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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어 단어
Décadence.'퇴폐', '쇠락'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 단어로서, 단어 자체는 16세기부터 있던 단어이지만, 보통 이 단어를 말할 때는 19세기 프랑스에서 시작한 문예사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이 사조에 속한 프랑스 예술가들은 기괴하고, 인위적이고, 비뚤어지고, 이국적인 감각과 경험들을 주제로 예술을 했는데, 같은 시대 사람들이 보기에 이러한 예술은 그 사회와 제도가 쇠퇴하는 전조 증상이라고 생각했다. 즉, 사회가 쇠퇴하기 전에 문화가 먼저 쇠퇴하는 증상을 보이는데, 그 증상이 바로 데카당스식 예술이라는 것이다.
같은 시대에 살았던 프리드리히 니체가 이 단어를 문화비평에 많이 사용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물론 니체도 원래 있던 단어를 사용한 것일 뿐, 니체 자신이 만들어낸 용어는 아니다.
2. 프리드리히 니체와 데카당스에 대하여
니체의 예술철학비극은 염세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비극은 오히려 염세주의에 대한 거부와 반대 절차로 간주되어야 한다.
(비극의 목적은) 공포와 동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나 감정의 격렬한 방출을 통해 위험한 감정에서 자기를 정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ㅡ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이해했지만ㅡ
쇼펜하우어는 '의지로부터의 해방'을 예술의 총체적 의도라고 가르쳤고, 체념시키는 것을 비극이 갖는 중대한 유용성이라며 경외했다. 그런데 이것은 염세주의자의 시각이며 사악한 시선이다. 우리는 예술가 자신들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비극적 예술가는 자신의 무엇을 전달하는 것인가? "
그가 보여주는 것은 다름 아닌 끔찍한 것과 의문스러운 것[1] 앞에서의 공포 없는 상태가 아닌가? 그 상태 자체가 지극히 소망할 만한 것이다. 이런 상태를 알고 있는 자는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그가 예술가라면 그는 그 상태를 전달하며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강력한 적수 앞에서, 커다란 재난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문자 앞에서 느끼는 용기와 자유ㅡ 이런 승리의 상태가 바로 비극적 예술가가 선택하는 상태이며, 그가 찬미하는 상태이다. 비극 앞에서 우리 영혼 내부의 전사가 자신의 사티로스의 제의를 거행한다. 고통에 익숙한 자, 고통을 찾는 자, 영웅적인 인간은 비극과 더불어 자신의 존재를 찬양한다 ㅡ 오직 그에게만 비극 시인은 그런 가장 달콤한 잔혹의 술(비극)을 권한다.
― <우상의 황혼>
프리드리히 니체의 예술철학(미학)에서 특기할만한 점이라면 그리스 비극의 지향과 데카당스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비극의 목적은) 공포와 동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나 감정의 격렬한 방출을 통해 위험한 감정에서 자기를 정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ㅡ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이해했지만ㅡ
쇼펜하우어는 '의지로부터의 해방'을 예술의 총체적 의도라고 가르쳤고, 체념시키는 것을 비극이 갖는 중대한 유용성이라며 경외했다. 그런데 이것은 염세주의자의 시각이며 사악한 시선이다. 우리는 예술가 자신들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비극적 예술가는 자신의 무엇을 전달하는 것인가? "
그가 보여주는 것은 다름 아닌 끔찍한 것과 의문스러운 것[1] 앞에서의 공포 없는 상태가 아닌가? 그 상태 자체가 지극히 소망할 만한 것이다. 이런 상태를 알고 있는 자는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그가 예술가라면 그는 그 상태를 전달하며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강력한 적수 앞에서, 커다란 재난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문자 앞에서 느끼는 용기와 자유ㅡ 이런 승리의 상태가 바로 비극적 예술가가 선택하는 상태이며, 그가 찬미하는 상태이다. 비극 앞에서 우리 영혼 내부의 전사가 자신의 사티로스의 제의를 거행한다. 고통에 익숙한 자, 고통을 찾는 자, 영웅적인 인간은 비극과 더불어 자신의 존재를 찬양한다 ㅡ 오직 그에게만 비극 시인은 그런 가장 달콤한 잔혹의 술(비극)을 권한다.
― <우상의 황혼>
"데카당스"란, 암울한 현실을 외면한 채 이상적인 조형 그 자체를 탐닉하는 예술을 말한다. 즉, 고통으로 가득찬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고 비현실적인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상태이다. 소위 말해 "속 빈 강정". 니체에게 이러한 예술관은 노예도덕을 정당화하는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데카당스 예술에 맞서는 그리스 비극의 정신을 추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아폴론적인 정신(이성)과 디오니소스적인 정신(광기)이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실을 반영하는 디오니소스적 광기가 아폴론적 이성에 의해 조화롭게 포장된 것'이 그리스 비극이다.
아폴론적 이성은 디오니소스적 광기가 스스로 파멸로 빠지는 것을 막으며, 디오니소스적 광기는 아폴론적 이성이 현실의 삶을 마주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막아서 조화를 이룬다.
우리는 비극 속 우연성, 한계성, 불합리성 등을 통해 논리적 이성으로는 도저히 건드릴 수 없었던 삶의 생생한 고통을 마주볼 수 있으며, 또한 이것에 도취되어 하나가 됨으로써 우리의 정신을 보다 더 높은 단계로 고양시킬 수 있다.
따라서 삶의 고통에 대한 묘사는 바로 삶의 대한 찬미이며, 이를 보여주는 예술이야말로 자기긍정의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성만을 중시하는 소크라테스를 거치면서 디오니소스적 광기는 사라져버리고, 그리스 비극은 몰락했으며, 이를 계승한 기독교 전통에서 예술은 더욱더 상징화되어, 이들이 좇는 것들은 현실의 삶과 상당히 멀어져버렸다.
따라서 그리스 비극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의 건강했던 삶을 다시 되돌려놓는 길이며, 니체는 이러한 비극의 모습을 바그너의 초기 음악작품 속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3. 일본의 TV 애니메이션 데카당스
자세한 내용은 데카당스(애니메이션) 문서 참고하십시오.[1] 인간의 삶은 '우연'과 '불합리'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끔찍하고도 의문스러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