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60년대 대중음악을 다루는 문서.2. 역사
로큰롤 음악이 사장되어 버리자, 1960년대 초반의 미국 음악계는[1] 크게 세 가지의 음악 장르가 주류가 되었다.먼저 첫 번째로 소울과 R&B를 필두로 한 미국 흑인 음악이 유례없는 전성기를 맞았다. 1959년, R&B의 대부 레이 찰스는 What'd I Say를 시작으로 일약 최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하고, 모타운의 초기 아티스트들도 히트하기 시작한다. 로이드 프라이스,[2] 브룩 벤턴[3] 등이 대표적이다.
두 번째로는, 로큰롤과 기존의 트레디셔널 팝을 섞은 팝 음악이 유행하게 되었다. 리키 넬슨이 대표적이다. 로큰롤 등장 시기 이전 스타일의 팝 음악은 트레디셔널(스탠다드 팝)이라고 구분짓게 되었다.
세 번째는, 이 로큰롤 음악에서, 로큰롤 정신은 빼버리고 특유의 멜로디만 남은 댄스 음악이 유행하게 되었다.[4] 처비 체커의 The Twist를 시작으로 유행하게 되었고 바비 루이스의 Tossin' and Turnin',[5] 처비 체커의 Pony Time,[6] 디 디 샤프의 Mashed Potato Time이[7]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1960년대 초반 미국 대중음악계의 주류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평온하게 흘러갈 줄 알았던 대중음악계에 큰 전환기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사실상 유명을 다한 로큰롤이 바다 건너 영국에서 유행하면서 재즈와 결합하게 되고 자연스레 스키플 밴드들이 생겨났는데, 그중 하나였던 비틀즈가 1964년 미국에 진출하게 되고 I Want to Hold Your Hand를 시작으로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일으키며 범지구적 인기를 구가한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현대 대중음악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하며 세부 장르들이 태동하고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8] 비틀즈는 로큰롤에서 록 음악을 정의하면서 대중음악의 바탕에 록을 자리잡게 했고,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 현대 대중음악의 기반을 만든다.[9] 그리고 비틀즈는 대중음악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바꿨다.
LP가 주류 매체이던 당시에 비틀즈의 음반이 상상을 넘는 열광적인 판매량을 보이며 기존 대중음악 시장에 유례없는 대호황이 오면서, 음악 시장은 폭발적인 성장을 맞이하게 된다.[10] 그리고 1960년대부터 록 음악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로큰롤은 발전하면서 그 뿌리인 컨트리로부터 서서히 멀어지고, 다양하고 실험적인 하위 장르를 포함하는 하나의 형식을 갖춘 상위 장르로 록 음악이라 불리기 시작한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시작된 1960년대 초중반부터 음악계를 포함한 대중문화 전반이 격변하기 시작하며 1960년대 후반기에는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가 시작하여 영화계도 현대적으로 넘어가며, 영화계를 포함한 대중문화계가 전체적으로 현대적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여기에 비틀즈가 만든 자유로운 사회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아직 근대적인 색채가 강했단 시대에서 새로운 현대 시대로 발전 시점에 비틀즈가 강력한 오케스트레이터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11]
블루스가 영국으로 건너가 만들어진 브리티시 블루스 밴드였던 롤링 스톤스와 R&B 밴드에서 시작했던 더 후는 영국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비틀즈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I Can't Get No) Satisfaction같은 명곡으로 하드 록의 시초를 열면서 젊은 층의 큰 지지를 받았고 이는 히피 문화로 이어졌다. 비틀즈의 All You Need Is Love로 상징되는 히피 문화는 절정에 오르다가 1970년대에 끝을 맞는다.
