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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조 | 네오 리얼리즘, 누벨바그, 뉴 할리우드, 대만 뉴웨이브, 스파게티 웨스턴, 시적 리얼리즘, 표현주의, 도그마 95, 소비에트 몽타주, 프리 시네마, 폴란드 학파, 제3영화, 멈블코어, 시네마 뒤 룩, 홍콩 뉴웨이브, 뉴 퀴어 시네마, 뉴 저먼 시네마 | |
포맷 /프로덕션 | 3D, 독립 영화, 애니메이션 영화, 흑백 영화 |
Italian neorealism(영어) Neorealismo(이탈리아어)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에 나타난 리얼리즘 경향으로 대략 1940년대 중반부터 시작하여서 1950년대 중반까지 이탈리아에서 유행했던 사조로, 프랑스 영화계의 누벨바그와 훗날의 영화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른바 현실적인 영화들이 등장하게 된것이다. 다만 리얼리즘은 19세기 중엽에 이미 미술과 문학에서 사조로써 대두되었기 때문에, 이때의 사조를 네오 리얼리즘[1]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용어 자체는 1943년 이탈리아의 영화 잡지 <영화>에서 언급하였다. 그 당시에는 프랑스의 시적 리얼리즘을 칭하기 위해서 언급하였지만, 1948년에 공식적으로 전후 이탈리아의 사실주의를 칭하는 용어로 정착하였다.2. 발생 배경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후에 발생하였다. 패전국이던 당시 이탈리아의 영화계는 당시 국가의 사정에 의해 프로파간다 영화나 코미디 영화 등을 중심으로 제작되고 있었으며, 특히 대전 중 급속히 그 규모를 키웠던 미국 영화가 물량 공세로 치고 들어오는 상태였다.이런 경향에 반하는 이탈리아의 영화감독들은 구체적으로 시스템화 된 영화 제작 방식에서 이런 현상을 느끼고, 기존의 상업적 영화들을 백색전화 영화라 비하하며 그에 반하기 위해서 제도를 벗어난 영화제작 방식을 꾀하였고, 이후 사회적으로도 우울한 분위기가 남아있던 1950년대 초까지는 이탈리아 영화에서 주류를 차지하였다.
3. 기술적인 특징
특징 대부분이 돈이 없어서 그런것이다. 물론 종전후의 패전국이자 거대 스튜디오에서 탈피한 제작방식을 감안하자면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규격화 되지 않은 상대적인 현실을 찍는다는 작가적 정신론도 무시하긴 어렵다. 돈이 없어서 그렇게 만든거였지만, 이것은 수많은 영화 제작자들의 미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 거친 편집. 예를 들어 뭔가 그 장면에서 인물들끼리 더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뚝뚝 끊긴다든지.[3]
- 전문배우들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캐스팅한 사람들(촬영장 현지의 일반인들)이나 인부를 배우로 썼다. 전문 배우들도 쓰였지만, 그 숫자가 적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배우들이 아닌 사람들이 조연인 줄 안다. <흔들리는 대지>에서의 어부들이나 <자전거 도둑>에서의 주인공 부자 등.
- 조명이 없는 자연채광.
- 뉴스용 자투리 필름 사용
- 한정된 공간이나, 게릴라식 촬영(현지촬영) - <무방비도시>의 촬영장은 실제 사건이 일어난 곳에서 촬영하였고, <흔들리는 대지>에서 드러나는 지방 사투리 등.
- 핸드헬드가 많이 쓰였다. 당시 삼각대도 하면 돈이 들기에 이랬다고. [4]
- 그외에도 일반 영화랑 비교해 보면 다른게 많다. 한계 때문에 크레인을 쓸 수 없는 등...
- 굉장히 제작일정이 빨랐는데, 배우들은 비전문 배우였기에 영화배우뿐만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진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 이 사조가 유행한 시기가 매우 경제적으로 안 좋았던 시기라서 스텝들도 감독 겸 제작자에게 돈을 받는 처지인 이상, 감독의 권한이 지금보다 훨씬 강력했다.
