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12대 황제 네르바 NERVA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Marcus Cocceius Nerva |
출생 | 30년 11월 8일 |
로마 제국 나미 | |
사망 | 98년 1월 27일 (향년 67세) |
로마 제국 로마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96년 9월 18일 ~ 98년 1월 27일 (1년 131일) | |
전임자 | 도미티아누스 |
후임자 | 트라야누스 |
부모 | 아버지 :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어머니 : 세르기아 플라우틸라 |
자녀 | 트라야누스 (양자)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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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제12대 황제.로마 제국의 최전성기인, 서기 2세기 동안 100여 년을 통치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창건자로,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지명하여 평화롭게 제위를 이양한 것으로 유명하다. 로마인들로부터 즉위 과정과 양자 선정 과정 모두 당대부터 미스테리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실제로 짧은 재위 기간 내내 큰 업적은 없는 황제였다.
하지만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로부터 시작된 표현인 오현제 중의 한 명으로 제시되어 후대에 선정을 베푼 황제로 대중들에게 유명해졌다.
2. 황제 즉위 전
이탈리아 중부 지방인 움브리아주의 나르니 출생으로 30년 11월 8일에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와 세르기아 플라우틸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네르바의 개인 이름인 '마르쿠스'는 증조부때부터 연이어 물려받은 이름이었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같은 이름을 썼다.이탈리아에 기원을 둔 로마 상류층의 엘리트로 잘 알려진 네르바는, 플라비우스 왕조와 달리 공화정 시절부터 원로원 의석을 차지해온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네르바 가문은 대대로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협력한 귀족 가문이었는데, 단순하게 협력한 로마 귀족 가문이 아니라 영향력이 상당했던 정치 명문가였다.
3. 조상과 가족
네르바의 증조부였던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1](1세)는 내전기 때 삼두파 중 옥타비아누스(훗날 아우구스투스)를 지지한 원로원 귀족이었고, 공화정 시대 말기인 BC 36년도 집정관을 역임했다.네르바의 조부였던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2세)는 뛰어난 법률가로 상당한 명성을 떨쳤던 원로원 의원으로, 젊은 시절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자 후계자였던 티베리우스의 몇 안 되는 가장 친한 친구로 유명했다. 이런 이유로 네르바의 조부는 친구 티베리우스의 오랜 법률 조언자로 있으면서 티베리우스 시대가 된 이후, 황제의 추천 아래 서기 21년(또는 22년) 7월에 집정관에 올랐다. 네르바(2세)는 집정관에서 물러난 이후 티베리우스 황제가 조카와 아들을 연이어 잃고, 카프레이아(카프리) 섬의 별궁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부터 자발적으로 별궁으로 거처를 함께 옮긴 최측근이었다. 이런 까닭에 그는 33년에 카프레이아 섬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네르바의 부친인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3세) 역시 원로원 의원으로 있으면서 비텔리우스[2] 등과 함께 원로원 내 중진 중, 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파의 대표적인 인사였다. 이런 연유로 그는 칼리굴라 황제의 집권 기간 중에 집정관을 지냈다.
네르바의 외가 역시 제정 시대부터 서서히 줄어들던 이탈리아 귀족 집안이었다. 네르바의 외숙모는 기사계급 출신 가문에서 태어난 루벨리아 바사였는데, 그녀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손녀딸인 율리아 리비아가 남편인 네로 카이사르와 사별한 후 재혼하면서 수양딸로 삼은 여자였다. 한마디로 네르바는 몇 안 되는 공화정 시대로부터 내려온 명문가에 속해 있었던 사람이었고, 본인을 포함해 4대가 모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지지하던 원로원의 대표적인 황제파 정치 가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네르바에게는 코케이아라는 이름의 동복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네로 사후 즉위한 황제들 중 한 명인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의 친형이었던 루키우스 살비우스 티티아누스 오토와 결혼했다. 이 결혼에서 코케이아는 네르바의 유일한 조카인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코케이아누스를 서기 55년에 낳았다. 네르바의 조카 오토 코케이아누스는 네 황제의 해 내전 동안 황제에 올랐던 숙부 오토가 양자로 입양하길 원할 정도로 매력이 넘치는 아이였다. 외숙부 네르바 역시 외조카를 각별히 신경썼는데, 이런 배경 때문에 오토 코케이아누스는 서기 63년 사제들 중 귀족 청소년들로 구성된 각각 12명씩의 살리 멤버가 되었다. 이후 네르바의 외조카 오토는 서기 82년 집정관까지 취임했다. 그렇지만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그를 의심하고 미워해, 서기 96년 "반역자인 숙부 오토의 생일을 축하했다."는 죄목을 씌워 죽였다.
