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29 22:02:43

맘루크 왕조/역사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맘루크 왕조

1. 건국
1.1. 기원1.2. 아이유브 왕조 전복1.3. 바이바르스: 실질적인 창업군주1.4. 십자군 전쟁의 종결
2. 앗 나시르 무함마드: 문화적 황금기
2.1. 앗 나시르 무함마드 사후 정치적 혼란
3. 왕가 교체와 쇠락
3.1. 바르스베이: 대유럽 무역통제 강화3.2. 카이트베이: 마지막 중흥기3.3. 칸수 알 구리: 실패한 개혁
4. 멸망5. 오스만 제국 치하의 맘루크


1. 건국

1.1. 기원

파일:Ayyubid_Sultanate_1193_AD.jpg 파일:Sulwan_al-Muta’_fi_‘Udwan_al-Atba’_by_Ibn_Zafar_al-Siqilli,_(1104_-_1170_to_1172)_Egypt_or_Syria_circa_1330_CE.jpg
아이유브 왕조 맘루크
맘루크는 해방노예를 뜻하는 단어로 집안일을 맡던 노예인 굴람과는 다른 존재였다. 맘루크들은 무술, 궁정 예절, 이슬람 학문을 철저히 배운 뒤 자유를 얻었지만, 여전히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고 주인 가문을 섬겼다. 맘루크들은 9세기 무렵부터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군문에 중용되기 시작했고, 이후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툴룬 왕조이흐시드 왕조 등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며 완연한 지배층으로 발전했다.

12세기 말과 13세기 초인 아이유브 왕조에서도 살라딘파티마 왕조의 흑인 보병을 맘루크로 교체하면서 이집트 군대의 중추를 이루게 된다. 맘루크는 살라딘 사후에도 중용되었기에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들과 고위 지휘관들은 저마다 개인적인 맘루크 부대를 두고 있었다. 아이유브 왕조의 맘루크 대부분은 중앙아시아 출신의 킵차크 투르크인으로 군에 들어오면 수니파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아랍어를 배웠다. 맘루크들은 주인을 '아버지'라고 불렀을 정도로 깊은 충성을 바쳤고 주인들도 이들을 단순한 노예가 아니라 친족처럼 대했다.

특히 아이유브 왕조의 장군이던 앗 살리흐 아이유브는 1229년 아버지 알 카밀 술탄이 이집트를 떠난 동안 부왕으로 재위하며 시리아, 이집트, 아라비아에서 약 1,000명의 맘루크들을 사들인 뒤 그의 이름을 따 '살리히야'라고 불렀다. 앗 살리흐 아이유브는 1240년 술탄으로 즉위하자마자 흔들리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맘루크들을 해방시킨 뒤 기존 아미르들에게 몰수한 이크타(iqta), 즉 봉토를 나눠주며 맘루크의 권한을 크게 강화시켰다. 맘루크들의 위세가 대단했기에 항간에 '살리히들의 나라'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고. 살리히야들 중 일부는 바흐리 맘루크 혹은 바흐리야로도 불렸는데,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그들의 거점으로 카이로 인근 나일 강의 루아드 섬에 '칼라트 바흐르 앗 닐' (나일 강의 성채)을 지어 제공한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 바흐리 맘루크들이 바로 훗날 맘루크 왕조의 지배 가문이 된다.

1.2. 아이유브 왕조 전복

그러나 앗 살리흐 아이유브와 맘루크 사이의 갈등도 점차 커져가고 있었다. 특히 1249년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이끄는 제7차 십자군이 다미에타를 정복하자 이에 분개한 앗 살리흐가 다미에타를 지키던 맘루크들을 처벌하겠노라 단언했고, 이에 화가난 만수라의 맘루크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 앗 살리흐의 심복 파크르 앗 딘이 겨우 둘 사이를 진정시켰지만 곧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병사하고 그의 아들 알 무아잠 투란샤가 새 술탄에 오르게 된다. 맘루크들의 위협을 실감한 투란샤는 자지라시리아 출신 측근들을 밀어주며 맘루크를 견제할 세력을 키우려 했는데, 이게 맘루크들의 심기를 건드리고야 만다.

1250년 2월 11일에는 바이바르스가 이끄는 바흐리야 맘루크들이 알 만수라 전투에서 십자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이어 4월 6일에는 도망치는 십자군들을 뒤쫒아 파리스쿠르 전투에서 십자군을 전멸시키고 루이 9세를 생포하며 제7차 십자군을 끝장내버렸다. 하지만 바흐리야와 살리히야 맘루크들에게 전훈을 몰아줄 생각이 없던 투란샤는 본인의 측근들에게 공적을 얹어주려 들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살리히야 맘루크들이 1250년 5월 파리스쿠르에서 투란샤를 죽여버리고야 만다.

쿠데타에 성공한 맘루크들은 우선 아이유브 왕가의 알 아슈라프 무사를 술탄으로 옹립했으나 실제 권력은 맘루크 대장인 아이바크가 독차지했고, 선왕 앗 살리흐 아이유브의 애첩이었던 샤자르 앗 두르와 결혼하여 이를 정당화했다. 몇 년 후에 아이바크는 허수아비 술탄 알 아슈라프 무사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술탄이 되었다. 이로써 맘루크 왕조가 성립되었다. 한편 앗 살리흐 아이유브의 사후 이집트가 혼란을 겪는 틈에 시리아를 통일한 알레포의 아미르 앗 나시르 유수프는 이집트의 맘루크들과 싸웠으나 패배했고, 1260년 몽골군에게 시리아가 정복되면서 자연스레 맘루크의 경쟁자는 사라져버렸다. 그 사이에 아이바크는 부인 샤자르 앗 두르와 대립하다가 1257년 4월 목욕중에 그녀에게 암살되었고, 15살이었던 그의 아들 알 만수르 알리[1]가 옹립되었다. 이때 아이바크의 부관이자, 호라즘 왕가 출신 맘루크였던 쿠투즈가 섭정을 맡았는데 이내 술탄 알리를 쫓아내고 자신이 술탄이 되었다. 술탄으로 즉위한 쿠투즈는 바이바르스와 그의 파벌 바흐리야 맘루크들을 탄압하고 정적을 제거했는데, 이렇게 맘루크 내에서 박터지게 싸우는 사이에 몽골 제국의 침입이라는 대사건이 터진다.

몽골은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알레포다마스쿠스까지 정복했다.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정적 탄압에 열심이던 쿠투즈는 바이바르스와 화해해 일단 몽골부터 무찌르기로 결정, 일시적으로 화해했다. 한편 1260년 여름 훌라구 칸몽케 칸 사후 몽골 내전의 추이를 지켜보기 위해 주력 병력을 이란으로 옮기고, 그의 부관 키트부가 노얀 휘하 10,000여 명의 비주력 병력만 시리아에 남겨두자 미리 힘을 비축해둔 맘루크군은 그때를 틈 타 북상하여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궤멸시키고 시리아를 정복했다. 그리고 맘루크군의 선봉장이었지만, 술탄 쿠투즈와 불편한 주종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바흐리 맘루크의 바이바르스는 이집트로 돌아오는 길에 쿠투즈를 암살하고 1260년 10월 본인이 직접 술탄이 되었다.

