며 4위권으로 들어오기는 했으나 로비 파울러가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며 시즌 아웃되어 대위기를 겪어야했다. 그러나 신예 원더 보이 오언의 활약 하에 리버풀은 다시금 경기력을 올렸고 22라운드에 2위까지 올라서는 등 꾸역꾸역 순위를 지켜냈다. 이후 리버풀은 시즌 마지막까지 3~4위권을 수성, 결국 18승 11무 9패 3위의 성적으로 리그를 마감했다. 또 다시 우승 경쟁과는 멀어지며 아스날 FC,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격차는 벌어졌지만, 그래도 리그 4위권 내로는 안착하며 상위권 성적은 유지할 수 있었다.
FA컵에서는 3라운드 첫 경기부터 코번트리 시티에게 3-1로 홈에서 충격패하며 탈락하고 말았다. 리그컵에서는 연승하며 준결승까지 진출했으나, 미들즈브러 FC에게 2차전에서 2-0으로 패해 합산 스코어 3-2로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UEFA컵에서는 1라운드 셀틱 FC을 만나 원정 다득점으로 힙겹게 2라운드에 진출했으나 RC 스트라스부르 원정에서 3-0으로 대패하며 스코어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탈락했다.
에반스는 콜리모어를 이적시키고 인스와 리들레를 영입해 공격진을 보강했으나, 파울러의 장기 부상에 의해 결국 오언의 깜짝 활약에 힘입어 시즌을 끌고나가야했다. 또한 시즌 말미엔 출전 시간을 이유로 파트리크 베르게르와도 사이가 틀어져 1998년 3월, 볼튼 원더러스를 상대로 베르게르가 교체 출전을 거부하기까지 이르렀고, 에반스는 경기 후 그의 태도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그를 판매하겠다고 선언하는 등 구설수가 이어져 공격진은 더욱 흔들렸다. 이에 리버풀은 다시 무관에 그치고 말았다. 그나마 신예 오언이 리그 18골로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에 오르고, 시즌 23골을 몰아쳐 팀 공격이 유지되었으며, 스티브 맥마나만과 인스가 바로 뒤를 지원해 팀의 리그 성적은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 영입된 인스도 파티를 즐기는 등 사생활이 문란한 선수 중 하나였고, 리버풀의 '스파이스 보이즈'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에반스는 전임 감독 그레이엄 수네스 처럼 완강한 규율주의자가 아니었고, 팀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감독이었기에 리버풀의 기강 문제는 계속해서 외부로 노출되고 있었다.
3.6. 1998-99 시즌
3.6.1. 로이 에반스 & 제라르 울리에 공동 감독 체제
제16대 감독 로이 에반스 제17대 감독 제라르 울리에 | |
<colbgcolor=#d00027><colcolor=#fff> 감독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로이 에반스 / 제17대 감독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제라르 울리에 / 제16대 감독 |
코치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더그 리버모어 (수석 코치)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파트리스 베르그 (수석 코치)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필 톰슨 (수석 코치)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조 코리건 (골키퍼 코치) [[스코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론 예이츠 (스카우트) |
주장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폴 인스 / 제43대 주장 (1997~1999) |
계약 기간 | 1998년 7월 16일 ~ 1998년 11월 12일 (4개월/ 120일) |