4. 집정관 시기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네르바의 어린 시절의 삶과 초창기 시절 경력, 사생활 등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네르바는 네로 시대 동안 30대의 젊은 나이에 이미 원로원 의원 중에서 이탈리아 귀족을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황제파 인사로 이름을 날렸다.맡았던 업무 역시 제국의 주요 행정 업무와 외교 업무였는데, 성격이 원만해서 적이 많이 없었다. 따라서 당시 황제였던 네로는 네르바를 총애했고, 그의 문학적인 재능과 능력을 높이 평가해 네르바의 문학 작품을 극찬할 정도로 사랑했다. 그래서 네르바에게 이에 대한 상으로 각종 영예와 특권을 부여했다.
그러다가 가문 대대로 협력했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네로의 자살을 끝으로 막을 내리자, 네르바는 내전 기간 동안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대신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충성했다. 이후 그가 지지한 베스파시아누스가 비텔리우스를 이기고 내전을 종식시켰다. 이때 네르바는 플라비우스 왕조를 개창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치세하에서 71년[3] 집정관을 지냈다. 90년에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의 반란이 있었을 때 도미티아누스는 네르바와 함께 집정관직에 올랐다.[4] 반란이 일어났을 때 도미티아누스가 그를 선택했다는 것인데, 이는 네르바가 원로원 내에서 신망이 두터운 중진이었음을 의미한다.
5. 황제
5.1. 즉위와 위기의 고조
서기 96년, 네르바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게 될 친혈육인 여동생 코케이아의 아들인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코케이아누스를 잃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네르바의 외조카인 오토 코케이아누스가 숙부였던 오토 황제의 생일을 기념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그를 죽였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해인 96년, 도미티아누스가 팔라티노 황궁 안의 본인의 침실에서 끔찍하게 암살당했다.(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하자, 네르바는 고령인데다가 병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에 의해 황제에 옹립되었다. 네르바는 자식도 없고 외조카마저 살해되어, 외조카의 아들들인 여동생의 손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제위계승 자격을 논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네르바가 황제로 지목된 것은 조종하기 쉬운 노인을 자리에 앉혀 원로원이 정국을 장악함과 동시에, 도미티아누스에게 혈육을 잃어 그 명분이 명확한 네르바를 상징으로 삼아 플라비우스 왕조의 악행을 부각시키려는 의도 등이 깔려 있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도미티아누스가 실각한 것이 아니라 암살당했는데도, 원로원은 사후 도미티아누스를 단죄했다. 원로원을 억압했던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분풀이이기도 했지만, 이는 원로원이 그들 주도하의 정국을 구상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네르바는 그가 재임하는 동안 단죄당하는 원로원 의원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5][6] 동시에, 네르바는 사재를 전부 기부해 사심이 없음을 밝혔다. 다만, 이 발언은 사실 반강제적으로 나왔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동시대나 후대의 로마인들 사이에서도 이야기가 나왔다. 후술할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가 이 발언, 맹세에도 네르바가 세 번에 걸쳐 각각의 꼬투리를 잡아 처벌하려고 한 것도 여러 말을 낳았다.
하여 디오 카시우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암살한 공모자들이 암살 이전에 네르바를 잠재적인 후계자로 접근했는데, 이는 그가 적어도 도미티아누스 암살 음모 사실을 흐름상 알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또 네르바가 사심 없이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고, 사재를 국가에 바쳤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네르바의 친척들이 모두 있어 의문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담담히 적고 있다.