한편 1965년, 비틀즈는 Yesterday[12]와 싱글곡 모음집이 아닌 작품으로 보는 '앨범'의 시초가 되는 명반을 내놓는데 바로 Rubber Soul이다.[13] Rubber Soul 이전에도 '명곡'들은 많았지만, 대중음악계 최초의 '명반'은 Rubber Soul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일 정도로 앨범시대를 불러온 시초작이다. 이 Rubber Soul을 시작으로 자극받은 수많은 뮤지션들이 주도적으로 명반을 내놓기 시작하는 앨범시대가 도래하는데, 이 앨범시대가 개막하면서 상업적인 발전을 넘어 대중음악계는 더욱 크게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비틀즈의 Rain 등으로 시작됐다고 평가[14]되는 마약을 한 몽환적인 느낌의 록 음악이 유행하는데, 이를 사이키델릭 록이라고 한다. 비틀즈가 1966년에 내놓은 걸작, Revolver가 사이키델릭 음악의 시작을 알렸다. 이때부터 비틀즈는 이전보다 좀 더 다양한 주제의 가사들을 쓰기 시작했으며, 갖은 실험적인 시도로 대중음악에 실험음악을 도입했다. 이 앨범으로 비틀즈는 한 시대의 끝과 다른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15] Revolver가 시작하고 페퍼 상사가 상징하는 사이키델릭 록의 사조를 바탕으로 도어즈,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같은 전설적인 밴드들이 1960년대 후반부터 대중음악계를 뒤흔든다. 이 사조는 1970년까지 이어지다가 샤론 테이트 암살사건으로 히피 문화가 몰락하고 사이키델릭 록을 이끌던 3J[16]가 비슷한 시기에 요절하며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1966년, Rubber Soul에 충격받은 비치 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은 대중음악의 완벽한 고전으로 불리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언급되는 Pet Sounds를 탄생시키는데, 이것이 대중 음악가들에게 많은 충격을 몰고 온다. 그중 God Only Knows는, 2023년도 평론에서는 앞으로도 현대 대중음악사에서 다시 나오기 힘들다는 극찬을 받을 정도로 완벽한 작곡이라는 평론을 받았다.[17] 비치 보이스의 Pet Sounds에 충격받은 비틀즈는 1967년, 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역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18]를 탄생시킨다.
이 작품이 위대하다 평가받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크게 보면 일종의 유행이나 다름이 없던 록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렸고 다른 음악들과 만나 확장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 그리고 1960년대는 대중음악과 클래식의 분리가 강하던 시기였는데 페퍼 상사는 20세기까지의 고전 음악의 성과를 수용하면서, 분리와 고립을 넘어 서양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는 것, 그리고 록 음악으로 대표됐던 대중음악에 이전까지 확보했던 대중성에 기초해 위대한 예술이 갖추어야 하는 중요한 덕목인 '보편성'을 획득한 사례라는 것이다. 비틀즈 신드롬이 생겼을 때 당혹해하던 기성세대들도 페퍼 상사는 거부감 없이 들었고, 그렇게 세대 간 단절을 끊어내면서 모든 세대가 향유할 수 있는 음악이 시작됐다. 소위 고급 문화를 지향하는 클래식 음악계도 페퍼 상사를 통해 받은 신선한 충격을 솔직하게 고백했다.[19]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바꾼 음반 중 하나이다.[20]
한편으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음악으로 유명한 벨벳 언더그라운드도 같은 해, 중요한 역사적인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The Velvet Underground & Nico를 탄생시킨다. 앤디 워홀이 밴드의 후원자로서 여러가지 지원을 해주었으며 펑크 록, 개러지 록, 익스페리멘탈 록, 뉴웨이브, 슈게이즈, 노이즈 록, 고스 록등 그외 하부 장르가 여기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21] 또한, 1969년에는 The Velvet Underground를 발매한다. 마이너한 장르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 전작과 달리, 이 앨범은 부드러운 팝 멜로디에 비범한 미니멀리즘을 결합했다는 점 때문에 얼터너티브 록에 큰 영향을 미친 앨범이다. R.E.M.이라던가 디셈버리스트, 빅 스타, 비트 해프닝, 윌코 등이 이 앨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때문에 60년대 음악임에도 촌스럽지 않은 코드 진행과 사운드 덕분에 모던 록으로 대표되는 21세기 록 트렌드의 초석을 닦아놓은 앨범으로 평가받으며 세월이 흐를수록 더더욱 높이 인정받는 명반이다.
