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color=#fff><colbgcolor=#536349> Battle of Liège Eroberung von Lüttich 리에주 전투 | |||
| 1차 세계 대전 서부전선의 벨기에 침공의 일부 | |||
| 날짜 | 1914년 8월 5일 ~ 8월 16일 | ||
| 장소 | 벨기에 리에주 | ||
| 교전국 | | | |
| 지휘관 | 소장 | 지라드 르망 중장 | |
| 전력 | 약 60,000명 병력 | 약 30,000명 | |
| 피해규모 | 2,000~2,500명 사상 | 2,000~3,000여 명 사상 4,000명 포로 | |
| 결과 | 독일 제국의 전술적 승리, 벨기에의 전략적 승리 | ||
1. 개요
| 리에주 전투 12초 정리 |
2. 배경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게 최후통첩을 보낸뒤 세르비아 왕국가 거절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에게 선전포고, 같은 범슬라브민족인 러시아 제국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 같은 동맹인 독일 제국이 러시아 제국에게 선전포고, 같은 동맹인 프랑스에게 독일 제국이 선전 포고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그당시 독일은 계획에서나 있었던 양면전선을 버텨야 했다. 그래서 독일은 양면전선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하여 계획한 슐리펜 계획을 따를수 밖에 없었다. 슐리펜 계획으로는 러시아는 동원이 느리니, 벨기에로 통과하여 프랑스를 빨리 점령하고 프랑스 병력들을 러시아 전선에서 싸운다는게 계획이였다. 하지만 독일은 벨기에를 공격하면 영국이 할것을 알기에 벨기에를 공격하지 말고 러시아 전선으로 가길바랬다. 하지만 몰트케는 굳이 수정하기 싫어, 황제를 설득한뒤 발동하기로 했다. 한편 벨기에에서는 프랑스처럼 명확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1913년때 독일은 적으로 간주하고 뫼즈 강 기준으로 요새에서 싸운다는 계획했으나, 참모부, 참모총장에게 거부되었다. 그 당시 벨기에는 적은 병력들과 분산된 전략으로 독일군34사단들을 막아야했다. 벨기에는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리에주, 나뮈르 요새에 모든 희망을 걸어야했다.
3. 전투전
7월 29일, 독일 정부으로부터 비밀 봉투를 브뤼셀 주재 독일 대사 클라우스 폰 벨로잘레스케(Claus von Below-Saleske)가 8월 2일에 봉투를 개봉해 벨기에 정부에 전달했다. 봉투 속에는 독일의 최후통첩이 있었다. 최후통첩 내용은 나뮈르 요새로 향하는 프랑스군을 격퇴해주게하고 만약 저항을 한다면 적으로 간주하고 12시간안에 답장바란다는 내용이였다. 요약하자면 "야 나 니네 땅에 싸울게, 꼬우면 나랑 적하던가"와 같은 협박이였다. 하지만 8월 2일 알베트 1세와 벨기에 정부는 저항하기로 했다. 이런 반응을 예상 못했던 빌헬름 2세는 알베르 1세의 부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의 혈연 관계를 이용하여 좋은 의도로 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연히 벨기에 정부는 이말을 무시하고 벨기에 록셈부르크 사이 도로 철도를 끊었다.4. 전투