1.3. 바이바르스: 실질적인 창업군주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바이바르스 문서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바이바르스#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바이바르스#|]]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Baybars,_Medallion_IV,_Baptistère_de_Saint-Louis.jpg 파일:EdwardICrusadeMap.jpg
바이바르스 맘루크와 십자군, 몽골의 충돌
바이바르스는 몽골 제국에게 바그다드가 함락당한 뒤 끊어졌던 아바스 칼리파를 1261년 부활시켰다. 아바스 가문의 알 하킴 1세를 카이로에서 즉위시킨 뒤 유용한 얼굴마담으로 써먹었고, 이 이래로 아바스 칼리파들은 실권없는 허수아비로 전락해 카이로 술탄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한편 1263년에는 시리아의 아이유브계 아미르였던 알 무기스를 일 칸국과의 내통 혐의로 폐위시키며 시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또한 맘루크 기병대를 1만 명에서 4만 명으로 대폭 증강했으며 엄격한 군율 아래 승마, 검술, 궁술을 훈련한 4,000명의 최정예 왕실 근위병을 양성했다. 바이바르스는 이집트와 시리아를 연결하는 우편망 제도 '바리드'를 창설했고 우편 노선을 따라 곳곳에 다리와 도로를 대규모로 건설하는 토목공사를 펼치기도 했다.

외교적으로도 능수능란한 기술을 선보였다. 바이바르스는 몽골 세력이 유럽의 기독교 세력과 연합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몽골과 외교 접촉을 시도했고, 동시에 페르시아의 일 칸국과 북방의 킵차크 칸국 사이를 이간질시켜 몽골 내에 불화의 씨앗을 심었다. 당시 몽골이 장악하고 있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튀르크계 맘루크 병사들을 지속적으로 수혈해와야 했던 것도 바이바르스가 몽골과 외교전에 나선 이유들 중 하나였다.

1265년까지 이집트와 시리아를 완전히 장악한 바이바르스는 시리아 전역에 남아 있던 십자군의 요새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265년에 아르수프를, 1266년에는 할바와 아르를 점령했다. 바이바르스는 새 십자군이 재차 상륙했을 때 그 요새들이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리아 해안의 요새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1266년 8월에는 일 칸국과 동맹을 맺은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을 응징하기 위해 원정을 감행하여 수많은 마을들을 초토화시키고 왕국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이 무렵 바이바르스는 성전기사단으로부터 사페드를 탈취하고 곧이어 람라까지 점령한 업적을 남겼던 상태로, 해안의 요새들과 달리 내륙의 사페드와 람라 같은 도시는 강화·확장하여 군사 거점이자 행정 중심지로 활용했다.
파일:por-Troels-Myrup-cc.jpg
크라크 데 슈발리에
1268년에는 야파를 함락시킨 뒤 같은 해 5월 18일 십자군의 주요 거점 안티오크를 점령했다. 이어서 1271년에는 트리폴리 백국 소유 난공불락의 요새인 크라크 데 슈발리에까지 함락시켰다. 바이바르스는 1272년에 일시적으로 이스마일파 암살단 어쌔신들과 동맹을 맺었지만 어쌔신들의 독립성이 맘루크 왕조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고 1273년 7월 자발 안사리야 산맥 일대의 어쌔신 요새들을 정복하고 마시아프를 비롯한 여러 성채를 접수했다. 1년 전인 1272년에는 다시 일 칸국을 상대로 아나톨리아 엘비스탄으로 원정을 떠나 몽골군을 대파했다. 그러나 병력이 과도하게 노출되어 보급선이 끊길 위험이 커지자 반격당하기 전에 시리아로 철수했다.

바이바르스는 이집트 남쪽에 위치한 누비아 의 기독교 국가 마쿠리아 왕국을 상대로 공세를 펼쳤다. 맘루크 군대는 1265년 마쿠리아 왕국을 침공해 누비아 왕을 맘루크의 봉신으로 삼았고, 홍해 연안의 수아킨과 달라크 제도를 정복하였으며, 더 나아가 헤자즈 지역과 나일강 서쪽 사막 지대, 그리고 바르카까지 세력을 확장하려 들었다. 결국 이에 반발한 마쿠리아의 다비드 1세가 맘루크의 괴뢰 왕을 폐위시킨 뒤 반란을 일으켰으며, 1272년에는 맘루크 왕조 소유의 홍해 항구 아이드합을 약탈했다. 이에 1276년 맘루크군이 동골라 전투에서 다비드 1세의 군대를 격파한 뒤 맘루크에게 협력했던 샤칸다를 새 마쿠리아 국왕으로 세웠다. 이때 맘루크가 누비아를 정복하며 나일강 남쪽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였던 카스르 이브림 요새가 맘루크 왕조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다만 워낙 반란이 자주 터지는 지방이라 바이바르스의 후계자들도 반복적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새 봉신왕을 세우는 방식으로 통치권을 계속 유지해야 했다. 물론 아예 소용이 없던 것은 아니라서 맘루크 왕조는 바이바르스의 초기 정복 덕분에 매년 마쿠리아 왕국에게서 조공을 받았다. 이 전통은 14세기 중엽 마쿠리아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됐으며 누비아 남쪽 알아브와브 지역의 아두르 왕으로부터도 봉신 서약과 조공을 받았다.

바이바르스는 본인의 출신가인 자히르 가문을 왕조화하려 시도했다. 그는 1264년 당시 네 살이던 아들 알사이드 바라카를 공동 술탄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능력과 공로에 따라 술탄을 선출하던 기존의 맘루크 전통을 깨뜨린 파격적인 조치였다. 1277년 7월 바이바르스가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원정 도중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아들 바라카가 유일한 술탄으로 즉위했다. 바이바르스는 평생에 걸친 전쟁과 정복을 통해 맘루크 왕조의 세력을 이집트와 시리아, 누비아 전역으로 확장해내는 데에 성공했고, 십자군과 몽골, 그리고 주변의 독립 세력을 제압하여 맘루크 왕조를 이슬람 세계의 새 패권국으로 올려놓았다. 불안정하던 맘루크 왕조의 실질적인 창건자라고 보아도 손색이 없는 인물.

1.4. 십자군 전쟁의 종결

파일:Siege_of_Tripoli_Painting_(1289).jpg 파일:siegeacre14.jpg
1289년 트리폴리 공방전 1291년 아크레 함락
바이바르스의 장남 바라카는 왕위 승계 직후 궁정 내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1279년 11월 바이바르스의 부관 출신이던 칼라운에게 쫒겨났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술탄으로 등극한 칼라운은 즉위하자마자 일 칸국의 대규모 침공을 막아내야했다. 일 칸국이 1281년 아르메니아, 조지아, 셀주크 세력을 모아 8만 명의 대군을 조직해 이집트를 침략했기 때문. 그러나 맘루크 왕조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홈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시리아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일 칸국의 서진을 다시금 막아낼 수 있었다. 일 칸국을 쫒아낸 뒤에는 시리아에 남아있던 십자군의 잔존 세력을 축출할 여유를 얻어 1285년 5월 마르카브 요새를 함락하기도 했다.

