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8:15:57

빌 샹클리

빌 샹클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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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前 축구감독
파일:0_Bill-Shankly.jpg
빌 샹클리
Bill Shankly
<colbgcolor=#eeeeee,#191919> 본명 윌리엄 샹클리
William Shankly, OBE[1]
출생 1913년 9월 1일
스코틀랜드 이스트에어셔주 글렌벅
사망 1981년 9월 29일 (향년 68세)
잉글랜드 머지사이드주 리버풀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스코틀랜드|]][[틀:국기|]][[틀:국기|]])
직업 축구 선수 (라이트 하프[2]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칼라일 유나이티드 FC (1932~1933)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 (1933~1949)
감독 칼라일 유나이티드 FC (1949~1951)
그림즈비 타운 FC (1951~1954)
워킹턴 AFC (1954~1955)
허더즈필드 타운 AFC (1956~1959)
리버풀 FC (1959~1974)
국가대표 5경기 (스코틀랜드 / 1938~1939)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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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5e5e5><colcolor=#000> 등번호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 - 4
가족 밥 샹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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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선수 경력2.3. 감독 경력2.4. 은퇴 이후
3. 감독 스타일4. 평가5. 어록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
6.2. 감독
6.2.1. 대회 기록6.2.2. 개인 수상
6.3. 서훈
7. 여담8. 다큐멘터리9.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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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
Form is Temporary, Class is Permanent.
영국(스코틀랜드)축구 선수 출신 감독. 1959년부터 1974년까지 리버풀 FC 감독을 맡았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빌 샹클리는 1913년 스코틀랜드 에어셔주 글렌벅의 작은 탄광촌에서 5남[3] 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윌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샹클리는 그의 자서전에서 성장기 동안 겨울에 배를 굶을 정도로 가난하게 자랐지만 축구에 대한 열의만큼은 뛰어났다고 쓰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는 5살부터 14살까지 학교를 다니며 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했으나 학교에 제대로된 축구 팀이 없었을만큼 열약한 환경에서 자랐다. 이후 1928년 샹클리는 학교를 떠나 형인 밥과 함께 지역 광산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는 광부로 2년 동안 어렵게 일하면서도 가능한 한 자주 축구를 했고 셀틱레인저스의 경기를 보러다니며 축구 선수에 대한 꿈을 키웠다. 실력을 갈고 닦은 샹클리는 마을 지역 팀인 글렌벅 체리피커즈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가 입단했을 무렵 클럽은 거의 해체단계에 있었고 클럽이 해체된 이후에는 글렌벅에서 약 12마일 떨어진 크론베리 에클린턴에 입단하게 된다. 샹클리는 자전거로 출근하며 1931-1932 시즌 스코틀랜드 하부 리그에서 뛰었고 그 다음 시즌 본격적인 프로 선수 생활을 위하여 잉글랜드로 진출하게 된다.

2.2. 선수 경력

크론베리에서 뛰던 샹클리는 피터 캐러더스라는 스카우터의 추천을 받아 칼라일 유나이티드에서 한 달 간의 트라이얼 기회를 받았고, 트라이얼로 단 한 경기를 뛰고는 곧바로 계약을 맺어 칼라일 유나이티드 유스 팀에 입단하게 된다. 1932-1933 시즌 19살의 나이로 잉글랜드 무대에 데뷔한 샹클리는 1932년 12월 31일 로치데일 AFC와의 1군 경기에서 처음 시니어 데뷔를 한 뒤, 1군 무대를 16경기 가량 소화했고, 리저브 팀에서는 지역 리그 컵 결승전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 리저브를 꺾고 우승을 맛보기도 했다.[4] 그는 지역 기자들에게 레프트백으로서 재능이 있다고 평가받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수비형 미드필더 포지션을 소화했다. 그는 열심히 달리고 투철하게 몸을 쓰는 스타일로 칼라일에서 손 꼽히는 유망주로 평가받으며 많은 기대를 모았다.
파일:billasaplayer.jpg
선수 시절의 빌 샹클리

샹클리는 그의 고향인 글렌벅과 가까운 칼라일에서 안정을 느끼고 있었지만, 1932-1933 시즌이 끝난 직후, 프레스턴 노스 엔드가 그의 영입에 500 파운드의 이적료를 제시했고, 그는 총 60 파운드의 계약 수당 및 5 파운드의 주급을 받고 프레스턴으로 이적하게 된다. 샹클리는 처음 해당 조건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형인 알렉 샹클리가 당시 칼라일보다 더 큰 클럽이자 2부에 속해있던 프레스턴으로 이적하는 것은 기회라는 조언을 했고 결심을 굳히게 된다. 샹클리는 이적 후 리저브 팀에서 커리어를 시작했고 그는 이전에 뛰던 리그보다 더 수준 높은 지역 리그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는 1933년 12월 9일 헐 시티와의 경기에서 20살 3개월의 나이로 1군 데뷔를 하게되었는데, 그는 데뷔 경기에서 골을 넣었고 영리한 패스를 보여주며 전국적으로도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는 빠르게 1군 주전으로 자리를 잡았고 이에 힘입어 프레스톤은 1934-35 시즌의 결과로 1부 리그로 승격도 하게 되었으며 그는 팬들의 사랑을 받는 선수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은퇴하기 까지 16년 동안 프레스턴에서만 선수 시절을 보냈으며 그가 은퇴하기 전까지 프레스턴은 다시 강등되지 않았다. 그는 성실하게 뛰는 팀 내 주축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1936-1937 시즌 FA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선덜랜드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고, 그 다음 시즌 FA컵 결승전에 다시 진출하여 허더스필드를 1-0으로 꺾는데 일조하며 생애 첫 메이저 우승을 맛보는 선수생활의 정점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의 전성기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리그가 중단되며 더 빛을 보지는 못했고 그는 전쟁 시기 영국 공군에 입대하여 전시 리그에서 커리어를 이어갔다. 전쟁 이후 다시 리그가 재개되었고 샹클리는 프레스턴으로 복귀하였는데, 이 당시 그는 톰 피니와 4시즌 간 동료로서 경기하기도 했다.[5] 그는 프레스턴의 주장을 맡다가 33세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샹클리는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스코틀랜드 대표팀에서 공식 경기와 비공식 경기를 합쳐 12차례 출전하기도 했다. 그는 1938년 4월 9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데뷔했으며 그의 출장 경기 중 9번은 잉글랜드와의 경기였고 나머지는 북아일랜드, 웨일스, 헝가리와의 경기였다. 그는 1941년 5월 3일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는 주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1941년 5월 3일 그의 국가대표 경력에서 유일한 득점을 잉글랜드를 상대로 기록하기도 했는데, 이 득점은 50야드 정도의 거리에서 골문으로 차 넣은 초 장거리 골으로 유명했다. 또한 이 경기에서는 친구이자 후에 감독시절 경쟁자로 맞붙는 맷 버스비도 함께 뛰었다.