앞서 언급했던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함께 이끌었던 롤링 스톤스는 초기에는 블루스나 로큰롤 곡들을 커버하거나 비틀즈가 써준 곡을 받아 발매하는등 그저 그런 행보를 보였으나, 1965년 키스 리처드의 자작곡 (I Can't Get No) Satisfaction을 시작으로 이후 롤링 스톤스 4대 명반이라 불리는 앨범들을 발매하기 시작한다. 로큰롤에서 록 음악이 아직 완전히 형성되기 전부터 '자유', '저항', '퇴폐'를 불어 넣어 현대에 일컫는 록의 정신을 세겼으며, 음악적 영향력으로 보면 록밴드로는 그 비틀즈 다음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다. 구르는 돌이라는 명칭답게 지금까지 구르고 굴러오며 현재는 세계 최고의 록밴드의 자리에 올라섰다.
1966년, 모든 곡을 자작곡으로 채운 명반 Aftermath을 시작으로 평론가들과 대중 모두에게 극찬을 받으면서 그들의 음악성도 주목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1967년 Between the Buttons를 시작으로 사이키델릭 록의 역작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를 발표하는데 이 앨범은 재거/리처즈의 작곡 능력과 브라이언 존스의 편곡 능력 및 악기 연주 능력이 조화되어 롤링 스톤스의 앨범들 중 유일하게 기존의 이미지를 버리고 당시 유행하던 사이키델릭 록을 지향한 앨범이다.
1960년대 초반, 포크 음악에는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이 등장하며 음악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데 밥 딜런이 대중음악계에 남긴 유산은 당시 의미없는 낱말에 지나지 않은 노래 가사에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부여했고 문학적이고 좀 더 은유적인 이야기를 담게 하며 대중음악에 부재했던 철학을 부여 했다는 점이다.[22] 밥 딜런과 비틀즈는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렇게 포크 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킨다. 이 시기 밥 딜런이 출시한 Highway 61 Revisited[23]와 Blonde on Blonde[24]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들이다. Highway 61 Revisited에 수록된 밥 딜런의 노래 Like a Rolling Stone은 명실상부 밥 딜런의 대표곡이며,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곡을 꼽을 때 가장 자주 언급되는 곡이다.[25]
이들뿐만 아니라, 미국의 전설적인 록 밴드 버즈의 활동기이기도 하다. 포크 록, 사이키델릭 록, 컨트리 록 등 여러 장르에 음악적으로 기여하여 1960년대와 그 이후 대중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특히 맥귄은 이미 버즈 결성 이전부터 비틀즈의 곡들을 모두 어쿠스틱으로 편곡해 부를 정도로 열렬한 팬이어서 1964년도 비틀즈의 앨범 A Hard Day's Night에서 조지 해리슨이 사용한 12현 리켄배커 기타에 영향을 받아 버즈도 같은 기타를 사용했으며 조지 해리슨과 로저 맥귄의 쟁글거리는 기타 사운드는 훗날 쟁글 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여러 혼란을 겪은 밴드인데, 1967년에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The Notorious Byrd Brothers는 무그 사운드를 비롯해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흡수해 찬사를 받으며 버즈판 Pet Sounds로 남게 되었다.
로저 맥귄과 크리스 힐먼만 남은 버즈는 그램 파슨스와 힐먼의 사촌인 케빈 켈리를 기용해 테네시, 내슈빌에 박혀서 Sweetheart of the Rodeo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음악적 충돌과 저조한 판매량 역시 갖가지 충돌을 낳다가 남아공 투어 문제가 도화선이 되어 그램은 탈퇴했다. 이후 이 앨범은 얼트 컨트리 록의 시발점으로 재평가 받으며 여러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는 버즈의 또 다른 명반이 된다.