칼라운은 상인 계층과 관료 계층,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의 지지를 얻는 데에 주력했다. 상인들에게 큰 부담을 주던 각종 세금과 부과금들을 폐지했고 동시에 메디나예언자의 모스크, 예루살렘알 아크사 모스크, 헤브론의 이브라힘 모스크를 개축해 종교인들의 신망을 얻었다. 종교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건축물들에도 관심을 쏟았는데 대표적인 예시가 카이로의 칼라운의 대규모 복합단지. 병원과 교육, 의료, 구호 기능을 모두 담당하는 거대한 복합단지였다. 특히 칼라운은 일 칸국과 일시적인 평화를 맺은 뒤 내부 안정을 위해 이집트와 시리아의 고위 맘루크 장군들 수십명을 잡아 투옥해 숙청시켜버렸다. 칼라운은 이전까지 주로 튀르크계 맘루크들에게 의존하던 체제를 바꾸어 비튀르크계 맘루크들을 대거 영입, 특히 체르케스인들을 다수 구입해 기존 바흐리 맘루크를 견제할 새로운 맘루크 세력인 '부르지 맘루크'를 만들어냈다.

최후의 살리히 맘루크[2] 출신 술탄이던 칼라운이 1290년 사망하자 그의 아들 알 아슈라프 할릴이 새 술탄으로 즉위했다. 할릴 역시 전임자들처럼 십자군과 몽골 세력의 격퇴, 시리아 통합과 새 맘루크 병력의 충당을 최우선 과제를 꼽았고 특히 1291년 십자군 최후의 거점 아크레를 함락하면서 십자군 전쟁을 종결지음과 동시에 194년 만에 그리스도교 세력을 레반트 해안에서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다.[3]

그러나 할릴이 고작 즉위 3년만인 1293년 암살당하면서 심각한 파벌갈등에 빠진다. 그의 동생 앗 나시르 무함마드가 술탄직을 승계했지만 이듬해 몽골계 맘루크이자 칼라운의 부하였던 알 아딜 키트부가에게 폐위당했다. 키트부가도 2년만인 1296년 후삼 앗딘 라진에게 술탄직을 빼앗겼고, 라진은 봉토 재분배를 통해 권력을 안정화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1298년, 4년만에 앗 나시르 무함마드가 복위했다. 그러나 나라꼴은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외부에서는 연달아 외적들의 침입이 이어졌다. 1299년 마흐무드 가잔이 이끄는 일 칸국 군대가 시리아를 침공해 3차 홈스 전투에서 맘루크를 꺾었지만, 곧 병참 문제로 후퇴했고 군사를 재정비한 맘루크군에게 패해 물러났다. 일 칸국은 1303년 또다시 맘루크를 침략했지만 다마스쿠스 남쪽 마르즈 알수파르 전투에서 패배하며 맘루크의 승리로 끝났다.[4]

2. 앗 나시르 무함마드: 문화적 황금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앗 나시르 무함마드 문서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앗 나시르 무함마드#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앗 나시르 무함마드#|]]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Mosque_of_Sultan_al-Nasir_Muhammad_in_the_Citadel,_Cairo,_1318-35_(22).jpg 파일:Maqamat_of_al-Hariri._Enthroned_Prince._Probably_Egypt_1334.jpg
술탄 앗 나시르 무함마드 모스크 1334년 제작된 맘루크의 궁정화
한편 앗 나시르 무함마드는 복위했음에도 불구하고 혼란스러운 대내외 상황으로 인기를 급격히 잃어갔다. 이 상황에서 칼라운 휘하 출신 체르케스계 맘루크였던 바이바르스 2세가 급부상했고, 결국 앗 나시르 무함마드는 2차로 권좌에서 쫒겨나고야 만다. 그러나 바이바르스 2세 역시 집권 후 실책을 연발하며 빠르게 몰락했고 앗 나시르 무함마드는 1년만인 1310년 2번째로 복위했다.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3차 재위기는 앞선 1차와 2차 재위기와는 달리 무려 30년 넘게 이어지며 맘루크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앗 나시르 무함마드는 2번이나 쫒겨났던 쓰라린 기억을 잊지않았다. 그는 전임 술탄이던 칼라운할릴 휘하의 맘루크들이 권력을 독점한 채 마음대로 술탄을 갈아치우는 것을 막기 위해 철저한 중앙집권화를 추구했다. 앗 나시르 무함마드는 1310년 재집권하자마자 핵심 집권층이었던 바흐리 맘루크들을 포함해 과거 자신을 몰락시키는 데 일조했던 맘루크 장군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반면 자신에게 충성하는 맘루크 30명에게는 막대한 이크타, 즉 봉토를 배분해서 충성파를 길렀다. 앗 나시르 무함마드는 초기에는 아버지 칼라운 휘하의 맘루크들을 놔두었지만 1311년과 1316년에 걸쳐 대부분을 투옥하거나 처형해버렸다. 그 결과 1만 명에 달했던 맘루크는 3천여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게다가 아바스 칼리파였던 알 무스탁피를 폐위시키고 본인 입맛에 맞는 알 와시크 1세를 새로 올렸으며, 이슬람 대법관들에게 본인의 의중에 맞는 판결과 파트와를 내리도록 강요하며 종교 쪽도 꽉 틀어쥐었다.

외치도 성공적이었다. 맘루크 왕조는 1313년 시리아를 침공한 일 칸국을 격퇴했고 1322년에는 공식적인 평화조약을 체결해 오랫동안 지속되던 불화를 종식시켰다. 마침 일 칸국이 내부적으로 분열하며 몰락해가는 시기였기에, 신생 튀르크-몽골계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외교무역관계를 수립해 맘루크 왕조를 중동과 중앙아시아의 국제교역허브로 만든 것도 바로 이 앗 나시르 무함마드였다. 한편 일 칸국의 해체로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되던 신규 맘루크 공급이 급감하자 신입 맘루크들에게 훈련 규율을 완화하고 보상을 확대하는 당근을 꺼내 외부의 엘리트들이 자진해서 이집트 맘루크로 입대하도록 유도했다. 여러 모로 정치적, 경제적 개혁을 단행해 맘루크 왕조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군주였다.