2.3. 감독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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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은퇴 이후

샹클리는 1974년 FA컵을 우승했을 때 60세의 나이였고, 해당 경기가 끝난 후 라커룸으로 돌아왔을 때 오랜 세월 끝에 피곤함을 느끼며 은퇴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의 아내 네시는 그가 1년 일찍 은퇴하기를 바랬기에 샹클리는 예년부터 보드진에게 은퇴를 언급해왔고 결국 보드진도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다고. 샹클리는 유러피언 컵을 들어올리지 못했다는 통한의 아쉬움이 있었으나 그간 리버풀에서의 자랑스러운 업적에 만족하며 결국 1974년 7월 12일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하지만 평생 축구를 업으로 했고 리버풀을 사랑했던 그는 쉽게 구단을 떠날 수 없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은퇴를 선언하자마자 그 결정을 후회했다고 쓰기도 했을 정도. 이에 샹클리는 은퇴 후에도 클럽과의 관계를 지속하려고 했고 멜우드의 팀 훈련장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리버풀은 밥 페이즐리 체제에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고, 은퇴한 샹클리가 지속적으로 훈련장에 모습을 비추면 페이즐리 체제의 권위가 흔들릴 것이라 판단하여 이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못했다. 당시의 일화들에 따르면 샹클리는 구단이 자신을 반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많이 섭섭했던 모양.[6] 또한 이후 샹클리는 구단 보드진에 합류하여 이사직을 맡게 되었지만, 다른 보드진 구성원들과의 의견 차이가 있었던데다가 워낙 쌓아온 커리어만큼 입김이 강해 불화를 야기했다. 결국 리버풀은 보드진 내 고압적인 인물을 둘 수 없다는 판단을 했고 샹클리는 구단에서의 직을 내려놓게 된다.[7] 샹클리가 구단에 어떤 존재였는지를 생각한다면 당시 리버풀의 샹클리에 대한 처우는 다소 무례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가차없는 승리를 추구하고 구단과 감독, 선수들을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리는 것은 정작 샹클리 본인이 리버풀에 줄곧 주입해온, 수년간 다져온 본인의 유산이었다.

샹클리는 리버풀 감독직에서 은퇴한 지 4개월 후인 1974년 11월 대영제국 훈장인 OBE를 수상했으며, 샹클리와 그의 아내 네시는 1959년 리버풀로 오면서 구입한 리버풀 웨스트 더비의 주택에서 계속 생활했다.[8] 그리고 1981년 9월 26일 아침, 샹클리는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인해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동년 9월 29일 심장마비 재발로 명예로웠던 생을 마감했다. 샹클리가 사망한 날, 리버풀의 훈련장 멜우드와 에버튼의 훈련장 벨필드에서의 모든 훈련이 취소되었고, 영국 노동당 의회 또한 그를 위해 1분간 묵념했다.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이자 샹클리의 국가대표 동료이자 절친이었던 맷 버스비는 샹클리의 급사에 큰 충격을 받아 모든 연락을 끊기도 했다. 이후 축구계 모든 클럽들과 선수들로부터 샹클리에 대한 많은 헌사가 쏟아졌고 리버풀의 존 스미스 회장은 "금세기 가장 뛰어나고 역동적인 감독이었다."라는 말로 샹클리의 삶을 요약했다. 샹클리는 10월 2일 안필드 근처 화장장에서 화장되었고 그의 유골은 안필드 구장 내 스탠드에 뿌려졌다. 바로 다음 날인 10월 3일 그의 사망 이후 첫 리그 홈 경기가 안필드에서 있었고 그의 추모행사가 열렸다. 팬들은 'Shankly Lives Forever' 라는 걸개를 집에 내걸며 그를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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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클리 게이트(Shankley Gates)의 모습
안필드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9]

이후 리버풀 구단은 안필드 경기장 안필드 로드 스탠드 앞에 15피트 높이의 주철로된 '샹클리 게이트' 를 설치하여 그의 명예를 기렸다. 'You'll Never Walk Alone' 문구가 새겨진 이 게이트는 1982년 8월 그의 아내 네시 샹클리에 의해 처음으로 개문되었다. 샹클리 게이트는 원래 메인 스탠드와 안필드 로드 엔드 스탠드 사이의 주차장 입구에 위치에 있었으나, 2016년 리버풀이 안필드 증축 공사의 일환으로 메인 스탠드를 대규모 증축하면서, 케니 달글리시 경 스탠드 부근으로 위치가 이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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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made the people happy
그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했다

이후 1997년에는 클럽에 대한 공헌을 기념하여 안필드에 청동으로 만들어진 7피트 높이의 빌 샹클리 동상이 세워졌다. 동상의 주춧돌에는 '그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했다.(He made the people happy)'라는 기념비적인 문구가 함께 들어갔다. 또한 2016년에는 안필드 외곽 96번가에 빌 샹클리 기념석이 설치되기도 했는데, 이 기념석에는 1965년 안필드에서 인터 밀란을 상대로 3-1로 승리했던 유러피언 컵의 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적혀있다. 해당 경기는 리버풀이 유럽 최정상 무대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처음 알리며 붉은 제국의 역사적인 시작을 알린 기념비적인 경기이기도 하다.