제위 계승이 잡음 없이 순식간에 이루어진 덕분에 내전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군대의 인기가 높았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 자리에 노인이 들어앉은 것에 대해 근위대는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는 네르바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플라비우스 왕조의 세 황제 모두와 긴밀한 사이였고, 베스파시아누스와 도미티아누스는 그에게 속마음도 표현할 정도였다. 네르바는 네로의 몰락과 네 황제의 해 기간 동안의 무정부 상태를 봤고, 이를 직접 해결했던 사람인 까닭에 몇 시간이라도 주저한다면 폭력적인 내전으로 치닫게 될 것을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즉위 직후, 원로원이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기록말살형을 통과시키고, 이를 이행하는 조치를 하는 것에 있어 신중함을 권고했다. 그렇지만 원로원은 도미티아누스의 모든 것을 없애고 싶어했다. 그래서 도미티아누스의 기존 초상화는 모두 신제 네르바의 얼굴로 교체된 뒤 재전시되었다. 이와 함께 원로원 및 황궁 관료 세력은 네르바가 움직이기 전, 팔라티누스 언덕에 세워진 광대한 크기의 '플라비우스 궁전'을 '시민의 집'으로 명칭을 바꿨다. 이렇게 되자, 네르바는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향수가 강한 프라이토리아니, 로마군, 서민 모두의 불만이 클 것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살루스트 정원 안에 마련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소유의 옛 별장에 거처를 마련해 살아야만 했다.
5.2. 정국 수습 시도
네르바는 원로원이 내세운 방패막이 황제였다. 따라서 원로원의 일방적인 도미티아누스 흔적 지우기를 막고 싶어도, 혹은 그 속도를 줄이고 싶어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원로원 의원들이 도미티아누스를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칼리굴라)보다 암울하고 잔혹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후임자였던 네르바에게 동료 원로원 의원의 특권을 보장할 것을 강요한 것은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네르바는 황제로 즉위한 서기 96년, 자신의 모든 것을 이을 외조카인 오토 코케이아누스를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비극적으로 잃었던 터라 이를 따랐다. 또한 네르바는 즉위 후 열린 원로원 회의에서 이렇게 공개 맹세를 했다."본인이 집권하는 이상 단 한 명의 원로원 의원도 기소하거나, 죽이지 않겠다."
네르바의 이 발표 후, 원로원은 황제에게 환호를 보냈다. 그리고 그 보답처럼 네르바는 선제 도미티아누스가 암살 직전까지 기소한 모든 것을 폐기하고, 그 혐의로 희생된 사람, 투옥된 사람, 유배된 사람 모두를 사면했으며 그 재산을 돌려줬다. 이어 네르바는 원로원 의원 동료들에게 새로운 정부를 위해 함께 하자며, 그들에게 자문회의의 위원직을 개방했다. 즉위 직후부터 새 화폐를 즉시 발행하면서 도미티아누스가 내세운 구호인 공평, 정의, 자유, 법치'를 지우고, 악의적인 기소의 폐지, 관용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네르바는 여전히 지지기반이 약했다. 유명하고 신뢰할 친구와 조언자들에게 크게 의존하는 것은 원로원 내부의 친 도미티아누스 파벌을 자극할 것이 분명했다. 당시 네르바의 친구들과 조언자들은 모두 고령이었고, 이들은 무력집단인 군대를 통제할 힘이 없었다.
