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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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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내용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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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그너의 경우 : 악사들의 문제 (Der Fall Wagner : Ein Musikanten Problem)』는 1888년에 출판한 프리드리히 니체의 후기 작품으로서, 편지 형식의 글을 통해 바그너를 비판하고 있는 책이다.

2. 상세

이미 오래전부터 니체는 바그너를 비판하는 글들을 여러 차례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니체는 바그너의 추종자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니체는 자신이 바그너의 추종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말하기 위해, 바그너를 비판하는 책 『바그너의 경우』를 쓰기로 결심한다.

이 책은 처음에 8개의 긴 단편으로 된 '토리노에서의 편지'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1888년 6월 26일, 라이프치히의 나우만 출판사에 원고를 발송한 후로부터 약 일주일간, 니체는 출판사에 연이어 추가 원고들을 계속해서 보낸다. 이에 당황한 출판사 측은 그 동안 받은 원고 전체를 니체에게 모두 반송하고는 니체에게 한꺼번에 정리해서 달라고 요청했다. 니체는 이것들을 다시 정리하여 새로운 형태로 작성했고, 7월 16일 완성된 원고를 다시 출판사에 발송했다.

하지만 니체는 7월 말에 원고를 또 고쳐서 '결론적 고찰' 부분을 지우고 두 개의 '추신'을 추가하여 8월 24일 출판사에 재발송한다. 그리하여 9월 중순경에서야 『바그너의 경우』 초판이 니체의 손에 건네진다.

3. 내용

니체에 따르면 바그너의 음악은 데카당이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이상으로 내세우면서 사람들의 본능을 약하고 지치게 만든다. 그의 음악은 수백 가지 분위기와 격정을 통해 젊은이들의 모든 취향과 모든 저항을 무너뜨린다. 그는 사람들이 자포자기하여 그것을 믿게 될 때까지 한 가지 것에 대해 끈질기게 말한다. "너는 믿어야 하며 믿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이다. 오늘날 독일 젊은이들을 보라. 그들 모두 바그너에게 압도당하여 움직이지 않고 창백한 모습을 띄고 있다. 사람들이 그에게 저항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데카당스의 한 징표이다. 바그너의 음악은 약자와 지쳐 버린자를 유혹하여 그들을 더욱 지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병을 이겨 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건강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병조차도 삶에 대한 자극제가 될 수 있겠지만. 하지만 바그너의 음악은 이제 건강한 사람마저 타락하게 만들 정도로 그 영향력이 점차 강력해지고 있다. 바그너의 정신이 극장을 지배하게 된 후부터는, 취향ㆍ목소리ㆍ재능도 필요 없어졌다. 오직 바그너의 이상만이 요구된다. 여기에는 어떤 덕만이 어울리는 것 같다. ㅡ 훈련, 자동장치, '자기부정'이라는 덕, 즉 '복종과 성실'의 덕 말이다.

바그너는 어떻게 대중들을 속이고 지배하는가? 그는 마치 연극배우와 같이, 숭고한 것, 깊이 있는 것, 그리고 압도적인 것으로써 지쳐 있는 대중들을 예감하게 하고, 놀라게 하며, 고양시킴으로 해서 그들을 속인다. 바그너는 선율 없는 혼잡스러운 음악[1]과 온갖 애매성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예감하게 하고, 번개와 천둥 같은 음향 효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거창한 상징으로 이상에 이르지 못한 탄식과 동정을 보여주고 구원을 동경함으로써 사람들을 고양시킨다. 그의 예술에는 오늘날 전 세계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가장 유혹적인 방식으로 섞여 있다. ㅡ 지쳐 있는 자를 자극하는 세 가지 커다란 자극제, 즉 잔인성과 기교성과 순진성 말이다. 그의 발작적인 정서, 그의 과민한 감각, 그의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원하는 미적 취향, 그가 자신의 원칙인 것처럼 가장하는 그의 불안정성, 생리적 전형으로 간주된 그의 남녀 주인공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전부 의심할 여지 없이 병든 모습을 보여 준다. 바그너는 전형적인 현대 예술가이며 현대성의 진열장이다.

