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07 01:26:10

이진아시

뇌질주일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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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7CEEB> 대가야 반파국 시조
이진아시 | 伊珍阿豉
파일:이진아시왕 표준영정.jpg
칭호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
성씨 김(金)
이진아시(伊珍阿豉)
내진주지(內珍朱智)
뇌질주일(惱窒朱日)
신장 9척(2m 43cm)[1]
생몰년도 42년이전(?) ~ ?
재위기간 42년(?) ~ ?

1. 개요2. 이름3. 탄생 설화4. 기타5.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42년 반파국(대가야)을 건국한 시조. 다만 그 외의 역사 기록은 거의 전무한 수준인데, 애초에 가야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 자체가 매우 빈약한 실정이다. 위의 그림은 2016년 대한민국 정부가 지정한 표준영정이다. 당연하지만 저 위의 영정 그림도 상상화다.

2. 이름

삼국사기에서는 대가야국의 시조를 이진아시라고 하고, 그를 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즉 이진아시는 고대에 흔히 그랬던 것처럼 향찰식 표기일 가능성이 높다. '뇌질주일(惱窒朱日)'이라는 이름으로도 써 있는데, 위의 내진주지와 음이 통한다고 볼 수 있고, 한편 이 기록에서 금관국수로왕은 '뇌질청예'라고 쓰고 있다. 뇌질이 성씨격인지 뭔지 알긴 어렵지만 이름에 같은 글자들이 들어간다는 점에서 이진아시왕과 김수로왕은 분명히 어떤 공통점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역으로 금관국 중심적인 설화인 구지봉 구지가 설화에서도 어쨌든 김해 금관가야와 고령 대가야는 같은 날 알에서 태어난 형제라고 돼 있으므로, 설화의 내용은 다르지만 원래 형제였다는 부분은 겹친다.

일본 신화 이름인 이자나기와 이름이 비슷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실제로 고대 한국어와 고대 일본어를 모두 연구하는 알렉산더 보빈은 '이자나기'를 끝의 '기'가 일본어이고 앞의 '이자나'는 한국어로 '*yencana(*연자나. '얹-'과 '나-'의 고대형의 결합)의 결합으로 보았다. 한편으로는 '이자나기'처럼 '이진아시' 역시 한국어적 요소와 일본어적 요소가 혼합돼 있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특히 '아시' 부분이 그러한데, '아'가 소리를 나타내고 '주(朱: 붉다)'가 뜻을 나타내어, 일본어 'aka(빨강)'와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뒤의 '시'는 한국어적 요소로 지도자를 가리키는 존칭의 '-기'로 본다. 여기서 고대 한국어에 ㄱ, ㅋ, ㄲ, ㅎ의 변별이 없었고 그 대신 [x] 발음이었다는 학설을 빌리면 '-기' 혹은 '-시'는 '-*xi'로 표기할 수 있고, 이때 자음 /x/가 /i/ 모음 앞에서 구개음화해 '시'에 가깝게 소리가 났다고 해석할 수 있다.[2] 참고로 '일(日)'은 가차(훈가자)로 '해'의 당시 한반도 남부 방언이 역시 '*xi'로 존칭 접미사와 동음이의어였거나[3] 비슷한 발음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또 저 말이 만약 '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 수도 있는데, 그렇게 따지면 불을 켜다 할 때의 '켜다'라는 말은 과거에 ㆅㅕ다라고 표기되었으며 ㅎ은 고대에는 ㄱ 등과 구별되지 않았고, 힘-심의 관계도 그렇고, 희다가 '싀다', '시다'와 같은 발음으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을 보았을 때 ㄱ 또는 ㅅ으로 발음되기 쉬우며 더욱이 불은 희게 보일 수도, 붉게 보일 수도 있으므로[4] 이 豉자가 고대 한국어의 ㆅㅕ다의 어근 ㆅㅕ-를 나타내는 글자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름이 누리의 붉은 햇님[5]으로 해석된다며, 이를 밝은 누리라는 뜻의 혁거세 거서간과 연관짓기도 한다.