5.3. 크라수스 프루기 숙청 시도와 커지는 의심
이런 가운데 네르바는 본인의 즉위 당시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어겨 의심을 키웠고, 이 사건은 종국적으로 그가 친위 쿠데타를 겪을 때 원로원 동료들에게 사실상 버림받는 이유가 된다.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7]를 네르바가 즉위하자마자 누명을 씌운 사건이 그것이었다. 흔히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라고 부르는 이 인물은, 디오 카시우스 표현을 빌리면 정치적 음모를 꾸밀 머리도 없는 유순한 자였다. 그렇지만 그는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1차 삼두정치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의 직계 후손으로 당시 몇 없는 뼈대 있는 로마 귀족의 수장이었다. 그의 동생은 트라야누스 황제의 누나 울피아 마르키니아의 사위였고, 그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친인척으로 명망 높았다. 그는 도미티아누스에게 찍히지 않아 가문을 유지했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네르바와는 개인적으로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런 그가 네르바가 즉위한 뒤 암살 미수 사건에 몰리게 됐다. 이때 그는 개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네르바가 즉위하면서 누명을 쓰고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이때 네르바는 그를 추방해 죽이려고 여러 차례 법정에 세웠다. 폴 갈리반, 브라이언 존스, 존 D. 그레인저 등이 디오 카시우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등을 통해, 네르바가 이때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를 집요할 만큼 공격했음을 확인할 만큼, 정국 수습 조치와 어긋난 까닭에, 네르바 감금과 유폐 생활의 배경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중 논란이 된 것은 그가 원로원 동료들의 도움과 보호를 위해 보결집정관으로 서기 87년 1월 ~ 4월까지 짧게 재임한 것이 네르바 즉위를 반대해 반역 음모를 꾸몄다는 네르바의 억지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네르바는 이 주장이 통하지 않자,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가 조상들이 대대로 집정관을 지냈고, 그 조상에는 왕, 개선장군 등도 있다는 이유 아래에서 본인에게 많은 반감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어 이 사람의 친형제로 트라야누스 황제 누나의 사위인 서기 88년 보결집정관 리보 크라수스 프루기가 훌륭한 가문, 조상, 형제와 인척이 있는 이유 등으로 노골적으로 견제를 했다. 그런데, 리보 크라수스 프루기는 후일 황제가 될 트라야누스의 조카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장모인 살로니아 마티디아의 남편이었다.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아내가 될 비비아 사비나의 양부였고, 후일 황제에 오를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장모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아버지였다. 즉, 대 파우스티나 황후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친아버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의 장인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콤모두스 황제가 그들 스스로 자신들이 피소, 크라수스의 후손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말할 때 거론된 그 로마 귀족이었다.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와 리보 크라수스 프루기는 모두 기품 있고 잘생긴 로마 귀족이었고, 악행을 벌이지 않아 의심은 커졌다.
서기 96년 11월, 네르바 황제는 루디 플레비이로 알려진 11월 4일 로마 축제때 어리숙하고 조심성 많은 크라수스에게 아내와 함께 경기장에 오라고 초대장을 보낸 뒤, 그들에게 손수 관람석 맨 앞에 앉을 것을 강요했다. 그 이후 네르바는 군중들이 모두 주목한 가운데 날카롭게 갈아 놓은 칼을 이들 부부에게 전달하면서, 이것이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의 증거라고 외쳤다. 이때 칼을 받고 어쩔 줄 몰라하면서 겁에 질린 크라수스 부부는 당황해 했고, 군중들은 네르바가 날카롭게 갈아 놓은 칼을 주면서 이렇게 주장하자 더 크게 의심했다. 로마 군중들이 이때 네르바의 의도와 달리 공개적 방법으로 억지로 칼을 받고 어쩔 줄 몰라하는 크라수스 부부를 믿어 줬다. 하지만 이와 달리 네르바의 지지자, 친구들은 이것이 암살 미수였다며 크라수스 프루기를 당장 황제 암살 미수로 법정에 세워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르바는 이를 이유로 그를 기소해 법정에 세웠다. 하지만 이 재판은 네르바의 의지가 명확했음에도 증거 자체가 없어 그를 타렌툼으로 보내버리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그래서 디오 카시우스는 크라수스가 음모를 꾸미는 지능조차 없다는 식으로 적고, 네르바 황제가 크라수스와 그의 공모자들을 구경꺼리 자리 옆에 앉게 했다고 말하며, 그가 간접적으로 모함을 받았음을 묘하게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이 사건에도 네르바는 기소된 경쟁자 피소 프루기를 본인 즉위 연설, 맹세와 달리 계속 압박했다.