바그너는 전체를 창작할 수 없었다. 바그너의 예술에서 단어는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서 문장 속에서 튀어나온다. 문장은 겹쳐져 페이지의 의미를 흐려 버리고, 페이지는 전체를 희생시켜 가면서 자신의 생명을 획득한다. 전체는 이제 더 이상 전체가 아니다. 언제나 원자들의 무정부 상태, 의지의 분열, 도덕적으로 말하면 '개체의 자유'이다. 삶이라는 것, 삶의 동등한 활력, 삶의 진동과 충만은 가장 작은 형태로 억압되고, 그 나머지의 것은 삶이 빈곤하다. 도처에 마비와 곤란과 경직, 또는 적대와 혼돈이 있다. 전체는 정말로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 바그너에게 있어서 전체란 모아진 것이고, 계산된 것이고, 인위적인 것이며, 인공물인 것이다. 드라마는 강한 논리를 요구한다. 그러나 바그너에게 논리라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에게 음향, 운동, 색채, 짧게 말하면 음악이 주는 감각, 다시 말해 기존 양식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요소적인 것들의 높은 법칙성'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는 해체된, 말하자면 요소적으로 된 음악이 어떤 마법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대부분 발견해 냈다. 이로써 그는 드라마의 연결과 분리의 심리적인 동기 설정을 회피한다.

바그너는 천성적으로 음악가는 아니었다. 대신 그는 음악의 언어적 능력을 무한대로 확장시켰다. 그는 언어로서의 음악에서는 빅토르 위고였다. 음악이 경우에 따라서는 음악이 아니라 언어, 도구, 연극의 시녀 일 수도 있다는 점이 최우선으로 인정된다고 언제나 전제된다면 그렇다. "음악은 항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이론이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실천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세부 묘사에 빠진 나머지, 그는 전체로서의 음악을 창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근본적으로 '그 의미는'이라는 말을 전면에 내세워야만 했다. 그렇다. 바그너가 젊은이들을 정복한 수단은 음악이 아니다. 그것은 이념이다. 그는 모든 허무적인 본능에 아첨하고, 이 본능을 음악으로 위장한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교의 정신에, 모든 데카당스의 종교적 표현 형식에 아첨한다. 귀 기울여 들어 보라. 황폐한 삶의 토양 위에 자라난 모든 것, 초월과 피안과 같은 날조된 모든 것은 바그너의 예술에서 가장 고상한 대변자를 얻는다.

구원이라는 이념만큼 바그너가 깊이 숙고한 것은 없다. 그의 오페라는 구원의 오페라이다. 어떤 사람은 항상 그에게서 구원을 얻길 바라고 있다. 때로는 어떤 청년이, 때로는 어떤 처녀가 말이다. ㅡ 이것이 바그너의 문제인 것이다. ㅡ 그리고 그는 자신의 라이트모티브[2]를 얼마나 다양하게 변화시키는가! 얼마나 진기하고 얼마나 의미심장한 조바꿈인가! 바그너가 아니라면 누가 그런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을까? 순결한 처녀는 사랑에 빠지면 흥미진진한 죄인을 구원하게 된다는 것(《탄호이저》의 경우) 말이다. 또는 심지어 영원한 유대인도 결혼하게 되면 구원받고 정착하게 된다는 것(《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경우), 또는 낡고 찌든 방의 여인은 순결한 젊은이에 의해 구원받기를 좋아한다는 것(쿤드리[3]의 경우), 또는 아름다운 소녀는 바그너주의자인 어떤 기사에 의해 구원받기를 가장 바란다는 것(《명가수》의 경우), 또는 결혼한 여인도 역시 기사에 의해 구원받기를 좋아한다는 것(《이졸데》의 경우), 또는 '늙은 신'은 모든 면에서 도덕적인 타협을 하고 난 후 결국은 자유정신과 비도덕주의자들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것(《반지》의 경우) 말이다.

그러나 바그너는 사랑(구원)을 잘못 이해했다. 그는 사랑을 몰아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원하며 종종 자신의 이익에 반대되는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그너는 그들이 그 대가로 그 사람을 소유하기 원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심지어는 신마저도 사람들이 사랑으로 응답하지 않으면 무섭게 변하지 않은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격언이 옳을 것이다. "사랑은 모든 감정 중에서 가장 이기적인 감정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상처받게 되면 가장 관대하지 못하다."[4] 비제의 《카르멘》의 보라. 만족할 줄 모르는 우리도 그 춤이 지닌 관능적 우울에서 마침내 사랑을, 자연으로 환원되는 사랑을 배우고야 만다! 이것은 '고결한 처녀'의 사랑이 아니다! 젠타[5]의 감수성도 아니다! 오히려 운명으로서의 사랑, 숙명으로서의 사랑, 시니컬하고 순수하며 잔인한 사랑이다. ㅡ 그리고 바로 그 속에는 자연이 들어 있다. 그 한가운데에 투쟁이 있고 그 밑바닥에는 성에 대한 철저한 증오가 놓여 있는 사랑! ㅡ 사랑의 본질을 이루는 비극적 장난이 그토록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고 그토록 끔찍하게 공식화되어 있는 경우를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의 끝을 장식하는 돈 호세의 외침은 이렇다. "그래! 내가 그녀를 죽였다, 내가 ㅡ 내 사모하는 카르멘을!"