2.1. 앗 나시르 무함마드 사후 정치적 혼란

파일:external/www.youregypttours.com/308-582.jpg
술탄 하산의 모스크-마드라사
30년간 맘루크 왕조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앗 나시르 무함마드가 1341년 사망하자 맘루크 왕조는 그의 후손들이 잇달아 즉위하는 정치적 혼란기로 빠져들었다. 앗 나시르 무함마드는 생전에 아들 알 만수르 아부 바크르를 차기 술탄으로 지정해놓았지만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최측근이던 쿠스운이 아부 바크르를 폐위한 뒤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6남 알 아슈라프 쿠주크를 새 꼭두각시 술탄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1342년 1월 쿠데타가 일어나 쿠스운과 쿠주크 모두 실각했고,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또다른 아들 알 나시르 아흐마드가 새 술탄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알 나시르 아흐마드는 전형적인 암군이었다. 그는 즉위 후 수도 카이로가 아닌 요르단의 알카라크 지역으로 궁정을 옮긴 다음 시시콜콜한 국정은 카이로의 재상에게 일임해버렸다. 알 나시르 아흐마드는 향락에 빠져 은둔하며 자신을 지지하던 인물들까지 처형하는 폭정을 일삼았고, 결국 1342년 6월에 또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그의 이복형제 알 살리흐 이스마일이 새 술탄으로 즉위했다. 알 살리흐 이스마일은 비교적 안정적인 통치를 시도했지만 1345년 8월 죽었고, 그 뒤를 이은 알 카밀 샤반은 맘루크 군인들의 반란으로 살해되었으며 다음 술탄 알 무자파르 하지 역시 1347년 맘루크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었다.

1347년 알 무자파르 하지마저 목숨을 잃자 맘루크들은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12살짜리 어린 아들인 앗 나시르 하산을 새 술탄으로 서둘러 즉위시켰다. 그러나 하산의 첫 통치기인 1347년 ~ 1351년은 세계를 강타한 흑사병의 확산기와 정확하게 겹쳤다. 1347년 흑사병이 이집트에 처음 상륙했고 역병이 잇따라 발병하며 인구가 대규모로 죽어나갔다. 노동력의 급감과 사회의 황폐화, 세입 감소가 발생하고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1351년 결국 타즈 장군이 반란을 일으켜 하산을 폐위한 뒤 그의 형제 알 살리흐 살리흐를 새로 옹립했다. 그러나 1355년 또다른 맘루크 세력인 샤이쿠와 시르기트미쉬 장군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살리흐를 쫒아내고 하산을 다시 술탄으로 세웠다.

하산은 복위한 뒤 서서히 권력을 장악하며 정적 타즈 장군, 샤이쿠 장군, 시르기트미쉬 장군을 모조리 숙청했다. 또한 정통 맘루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아울라드 알나스', 즉 맘루크의 후손들을 적극 등용했다. 이들은 부모가 맘루크 출신이지만 노예로 팔려오거나 해방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태어나 자유민으로 성장한 2세대 맘루크였다. 하산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밀어줬는데, 당연히 기존 맘루크들의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하산은 얄부가 알우마이리 장군이 일으킨 반란으로 1361년 목숨을 잃었다.

얄부가는 앗 나시르 하산을 살해한 뒤 알 무자파르 하지의 아들 알 만수르 무함마드를 새 술탄으로 세우고 본인은 섭정이 되어 전권을 휘둘렀다. 십자군의 몰락 이후 서아시아의 기독교 중심지로 떠오른 아르메니아를 노리던 맘루크 왕조는 1365년 아르메니아로 원정을 단행했지만 키프로스 왕국피에르 1세알렉산드리아를 기습침공하며 무위로 돌아갔다. 맘루크 왕조는 이 이후로 국제무역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했고 무역 수입이 줄어들며 세입이 급감했다. 게다가 얄부가는 군의 기강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맘루크들에게 강압적인 훈련과 교육을 부활시켰는데, 강한 반발을 사 결국 1366년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 심지어 본인이 1363년 옹립한 술탄 알 아슈라프 샤반마저 얄부가의 암살공모자였다. 얄부가를 죽인 알 아슈라프 샤반은 1377년까지 실권을 휘둘렀지만 그 역시 메카를 순례하던 도중 반대파에게 암살당했다.

3. 왕가 교체와 쇠락

파일:Barqouqy_mosque_-_Moez_street.jpg 파일:Mausoleum_of_Barquq_(8590204303).jpg
술탄 바르쿠크의 모스크-마드라사 복합단지
알 아슈라프 샤반이 죽자 그의 일곱살짜리 아들 알 만수르 알리가 즉위했지만 실권은 맘루크 장군들에게 있었다. 개중 얄부가 휘하의 체르케스계 맘루크 출신이던 2명의 장군 바르쿠크와 바라카가 가장 강력했다. 바르쿠크는 1380년 바라카를 축출하며 유일한 권력자로 떠올랐고 1381년 알 만수르 알리가 죽자 9살짜리 동생 알 살리흐 하지를 즉위시킨 뒤 본인은 섭정으로 군림했다. 이듬해 1382년에는 알 살리흐 하지마저 폐위시키고 본인이 직접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1250년 건국 이래로 킵차크(쿠만, 폴로베츠) 중심의 튀르크계 바흐리 맘루크가 독점해오던 술탄직이 체르케스부르지 맘루크 세력에게 넘어감으로써 바흐리 → 부르지로 왕가 교체가 일어났다.[5]

바르쿠크는 옛 얄부가를 따르던 맘루크들 덕분에 즉위할 수 있었지만 정작 즉위한 뒤에는 이들이 바르쿠크에게 위협이 되었다. 1389년에 옛 얄부가의 가신이던 시리아의 맘루크들[6]이 반란을 일으켜 카이로로 진격하자 바르쿠크는 일시적으로 알 살리흐 하지에게 술탄직을 되돌려주고 퇴위했다. 그러나 시리아 맘루크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바르쿠크는 체포되어 알카라크로 유배당했지만, 그 곳에서 힘을 길러 1390년 2월 카이로를 수복하고 술탄직을 되찾는 데에 성공했다. 1393년에는 시리아의 맘루크들이 완전히 제압되며 통치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바르쿠크는 한 번 쫒겨났던 경험을 교사삼아 5,000여 명의 체르케스인들을 대규모로 맘루크로 받아들였다. 또한 행정 개혁을 실시해 시리아를 본따 이집트를 알렉산드리아, 다만후르, 아시유트 이렇게 3개의 행정구역(niyaba)으로 나누었다. 바르쿠크는 개혁을 통해 베두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이집트 농촌지방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고자 했다. 나일 삼각주의 베르베르계 부족들을 상이집트에 파견해 베두인들의 영토확장을 견제하도록 한 것 역시 비슷한 목적. 그는 1387년 아나톨리아의 시바스 일대를 복속시키는 등 외적으로도 팽창했지만 신흥 강국인 오스만 베이국, 백양 왕조흑양 왕조 등이 슬금슬금 떠오르는 패자로 성장하며 맘루크 왕조를 위협하고 있었다.