3. 탄생 설화

대가야의 건국 설화이기도 한 이진아시의 탄생 설화는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한 가지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지봉 탄생설화",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정견모주가 등장하는 탄생 설화다.
本大伽倻國【詳見金海府山川下】 自始祖伊珍阿豉王【一云 內珍朱智】 至道設智王 凡十六世五百二十年 【按崔致遠 釋利貞傳云, 伽倻山神, 正見母主, 乃爲天神夷毗謌之所感, 生大伽倻王惱窒朱日. 金官國王惱窒靑裔二人, 則惱窒朱日, 爲伊珍阿豉王之別稱, 靑裔, 爲首露王之別稱, 然與駕洛國왕古記六卵之說, 俱荒誕不可信, 又釋順應傳, 大伽倻國月光太子, 乃正見之十世孫, 父曰異腦王, 求婚于新羅, 迎夷粲比枝輩之女, 而生太子, 則異腦王, 乃惱窒朱日之八世孫也, 然亦不可考.】
본래 대가야국(大加倻國)【김해부(金海府) 산천(山川) 하(下)에 자세하다】.은 시조 이진아시(伊珍阿豉) 왕【한편으로 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 한다.】부터 도설지왕에 이르기 까지 범(凡) 16세(世) 520년【최치원의 석이정전(釋利貞傳)에 이르길,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곧 천신 이비가(夷毗訶)에게 감응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으니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 그러나 가락국고기의 육란의 설과 더불어 황탄하여 믿을 수 없다. 또 석순응전(釋順應傳)에는 대가야국 월광태자(月光太子)는 곧 정견모주의 십세손으로 부는 이뇌왕이라 하는데 신라에 구혼하여 이찬 비지배의 딸을 맞아 태자를 낳았는데 이뇌왕은 뇌질주일의 팔세손이다. 그러나 참고할 것은 못된다.】을 지냈다. 신라 진흥왕이 이를 멸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29 고령현(高靈縣) 건치연혁(建置沿革)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자세한 내용의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중략) 이런 줄도 모르고 정견은 한가롭게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는 환하게 들여다보이는 물 속을 보기도 하고 산새들이 우짓고 있는 숲 속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목욕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다가 햇빛이 유난히 밝은 것을 느꼇다. 정견은 그 순간 너무나 눈부시게 빛나는 햇빝을 의식하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는 눈부신 햇빛을 보지 않으려고 한 손으로 해를 가렸으나 햇빛은 여전히 정견의 마음 속까지 환히 비치는 듯 하더니 순간 이비가의 얼굴이 보였다. 그 순간 정견은 아주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견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을 때는 해가 서산으로 와전히 기울어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 정견은 하늘 나라의 남신인 이비가의 아이를 잉태하였다. 정견은 아이를 위하여 자기 몸을 소중히 하였다. (중략) 정견은 오랜 산고 끝에 쌍둥이를 낳았다. 정견은 큰아이의 이름을 뇌질주일, 작은 아이의 이름을 뇌질청예라 하였다.(후략)
출처 : "한국인의 신화". 한상수 저. 문음사. 2003年**
뇌질주일은 아버지인 이비가를 닮아 얼굴이 해와 같이 둥글고 붉었다고 한다. 수로왕은 어머니인 정견모주와 닮았다고.

이 설화를 보면 알겠지만 《삼국유사가락국기에 등장하는 〈육가야형제설화〉, 즉 김수로왕 탄생 설화에선 김수로가 형이지만 대가야 탄생설화에선 이진아시가 형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내용은 이진아시에 대한 신성성이 극히 강조된 것으로, 신화 내용으로 보아 정견모주로 나타나는 토착 세력과 이비가로 나타나는 이주 세력의 결합에 의해 대가야가 형성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개 건국 신화는 특정 계급의 우월성 또는 신성성을 구현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즉 신화를 통해 지배 계급의 정당성을 부여받고, 또한 이를 의례를 통하여 재현하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왕권의 원천과 현실의 정치 사회적 관계를 수긍하게 하였다.

이러한 탄생설화 때문에 대가야의 모태인 가야산은 우두산(牛頭山)이라 불렸고 산신제 때는 소를 제물로 바쳤다.

이진아시가 맨 처음 도착해서 나라를 세운 곳이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장기리 알터 마을로 추정하는 이유도 위의 설화 때문이다. "알터"라는 이름은 주변 산기슭에 꿩이 집단으로 서식해 알이 꿩알이 많아 알터가 되었다는 설화도 있지만 이진아시 설화에서 이진아시의 알이 멈춘 장소도 바로 이곳이어서 "알터"가 되었다는 설도 있기 때문이다.