벨기에의 확답을 들을 것도 없이 독일군은 벨기에를 돌파하는 첫 번째 관문인 리에주 요새를 향했다. 선봉을 맡은 폰 엠미히 장군은 특별히 6개의 부대로 구성된 소규모의 뫼즈군(Army of the Meuse)을 이끌었다. 만약에 벨기에군이 항전하지 않는다면 이런 소규모의 부대로도 리에주 요새를 항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독일군에서는 벨기에가 잘해봤자 형식적인 저항을 보일 뿐, 그 나약한 군세로 진지한 저항을 퍼부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빌헬름 2세의 트롤링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반응이었다.하지만 무저항을 예상했던 뫼즈군은 벨기에 기마대와 자전거병에게 공격당했다. 꿋꿋이 150미터 위의 언덕에 위치한 리에주 요새에 맞닥뜨린 뫼즈군은 다리를 끊는다면 적국으로 간주하겠다는 독일의 패기서린 협박에 불구하고도 끊긴 다리를 발견했다. 끊긴 다리를 무시하고 건너려 하자 벨기에 보병에게 공격당했다. 나약했다고 믿었던 벨기에군과 독일군은 실제로 교전에 맞닥뜨린 것이다. 25,000명의 벨기에군보다 2배 넘게 많은 60,000명의 뫼즈(독일)군은, 밤이 돼서야 치열한 교전 끝에 리에주 북부에 위치한 비제(Visé)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8월 5일에 공세를 재개한 엠미히의 뫼즈군은 리에주 요새에 야포로 포격한 뒤, 보병돌격을 명했다. 그러나 겨우 야포 정도로는 리에주 요새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그 덕에 제대로 된 엄폐물 없이 언덕 위의 요새를 향한 보병은 벨기에의 총격에 떼죽음 당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중대 뒤에 중대를 끊임없이 밀어 넣고 소요새 사이의 공간에 벨기에군이 참호를 완성하지 못한 탓에 큰 피해에 불구하고도 돌파에 성공했다. 그러나 돌파한 병력마저 중앙의 요새를 향하면서 기관총 세례에 직격으로 맞은 탓에 시체만 산을 쌓아갔다. 고전하는 독일군의 공세에 벨기에군은 착검돌격으로 독일군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슐리펜 계획의 실행을 위해선 리에주 요새를 격파하는 게 필수인 독일군은 꿋꿋이 위의 과정을 반복했다. 그 결과, 뛰어난 성과 없이 독일군의 시체만 쌓여갔는데, 그 대신 이 시체 산은 인공엄폐물을 형성해 벨기에군을 곤란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소수 병력에 의존해야 했던 벨기에군과 달리 독일군은 예비병 또한 넘쳐나서 『8월의 총성』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명을 총알 쓰듯"(spending lives like bullet) 병력을 무식하게 밀어 넣았다. 5일 밤에도 엠미히는 공세를 재개했으나 제14여단을 둘러본 에리히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는 병사들이 우울하고 불안해했다고 표현했다.
밤에 재개되는 공세 속에 제14여단의 흐트러진 대열을 목격한 루덴도르프는 무슨 소동인지 둘러보러 갔다. 제14여단장 폰 부소(Friedrich von Wussow)가 기관총 세례를 맞고 죽었음을 확인한 루덴도르프는 곧바로 지휘권을 이어받고 과감히 소요새 플레롱(Fléron)과 데브녜(d'Évegnée) 사이를 돌파했다. 운 좋게도 플레롱의 기관총이 작동하는 데 실패했는데 이를 보기 좋게 공략한 루덴도르프는 6일날 오후 2시에 리에주 안마저 들여다볼 수 있는 위치의 언덕에 도달했다. 루덴도르프는 야포를 리에주를 향해 조준하고선 르망을 항복시키기 위해 브뤼셀에 부임해 있던 독일 군사담당관을 특사로 리에주 요새 안으로 파견 보냈다. 파견된 군사담당관은 르망에게 항복하지 않는다면 체펠린 비행선이 리에주를 박살 낼 것이라 협박했다. 이를 증명하듯이 곧바로 독일군은 비행선으로 요새를 폭격해 9명의 민간인을 죽이고 또다시 특사를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를 갖춘 르망은 항복을 거부했다.
항복할 수 없다면 납치해서 강제로 항복시키겠다고 마음먹은 독일군은 40명을 영국군과 비슷한 복장으로 위장시켜 르망의 지휘부로 파견 보냈다. 그러나 위장복이 허술했는데 지휘부에 도착한 곧바로 40명은 발각당해 벨기에군에게 공격받았다. 르망은 아수라장이 된 지휘부에서 탈출해 서부에 있는 소요새 롱생(Loncin)에서 지휘를 재개했다.