바르쿠크가 1399년 사망하자 11살 아들 안 나시르 파라즈가 술탄직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그해 티무르가 시리아를 침공해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약탈해갔고, 천만다행으로 1402년 티무르가 오스만 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시리아를 떠나는 바람에 정면충돌은 피할 수 있었다. 파라즈는 간신히 술탄 자리를 유지했지만 1403년의 기근, 1405년의 역병, 1401년부터 10여년 간 이어진 베두인들의 반란, 내부의 쿠데타 시도 등 그야말로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상이집트에서 맘루크 왕조의 통제력은 거의 무너졌고 수도 카이로에서마저 술탄의 권위가 의심받는 상황으로 전락했다. 결국 1412년 시리아의 아미르 알 무아야드 샤이크가 반란을 일으켜 파라즈를 내쫒고 아바스 칼리파 알 무스타인을 새 꼭두각시 술탄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6개월 뒤 알 무아야드 샤이크는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알 무스타인마저 축출한 뒤 본인이 직접 술탄을 차지한다. 그는 무너져가던 맘루크 왕조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지만 1415년~1417년, 1420년에 역병이 퍼지는 바람에 사회적인 혼란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파라즈의 치세 동안 쌓인 세급 체납분을 징수한다는 명분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세금 징수와 약탈(...)을 겸한 이른바 '세입 원정'을 떠난 것으로도 유명하다. 샤이크는 아나톨리아로 친정해 맘루크 왕조의 북쪽 국경을 확장하기도 했다.

3.1. 바르스베이: 대유럽 무역통제 강화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바르스베이 문서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바르스베이#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바르스베이#|]]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sultan_barsbay_mausoluem.jpg
술탄 바르스베이의 영묘
샤이크는 1421년 사망하기 전 체르케스 맘루크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튀르크계 맘루크들을 새로 수혈하고 어린 아들 아흐마드를 섭정할 인물로 아타베그 알 아시키르를 임명하고 갔다. 그러나 샤이크가 사망하자 체르케스계 아미르인 타타르가 샤이크의 미망인과 결혼한 뒤 아타베그 알 아시키르를 쫒아내고 직접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타타르가 즉위 후 3개월만에 사망하자 또다른 체르케스계 아미르이자 바르쿠크 휘하 장군이던 바르스베이가 1422년 새 술탄으로 즉위한다.

바르스베이는 향신료 무역 등 유럽과의 고가무역을 국가 독점으로 전환하고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였다. 유럽 상인들은 오직 맘루크 정부가 지정한 국영 전매상들을 통해서만 향신료와 진귀한 동방의 물품들을 사갈 수 있었다. 경쟁이 아니라 세입 극대화를 위한 전매제였기 때문에 향신료의 가격은 치솟았고 현지 상인들은 울상이 되었다.[7] 게다가 홍해 무역의 통제강화를 위해 홍해의 상인들이 예멘아덴이 아닌 맘루크가 지배하는 제다 항구에만 화물을 하역하도록 강제했다. 즉 홍해를 거쳐 유럽으로 향하는 무역로에서 뽑아먹을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뽑아먹으려 들었던 것. 바르스베이는 이를 통해 흑사병으로 입은 피해를 회복하고자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이집트의 횡포에 반발한 유럽 상인들이 인도로 향하는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 즉 대항해시대가 열리는 밑바탕이 되었기에 이집트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쳤다.

헤자즈메카로 향하는 순례길을 베두인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메카의 샤리프들이 갖고 있던 자치권을 완전히 박탈했으며 군대를 파견해 헤자즈를 점령하고 베두인들을 몰아내어 직접통치로 전환했다. 또한 카탈루냐와 제노바 해적들에게서 지중해 연안을 방어하기 위해 1425년 키프로스 원정을 감행해 해적들을 지원하던 키프로스 왕국의 야누스 왕을 사로잡았다. 이때 키프로스가 지불한 막대한 몸값 덕에 이집트는 14세기 이래 처음으로 새 금화를 주조할 수 있었다. 백양 왕조가 자지라 일대를 약탈하자 1429년 그에 대한 보복으로 에데사를 약탈하고 수도 아미드를 공격함으로써 종주권을 확립했고, 아나톨리아의 베이들을 복속시키는 데에도 성공했다.[8]

바르스베이가 1438년 6월 7일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14살 아들 알 아지즈 유수프가 즉위했지만 곧 섭정 사이프 앗딘 자크마크가 유수프를 알렉산드리아로 유배시킨 뒤 새 술탄으로 즉위했다. 자크마크는 오스만 제국과는 우호관계를 유지했고 1440년부터 1444년까지 3차례에 걸쳐 성 요한 기사단이 장악한 로도스섬으로 원정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국내적으로는 바르스베이의 독점정책을 유지했으나 일부 관세는 폐지했다. 자크마크가 1353년 2월 사망하자 18살 아들 알 만수르 우스만이 술탄을 이어받았으나 곧 쫒겨났고, 사이프 앗딘 이날이 새 술탄이 되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는 초대형 사건이 터졌던 것도 이 시긴데, 맘루크 왕조는 이를 이슬람 전체의 승리라고 선포하며 대대적인 축제를 벌였다. 다만 맘루크 조정이 이 사건의 중대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의문. 오스만 제국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날개를 달고 비상하는 반면 이미 쇠락해가던 맘루크 왕조는 오스만의 성장에 희희낙락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맘루크 왕조는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느라 막대한 토지들을 매각했고 세입은 급감했다. 게다가 귀금속 기반 화폐가 거의 유통되지 않을 정도로 국가 경제는 이미 붕괴상태에 직면해 있었다.

이날이 1461년 2월 사망하자 아들 알 무아야드 아흐마드가 즉위했으나 다마스쿠스와 제다의 총독들이 반발해 곧 쫒겨났다. 절충안으로 그리스 출신 맘루크 쿠쉬카담 알 무아야드가 새 술탄으로 선출됐고 쿠쉬카담은 반대파를 제압하고 권력을 다지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쿠쉬카담도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키프로스는 여전히 맘루크 왕조의 봉신국이었지만 전대 술탄 이날이 세워놓은 제임스 2세를 모욕한 바람에 쿠쉬카담에게 반기를 들었고, 국내에서는 베두인들이 끊임없이 크고작은 소요를 일으켰으며 나일 삼각주의 라비드 부족, 상이집트의 하와라 부족은 자기 멋대로 행동하며 계속해서 술탄의 골치를 썩였다.