계약 종료 (에반스의 자진 사임에 따른 울리에 체제 출범) | |
역대 전적 | 18경기 7승 6무 5패 (승률 38.89%) |
1998-99 시즌, 결국 팀의 기강을 다시 잡기 위해 리버풀 보드진은 에반스와 함께 제라르 울리에를 공동 감독으로 앉히는 강수를 두게 되었다. 울리에는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과 이하 연령별 대표팀을 오랜 기간 맡으며 많은 재능 있는 유망주들을 길러냈고, 1998년 프랑스의 월드컵 우승에 기여한 인물로 주목을 받고 있던 감독이었다. 리버풀은 전술 능력이 뛰어났으나 선수 관리에 부족함을 보였던 에반스가 팀의 전술을 담당하고, 선수 육성과 관리에 뛰어난 울리에가 스쿼드를 관리하는 식으로 팀을 만들어나가고자 했다.[6] 리버풀은 빌 샹클리 체제에서 밥 페이즐리 체제로 성공적인 사령탑 승계가 이루어진 이후, 외부 영입 없이 줄곧 내부 코칭 스태프 승진과 팀 레전드 출신 감독을 선임해 오며[7] '리버풀 웨이'라 불리는 감독 선임 전통을 잇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출신의 울리에 선임은 당시로서는 나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에 1998년 7월, 리버풀 역사상 최초의 공동 감독 체제가 성립되었다.[8] 그러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공동 감독 체제는 리버풀에게 악재로 작용했다. 두 사람은 팀 운영의 모든 부분에서 자신의 권한을 내세우며 대립했다.[9] 이렇듯 두 감독이 자리 다툼을 했으니 성적이 제대로 나올 리 만무했고, 리버풀은 공동 감독 체제가 시작된 1998-99 시즌 초반 4개월 동안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 결국 1998년 11월 토트넘 홋스퍼에게 홈에서 3-1로 패한 것을 끝으로 로이 에반스는 체제의 비합리성을 느껴 자진 사임했고, 11월 12일, 울리에가 비로소 리버풀의 정식 감독으로 계약하여 부임하게 되었다. 단독 감독 체제로는 2대 감독 존 맥케나 이후 최초의 외국인 감독 체제였다.[10]
제라르 울리에 체제에 대한 내용은 리버풀 FC/울리에 체제 문서 참고하십시오.
4. 공격 포인트 순위
5. 시즌별 주요 성적
로이 에반스의 시즌별 주요 성적 | ||||||||||
시즌 | 리그 | FA | EFL | CS | UCL | UEL | CWC | ICC | 감독 | |
1993-94 시즌[11] | 8위 (▼ 2) | - | - | - | - | - | - | - | 그레이엄 수네스 ↓ 로이 에반스 | |
1994-95 시즌 | 4위 (▲ 4) | 6R | 우승 (5회) | - | - | - | - | - | 로이 에반스 | |
1995-96 시즌 | 3위 (▲ 1) | 준우승 | 4R | - | - | 2R | - | - | ||
1996-97 시즌 | 4위 (▼ 1) | 4R | 5R | - | - | - | 4강 | - | ||
1997-98 시즌 | 3위 (▲ 1) | 3R | 4강 | - | - | 2R | - | - | ||
1998-99 시즌[12] | 8위 (▼ 4) | - | 4R | - | - | 3R | - | - | 로이 에반스 & 제라르 울리에 ↓ 제라르 울리에 |
6. 평가
신선한 전술로 그레이엄 수네스 체제에서의 부진을 극복하고 1990년대 후반 팀을 다시 상위권 경쟁의 흐름에 올려놓은 레전드 코치 출신의 감독이자, 붉은 제국을 지탱한 부트 룸 코치진의 명맥을 이은 마지막 인물. 내부 코치진과 레전드 출신으로 사령탑을 승계하는 리버풀의 전통에 의해 위기 상황에서 부임한 이후, 이전에 없던 새로운 시스템을 팀에 이식하며 돌풍을 일으켰으나 선수단 관리에서는 아쉬움을 보여주며 '스파이스 보이즈'라는 이명으로 1990년대를 마무리하여 일장일단의 커리어를 보냈다.에반스는 빌 샹클리 시절부터 리버풀에서 선수와 코치로 활약해오며 붉은 제국의 모든 순간들을 지켜봐온 인물이었기에, 그동안 리버풀을 거쳐갔던 명장들과 레전드 코치진들의 모든 것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레이엄 수네스 체제의 실패 이후 그동안의 경험을 발휘해 완전히 새로운 전술을 팀에 도입했다. 