1964년에 데뷔한 킹크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록 밴드이다. 1966년의 Face to Face를 시작으로 음악적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전곡이 레이 데이비스의 자작곡으로 이뤄진 첫 앨범으로 음악적으로 큰 진화를 이룬 작품이었다.[26]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며 발표한 싱글 Waterloo Sunset가 큰 히트를 내었고, 1967년 발표된 앨범 Something Else by the Kinks은 밝은 로큰롤 성향이 줄어들고 영국적인 멜로디가 있는 서정적인 곡들 위주로 짜여진 앨범이었다. 이로서 여러 뮤지션이나 평론가, 프로듀서들이 이른바 킹크스 사운드(Kinks Sound)로 지칭하던 타 밴드들과 다른 킹크스만의 독창적인 사운드가 완성된다. 그러나 상업적으로 미국 시장에서 대실패 등, 큰 실패를 맛보고 안 좋은 일을 연이어 겪는다. 현대에 와서 킹크스는 영국 포크 음악과 전통을 추구하면서 팝 멜로디를 만들어 '영국스러움'이나 '팝 멜로디', '서사가 있는 가사'를 추구하는 아티스트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27]
모타운을 필두로 한 미국 흑인 음악은, 미국 음악계의 3분의 1이 날아간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로도 계속 전성기를 누렸다. 모타운은 슈프림즈, 템테이션스, 포 탑스, 스티비 원더, 마빈 게이, 마사 앤 더 밴델라스, 더 미라클스 등의 아티스트를 기점으로 미국 음악계를 점령해갔다. 이 중에서도 슈프림즈는 빌보드 싱글 차트 갯수 기준으로는 비틀즈 다음가는 인기를 누린다.[28][29] 같은 시기 윌슨 피켓, 오티스 레딩 등의 애틀랜틱 레코드, 스택스 레코드 아티스트들도 수많은 히트곡들을 발매했다.
소울 음악의 여왕 아레사 프랭클린, 흑인 음악과 백인 음악의 가교 역할을 한 에타 제임스, 소울의 왕이라 불리던 쌍두마차 샘 쿡과 오티스 레딩, 그리고 시카고 소울의 기린아 커티스 메이필드 등이 이 당시에 유명했던 인물들. 또한 흑인음악의 대중화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아이즐리 브라더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거물들이다.
1963년에는 로네츠의 Be My Baby(로네츠)가 출시한다. 비틀즈, 브라이언 윌슨과 같은 스튜디오 개척자들을 위한 로제타 석이라 칭해지는 이 희대의 명곡은 사상 최고의 팝 레코드 중 하나로 불린다.
1967년에는 오티스 레딩이 부른 곡 Respect를 아레사 프랭클린이 커버해서 발표한다. 아레사 프랭클린 버전은 당시 막 시작되던 페미니즘과, Black Power Movement(흑인 자부심 고취 운동)에 대한 내용들을 모두 담고 있다.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인 곡이었는데, 페미니즘적인 사상이 들어가 있는 최초의 노래 중 하나이며, 백인들에 영합되려고 했던 모타운과는 다르게 당시 미국 흑인들의 사회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한편으로 흑인 음악인 소울 음악, R&B, 재즈 등이 서로 결합되어 현재의 수많은 흑인 음악의 모태인 펑크(Funk)가 탄생한 시기다. 소울 음악이라는 음악 장르를 완성했고, R&B의 유행에도 큰 업적이 있으며 펑크라는 장르를 만든 소울 음악의 대부 제임스 브라운은 이 장르의 개발과 대중화를 거의 홀로 이끌었다. 1965년 Papa's Got a Brand New Bag (Part 1)으로 대중화의 서막을 알렸고, 이후 60년대 중후반 수많은 펑크 히트곡을 내놓는다. 제임스 브라운이 펑크를 대중화 시키면서, 수많은 펑크 아티스트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과 아이즐리 브라더스가 있다. 소울을 대표하는 제임스 브라운의 명곡으로 I Got You (I Feel Good)이 있다.