3.2. 카이트베이: 마지막 중흥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카이트베이 문서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카이트베이#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카이트베이#|]]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Mamluk_Sultan_Kayitbay_by_Florentine_painter_Cristofano_dell'Altissimo_Galleria_degli_Uffizi.jpg 파일:pict0079.jpg
카이트베이 카이트베이 요새
쿠쉬카담이 1467년 10월 세상을 떠나자 얄바이 알 무아야드가 뒤를 이었지만 고작 2달만에 폐위됐고 그 자리를 티무르부가 알자히리가 차지했다. 그러나 티무르부가 역시 1468년 1월에 퇴위, 자신의 부사령관이던 카이트베이에게 술탄직을 넘겨주었다. 카이트베이는 1468년부터 1496년간 무려 28년간 재위했는데, 앗 나시르 무함마드를 이어 2번째로 긴 재위기간으로 상대적인 안정과 번영의 시기였다. 특히 맘루크 왕조의 전통이던 음모나 권모술수를 혐오했던 인물로 전임 술탄 티무르부가를 관대하게 대우했을 정도로 공정하고 온건한 통치로 이름높았다. 덕분에 카이트베이의 재위기 내내 심각한 쿠데타나 궁정음모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재정 쪽으로는 여전히 재산 몰수, 강탈, 뇌물 같은 맘루크 왕조 고질적인 부패한 관행이 지속됐지만 카이트베이 치하에서는 그나마 체계가 잡혀서 어느정도 일정한 제도적 틀 안에서만 이루어졌다. 카이트베이는 행정관료와 이슬람 법학자 울라마들과 협력했고 특히 경건한 수니파 무슬림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등대가 세워진 카이트베이 요새처럼 수많은 건축물들을 세우는 데에 열심이었던 군주였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재위 내내 이집트는 흑사병에 시달렸고, 농업은 침체되었으며 국고는 빈약했고 경제는 호황으로 접어들 기미가 보이지않았다.

맘루크 왕조의 대외 상황도 쉽지않았다. 특히 북쪽의 떠오르는 패권국 오스만 제국이 가장 큰 문제였다. 오스만 제국이 지원하는 둘카디르 왕조의 샤 수와르가 맘루크 왕조가 지원하는 카라만 왕조[9]의 아흐마드와 아나톨리아에서 맞붙었다. 초창기에는 샤 수와르에게 맘루크 군대가 연달이 깨져나갔지만 1470년 메흐메트 2세카이트베이 간의 협정으로 양측 모두 둘카디르와 카라만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기로 결정, 결국 1471년 샤 수와르가 맘루크 왕조에게 패배하고 카이로로 압송당해 처형됐다. 맘루크 왕조는 둘카디르 왕조를 봉신국으로 삼았지만 오스만 제국과 맘루크 왕조 간의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백양 왕조의 지도자 우준 하산 역시 큰 위협이었다. 우준 하산은 1472년 알레포 일대를 침공했으나 뛰어난 맘루크 장군 야슈바크에게 패배하고 물러났다. 우준 하산이 1473년 에르주룸에서 메흐메트 2세에게도 깨져나가자 그의 후계자 야쿠브는 최대한 카이트베이의 심기를 정면으로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공존을 택했다. 야쿠브는 야슈바크에게 에데사 원정에 동참해주길 요청했고 야슈바크는 이를 수락했다. 원정은 초반에 성공적이었지만, 맘루크 왕조 최고의 야전사령관이었던 야슈바크가 포위전 도중 전사하는 뼈아픈 손실을 입었다.

1489년에는 베네치아 공화국키프로스를 병합했다. 대함대를 지닌 베네치아가 키프로스를 병합하는 쪽이 더 해적들 통제에 좋을 것이라 판단한 카이트베이 역시 이를 묵인했고 베네치아는 매년 키프로스가 바쳐오던 조공 8,000두카트를 계속 맘루크에 바치기로 했다.[10]

한편 오스만 술탄 메흐메트 2세가 1481년 사망하고 아들 바예지트 2세가 새 술탄으로 즉위하면서 오스만과의 긴장이 재고조된다. 그의 형제 젬이 바예지트 2세의 왕위계승전쟁에 끼어들었는데, 젬이 내전에서 패배하고 1481년 9월 카이로로 피난을 왔기 때문. 카이트베이가 젬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보호해주자 당연히 바예지트 2세는 분노했고 오스만과 맘루크 사이의 관계는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카이트베이는 둘카디르 왕조의 알라 앗다울라를 지원해 오스만을 견제하려 시도했지만 알라 앗다울라가 1483년경 오스만에게 충성을 바꾸면서 이를 계기로 오스만-맘루크 전쟁이 일어났고, 6년간의 소모적인 전쟁 끝에 1491년 전쟁 직전으로 돌아가는 내용(Status Quo)의 협정이 체결되며 종식된다. 이후 카이트베이가 1496년 죽을 때까지 특별한 분쟁은 없었다.

3.3. 칸수 알 구리: 실패한 개혁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칸수 알 구리 문서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칸수 알 구리#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칸수 알 구리#|]]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Anonymous_Venetian_orientalist_painting,_The_Reception_of_the_Ambassadors_in_Damascus',_1511,_the_Louvre.jpg
칸수 알 구리 치하의 다마스쿠스를 방문한 베네치아 대사 일행
마지막 중흥기를 이끈 카이트베이는 1496년 8월 사망했다. 이후 수년간의 정치적 혼란기와 여러 술탄들이 갈아치워진 끝에 1501년 칸수 알 구리가 술탄으로 등극했다. 구리는 몇개월간 권력기반을 확고히 다진 뒤 조카 투만베이를 부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등 최측근들을 요직에 꽃아넣었다. 또한 라이벌이었던 시바이를 1506년 다마스쿠스의 총독으로 임명해 재위 기간 내내 중용하며 시리아 일대를 통제하는 데에 써먹기도 했다.

그러나 칸수 알 구리의 재위기는 이미 맘루크 왕조의 쇠퇴가 완연한 시대였다.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전대부터 이어진 인구감소와 경제침체에 더해 시간이 지나며 부패해버린 맘루크 자체들의 문제도 심각했다. 군인들은 급여를 인상해주지 않을 시 반란을 일으키겠다며 술탄을 협박했고, 어쩔 수 없이 실시한 봉급인상은 국고를 더욱 빠르게 고갈시켰다. 칸수 알 구리는 재정을 채우기 위해 과중한 세금과 강압적인 징수를 실시했고 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전국 각지의 요새를 보수하고 카이로에서 건축 사업을 추진하는가 하면 새로운 맘루크 병사들을 대량 수혈하는 방식으로 나라의 개혁을 꾀했다.