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는 사형은 면했지만, 네르바에게 제대로 찍혀 추방지로 돌려가면서 온갖 고생을 다했다. 소 플리니우스처럼 피소 프루기를 의심하는 이들은 늘었고,[8] 이는 네르바에게 큰 고초를 겪은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가 그와 친분 있고 인척 관계였던 트라야누스가 등장하면서 겨우 누명을 벗었다고 하더라도, 트라야누스 치세 말에 다시 공격받고, 하드리아누스 즉위와 동시에 추방되고 살해된 일련의 사건이 된다. 다만, 크라수스가 살해됐다는 식의 내용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를 통해 주장된 것 등이라서, 크라수스가 하드리아누스 손에 죽었는지는 정확치 않다. 왜냐하면 다른 고대 기록과 교차 검증된 기록 등에 따르면,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가 트라야누스 황제의 원정을 동행했고 118년 서거 때에도 함께 했으며, 하드리아누스 황제 재위 1달째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남아달라고 만류했음에도 계속된 의심 때문에 지친 그가 스스로 낙향해 죽었다고 적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학자 그레인저는 네르바가 단지 왕정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될 정도로 명문가로 크라수스, 피소의 직계후손인 정적에게 무리할 정도로 벌인 일이 미래를 생각하면 결코 현명하지 못했다고 평한다. 또 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 직후부터 암살배후로 의심받은 원인에는 네르바가 일찍부터 정적 내지 그냥 사이 나쁜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를 어거지로 재판에 세워 유죄로 몰락시켜 죽이려고 한 점이 네르바가 의심받는 것을 키웠다면서, 이 사건이 친위 쿠데타의 또 다른 이유였을 것이라고 평한다. 즉, 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 이후 군대에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고 군대에서 네르바를 사실상 가택연금시킨 원인에서도 종종 거론될 만큼, 네르바에게는 뼈 아픈 실책이 됐다. 네르바가 용의주도적인 악인도 아니고, 정치적 음모에서 늘 거리를 뒀던 명문가 수장의 정치적, 사회적 명줄을 사실상 끊어 버리면서, 군부를 이끈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의 신흥 귀족들에게 경각심을 준 것은 덤이었다.
5.4. 민심 수습 시도와 흔들리는 군대의 충성
당연한 이야기인데, 96년 11월 4일에 크라수스 프루기와 그 아내를 공모자로 몰면서 벌인 일 때문에 네르바는 도미티아누스 암살 배후로 프라이토리아니, 군부, 대중의 의심을 더 키웠다. 사람들은 네르바, 원로원 내 네르바 지지자들의 주장을 더욱 믿지 못했다. 크라수스가 11월 4일의 일로 티렌툼으로 억지로 추방된 일은 민심 수습의 필요성을 증대시켰다.이런 사건 속에서, 자연스럽게 네르바를 바라보는 대중, 군부의 시선은 이중적이고 더욱 차가웠다. 이에 네르바는 관례를 이유로 로마인 가정,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과 그 가족, 각지의 로마군 병사에게 시혜를 베풀었다. 시민들에게는 1인당 75데나리우스(은화)의 콩기아리움[9]을 주고,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에게는 1인당 5,000데나리우스의 충성 보너스를 즉시 지불 형식으로 주었다. 이어서 네르바는 중위 소득 이하의 로마인과 그 가족의 세금 부담을 경감하는 일련의 조치를 발표해 즉시 실행했다. 여기에는 무산자에게 최대 6,000만 세스테르티우스 가격의 땅을 할당한 조치도 있었다. 이 외에도 네르바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오가는 5% 상속세의 면제, 본국 이탈리아 농민들을 위한 무상 대출, 로마와 이탈리아 주민 자녀들의 교육과 복지를 위한 기금 마련, 본국 이탈리아 내 자치단체 및 시의회에게 5% 이자금 지불 등을 실행했다.[10]
그렇지만 네르바의 이런 관용책과 빵과 서커스는 선제 도미티아누스가 마련한 막대한 흑자의 국고에서 그만큼 부담할 금액이 많아짐을 뜻했다. 더군다나, 네르바는 앞뒤 따지지 않고 국고 자금의 남용을 폐지한다며, 잘못된 재정 운용책을 펼쳐 혼란을 유발시켰다.
결국 네르바 정부는 오래지 않아, 선대 황제들 중 가장 많은 금액을 단기간에 쓰게 되었고, 이는 제국 경제와 국고 관리 측면에 부담을 주었다. 어느 정도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그가 쓴 금액이 과거 칼리굴라의 즉위 이후 8개월 동안 운용한 금액보다 많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말은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의 유증금을 흑자 내에서 공공지출[11]하고, 빵과 서커스를 통한 제정 지지 확보 및 홍보 비용으로 나간 거금과 비교해, 네르바의 조치 역시 단기간에 엄청난 거금이 빠져나갔음을 뜻했다. 설령 그가 이 금액보다 적게 썼다고 해도, 네르바와 원로원은 도미티아누스 암살 이후 정국을 수습한다며 칼리굴라가 소문상 쓴 돈보다 많은 금액을 일시불로 주었고, 장기적으로는 훨씬 많은 돈이 네르바가 붕어한 뒤에도 계속 빠져 나간 셈이 되었다. 과거 칼리굴라가 유증금 내의 흑자를 빨리 썼다고 욕을 먹은 것을 생각하면, 원로원이 등을 돌리는 순간 그 책임은,과거 칼리굴라가 그랬듯이 황제인 네르바가 뒤집어 쓰고, 욕을 먹게 된다는 것을 뜻했다.