1998년에는 샹클리가 선수로 전성기를 보냈던 프레스턴 노스 엔드가 홈 구장인 딥데일을 리모델링하면서 북쪽 스탠드를 '빌 샹클리 콥' 스탠드로 명명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이 스탠드는 샹클리의 머리와 어깨의 이미지를 담은 문양으로 시트가 색칠되어졌다. 이후 샹클리는 감독으로서 잉글랜드 축구에 끼친 영향을 인정받아 2002년에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2004년에는 스코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첫 번째 헌액자로서 입성하기도 하였다. 2015년 8월에는 리버풀 도심 내에 빌 샹클리의 삶과 경력을 기리는 호텔과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3. 감독 스타일

샹클리의 전술은 패스 앤 무브로 대표된다. 당대 잉글랜드 축구는 지역 방어와 포지션 유지를 선호하는 형태가 다수였는데, 샹클리는 이러한 형태의 상대 팀들을 부수기 위해 패스와 움직임을 통한 빠르고 공격적인 축구를 철학으로 삼았다. 이에 샹클리는 좌우 측면에 빠른 윙어를 활용하고 공격진에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포워드들을 배치하여 다이나믹하게 공격을 펼쳐나가는 구조를 선호했으며, 1960년대에는 로저 헌트-이안 세인트 존, 1970년대에는 존 토샥-케빈 키건을 앞세워 강렬한 공격형의 전술을 발휘했다. 특히 상대를 기다리지 않고 압박을 가하는 형태의 수비를 사용한 압박 축구의 선두 주자이기도 했다.

리버풀 부임 초반에 샹클리는 W-M(3-3-4) 포메이션을 주로 사용하여 헌트, 세인트 존, 앨런 에이코트, 이안 캘러한 등의 공격 자원들을 유기적으로 배치하며 상대 수비진을 공략했다. 이는 게리 번-론 예이츠-로니 모란이 3백을 만들고 중원에 고든 밀른과 윌리 스티븐슨, 그리고 그 위에 피터 톰슨, 지미 멜리아, 캘러한, 세인트 존, 헌트가 퍼져있는 전형이었다. 이러한 전형은 당대 잉글랜드 수비진들을 제대로 공략하며 리버풀을 1부 리그 우승까지 이끌었다. 그러나 1962년 월드컵을 시작으로 국가대표팀 경기들에서 W-M 포메이션의 한계가 드러남에 따라 샹클리는 유럽 대항전에 대응하기 위해 4백 축구로 전환하여 4-4-2, 4-2-4에 가까운 형태로 전형을 구축했다. 샹클리는 공격 숫자를 한 명 줄이고, 기존의 3백에 토미 스미스를 센터백으로 투입하여 4백을 만든 뒤, 톰슨과 캘러한을 좌우 윙에, 밀른과 스티븐슨을 중앙 미드필더에 놓고 헌트와 세인트 존을 투톱으로 배치하였다. 이러한 형태에서 예이츠는 최종 수비수를 맡고 또 다른 센터백 스미스는 전진하는 볼 플레잉 디펜더의 임무를 맡아 센터백진에 역할 분배가 두드러졌으며, 득점을 담당하는 헌트와 헌트 주변의 공간을 공략하는 세인트 존의 유연한 포지셔닝도 돋보일 수 있었다. 이러한 샹클리식 4-4-2 형태는 이후 70년대 리빌딩을 거치면서도 계속 이어졌고, 헌트-세인트 존의 역할은 토샥-키건이 그대로 계승했다. 70년대 샹클리의 4백은 알렉 린제이-레리 로이드-토미 스미스-크리스 라울러로 구성되었고, 특히 좌측 윙어에 발빠르게 전진이 가능한 스티브 하이웨이가 돌격대장 역할을 수행함에 따라 좌측 풀백 린제이가 함께 공격 가담을 펼쳐 상대 우측면에 과부하를 주는 식의 패턴 플레이도 발전했다. 이러한 샹클리의 전술과 철학은 후에 밥 페이즐리에게 전수되어 붉은 제국을 탄생시켰다.

전술 외적으로는 선수들을 아들처럼 돌보는[10] 덕장이면서도, 승부의 세계 앞에서는 냉정함과 비범함을 발휘해 팀의 성공을 위해 칼을 뽑을 수 있는 승부사 기질의 감독이었다. 실제로 60년대 후반부터 팀의 성적이 우하향하자 그동안 팀의 주축이었던 레전드급 선수들을 대다수 정리하고 새로운 재능들을 팀에 채워 혁신적인 리빌딩을 성공시켰던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승부욕이 대단하여 가끔은 공격적인 인터뷰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던 감독이며 타고난 달변가라 그 과정에서 수많은 명언을 탄생시켰다. 샹클리는 또한 구단에 대한 투자를 끌어오기 위해 보드진들에게도 자신의 의견을 열렬히 피력하기도 했고 단순히 코치로서의 역할을 넘어 팀의 시스템 전반을 직접 지시하여 손보는 등, 자신의 목소리와 생각을 거리낌없이 실현하는 특유의 카리스마를 보유한 감독이었다. 이런 캐릭터에 의해 리버풀에서는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졌으며, 팬들에게도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이는 그가 그 누구보다 서포터들의 존재를 중요시하고 팬들과의 유대감을 그 어떤 가치보다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기도 했으며, 실제로 샹클리는 팬들 앞에서 연설하거나 팬들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를 상당히 즐겼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샹클리는 팀과 팬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능력이 실로 뛰어났던 감독이며, 팬들로 하여금 결과물을 떠나 낭만과 감동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인간적인 면모를 갖췄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철저한 전략으로 미래를 대비하는 안목과 더불어 강력한 리더십으로 집단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었던 감독이다. 이에 21세기에 리버풀에 부임하여 입지전적의 역사를 새로 쓴 위르겐 클롭이 상당히 샹클리와 닮은 점이 많은 감독으로 꼽히기도 한다.[11]