다시 하드 록으로 돌아오면, 1966년에 각 분야의 최고들인 에릭 클랩튼, 잭 브루스, 진저 베이커가 결성한 세계 최초의 슈퍼밴드, 크림이 등장하는데 크림은 블루스 베이스의 초고음과 즉흥 연주를 보였으며 이들은 최고의 기타리스트라고 불리는 지미 헨드릭스와 함께 하드 록의 발전과 헤비 메탈 장르의 탄생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이 시기 비틀즈의 Helter Skelter가 최초의 헤비 록 혹은 메탈로서 헤비 메탈의 탄생을 예시한다. 1960년대 미국 대중음악계의 대표적인 역주행 사례로 크림의 Disraeli Gears 앨범에 수록된 Sunshine of Your Love가 있다.
그리고 1968년에는 비로소 로버트 플랜트를 영입하며 완전체를 이룬 레드 제플린과 1970년대에 결성되는 블랙 사바스와 함께 하드 록의 불경한 삼위일체[30]를 이루는 딥 퍼플이 데뷔하며, 레드 제플린은 1969년 Led Zeppelin 앨범을 시작으로 1970년대 하드 록의 전성기를 열기 시작한다. 레드 제플린의 이 시기 대표곡으로는 Babe I'm Gonna Leave You, Good Times Bad Times가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건이 터진다. 흑인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1968년 4월에 과격파 백인단체 소속의 제임스 얼 레이가 쏜 총에 맞아 암살당한 것이다.[31] 대중음악계도 이 시기 대대적인 조의를 표했으며, 대표적으로 비틀즈는 1968년 후반기 명반 The Beatles의 Blackbird[32]로 조의를 표했다.이외에도 비틀즈는,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로 관중석 인종 분리를 금지하며 민권법 운동을 공식적으로 지지하면서 인종차별 완화에 여러가지 공헌을 했다.
또한, 이 시기는 베트남 전쟁이 시작된 시대로 수많은 사람이 반전 운동에 참여했다. 대표적으로 히피 무브먼트가 그러한 이유로 탄생하고 절정을 맞고, 전쟁에 반대한다는 사회 각지에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음악계도 당연히 그러했고, 단순히 반전 활동뿐만 아니라, 각종 명작들이 탄생한 계기가 됐다. 앞서 언급한 비틀즈의 All You Need Is Love와 베트남 전쟁을 상징하는 명곡이자, 롤링 스톤스의 희대의 명곡 Gimme Shelter가 그러하다.
그리고 대중음악계에서 본격적인 무대 퍼포먼스가 시작된 시대이기도 하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시작한 춤에서, 댄서의 면모는 제임스 브라운같은 뮤지션들이 이어 갔으며, 막춤이나 폭발적인 무대 매너로 관중들을 조련하며 공연을 이끌어 나가는 면모는 록 밴드들의 프론트맨들이 이끌어 나갔다.
1960년대의 롤링 스톤스, 더 후, 레드 제플린, 도어즈,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등의 밴드들이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지미 헨드릭스는 치아로 기타줄을 연주한다던지 기타를 이용한 갖은 퍼포먼스를 보였고, 더 후의 피트 타운젠드는 특유의 윈드밀과 슬라이딩, 그리고 악기 부수기 등의 퍼포먼스로 후대의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가 기타나 관악기가 솔로 연주를 할때 특유의 막춤을 추는 퍼포먼스부터, 애드리브를 포함한 여러가지 관객 조련까지 후대의 록 밴드부터 대중음악 아티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영향은 다음 시대에도 이어지며 발전한다.
일렉트릭 기타의 경우 언급한 지미 헨드릭스가 혜성같이 등장하여 이펙터 등의 사용을 정립하고 좡좡거리는 주법을 퍼뜨려 이후의 록 음악계에서의 기타 연주법에 대한 기틀을 잡았다. 기타리스트의 역사는 이 사람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고 확고하게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지미 헨드릭스는 기존의 흑인 블루스 연주자나 팬들한테는 상당히 멸시받았기도 했지만 이후 재즈, 소울 음악, 펑크 등 흑인 음악계도 지미 헨드릭스의 영향을 받아들여 큰 발전을 이룩한다. 그렇게 헨드릭스에게 가던 질타는 후대에 남긴 영향력이 워낙 거대했기에 자연스럽게 사라졌다.[33]
그리고 이 시대에 등장한 비틀즈가, 이 시대를 마지막으로 작품을 제작하고 1970년에 해체를 한다. 그들의 마지막 작품[34]인 Abbey Road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앨범 커버로도 유명하며, 1960년대 예술을 집대성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 역작이다.