그는 리버풀이 샹클리 시대 이후 전통적으로 고수해오던 패스 앤 무브의 철학을 다시 어어가되, 60년대 이후 굳어진 4-4-2 포메이션을 탈피하여 3백을 활용하는 3-4-1-2(3-5-2)를 활용하여 팀을 리빌딩했다. 이러한 방식의 에반스식 3백 전술은 리버풀에는 물론 프리미어 리그 전체를 통틀어서도 새로운 체계였다. 에반스는 공격적인 윙백 기용으로 측면을 해결하고, 존 반스와 이안 러쉬 등 기존의 핵심 선수들에 더하여 스티브 맥마나만, 제이미 레드냅, 로비 파울러 등 어린 잉글리시 코어들을 결합해 팀을 구축했다. 이에 반스와 레드냅이 중원에 자리잡고, 파울러와 러쉬의 투톱 체계 밑에서 맥마나만이 프리롤의 플레이메이커로서 활약할 수 있었다.[13] 에반스는 이러한 새로운 3백 전술과 함께 수네스 아래에서 중위권으로 떨어졌던 팀의 성적을 반등시켜 상위권 경쟁이 가능한 수준까지 팀을 끌어올렸고, 1994-95 시즌 리그컵 우승, 1995-96 시즌 FA컵 준우승에 이어 1996-97 시즌에는 매력적인 공격 축구를 구사하며 리그 우승 경쟁까지 펼쳤다. 에반스 아래에서 파울러는 리그 최고의 공격 자원으로 떠올랐으며, 맥마나만은 당대 프리미어 리그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이름을 날렸다. 1997년부터는 에반스 아래에서 마이클 오언이 발굴되어 공격진에 적극적으로 기용되어 충격적인 활약을 펼침으로써 또 다른 시대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반대로 수비에서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에반스의 리버풀은 매 시즌 크로스 방어에서 취약점을 드러냈으며, 고질적인 수비진 집중력 부재는 매번 발목을 잡는 요소이기도 했다.
좋은 전술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에반스는 부임 시기에 팀의 기강을 잡고 선수단을 통제하는 것에는 크게 실패하여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 리버풀의 주축으로 팀의 반등을 이끈 파울러, 맥마나만, 레드냅과 같은 어린 잉글랜드 선수들은 엄격한 규율주의자였던 그레이엄 수네스 감독이 팀을 떠나자 데이비드 제임스, 스탄 콜리모어와 같이 사생활이 문란했던 팀 멤버들과 어울려 놀기 시작했고, 화려한 헤어 스타일과 패션을 즐기며 자기 관리를 게을리했다. 그러나 에반스는 수네스와 달리 선수단을 강하게 통제하지 않는 감독이었고 선수들의 사생활 문제는 점점 외부로 드러나기 시작했다.[14] 이에 리버풀 선수단은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당시 인기 걸그룹 스파이스 걸스에 빗댄 스파이스 보이즈라는 별명으로 조롱받기도 했다. 리버풀은 강력한 재능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대권 도전이 가능한 전력을 갖춰가고 있었지만 이러한 선수단의 기강 및 사생활 문제는 결정적인 순간에 팀의 집중력 부재와 위닝 멘탈리티 부족으로 이어졌다. 결국 리버풀은 리그 우승의 적기라고 생각되었던 1996-97 시즌 후반기에 추락하며 4위로 떨어지기도 했으며, 에반스 재임기에 항상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더비전에서 힘을 못쓰고 패배하거나, 홈에서의 단두대 매치에서 승리하지 못하거나, 약팀과의 경기에서 어이없이 승점을 잃거나, 유럽 대항전에서 부진하는 등 한끗 부족한 결과를 남겨야만했다. 이러한 좋지 못한 팀 문화와 멘탈리티 속에 에반스는 선수들은 관리하는 것에 매번 어려움을 겪어야 했으며, 실제로 스탄 콜리모어, 파트리크 베르게르 등의 선수들과는 직접적인 불화를 빚기도 했다. 이러한 에반스의 관리자적 단점은 후에 제라르 울리에 체제가 출범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종합하자면, 붉은 제국을 지켜온 레전드 코칭 스태프로서의 경험을 발휘해 수네스 체제의 부진을 극복하고 1990년대 리버풀의 전력을 새로 다진 리버풀 중흥기의 초석과도 같은 감독. 