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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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샹클리는 언제나 위대한 축구 감독 그 이상이었다. 그는 축구계의 무함마드 알리였고 카리스마 넘치는 이단아였다. 그의 언사는 예상치 못하는, 흠잡을 수 없는 시였다. 그는 리버풀을 혁명 지도자처럼 이끌었고, 대의를 위해서 그의 선수들을 축구 선수로서뿐만 아니라 전사들로서 지시했고, 팬들에게는 민중의 영웅이 되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제임스 코빗
이제 60년대 이전의 낡고 황폐했던 클럽은 찾아볼 수 없다. 샹클리는 잉글랜드 2부 리그의 수렁에 빠져있던 팀을 건져내 그들을 유럽 대륙 최고의 위치로 이끌었다. 그는 팀을 3번의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팀에 첫 FA컵과 첫 UEFA컵 우승컵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이 은색 트로피들은 이야기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글렌벅 출신의 이 남자가 보여준 가장 큰 영향력은 형이상학적이다. 그는 리버풀의 아이디어를 창조했다. 이는 그가 머지사이드에 도착하기 전까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개념은 아직도 클럽 전체를 관통한다. 샹클리는 팬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들이 '골문으로 공을 빨아들이게 하는 것'에 대해 말했고, 관중들이 마치 경기장에 뛰는 것 처럼 느끼게 했다. 샹클리는 리버풀 클럽 역사상 가장 중요한 아이콘이다.
리버풀 태생의 전 축구선수 토니 에반스

빌 샹클리는 이견이 없는 명실상부 리버풀 구단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꼽힌다. 샹클리는 1950년대 2부 리그의 수렁에 빠져있던 팀에 부임하여 강력한 리더십으로 리버풀을 1부 리그 승격으로 이끌었고, 이후 승격 두 번째 시즌에 1부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구단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종식시키는 입지전적의 위업을 쌓았다. 또한 그는 구단 역사상 최초의 컵 대회 우승인 FA컵 우승을 이끌었고, 구단 역사상 첫 유럽 대항전[12]에 진출하여 리버풀을 실질적으로 유럽 무대에 알렸으며[13], 이후 구단 역사상 최초의 유럽 대항전 우승[14]과 잉글랜드 구단 최초의 리그-유럽 대항전 더블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샹클리는 이러한 대회 우승 커리어와 성적만으로 평가될 수 없는 감독이다. 사실 우승 경력으로는 샹클리의 후임인 밥 페이즐리가 구단 역사상 가장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닌 샹클리가 리버풀 팬들의 가장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이유는, 샹클리가 리버풀의 모든 영광을 가능케한 토대와 기반을 마련했던 '구단의 아버지' 격 감독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샹클리가 구단에 남긴 유산들은 구단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고 그 영향력은 사실상 현대까지도 이어내려오고 있다.

먼저, 샹클리는 부임과 동시에 보드진에게 '매니저'로서 발휘할 수 있는 대다수의 권한[15]을 요구하여 강력한 운영권을 갖춘 뒤, 열약한 상태에 처해있던 리버풀의 홈 구장인 안필드와 당시 훈련장이었던 멜우드를 정비하여 리버풀이 제대로된 경기와 훈련을 소화할 수 있도록 구단의 인프라를 혁신했으며, 선수들이 입는 복장과 경기에서 사용하는 경기 장비 등 클럽 내 모든 운영 요소를 재정비했다. 그의 첫 부임 당시 리버풀은 잔디에 물을 주는 시설이 없었을 정도로 노화된 구장과 관리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채 방치된 훈련장만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그는 적극적인 보드진의 투자를 끌어오며 안필드를 리버풀의 요새로, 멜우드를 리버풀 역사의 산실로 탈바꿈시켰다. 이후 리버풀의 상징과도 같은 올 레드 색상의 홈 유니폼 또한 상대에서 위압감을 보여주기 위해 샹클리가 고안해낸 것인데, 실제로 샹클리는 운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철학 하에 처음으로 경기장 잔디 상태에 따라 다른 축구화 스터드를 사용하게 하는 등 고려할 수 있는 모든 구단의 디테일을 손 본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최초로 구단에 현대적인 훈련시스템을 도입했다. 샹클리 이전에 구단의 훈련은 대부분 단순히 도로를 내달리는 수준의 훈련에 지나지 않았으나, 샹클리는 체계적으로 나눠진 세션과 선수들의 상태에 알맞는 루틴, 공을 가지고 하는 기능적인 훈련들을 중시했다. 특히 5대5 스몰 코트 게임을 통한 좁은 공간에서의 패스워크 훈련을 구단에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샹클리는 훈련 이후의 회복 과정에서도 과학적인 이론을 동원하여 신체의 온도를 떨어트려 부상을 방지하는 방식을 사용했다.[16] 즉, 샹클리는 구단에 있어 감독이라는 위치를 공고히하며 클럽 내 모든 현대적인 인프라의 초석을 다졌을 뿐 아니라 리버풀의 경기 운영과 훈련 체계에 있어서 처음으로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한 인물인 것이다.