맘루크 군제의 개혁을 시도한 술탄이기도 했다. 그는 이미 유럽오스만 제국에서는 활용하고 있던 화약의 중요성을 꿰뚫어보고선 이를 맘루크에게도 도입하려 들었지만, 맘루크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기병 중심의 전술에 집착했다. 칸수 알 구리는 1507년 대포 주조소를 설립하고 튀르크계, 페르시아계, 아울라드 알나스[11] 등 비맘루크 출신들을 모아 대포 운용에 특화된 포병부대를 설립할 정도로 화약무기 도입에 진심이었다. 그러나 정작 전통적인 엘리트층인 맘루크들은 화약무기를 '비겁한 무기'라고 부르며 경멸했고, 화약무기를 군대에 도입하려는 데에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결국 칸수 알 구리는 죽을 때까지 맘루크 군대에 제대로된 화기를 도입하는 데에 실패했다.
파일:Mamluk_Sultan_Al-Ashraf_Qansuh_al-Ghuri_by_Florentine_painter_Cristofano_dell'Altissimo_Galleria_degli_Uffizi.jpg 파일:Portuguese_attack_on_Jiddah_1517.jpg
칸수 알 구리 제다를 포위한 포르투갈 함대
한편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을 돌아 인도 아대륙으로 가는 신항로를 열면서 홍해의 제해권 통제가 어려워졌다. 평소 사이가 좋았던 베네치아 공화국으로부터 간접적인 지원을 받아 포르투갈이 인도양에서 세력권을 형성하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1509년 디우 해전에서 압도적인 물량을 가지고도 철저하게 패배하여 인도양 해상 무역의 제해권을 잃고 말았다.[12] 그 뒤로 포르투갈은 인도양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맘루크의 상선을 견제해 맘루크가 중개하는 향신료 무역이 큰 타격을 받았다. 멸망 직전에는 포르투갈 함대가 왕조의 목구멍인 홍해를 들쑤시고 다니면서 지나가는 모든 선박을 나포하고 약탈했으나 맘루크 왕조는 아무런 함대가 없어서 그냥 두들겨 맞기만 하고 전혀 대응할 수가 없었다. 당시 제다에는 6년간 아무런 상품도 들어올 수 없었다고 하니 포르투갈의 깡패짓이 왕조의 수입에 극심한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바다에서는 포르투갈에 털리는 동안 육지에서는 폭발적으로 팽창하던 오스만 제국이 맘루크 왕조를 압박했다. 페르시아에 새로 들어선 시아파 계열의 사파비 왕조와 손을 잡고, 수니파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려고 했으나 사파비 제국의 시조인 이스마일 1세가 1514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셀림 1세와 벌인 찰디란 전투에서 무참히 패배하면서 맘루크 왕조는 수세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맘루크와 사파비의 양면전선을 해결한 셀림 1세는 그 다음해인 1515년 맘루크의 보호국이자 맘루크와 오스만 사이의 완충국이었던 둘카디르 공국을 공격했다. 1516년에는 셀림 1세가 본격적으로 오스만 대군을 이끌고 맘루크령 시리아를 침공하면서 오스만-맘루크 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면서도 포르투갈에 대해서는 맘루크와 오스만이 오월동주마냥 협력했고, 1517년 12월 오스만군은 메카의 관문이자 홍해 무역의 중심지인 제다에 주둔한 맘루크군을 도와 제다를 침공한 포르투갈군을 격퇴하기도 했다.[13]

4. 멸망

파일:Kansu_Gavri_Ölü.png 파일:Tomanbay_İdam.png 파일:Yavuz_Sultan_Selim_Han.jpg
셀림 1세에게 진상되는 칸수 알 구리의 목 효수당한 투만베이 2세 셀림 1세
경제적•군사적으로 쇠락해가는 맘루크 왕조는 '정복자' 메흐메트 2세 이래 한창 최전성기를 누리던 오스만 제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오스만의 셀림 1세사파비 제국둘카디르 왕조를 쳐부수고 후방을 안정시킨 다음 1516년 이집트로 밀고내려왔다. 1516년 8월 24일, 시리아 북부의 다비크에서 일어난 마르즈 다비크 전투에서 맘루크가 자랑하던 기병은 오스만군의 최정예였던 예니체리와 화약무기에 의해 2년 전 찰디란 전투에서 이란의 사파비군이 당했던 것처럼 무참하게 패배했다. 이 한 번의 전투로 맘루크는 시리아를 통째로 오스만에게 빼앗겼으며 칸수 알 구리까지 전사하는 치욕을 당했다.[14] 맘루크 군대는 알레포로 퇴각하려 시도했으나 시민들에게 거부당했고, 습격과 물자고갈에 시달리며 겨우 도망쳤다.

오스만 군대는 기세를 몰아 이집트까지 내려왔고, 후임 술탄으로 즉위한 투만베이 2세는 최대한 군대를 긁어모으고, 화약무기까지 어느 정도 구해 어떻게든 오스만군에 맞서싸우려 했으나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15] 1517년 1월 22일 카이로 코앞인 리다니야에서 벌어진 리다니야 전투에서 또다시 완패를 당했다. 카이로를 함락한 오스만군은 3일간 도시를 약탈했으며 1월 31일에 사면을 선포하자 대부분의 맘루크들이 항복했다. 한편 투만베이 2세는 패잔병들과 함께 바나사로 도망쳤다.

셀림 1세는 투만베이 2세에게 가신이 될 것을 제안했지만 거부당했고, 결국 1517년 4월 가자 근처에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인 끝에 패배해 포로로 잡혔다. 셀림 1세는 투만베이 2세를 살려줄 생각이었지만 앞서 맘루크를 배신하고 오스만에 붙은 알레포 총독 카이로바크가 너무 위험하다고 설득, 결국 투만베이 2세는 참수되어 카이로의 성문에 효수되었다. 그리고 맘루크 왕조 밑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아바스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 알 무타와킬 3세가 정식으로 칼리파 칭호를 셀림 1세에게 바치면서 오스만 제국은 중동 대부분을 정복하고 칼리파 칭호까지 획득하여 명실상부한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으로 등극하게 되었다.[16]

5. 오스만 제국 치하의 맘루크

오스만은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집트를 속주로 편입했으나 지배층인 맘루크들로 하여금 이집트를 계속 지배하도록 했다. 다만 통치 초기 시리아와 이집트는 다소 불안정했는데, 1520년에는 셀림 1세가 서거하고 쉴레이만 1세가 즉위한 것을 기회로 여긴 시리아 총독 잔비르디 알 가잘리가 술탄을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가 곧 진압되었으며 1524년에는 이브라힘 파샤에게 밀려 재상이 되지 못하고 이집트 총독으로 좌천된 아흐메드 파샤가 역시 술탄을 칭했다가 곧 진압되었다. 이에 이브라힘 파샤가 재상 겸 이집트 총독으로 친히 이집트에 부임하여 통치 체계를 정비한 후 귀환했다. 이로써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평범한 일개 속주가 되었으나...[17] 그로부터 200년이 넘게 지난 1768년,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틈타 맘루크 장교 알리 베이 알-카비르가 독립을 선포하고 술탄을 칭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관리들을 추방하고 오스만 제국 파디샤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들을 없애려고 했다.