그의 아래 리버풀은 혁신적인 3-4-1-2 전술을 가지고 다시금 상위권 경쟁에 진입했으며, 로비 파울러, 스티브 맥마나만, 제이미 레드냅, 마이클 오언, 제이미 캐러거로 이어지는 전설적인 유스들을 배출하여 팀을 새롭게 성장시킬 수 있었다.[15] 하지만 동시에 젊은 선수들의 통제에 실패하여 에반스 재임기에 리버풀은 선수단의 사생활 문제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으며, 전임자 수네스의 단점은 극복했지만 동시에 또 다른 단점으로 인해 에반스는 결정적으로 리버풀이 우승권으로 복귀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자칫하면 깊은 암흑기로 이어질 수 있었던 수네스 체제를 극복하고 좋은 유산을 2000년대 이후로 물려줬기 때문에 단점과 더불어 딱히 뚜렷하지 못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아주 나쁜 평가를 받는 편은 아니다.[16][17]
[1] 단독 감독 체제 종료일[2] 이 시즌 프리미어 리그 우승은 블랙번 로버스였는데, 당시 블랙번의 감독은 리버풀을 떠나 새로운 출발을 선언한 달글리시였다.[3] 당시 앤디 콜과 콜리모어를 놓고 리버풀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눈치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스 퍼거슨이 발빠르게 움직여 콜을 영입해갔고, 리버풀은 콜리모어를 영입했다.[4] 해당 시즌 2위부터 4위까지 19승 11무 8패로 승점이 모두 같았다. 그러나 골득실에 의해 뉴캐슬 유나이티드와 아스날 FC가 각각 2위와 3위를 차지했고, 당시에는 2위까지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할 수 있었기에 마지막 라운드에서 UEFA컵으로 떨어져버린 리버풀로서는 치명적인 결과였다.[5] 우승 경쟁을 하다가 4위로 미끄러져 많은 비판과 조롱을 받았다.[6] 당시 떠오르던 울리에 감독을 원했던 리버풀이었지만, 그렇다고 수네스 체제의 부진을 딛고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던 에반스를 팽하기엔 명분도 부족했고, 에반스는 팀의 레전드로서 지위가 공고한 상태였다. 이에 공동 감독 체제로 에반스 또한 붙잡아두었던 것.[7] 그레이엄 수네스는 리버풀을 떠났다가 감독직으로 다시 복귀한 것이었지만, 붉은 제국 시절 핵심 중 핵심 멤버이자 엄청난 우승 경력을 자랑하는 레전드임과 동시에 전성기 팀 주장 출신이었다.[8] 리버풀의 초대 감독 윌리엄 바클레이 체제가 사실상 존 맥케나와 함께 공동으로 감독 역할을 수행한 체제였으나 공식적으로 공동 감독을 둔 것은 에반스-울리에 체제가 최초다.[9] 두 사람이 어찌나 대립했는지, 식사도 따로 할 정도였다고 한다.[10] 맥케나의 경우 잉글랜드에 근접해있는 아일랜드 출신이었고, 리버풀 구단 창립 멤버였던 인물이었다. 울리에의 경우 외국인이자 구단 외부 출신인 최초의 감독이며 최초의 유럽 대륙 출신의 감독이다.[11] 시즌 중도 부임[12] 공동 체제 성적[13] 실제로 맥마나만이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기 전까지의 거의 모든 프리미어 리그 활약은 에반스 아래에서 이루어졌다.[14] 수네스가 너무 강경파라 문제였다면, 에반스는 너무 무른 감독이어서 문제였다.[15] 스티븐 제라드는 후임 울리에 체제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16] 실제로 계속해서 리그 4위권 내의 성적을 유지하면서 리그컵도 우승했기 때문에 암흑기라고 할만한 성적을 거둔 것은 아니나, 그가 속해있던 부트 룸의 전임자들이 이룩한 위업이 너무나도 엄청났기에 크게 비교되는 편이다. 실제로 에반스는 부트 룸이 배출한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케니 달글리시에 비하면 아주 초라한 성적을 기록했다.[17] 전임자 수네스를 비롯해 로이 호지슨, 브렌던 로저스와 같은 암흑기 최악의 감독들에 비하면 준수한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