또한 샹클리는 특유의 '패스 앤 무브먼트' 철학을 기초로한 공격적인 축구를 리버풀에 도입해 리버풀이 특유의 다이나믹한 축구를 구사할 수 있도록 만든 리버풀 전술의 선구가격 인물이기도 했다. 샹클리는 선수들의 패스와 움직임을 통한 빠르고 공격적인 축구를 팀에 도입했고, 이에 리버풀은 좌우 측면에 빠른 윙어들과 공격진에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포워드들을 활용하며 당대 최고의 공격 전략을 구사하는 클럽 중 하나로 올라설 수 있었다. 또한 상대를 기다리지 않고 압박을 가하는 형태의 수비를 사용하여 압박 축구를 최초로 리버풀에 도입한 감독이기도 했다. 여기에 더하여 샹클리는 선수들을 아들처럼[17] 돌보는 인간적인 면모의 덕장이면서도, 승부의 세계 앞에서는 냉정함과 비범함을 발휘해 팀의 성공을 위해 칼을 뽑을 수 있는 승부사 기질의 감독이어서 스쿼드의 리빌딩에도 장점을 발휘했다. 이에 샹클리 체제가 장기간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리버풀은 샹클리 휘하에서 트렌드에 맞는 전술 변화[18]와 리빌딩을 통해 발전을 거듭함으로써 1970년대 실질적인 전성기를 연속해 맞이할 수 있었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그는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루벤 베넷, 로니 머랜, 톰 손더스 등의 당시 리버풀 코칭 스태프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조직적인 코칭 사단을 구축함으로서 구단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샹클리와 코치진들은 안필드 내의 축구화 보관 창고인 부트 룸(Boot Room)을 개조하여 비 공식 코칭 스태프 회의실로 활용하며 전술, 운영, 코칭, 팀 관리 등 클럽을 위한 무수한 논의들을 진행했고 구단 내 모든 사항들을 공유했는데, 이는 감독이 바뀌어도 구단의 시스템이 유지되는 '리버풀 웨이'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1967년 클럽의 스카우팅 시스템을 새로 혁신하여 재능 있는 선수들을 발굴할 수 있도록 한 것도 그가 남긴 유명한 유산의 한 부분.[19] 결국 구단의 전성기를 만든 코칭 시스템 전반의 초석을 샹클리가 세운 것이다. 실제로 이 샹클리의 코칭 시스템은 리버풀이 현대적인 클럽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하는데에 절대적인 영향을 줬다. 또한 실질적으로 그의 시스템과 그가 만든 '부트 룸' 아래 7-80년대 잉글랜드를 넘어 유럽을 지배한 리버풀의 전성기인 붉은 제국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샹클리가 구단 내 최고의 아이콘인 이유는 그가 단순히 리버풀의 인프라와 시스템을 개보수한 감독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샹클리가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명문 클럽'으로서 리버풀의 정체성을 만들어 냈기 때문. 그는 리버풀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리버풀을 공략불가능한 요새로 만드는 것이 자신의 이상이라는 것을 공언했고, 리버풀이라는 구단의 목표 의식을 보다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놓았다. 대표적으로, 위에도 언급하였듯이 그는 리버풀의 유니폼 컬러를 상하의와 양말까지 전부 붉은색으로 바꿨으며, 드레싱 룸에서 그라운드로 들어가는 입구마다 ‘This is Anfield’ 문구가 적힌 현판을 걸어두게 만들었다.[20] 그는 항상 리버풀은 최고가 되어야 하고,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길 원했다. 단순히 '잘 돌아가는 구단'을 넘어 선수들에게 강력한 동기부여와 더불어 위닝 멘탈리티를 심어주며 '확실히 이기는 구단'을 만들어낸 것. 결국 그의 바람대로 리버풀은 그의 지휘 아래 세 차례의 리그 우승과 구단의 첫 FA컵 및 첫 유럽 대항전 우승을 달성했고 잉글랜드 최고의 클럽 중 하나로 뻗어나게 되었다. 결국 2부 리그를 전전하던 클럽을 완벽히 리빌딩하여 명문 클럽으로서의 기틀을 확립한 샹클리의 도약기에 힘입어 리버풀은 밥 페이즐리조 페이건, 케니 달글리쉬로 이어지는 긴 전성기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리버풀은 단순한 클럽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기관(institution)이다. 그리고 내 목표는 사람들을 클럽과 팀에 가까워지게 하고 그들이 클럽의 일부라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아내들은 남편의 유골을 안필드에 가져다 놓고 작은 기도를 한 뒤 경기장에 뿌리기에 이르렀다. 난 그들에게 "당신들에겐 언제나 환영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십여 명씩 찾아왔다. 한 어린 소년이 그의 직장에서 죽자 어느 일요일엔 50명의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그의 유골을 스탠드에 뿌리기 위해 안필드로 왔다. 사람들은 살아있을 때만 리버풀을 지지하는게 아닌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리버풀을 지지한다. 이것이 진짜 리버풀의 스토리이다. 이것이 아마도 리버풀이 그토록 훌륭한 이유일 것이다. 이 사실에 위선은 없다. 이것은 정말 진실된 이야기이다.
빌 샹클리