1770년 알-카비르의 이집트 군대는 아라비아 반도 서부의 히자즈와 북부의 시리아 지방을 탈환해 이전 맘루크 왕조의 광대한 강역을 대부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 당시 유럽 및 러시아와의 전쟁 때문에 대규모 병력을 이집트에 파견할 여유가 없었던 오스만 제국은 이간책을 사용했다. 알-카비르는 티그리스 지방의 민족주의자인 자히르 알 우마르와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이들 사이에 금이 가 결국 알-카비르는 1772년에 살해되었다.[18]

오스만 제국의 계속된 공세와,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1공화국군이 이집트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맘루크들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1800년쯤 되면 카이로 근방의 한 줌밖에 안 되는 영토를 제외한 대부분의 강역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고, 계속 싸웠다. 혼란한 국내 정세와 오스만 제국의 가혹한 통치로 인해 1805년 대규모 민중봉기가 일어났지만, 맘루크는 내부 분열로 정권을 되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805년의 시위로 등장한 신임 이집트 총독인 무함마드 알리(메흐메드 알리)에 의해 이집트는 반독립국가가 되었으나, 맘루크들은 권력을 잡지 못하고 1811년 무함마드 알리에 의해 거의 모두 학살당했다. 소수의 맘루크들이 세나 술탄국[19]으로 흘러들어가 정권을 탈취하고 복수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다가 1820년에 다시 이집트를 공격했다. 그러나 역공당해 남아 있던 맘루크도 대부분 전사하여 맘루크 자체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1] 샤자르 앗 두르 항목에도 있지만 알 만수르 알리는 샤자르의 친아들이 아니라 배다른 아들이었다.[2]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에게 충성을 바치다가 아이유브 왕조를 갈아엎고 맘루크 왕조를 세운 맘루크 집단을 따로 '살리히 맘루크'라고 부른다. 즉 맘루크 왕조를 건국한 1세대 개국공신 맘루크들를 의미한다. 칼라운의 후계 술탄들부터는 모두 맘루크 왕조 건국 이후에 태어났거나 살리히에 속하지 않은 술탄들이다.[3] 셀주크 제국, 파티마 왕조, 장기 왕조, 아이유브 왕조 시대를 거치며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었던 십자군 전쟁을 종결지은 주체는 바로 맘루크 왕조였다.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퇴시킨 뒤 1260년대부터는 몽골과 연합을 맺었던 십자군을 상대로 복수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세를 가했다. 1268년에 안티오크 공국, 1289년에 트리폴리 백국, 1291년에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켰다.[4] 맘루크 왕조는 아인잘루트 전투 이래 43년 동안이나 일 칸국과 치고받으며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일 칸국은 시간이 흐르면서 주력 병력이 점점 현지 차출 병력으로 대체됐고 과거 몽골군의 색채가 옅어졌다. 결국 맘루크 왕조와 약화된 일 칸국의 전쟁은 1299년의 3차 홈스 전투를 제외하고는1 모두 맘루크 왕조의 승리로 끝났고, 아인잘루트 전투 당시 몽케 칸이 사망했다는 이유로 주력군을 후방으로 빼버린 치명적 실수 때문에 최적의 타이밍을 놓친 일 칸국은 최대 10만 명의 대군을 동원했음에도 창시자인 훌라구의 서방 정복 야망을 접어야 했다, 2. 반면 승리한 맘루크 왕조는 몽골군의 침략으로부터 이집트를 비롯한 아프리카 지역을 지켜내는데 성공하면서 이슬람 세계의 수호자라는 명성까지 얻으며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5] 다만 바흐리 왕조와 부르지 왕조를 싸잡아 구분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체르케스 맘루크 중에서도 바흐리 왕조의 술탄이 된 경우가 있었고, 부르지 왕조에서도 간혹 비 체르케스계 술탄이 즉위하기도 했다. 특히 바흐리 왕조 시기에는 킵차크 튀르크와 체르케스 외에도 키토부카와 같은 몽골인처럼 다양한 출신의 맘루크 아미르들이 술탄위에 올랐다.[6] 말라티아알레포의 총독이던 민타쉬와 얄부가 알나시이리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7] 하지만 워낙 이 세입이 짭짤했기에 바르스베이 후계 술탄들도 이를 이용해 향신료 뿐만 아니라 설탕, 직물 같은 물품들에도 이 전매제를 도입한다.[8] 반면 정작 상이집트의 통제권은 완전히 바로세우지 못해 실질적인 통치는 하와라 부족의 아미르들에게 넘어가 있었다.[9] 아나톨리아 반도 동남부에 위치했던 튀르크계 공국. 본래 아나톨리아 반도의 여러 튀르크계 국가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으나, 오스만이 뜨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후 오스만이 유럽 대륙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가는 동안에도 발목을 잡으려 했으나 오스만군이 마음먹고 쳐들어올 때마다 수도까지 밀리기가 일쑤였고, 15세기가 되면 맘루크 왕조에게 붙어서 오스만을 견제하는 처지가 되었다.[10] 다만 이는 맘루크 왕조가 지중해 연안의 해상 방비를 외국인 베네치아에 일부 의존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11] 부모는 맘루크 출신이지만 노예나 자유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자유민 태생. 즉 맘루크 2세대를 의미한다.[12] 애초에 맘루크 왕조는 권력의 기반이 맘루크로 대표되는 육군에 있었지, 해군은 거의 키우지 않아 무척이나 부실했던 반면, 16세기 포르투갈은 그야말로 세계 최강의 해군을 거느린 나라였으니 이길 수가 없었다.[13] 여담으로 맘루크 본국은 이미 오스만의 침입으로 멸망해버린 상태였고, 제다에 주둔해있었던 맘루크군은 그저 잔당일 뿐이었다. 그리고 포르투갈군을 격퇴한 직후, 오스만은 제다를 자국 영토로 합병했다.[14] 특히 인구에서도 오스만에게 열세였다. 이때 오스만의 인구는 1,100만명이었는데 맘루크 왕조의 인구는 그 절반도 안 되는 486만명에 불과했다.[15] 이때 맘루크 왕조는 심각한 재정난으로 인해 병사들한테 월급조차 제대로 못주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월급을 받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상당수의 고참 병사들이 오스만 군대가 쳐들어오는 상황에서도 참전하기를 거부하여 투만 바이 2세는 당장 참전할 병사들을 모집하는 것조차 어려웠다.[16]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칼리파를 자칭한 것은 세 번째 군주이자 처음으로 술탄을 칭한 무라드 1세 때부터였다. 하지만 이건 대부분의 무슬림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일종의 참칭이었다.[17] 다만 오스만의 지배 기간인 17세기 와중에도 이집트에서는 툭하면 맘루크들의 반란이 연례행사처럼 계속 일어나 치안이 불안한 상황이었다.[18] 여담으로 시리아에서는 1520년에 셀림 1세가 죽자마자 반란이 일어났다. 본래 맘루크 왕조의 신하로 오스만 제국에 항복하여 카이로 정복에 공을 세운 대가로 시리아 총독에 임명되었던 잔비르디 알 가잘리라는 인물이, 오스만 제국의 지방관과 병사들을 숙청하고 주민들이 오스만 제국식의 의복을 입는 것도 금지하는 등 제국에게 저항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반란에 협력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이집트가 아무런 동요도 일으키지 않았던 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셀림 1세의 뒤를 이은 쉴레이만 1세가 명군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진압되었다.[19] 수단 북부에 존재하고 있었던 부족 연맹 국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