4. 내적 특징
현실은 시궁창 그 자체가 많다. 주인공은 노력을 해도, 용을 써도 실패하고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왜냐하면 이미 전쟁이 휘몰아친 후 패전과 대공황의 시대였기 때문이다.1930년대 프랑스의 시적 리얼리즘 영화들에 영향을 받았다. 시적 리얼리즘의 대표적인 작가는 장 비고와 장 르누아르. 실제로 네오 리얼리즘 감독들은 체제 선전 영화를 쏟아내던 자국 사정 때문에 프랑스에서 영화를 배우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사건의 발단과 전개에 일정량 논리성을 띄던 기존의 영화들과 다르게 네오 리얼리즘 영화는 논리보다는 갑작스러운 사건의 발생과 진행을 보여주는 경향이 크다.[5]
개인과 사회(공동체)의 역할 갈등(복합적 성격화)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주인공이 많다. 이 과정에서 개인이 희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스튜디오의 촬영을 거부하고 직접 현장에 뛰처나가 촬영한 샷들은 패전 당시의 이탈리아를 있는 그대로 잘 보여준다. 대체로 큰 샷들(롱샷 등)을 위주로 촬영을 하기 때문에 극의 중심에 있어야할 주인공과 함께 실제 전후복구 중인 도시의 모습도 다량 함께 잡혔다. 이로써 극 영화 임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기록 영화로써의 관점 또한 함께 획득하였으며, 그런 현실의 중심에 있는 주인공을 보여줌으로써 당대의 현실을 직관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사실 이 흐름이 후대에 끼친 영향은, '현실'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라는 지점이 크다. 사실과의 거리를 만들면서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누벨바그 세대와 이후 영화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5. 종말
마셜플랜 예산이 본격적으로 집행되기 시작하고, 1950년대가 되면 이탈리아의 경제는 완연한 회복세에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낙관적인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하였고, 당시 이탈리아 관객들은 통속적인 영화들을 네오 리얼리즘 영화보다 더욱 선호하였기 때문에 네오 리얼리즘 영화는 한물 가게 되었다. 물론 지역간 불균형 성장과 부정부패 등의 문제는 여전히 현존해 있었기는 했지만, 어쨌든 절대적인 빈곤은 어느정도나마 해소되었기 때문에 파시즘에 억압받는 빈궁한 사람들의 생활상을 계속 이야기할 당위성이 떨어졌으며, 이에 따라 네오 리얼리즘 사조 또한 한물갔다. 또한, 이 당시 이탈리아 집권 여당인 기독교민주당에서도 네오 리얼리즘 영화를 싫어해서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수출을 노골적으로 방해하였고, 가톨릭에서도 섹스, 반성직적인 내용을 다루는거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했으며. 좌파라고 해서 꼭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환영한것은 아니라서 꿈도 희망도 없는 결말이나 낸다면서 썩 좋아하지 않았다.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기존 네오 리얼리즘 감독들의 영화는 코미디, 멜로 혹은 거대 프로덕션에서 작업한 대작들로 전환된다. 사실 네오 리얼리즘은 분명한 사조라기 보다는 파괴된 현실을 반영한 일종의 제작환경과 태도였기에 붐이 식은 후로는 대부분 자기 길을 갔다. 비토리오 데 시카는 대중적인 코미디로 전향했으며, 로베르토 로셀리니는 불륜 상대였던 잉그리드 버그만을 기용해 네오 리얼리즘의 태도를 유지하되 스타 아우라와 멜로 드라마를 활용해 모더니즘 영화를 개척했다. 루키노 비스콘티는 호사스러운 양식미와 데카당스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6]
대신 이탈리아 이외의 제 3세계나 후진국에서는 여전히 신선하게 받아들여져 1960년대 중후반에도 계속 만들어졌다. 한국 영화계에도 큰 영향을 미쳐 마부나 오발탄 등 전후의 한국의 현실을 다룬 영화들 중 일부가 네오 리얼리즘의 영향권에 있다.
6. 유명한 거장들
- 루키노 비스콘티 - 강박관념이 네오 리얼리즘의 효시로 꼽힌다.
- 비토리오 데 시카 - 자전거 도둑이나 움베르토 D가 유명하다.
- 페데리코 펠리니 - 펠리니는 장기간 작품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네오 리얼리즘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8 1/2은 초현실주의적인 색체를 띄기도 하였다.
- 로베르토 로셀리니 - 독일 영년, 무방비도시
-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 후발 주자로 초기작들이 네오 리얼리즘 풍이다.
[1] '신사실주의'라고도 부를수 있다.[2] 또한, 아래 기재된 특징은 '대체로' 그렇다는 뜻이지, 모든 네오리얼리즘의 영화가 다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3] 이것이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의 갑작스러운 점프컷에 영향을 주었다.[4] 하지만 네오 리얼리즘의 대표작 <자전거 도둑>에서는 핸드헬드를 보기 어렵다.[5] 네오 리얼리즘에 대한 분석에는 이런 사건의 발생이 훨씬 현실에 가깝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즉 현실에서는 각본처럼 합리적으로 짜여진 일들만 마주하지 않는다는 것. 뭐 그렇다고 현실에서 합리적인 일은 없고 불합리한 일만 연속적으로 생기는 건 아닌데..[6] 비스콘티는 네오 리얼리즘 시절에도 오페라적인 요소를 자주 도입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네오 리얼리즘적인 요소와 가족 멜로 드라마를 결합한 로코와 그의 형제들이 대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