또 한가지 샹클리가 구단에 남긴 위대한 영향은 바로 서포터즈와의 관계에 있다. 샹클리는 감독 경력 내내 팬들의 중요성을 구단에 피력해왔다. 그는 자신이 경기장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을 늘 강조했으며, 팬들은 팀에 정말 중요한 존재기 때문에 감독은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해야만 한다고 자주 말해왔다. 일례로 샹클리는 트로피 퍼레이드 중에 팬들이 던진 머플러를 경찰이 막아서자 소중한 것을 막지말라며 머플러를 회수해 두를 정도로 서포터들과 소통에 노력했다. 그는 팬들의 편지에 직접 타자를 쳐서 답장하는 것은 물론, 경기 전에 경기장에서 자주 연설을 하기도 했는데, 그는 공개적으로 팀의 변화와 이전 경기들에 대한 견해를 팬들에게 직접 설명하곤했다. 이에 리버풀 팬들은 그와 그의 팀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주었고 샹클리와 리버풀은 서포터들과 특별한 유대감을 형성하게 되었다. 1971년의 FA컵 결승전에서 패배한 뒤 샹클리가 세인트 조지 홀의 계단에 서서 10만명이 넘는 리버풀 팬들을 앞에 두고 연설을 했는데 이 당시에 피터 로빈슨 구단 사무총장이 "샹클리가 팬들에게 머시 터널[21]을 통해 행진하고 버킨헤드[22]를 약탈하라고 하면 진짜로 팬들은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 샹클리로부터 시작된 리버풀과 팬들의 특별한 유대감은 현대로까지 이어졌다. 샹클리 이후 리버풀은 압도적인 로컬 팬 베이스의 힘을 가진 구단이 되었고 현재에도 리버풀은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과 구단을 위한 절대적인 지지로 유명한데, 지금까지도 구단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You'll Never Walk Alone 정신이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현 리버풀의 모토라고 볼 수 있는 이 YNWA 정신의 실질적인 시초가 빌 샹클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종합하자면, 빌 샹클리는 리버풀의 경기장과 훈련장 및 모든 인프라에 초석을 마련한 인물일 뿐 아니라, 구단 내 운영과 코칭 시스템의 근본을 다졌고, 현대적인 전술과 전략을 도입해 팀의 첫 번째 전성기를 이끌며 팀에게 최초의 국내 컵 우승 및 유럽 대항전 우승을 가져다 주었으며, 팬들과의 단단한 유대관계를 구축해 구단을 지탱하는 문화까지도 만들어낸 입지전적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리버풀에서 만들어낸 모든 유산들은 현대까지도 구단과 축구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23], 특히 리버풀에게는 실로 구단 그 자체와도 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모두가 함께 노력할 때 위대한 구단이 탄생한다는 것을 직접 보여준 리버풀의 정체성 그 자체인 감독.

5. 어록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
Form is Temporary, Class is Permanent.
내 이상은 리버풀을 무적의 요새로 만드는 것이다.
My idea was to build Liverpool into a bastion of invincibility.
이 도시에는 위대한 두 개의 팀이 있다. 리버풀리버풀 2군.[24]
The best two teams on Merseyside, Liverpool and Liverpool reserves.
리버풀은 나를 위해 만들어졌고, 나는 리버풀을 위해 만들어졌다.
Liverpool was made for me and I was made for Liverpool.
마오쩌둥은 이것보다 더 붉은 힘을 본적이 없다.
Chairman Mao has never seen a greater show of red strength.
리버풀은 단순한 클럽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기관(institution)이다.
Liverpool is not only a club. It’s an institution.
당신이 1등이라면 당신은 1등이다. 하지만 당신이 2등이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If you are first you are first. If you are second you are nothing.
심판들의 문제점은, 그들은 규칙에 대해서는 알지만 경기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것이다.
The trouble with referees is that they know the rules, but they don't know the game.
만약 에버튼이 앞 마당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면, 난 커튼을 쳐버릴 것이다.
If Everton were playing at the bottom of the garden, I'd pull the curtains.
축구 클럽에는 선수, 감독, 서포터즈라는 신성한 삼위일체가 있다. 디렉터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수표에 사인이나 할 뿐이다.
At a football club, there's a holy trinity – the players, the manager and the supporters. Directors don't come into it. They are only there to sign the cheques.
이것은 우리 선수들에게 누구를 위해 플레이하는지, 그리고 상대에겐 누구를 상대로 플레이하는지를 상기시켜주기 위함이다. - 'This is Anfield' 현판에 대하여
About the 'This is Anfield' plaque - This is to remind our lads who they're playing for, and to remind the opposition who they're playing against.
일부 사람들은 축구가 생사의 문제와 같다고 여긴다. 난 그러한 태도에 매우 실망했다. 축구는 생사의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임을 확언한다.
Some people believe that football is a matter of life and death. I'm very disappointed with that attitude. I can assure you it is much more important than that.
광적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된다만, 이건 광적인 것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리버풀은 그들에게 종교다. 이곳에 오는 수천 명의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온다... 일종의 신사인 것이다. 안필드는 축구장이 아니다.
The word fanatic has been used many times…I think it’s more than fanaticism. It’s a religion to them. The thousands who come here, come to worship…it’s a sort of shrine, Anfield isn’t a football ground.
나는 무적의 팀을 만들고 싶다. 상대가 우리를 이기기 위해선 화성에서 팀을 만들어 보내야할 것이다.
I want to build a team that’s invincible, so that they have to send a team from bloody Mars to beat us.
무엇보다 나는 이타적이고, 다른 이들과 영광을 나눌 수 있도록 애쓰고 걱정하며, 머리를 높이 들고 '우리가 바로 리버풀이다' 외칠 수 있는 사람들로 이뤄진 한 가족을 만든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Above all, I would like to be remembered as a man who was selfless, who strove and worried so that others could share the glory, and who built up a family of people who could hold their heads up high and say 'We're Liverpool.
붕대를 풀어라. 그리고 '네' 무릎이라니!, 그건 '리버풀'의 무릎이다! - 무릎에 붕대를 감고 훈련에 나온 토미 스미스에게
To Tommy Smith after he'd turned up for training with a bandaged knee - 'Take that poof bandage off, and what do you mean YOUR knee, it's LIVERPOOL'S knee!
"아, 문제가 있는 리버풀이 리그 톱이군요." - 기자가 리버풀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아니냐고 묻자
To a journalist who suggested Liverpool were struggling - 'Ay, here we are with problems at the top of the league.
"그곳이 내가 사는 곳이오." - 주소란에 '안필드'라고 적은 것을 되물은 브뤼셀의 호텔 직원에게
Shankly to the Brussels hotel clerk who queried his signing 'Anfield' as his address on the hotel register - 'But that's where I live.
"그냥 들어가서 여기저기 수류탄 몇개 갈겨버려라 아들아! - 케빈 키건을 경기장에 투입하며
Explaining to Kevin Keegan at Anfield - 'Just go out and drop a few hand grenades all over the place son!'