또한, 대중음악계에서 일렉트로닉 뮤직이 시작된 시대이다. 대중음악계에서 처음 전자음악적인 색채를 띄우기 시작한 건 1960년대 후반으로, 이 시기 비틀즈가 페퍼 상사, 화이트 앨범, 애비 로드 등에서 슈톡하우젠의 영향을 받은 여러 음향 실험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자음향 기법을 각인시켰고, 처음으로 전자 악기만을 이용한 음악이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은 미국의 현대음악 계열에서 활동하던 웬디 카를로스가 바흐의 곡을 무그 모듈러 신디사이저로만 연주한 음반 Switched On Bach가 히트를 치고 나서 였다.
미국의 밴드 실버 애플즈, 그리고 캔이나 크라프트베르크같은 서독의 프로그레시브 록 아티스트들에 의해 1960년대 후반부터 발전되고 정립하기 시작한다. 일렉트로닉 록이 탄생하고 발전한 시대로, 1970년대에 들어서 탠저린 드림, 장 미셸 자르가 이어서 일렉트로닉 뮤직을 발전시키고, 대중화시킨다.
뮤직 비디오도 이 시대에 최초로 등장한다. 최초의 뮤직비디오 중 하나는 디온의 1963년 스코피톤[35]용으로 제작한 Ruby Baby 뮤직비디오다. 문제는 스코피톤 자체가 잠깐 유행하고만 접근성이 떨어지는 기기였다는 점인데, 한창 유행했을때도 미국 전역에 겨우 500여개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틀즈는 최초로 TV용으로 1966년 Paperback Writer, Rain 싱글 발매 때, 광고 목적으로 프로토 타입의 뮤직 비디오를 제작했고, 그 후 Strawberry Fields Forever에서는 최초로 시각적인 효과를 도입하고, A Day in the Life와, Penny Lane같은 독특한 영상미를 추구하는 예술성이 잡힌 현대 뮤직 비디오의 시초격 작품을 제작한다.
이러한 수많은 발전과 업적들로 인해서 서양에서 흔히 이 시기를 대중음악사 가장 위대한 시대라고 부른다.
2.1. 1960년대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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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 196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1]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전의 미국 음악계를 말한다.[2] 로이드 프라이스는 1959년 Stagger Lee (빌보드 핫 100 4주 연속 1위), Personality (빌보드 핫 100 2위, 195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3위), I'm Gonna Get Married (빌보드 핫 100 3위) 등의 대히트곡을 발매했다.[3] 브룩 벤턴은 1959년 "It's Just a Matter of Time" (빌보드 핫 100 3위), "Endlessly" (빌보드 핫 100 12위), "So Many Ways" (빌보드 핫 100 6위), 1960년 "Baby (You've Got What It Takes)" (빌보드 핫 100 5위), "A Rockin' Good Way (To Mess Around and Fall in Love)" (빌보드 핫 100 7위), "Kiddio" (빌보드 핫 100 7위), 1961년 "Think Twice" (빌보드 핫 100 11위), "The Boll Weevil Song" (빌보드 핫 100 2위), 1962년 "Lie to Me" (빌보드 핫 100 13위), 1963년 "Hotel Happiness" (빌보드 핫 100 3위) 등의 곡이 크게 히트했다.[4] 로큰롤, R&B, 소울 장르의 곡들이었다.[5] 1961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1위[6] 1961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7위[7] 196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3위[8] 1960년대의 경우 대중음악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전체가 크게 변동했었던 시기로 이 시기부터 베트남 전쟁 등으로 인해 미국 역사상 유래 없는 암흑기가 시작되며 히피 등 반문화 체제가 성장하여 클래식 시대가 종말을 맞는다.