중앙의 건물을 둘러싼 소요새가 돌파당했음을 간파한 르망은 리에주 요새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깨달았다. 북부와 남부의 소요새 고리를 독일군이 돌파한 순간 독일군은 중앙 건물을 포위해 외부의 지원을 끊으면 도시가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르망의 정보부는 폰 에미흐의 병력은 4개의 여단에[1] 이는 르망의 단 하나뿐이었던 제3사단에 4배에 달했다. 안트베르펀(Antwerp)의 요새에 의지해 야전군을 보존하는 게 국왕 알베르 1세의 의중임을 아는 르망은 전군에게 도시 리에주를 버리고 끝까지 저항하기 위해 요새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점점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던 리에주 요새의 르망과 달리 브뤼셀의 벨기에인들은 르망의 성공적인 방어전에 찬사를 보내며 마치 전쟁에서 이긴 듯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루뱅(Louvain)의 벨기에 총사령부 또한 이런 긍정적인 분위기에 취해 몇 명의 참모는 공세작전을 짜고 있었다고 한다. 훨씬 더 현실에 투철했던 알베르 1세는 이런 안일한 작전에 반대를 표하며 벨기에 내에 있는 독일군 군단을 총 5개로 간파하고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제때 와준다면 리에주는 건사할 수 없더라도 안트베르펀 요새와 나뮈르 요새에 의지해 독일군을 막을 수 있으리라 희망했다. 알베르 1세는 프랑스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에게 계속 지원요청을 보냈다. 프랑스 참모총장이자 총사령관 조제프 조프르는 4개의 사단을 보내겠음을 약속했으나 9월 15일까지 도착하지 않을 것이라 경고했다.
| 폭격당하는 리에주 |
리에주 요새가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을지 언정, 소수 병력으로 독일군의 강력한 공세에 용감히 맞서 싸우는 벨기에군에 전 세계가 찬사를 보냈다. 프랑스는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 훈장을 리에주 요새에 내리고 알베르 1세에게 군사훈장을 내렸다. 런던의 타임즈지(The Times)는 독일의 강력한 공세를 막아냄으로 "불멸의 명성"(Immortal renown)을 얻었다고 리에주의 벨기에군에 존경을 표했다. 그러나 일선의 병사들에게는 6일의 밤은 훗날 4년간 참호속에서 고생할 병사들처럼 암울했을 뿐이었다. 독일군은 끊임없이 벨기에군의 전의를 꺾기 위해 포격과 비행선으로 포탄 세례를 선사했다. 물론 이는 조국을 지키기 위한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르망과 벨기에군을 항복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7일날, 루덴도르프는 후속 부대 없이 직접 도시 리에주에 쳐들어가 벨기에군의 항복을 종용했으나 이미 르망은 도시에서 후퇴했다. 리에주의 시장을 붙잡은 폰엠미흐는 시장에게 만약에 요새가 항복하지 않는다면 리에주는 불타오를 것이라 협박했으나 시장은 요새의 항복을 종용하는데 거부하고 포로로 남았다. 도시의 함락으로 독일군은 기뻐했으나 리에주 요새는 당연히 멀쩡했다. 르망의 항복없는 저항덕에 원래 계획대로 10일에 벨기에로 진군했어햐 하는 알렉산더 폰 클루크(Alexander von Kluck)의 제1군은 13일로 지체되었다. 루덴도르프는 요새를 파쇄하기 위해 훨씬 더 강력한 중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로써 독일군은 9일에 리에주 요새를 향해 각각 크룹에서 제작한 420mm의 강력한 중포 빅 베르타(Big Bertha)와 스코다에서 제작한 중포를 파견 보냈으나 벨기에인들이 철도를 폭파한 탓에 이 또한 심각하게 지체되고 있었다.
8월 12일, 독일군이 기다리던 중포는 리에주의 퐁티스 요새에 도착했다. 다음 날인 13일 12시 30분경 퐁티스 요새가 파괴되었고, 17시 30분 앙부르 요새를 함락했다. 이후 리에주의 요새들은 추풍낙엽처럼 함락된다. 14일에 쇼드퐁텐, 리에르, 플레롱 요새가, 15일 봉셀, 랑탱 요새가 함락되었으며 16일에 리에주의 마지막 남은 요새들인 올로뉴와 플레말이 함락되었다.
5. 전투 후
벨기에는 열심히 저항하였으나 결국 독일군은 벨기에를 점령하였다. 이후 1914년 9월부터 1918년 11월까지 점령당한 벨기에 내에서 독일군들이 벌인 히스테리적 학살 행위 및 수탈 행위를 행하였다. 정확한것은 벨기에 학살 문서 참고.[1] 사실은 5개의 여단으로 정보부의 예상보다 더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