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

6.2. 감독

6.2.1. 대회 기록

6.2.2. 개인 수상

  • 잉글랜드 올해의 감독[25]: 1972-73
  • PFA 메리트상: 1978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2
  • 스코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4

6.3. 서훈

7. 여담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적인 감독 맷 버스비와는 절친한 사이다. 둘은 선수 시절 스코틀랜드 국가대표 팀에서 같이 뛰었던 팀 동료이기도 했고, 60년대 리그에서 우승경쟁을 펼쳤던 감독으로서의 경쟁 상대이기도 했다. 샹클리가 은퇴 이후 급사하자 버스비가 크게 상심해 연락을 두절하고 슬퍼하기도 했다.[26]
  • 데니스 로를 경기장에 처음 투입시키며 1군 데뷔를 시켰던 감독이기도 하다. 샹클리가 허더즈필드 감독으로 부임해있던 당시 로는 허더즈필드의 어린 유망주였고 샹클리는 당시 허더즈필드에 정식 부임하기 이전, 유스 팀 감독이기도 하였기에 사실상 로를 실질적으로 발굴한 감독. 이후 로가 맨유에서 활약하던 당시, 샹클리는 리버풀의 감독으로 부임해있었고 리버풀과 맨유는 리그 정상을 놓고 경쟁을 펼치며 인연이 이어진다. 샹클리는 로에게 올드 트래퍼드가 아닌 안필드에 왔었어야 했다고 만날 때마다 농담을 건냈다고 한다.
  •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공군에 입대하여 상병으로 복무하던 중 아내 네시 샹클리를 만났다. 그들은 바바라 샹클리와 자넷 샹클리라는 두 딸을 두었고, 이들은 여섯 명의 손자를 낳았다. 네시 샹클리는 2002년 8월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선수 시절의 일화로, 맨체스터 시티 소속이었던 북아일랜드 국가대표 피터 도허티가 샹클리를 리그 경기에서 만났는데 샹클리가 "위대한 팀, 노스 엔드, 위대한 팀..."이라고 계속 중얼거리며 온 경기 내내 자신을 쫓아다녔다고 한다.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상당히 집요한 플레이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고. 결국 해당 경기에서 샹클리의 프레스턴이 맨체스터 시티를 3-1로 완파했다고 한다.
  • 그는 축구 철학과 함께 뚝심있는 사회주의자로도 유명했다. 인터뷰에서도 여러차례 대놓고 언급하기도 했다. 협업과 공생을 강조했으며 그도 이런 자세가 리버풀 성장의 동력 중 하나라 말한 적도 있다. 그의 사망 당시 영국 노동당이 그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기려 추모하기도 했다.
  • 그는 특이하게도 복싱 선수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공군에 입대하여 많은 스포츠들을 접했는, 당시에 RAF라는 단체의 미들급에서 우승한적도 있을 정도였다.
  • 2015년 말부터 리버풀에 부임한 위르겐 클롭 감독이 현지 언론과 팬들 사이에서 빌 샹클리에 자주 비유되곤 한다. 리버풀의 레전드 골키퍼 브루스 그로벨라는 "클롭은 독일인으로 환생한 빌 샹클리다"라고 말했으며, 리버풀 레전드 미드필더 그레이엄 수네스 역시 "클롭은 리버풀과 매우 잘 어울리는 감독이며, 마치 샹클리와 같다"라는 말을 남겼다. 정작 클롭 본인은 "나는 절대로 샹클리 감독과 비교될 수 없다"라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는데,# 침체기에 부임하여 리버풀을 부활시켰다는 점, 부임 5시즌 만에 1부 리그 우승을 안긴 점, 안필드에서 팬들과의 유대감을 중시하는 점, 클럽의 내부적인 문제에 대한 개혁, 훈련 시설 및 리저브 팀에 대한 프로젝트, 정치 성향 등 공교롭게도 두 감독 사이에 공통점이 꽤나 있다.
  • 빌 샹클리의 어록으로 알려져 국내 축구 커뮤니티에서만 아니라 해외 웹에서도 인용되는 문구로, “우리가 비기고 있거나 지고 있을 때 우리를 응원하지 않겠다면, 우리가 이기고 있을 때에도 응원하지 말라. (If you can't support us when we draw or lose, don't support when we win.)” 라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샹클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으며, 출처가 불분명한 문구이다.
  • 2021년 슈퍼리그 논란이 빚어지자 샹클리의 손자가 분노하여 리버풀이 계속 슈퍼리그를 고집하면 할아버지의 안필드 내 동상을 철거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리버풀이 리그를 배신하는데 할아버지 동상을 남겨둬 할아버지를 모독하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분노했고 결국 리버풀이 슈퍼리그에서 탈퇴하여 없던 일이 되자 동상 철거 요구를 철회했다.