키는 형인 수로왕과 같은 알 6개에 태어난 가야 왕들과 같이 9척[6]이었다.#

하지만 대가야의 기록이 부실한 만큼 더 이상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4. 기타

전설에 따르면 이뇌왕이 이진아시의 8세손(7대손)이며, 520년대생인[7] 월광태자가 이진아시의 어머니 정견모주의 10세손(9대손)이라 기록된 점을 고려하면 이진아시는 월광태자의 8대조가 된다. 도설지왕은 반파국의 16대 왕으로도 기록되어 있어 나머지 6명의 존재에 대해 논란이 있다.

월광태자는 반파국의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과 동일인물로 유력시되는 인물로, 이뇌왕이 친신라 외교의 일환으로 신라 여자를 부인으로 삼아서 태어났지만 반파국이 신라와 외교 갈등을 빚자 신라 부인은 귀국하였다. 이후 도설지는 사훼부(사량부) 소속 신라 장군으로 551년~561년 비석문에 등장하며, 562년 반파국의 마지막 왕으로서 신라에게 멸망당한다. 520년대생인 도설지왕을 월광태자와 동일인물로 간주할 경우 8대조인 이진아시는 160~180년을 역산해서 340~360년대생이 된다.

고고학적으로 반파국은 2~3세기 전신이 되는 '변진반로국(삼국지)'이 개진면 양전리, 반운리 일대에 출몰했지만, 4세기까지만 해도 변진반로국은 굉장히 미약한 가야 소국에 지나지 않았다.[8] 그러다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인해 금관국이 쇠퇴하자[9]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세력이 폭풍성장하고 대가야읍 연조리로 천도한 뒤 금관국에게서 '가라'의 이름을 빼앗아 '가라국(대가야)=반파국'이 되었다. 이때 5세기 전반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는 급격하게 강한 세력이 등장하지만, 단일 왕가가 아니라 여러 집단이 서로 비슷한 위계를 가지고 같은 묘역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5세기 전반에 '매우 많은' 고분이 나타났다. 이 현상은 5세기 중반에 마무리되고 다른 가야 지역과 완전히 구별되는 대가야 양식 가야토기가 등장하는 등 특색 있는 문화를 발전시키게 된다.

이진아시가 '대가야의 건국자'로 불리었으며 대가야읍에 도읍해 나라를 세웠다는 신화를 고려하면 이진아시는 실제로는 4세기 후반~5세기 초반 개진면에서 대가야읍으로 천도하고 '대가야'를 세운 왕'들' 중 한 명이었고, 5세기 중반 이진아시의 후손이 '대가야왕'으로 일원화되면서 이진아시의 후손이 남긴 후대 기록에 5세기 초반 이진아시계와 병존하던 타 왕계의 6명이 누락된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 신라, 금관국 모두 실제 건국 연대 조작을 수백 년 단위로 했기 때문에 반파국도 마찬가지로 건국 연대를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금관국도 3세기 김해의 왕권을 독점하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 일족을 기준으로 금관국 왕조를 세지 그 전신이 되는 '변진구야국'의 지배층들은 포함시키지 않음을 고려하면 이진아시도 비슷하게 볼 수 있다.

건국 연대를 조작한 신화에서도 백제, 신라, 금관국(기원전 1세기)과 달리 기원후 1세기라 기록하는 등 백제, 신라, 금관국보다 후대에 건국했음을 암시하고 있지만 고고학적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금관국의 건국자들과 비교하면 독보적으로 후대 인물이다. 고고학적으로 고구려 시조 추모왕은 기원전 1세기, 백제 시조 온조왕과 신라 시조 혁거세 거서간은 2세기 중후반, 태조 성한왕은 3세기 중반,[10] 금관국 시조 수로왕은 3세기 중후반 건국[11]한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이진아시 일족과 김해 대성동 고분군 일족과의 구체적인 관계는 알 수 없다. 6가야 전승은 실제로는 가야의 후예를 자칭하던 여말선초기 호족들이 왕건에게서 구전으로 내려오던 현지 전승을 되살려 스스로 가야 소국의 왕손임을 인정받고자 태조 왕건에게 요청해 만들어진 허구의 전설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가야 제국(諸國)의 왕조들이 김씨(金氏) 성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6세기 신라에게 멸망한 가야 각국의 왕조들이 당대 신라 왕조였던 김씨 족단의 일원으로 편입되면서 김씨 성을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금관국 왕조가 김씨 성을 사용한 것은 시조 수로왕의 '수로/쇠'를 음차한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에 신라 김씨와 수렴진화한 성일 수도 있지만,[12] 어머니가 신라 진골이었던 도설지왕은 신라 시절 사훼부(사량부) 소속이었는데 당시 사량부가 진흥왕의 아버지 입종갈문왕이 갈문왕으로 군림하던 김씨 족단의 중심임을 고려하면 도설지왕의 김씨는 김씨 족단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김씨를 사용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13] 김씨 성을 사용했다는 6가야 전승에 나오는 국가들 중 반파국, 안라국, 고자국일본서기에서 562년에 멸망한 10국 중 하나이며,[14] 멸망 이후 신라 김씨 족단에 편입되어 동화된 것으로 추측됨을 고려하면 이들이 김씨 성을 사용했다고 해서 이진아시 일족과 수로왕 일족이 같은 일족이 맞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5.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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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MBC 드라마 <김수로>에서 등장. 배우는 고주원