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잭 니콜슨 등의 메소드 배우의 등장과 뉴웨이브 시네마의 유행, 헤이즈 오피스의 폐지로 1960년대 이후와 이전으로 영화계의 역사가 크게 나뉘는데, 음악계도 그런 셈이다.[9] 대중음악을 하나의 문화로 발전시켰고, 최초의 리마스터링 & 뮤직비디오 시도, 야외 게릴라 & 스타디움 공연 대중화, 악기와 장르간 크로스오버로 락 뮤직의 성립과 세분화에 기여, 역사상 최초로 실험음악을 대중음악에 도입, 최초로 동양 음악을 서양 대중음악에 도입, 메들리곡 & 컨셉트 앨범 대중화, 4인 락밴드 & 일렉기타 체제 확립, 앨범 위주의 음악 대중화 등에 공헌하며 이로 다 말하기 힘들 정도의 영향력을 미친다.[10] 1970년대에 가서야 카세트 테이프가 대중적으로 보급되었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CD가 발명된 것을 고려하면, 당시로 상상을 뛰어넘는 판매량이었다. LP 자체의 가격도 카세트 테이프와 CD에 비해 2-3배 수준이지만, 재생 기기인 턴테이블의 가격도 보급기 기준으로 CD플레이어나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의 몇 갑절이나 된다.[11] 이 시대가 어떤 사회였는지 패션과 종교로 설명하자면, 댄디와 미니 스커트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모즈 룩'이 반항의 상징이었으며, 머쉬룸, 몹톱컷으로 불리는 비틀즈의 헤어컷을 따라했다고 퇴학당하는 일도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공연을 막기도 했으며, 존 레논의 예수 발언으로 비틀즈의 앨범이 화형식을 당하고, 국제적인 라디오 보이콧, 바티칸에서 성명문을 내는 등의 일이 있었다. 역사상 가장 많은 소설 판매과 번역으로 기네스북에 올려진 추리 소설의 상징, 애거서 크리스티의 동시대 소설에서도 비틀즈는 '딴따라'라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묘사된다.[12] 세계에서 가장 많이 커버된 곡이자 가장 많이 재생된 곡. 1985년까지 1,600개 가 넘는 버전이 만들어진 것이 인정되어 기네스 기록이 되었고, 2014년 2월 CBS News 보도 자료에 의하면 3천 명 이상의 아티스트가 커버했다 한다. 방송음악협회에 따르면 20세기에만 재생이 아닌, 700만 번이 넘게 '연주'되었다고 한다.[13] 재즈와 영화 사운드트랙 음반이 아닌 록, 팝 음악 등, 나머지 장르들을 기준하여 현대 대중음악계 최초라고 지칭한다.[14] 프리 재즈나 아방가르드 재즈 쪽에서 록에 관심이 있는 일부 재즈 연주자들이 하던 음악을 초기 사이키델릭으로 포함시킬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으나, 보통은 1965 ~ 1966년을 사이키델릭의 태동을 보는 것이 주 시각이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형태를 정립했는지, 일반 대중에게 얼마나 인식 되었는 지가 중요한 관점 중 하나인데 그중 비틀즈의 Rain이 최초로 꼽힌다.[15] 뉴스위크 - The Beatles' New 'Revolver' Expanded Edition Is a Must for Fans[16]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재니스 조플린. 공교롭게도 모두 27세에 죽었다.[17]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당시 사회에서는 저조한 판매 성적을 보였다는 것이다. 충격을 받은 것은 오직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들 뿐이었고, 이 앨범이 재평가를 받는 것은 다름아닌 80년대 ~ 90년대 부터였다. 여기에는 폴 매카트니 같은 동료들의 꾸준한 찬사가 같은 도움 등이 있었다.[18] 유명한 문구로 '영화에 시민 케인이 있고, 소설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있다면, 대중음악에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있다'는 문구가 있다.[19] 대표적으로 천재 음악가 레너드 번스타인의 고백이 있다.