8. 다큐멘터리

샹클리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1990)
샹클리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2007)

9.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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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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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 현재
초대
바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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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맥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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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왓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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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대
애시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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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맥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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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패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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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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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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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테일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0대
샹클리
(샹클리 체제)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
★★
11대
페이즐리
(페이즐리 체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
★★★★★★
12대
페이건
(페이건 체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3대
달글리시
(달글리시 체제(1기))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
★★
14대(대행)
모란
(모란 체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5대
수네스
(수네스 체제)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16대
에반스
(에반스 체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6&17대
에반스 · 울리에
(에반스 · 울리에 체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svg
17대
울리에
(울리에 체제)
파일:프랑스 국기.svg
★★
18대
베니테스
(베니테스 체제)
파일:스페인 국기.svg
19대
호지슨
(호지슨 체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20대
달글리시
(달글리시 체제(2기))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21대
로저스
(로저스 체제)
파일:북아일랜드 국기.svg
22대
클롭
(클롭 체제)
파일:독일 국기.svg

23대
슬롯
(슬롯 체제)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프리미어 리그 / FA컵 / EFL컵 / EFL 챔피언십
UEFA 챔피언스 리그 / UEFA 유로파 리그 / UEFA 슈퍼컵 / FIFA 클럽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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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영제국 훈장 4등급 수훈.[2] 수비형 미드필더[3] 형제들 모두가 역시 축구 선수와 감독으로 활약했다. 특히 셋째 형인 밥 샹클리(1982년 작고.)는 1962년에 던디 FC를 우승시킨 바 있다.[4] 1976년 자서전에서 샹클리는 여전히 이 첫 우승 메달을 가지고 있다고 쓰기도했다.[5] 샹클리는 피니의 플레이에 대해 매우 뛰어났다고 평했다. 자신의 자서전 3페이지 이상을 축구선수로서의 피니에 기량에 대해 썼을 정도.[6] 1976년 UEFA 컵 결승전 당시 리버풀이 샹클리를 초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선수단 호텔과 다른 호텔에서 숙박해야했던 사실이 좀 모욕적으로 느껴졌다고 언급하기도 했다.[7] 당시 리버풀은 감독직을 맡다 은퇴한 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디렉터로 합류한 맷 버스비 하의 맨유가 급격하게 쇠락하여 강등되는 부진을 겪은 점을 반면교사 삼았다고 한다.[8] 1981년 샹클리가 급사한 후, 네시는 2002년 8월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홀로 거주했다.[9] 게이트 최상단의 휘장에는 리버풀 FC의 상징인 라이버 버드가 있으며, 바로 아래에는 리버풀의 유명한 응원가이자 슬로건인 You'll Never Walk Alone이 새겨져 있다.[10] 실제로 선수들을 아들(son)이라는 단어로 불렀다.[11] 실제로 클롭은 특유의 카리스마와 인간적인 면모로 인해 '독일인으로 환생한 샹클리'라고 불린다.[12] 1964-65 시즌 유러피언컵[13] 당대 유럽 최고의 팀이었던 인터 밀란과 처음 진출한 유러피언컵 준결승에서 격돌해 명경기를 펼치며 리버풀의 이름을 유럽에 처음 써내렸다.[14] 1972-73 UEFA컵[15] 대표적인 것이 선수 선발권이다. 당시에는 구단 내 선수 선발 위원회가 별도로 설치되어 있어 감독이 출전 선수를 정할 수 없었다. 사실상 샹클리 이후부터 리버풀의 감독직은 강력한 지위를 갖췄다.[16] 당시에는 경기 이후 즉시 버스를 타고 훈련장으로 가서 훈련장에서 탈의 후 샤워를 하고 식사를 하는 방식이었는데, 땀에 젖은 채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몸에 무리를 줄수 있기 때문에 안필드 경기장 내에서 탈의를 하고 땀을 식히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이렇게 옷을 갈아입은 후 몸의 온도를 낮추고 이동하는 방식에 의해 실제로 상당히 부상 관리가 잘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쿨다운 방식은 당시 물리치료사직을 겸임했던 밥 페이즐리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었다.[17] 실제로 선수들을 아들(son)이라는 단어로 불렀다.[18] 초창기엔 W-M 포메이션의 3백 전략을 쓰다가 1960년대 중반, 국가대표팀 경기들에서 전술 트렌드를 읽어 4백의 4-4-2로 포메이션을 전환했다.[19] 1970년대 리버풀은 이 스카우팅 시스템을 활용하여 하부 리그나 하위 팀에 숨어있던 원석들을 발견해 유럽을 재패하는 스쿼드를 만들어낸다. 케빈 키건, 필 닐 등이 좋은 예.[20] 두 사안 모두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함이었다고 밝혔다.[21] 리버풀과 버킨헤드를 연결하는 수중 터널[22] 리버풀과 수중 터널을 통해 연결된 강 건너 편의 도시[23] 리버풀 역사 뿐 아니라 축구사에서도 굵직한 존재감을 가진 감독이다. 2013년 ESPN 선정 역사상 최고의 감독 TOP 10, 2019년 프랑스 풋볼지 선정 역사상 최고의 감독 TOP 10, 2013년 월드 사커지 선정 역사상 최고의 감독 TOP 20에 선정된 바 있다.[24] 같은 도시에 있는 에버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25] Manager of the Year Award[26] 참고로 샹클리가 허더즈필드 타운 FC 감독 시절에 리버풀 회장인 T.V. 윌리엄스가 "이 나라 최고의 클럽 감독에 관심 없습니까?"라며 영입 제의를 했을 때, "뭐요? 혹시 버스비가 짐 싸는 중이요?"라고 되려 반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