오늘날 바그너 추종자들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그들이 문화에 미친 영향을 측정해보자. 그들의 운동은 도대체 누구를 전면에 부각시켰는가? 그들의 운동은 무엇을 점점 더 거대하게 키워 왔는가? ㅡ 무엇보다도 문외한들과 예술을 모르는 백치들의 오만불손을 키워 왔다. 그들은 이제 협회를 조직하고 자신들의 '취향'을 관철시키려고 한다. 그들은 심지어는 음악과 음악가의 일에 심판관이 되고 싶어 한다. 두 번째, 예술에 기여하는 모든 엄격하고 고귀하며 양심적인 교육에 관해 점점 더 강하게 무관심을 조장했다. 그러한 교육의 자리를 천재에 대한 신앙이 차지해 버린다. 쉽게 말하면, 뻔뻔한 딜레탕티즘이 차지하는 것이다(ㅡ 이에 대한 공식이 《명가수》 속에 나온다). 세 번째, 그리고 가장 나쁘기도 한 것인데, 그것은 연극주의이다. ㅡ 즉 연극이 우위를 점한다고, 연극이 예술 전체를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난센스를 키웠다... 그러나 사람들은 연극이 무엇인지를 바그너주의자들의 얼굴에 대고 골백번 말해야 할 것이다. 연극은 언제나 예술의 하위에 있을 뿐이고, 언제나 부차적인 것이고, 거칠게 변한 것이고, 대중을 위해 적절하게 굽혀지고 위장된 것이라고 말이다! 연극은 취향 문제에서 일종의 대중 숭배의 형식이다. 연극은 일종의 대중 봉기이며, 좋은 취향에 대항하는 국민투표이다... 바그너의 경우가 바로 이 점을 증명하고 있다. 그는 다수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취향을 망가뜨렸다. 그는 오페라 자체를 위해 우리의 취향을 망가뜨렸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니체는 세 가지 요구를 한다. 1 극장이 예술의 지배자가 되지 말 것. 2 배우가 진정한 예술가를 타락시키지 말 것. 3 음악이 기만하는 예술이 되지 말 것.

4. 여담

  • 니체는 책의 초반부에 비제의 《카르멘》을 극찬하면서 이의 대비로 바그너의 음악을 비판한다. 비제의 음악이 좋은 까닭은, 가볍고 부드럽고 정중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또한 심술궃고 세련되며 숙명적이며, 그것의 행복은 짧고 갑작스러우며 주저 없이 찾아온다. 비제의 음악은 기분을 명랑하게 하고 기쁨을 준다. 그 줄거리는 열정적인 논리, 가장 짧은 윤곽, 가혹한 필연성까지도 갖추고 있다. 그래서 비제의 음악은 듣는 이를 더 나은 사람으로 되게 만들고 풍요롭게 만든다. 이런 음악을 공식화하면 이렇다. "자연, 건강, 명랑성, 젊은, 덕으로의 회귀!"[6]

[1] 바그너의 '무한 선율'을 말한다.[2] Leitmotiv : 오페라 등에서 극 중 주요 인물이나 특정한 감정 등을 상징하는 동기를 취하는 악구이다. 바그너는 라이트모티브를 곡 중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극의 진행을 암시하고 악곡의 통일성을 주었다.[3] 《파르지팔의 여주인공》[4] 프랑스의 수필가, 뱅자맹 콩스탕의 말.[5] 젠타(Senta)는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이다. 그녀는 헌신적인 사랑과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유령선 선장인 네덜란드인을 구원한다.[6] 내가 얼마나 이 음악에 의해 좋아졌는지를 당신은 벌써 알아챘는가? ㅡ "음악은 지중해처럼 되어야 한다." 나는 이 공식에 관해 몇 가지 근거를 가지고 있다. 자연, 건강, 명랑성, 젊은, 덕으로의 회귀! ㅡ (프리드리히 니체 『바그너의 경우 / 니체 대 바그너』 이상엽 옮김, 세창, 2020, p.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