[20] 보통 이렇게 평가받는 음반들은 60~90년대에 몰려 있다.[21] 드림 팝의 시초는 비틀즈와 비치 보이스로 보는 게 주 시각이다.[22] 2017년 음악 최대 데이터베이스 사이트 올뮤직의 연구 결과, 밥 딜런은 전체 기준 두번째로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솔로 아티스트로는 가장 많이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뉴스위크에서는 폴 사이먼, 브루스 스프링스틴, 이글스, 닐 영, 도노반, 돈 매클레인, 조니 미첼 등 쟁쟁한 70년대 아티스트들을 다른 말도 아닌 '딜런의 자식들'로 분류했다. 밥 딜런은 이러한 문화계의 공로를 인정받아 훗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23] 모더니즘 시인들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가사 역시 하나의 예술의 경지로까지 올렸다. 평론가들은 밥 딜런이 미국의 정치적, 문화적 혼돈을 잘 담아낸 혁신적인 음악을 했다고 극찬하였다.[24] 포크 록에서 한층 더 나아가 블루스, 컨트리, R&B 등 보다 다양한 장르를 받아들이고 백 밴드인 더 호크스를 비롯한 여러 명의 세션 뮤지션들을 고용하여 제작해 딜런의 앨범 중에서도 손꼽히게 호화로운 사운드를 보여주는 앨범이다.[25] 이 노래 다음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노래로는 A Day in the Life, Be My Baby, Respect, Smells Like Teen Spirit, (I Can't Get No) Satisfaction 등이 있다. 당장 항목으로 넘어가서 수상 기록을 봐보면 알겠지만, 명곡 리스트를 선정할 때 거의 대부분의 매체에서 이 곡을 1위로 올린다.[26] 비틀즈의 Rubber Soul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으나 Rubber Soul이 사운드적으로 통일감을 이뤘다면 Face to Face는 가사로 통일감을 조성한 앨범이었다.[27] 엘비스 코스텔로, 더 잼(과 폴 웰러), 더 스미스, XTC, 오아시스, 블러, 실제로 데이먼 알반이 존경하는 뮤지션 중 킹크스의 레이 데이비스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리버틴즈가 이들의 추종자로 유명하다.[28] 비틀즈가 1964년 ~ 1970년 사이에 20개의 빌보드 핫 100 1위 곡을 만들어냈는데 같은 시기 슈프림즈는 12개의 빌보드 핫 100 1위 곡을 만들어냈다. 이 시기에 빌보드 핫 100 1위 곡을 10개 이상 만들어낸 아티스트는 비틀즈와 슈프림즈가 유이하다.[29] 그러나, 누적기간 기준으로는 빌보드 핫 100 1위 누적기간 리스트에 10위권(34주)에도 못 들었고, 빌보드 200 차트 누적기간 기준으로는 1위/5위권/10위권 모두 10위 안에 못 들었다. 앨범 차트 1위 누적기간 리스트의 10위는 37주다. 비틀즈의 경우, 각각 1위(132주), 5위권(292주), 10위권(382주)로 모든 리스트에 1위로 등극하며 역대 최장 기록이다.[30] They made up the ‘unholy trinity’ of British hard rock and heavy metal during the genre's 1970s golden age. - BBC[31] 그가 암살당한 후 미국 정부는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의 날로 지정, 국경일로 만들었다. 마틴 루터 킹의 I have a dream은 지금까지도 인류에 회자되는 명연설로 남아있으며 지금도 간간이 미국 교과서에 실린다.[32] 마틴 루터 킹에 대한 추모적 성격을 띠는 곡으로, 폴 매카트니에 따르면 실질적으로는 인권 운동에 참여하는 흑인 소녀를 위한 곡이라고 한다.[33] 실제로 지미 헨드릭스가 흑인음악계에서 까일 무렵에도 비비 킹, 마일스 데이비스, 조지 클린턴 등의 진짜 거장들은 창의적인 사운드를 들려주는 헨드릭스의 혁신성을 알아보고 그에 영향받은 음악을 선보였다.[34] 발매는 Let It Be가 더 나중이지만, 녹음은 애비 로드가 더 늦은 시점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35] 1960년대 미국에서 잠깐 유행했던 일종의 주크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