천군 이비가와 정견모주 사이에서 태어나서 수로와는 이부형제가 되며 수로의 이부동생이다. 자신이 천군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성장해가나 점차 수로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나중에 수로가 어머니인 정견모주의 친아들임이 밝혀지고 나서 입지가 점점 좁아지기에 창천곡으로 자기를 따르는 천군단 100여명을 이끌고 떠나서 따로 살림을 차린다. 이는 금관가야와 대가야라는 형태에서의 분화 기준을 보여주기 위한 드라마적 형태로 보인다. 수로보다는 조금 딸려도 충분히 왕의 자리의 능력을 보여주는 인물로 그려진다.


[1] 삼국시대에 대한 기록에서 9척이라 나온다. 다른 각주에도 서술하지만 현재의 척은 일본이 개항 이후 피트를 척으로 번역한 것이 넘어온 것이다. 고대사의 1척은 거의 전한의 1척인 22.5cm를 기준으로 한 것.[2] 실제로 현대 한국어의 ㅎ 소리는 '힘' 등의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전설모음 /i/ 앞에서 구개음화해 '심'과 유사하게 바뀌는 일이 잦다.[3] 혹은 아예 해를 뜻하는 같은 말에서 비롯된 다의어였을 수도 있다. 한국어족이 해를 숭상해 왔기 때문이다. 해씨 고구려설이 이와 연관이 있다.[4] 한국어의 '붉다'가 '밝다'와 같은 어원을 지닌 게 그 증거이다.[5] 단, 태양을 붉은색과 연관짓는 것은 일본어적 요소이다. 한국어족에서는 예로부터 태양을 흰색과 연관지었다. 당장 '희-'의 어원부터가 '해'와 같다.[6] 한나라 때의 척은 22.5cm. 계산을 하면 203cm이다.[7] 522~529년 사이[8] 개진면 시절 변진반로국의 와질토기는 부산 노포동 고분군이나 울산 웅촌면 하대마을 유적과 양상이 비슷해 낙동강을 타고 교류한 것을 알 수 있지만, 반파국만의 '특별함'이 두드러지지는 않는다.[9] 4세기 후반부터 금관국이 약해지기 시작하는 정황이 있어 4세기 후반으로 올려 잡아야 한다는 가설도 있다.[10] 3세기 중반 기리영 전투 이후 대방군의 통제권이 강해지자 이에 반발한 서북한 고조선인들이 충주 금릉동에 남하해 세운 친목지국 마한 거수국의 건국자.(백제가 임진강의 하북위례성에서 한강 이남의 한성백제로 재남하한 시기와 같다) 4세기 초반 백제에게 멸망하자 그의 후손들이 사로국으로 재이주해 신라 김씨 왕조가 되었다.[11] 정확히는 김해 주촌면 양동리 고분군 중심의 소국인 변진구야국에서 김해 대성동 고분군을 중심으로 한 금관국 체제로 전환시킨 인물로 추정된다.[12] 금관국은 문명의 중핵이었던 철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13] 보장왕의 후손인 안승도 신라에 귀부하면서 김씨를 사성받았다.[14] 나머지는 사이기국, 다라국, 졸마국, 자타국, 산반하국, 걸손국, 임례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