이렇게 되니, 네르바는 원로원의 도움 속에서도 개인적으로는 지출을 대폭 줄여야 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특별 경제 위원회를 구성해 다른 원로원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해야만 했다. 네르바와 함께 한 특별 위원들은 황제의 이름으로 황궁과 정부의 지출을 줄이겠다며 종교제, 황제가 맡은 빵과 서커스 축제, 전차경주 대회, 경마 대회를 폐지했고, 황제 소유의 선박, 부동산, 가구, 보석류를 모조리 경매를 통해서 팔게 했다. 다행히 도미티아누스의 치세 때 반역죄로 빼앗은 금은보화와 부동산이 큰 수익을 안겨줘서, 재정 부담 위기는 넘길 수 있었다. 그렇지만 네르바의 인기 영합 정책과 그 후유증은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 집행 중이었던 공공건축물의 개보수, 도로 확장과 수리, 수도교 관리 및 확장 공사 사업 자금 외엔 새 황제와 원로원을 위한 쇼케이스를 열 기회를 박탈했다. 이 때문에 원로원은 욕을 먹지 않고, 네르바만 비난받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더 심각한 것은 네르바와 원로원이 안면몰수하듯이, 건들지 말아야 될 것에 손을 댄다고 도미티아누스 지지자들에게 단단히 찍힌 현실이었다. 기록말살형을 당했다고 한들, 여전히 군대와 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도미티아누스의 흔적까지 네르바의 공로로 내세운 행동이 되었으니,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미티아누스가 건설한 포룸은 네르바 포룸이 되었고, 새로운 수도교, 곡물창고, 도로까지 모두 네르바가 한 것이 되었다. 물론 이런 조치는 기록말살형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면, 후임 황제와 원로원 입장에선 당연한 행동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도미티아누스는 프라이토리아니와 군대 및 대중에게 독재자로 평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공정하고 절제된 미덕을 가진 황제로 호평을 받아 그 흔적을 모두 지우는 것은 불만을 초래할 위험성이 컸다.
5.5. 강제적인 양자 지명과 붕어
군대는 불만을 품고 있었고, 지지 기반이 없는 늙은 황제는 여동생의 손자들이 여럿 있다고 한들 그들을 후계자로 내세울 명분이 없었다. 제위 계승자도 없었고, 황제의 모든 사재 역시 강압적으로 군대에게 압류된 상태였다. 네르바는 고립된 채 원로원의 방패막이 같은 처지가 되었다. 고령의 황제는 온순하고, 원로원에게 굴복된 인상을 남겨, 이를 지켜본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은 원로원에게 휘둘린 네르바와 원로원을 손바닥 위에 놓고 가지고 논 도미티아누스를 비교했다.이런 여론이 감지되는 가운데, 네르바는 서둘러 근위대장 인사 조치를 단행하여 병사와 대중들로부터 원한을 사고 있었던 티투스 페트로니우스 세쿤두스를 해임하고, 전임자 중 병사들에게서 신망을 얻고 있었던 카스페리우스 아일리아누스를 복직시켰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오히려 독이 되었다. 아일리아누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그가 내세운 절대 가치인 법 아래에서의 공평함을 찬양한 사람이었다. 그는 부하들처럼 시해된 도미티아누스가 기록말살형을 당한 것이 부당하다고 느꼈고, 오히려 그를 신격화시켜야 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아일리아누스는 "네르바와 원로원이 도미티아누스 암살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치며,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끌고 수도 로마를 포위했다.
아일리아누스와 프라이토리아니가 내부 쿠데타를 일으켜 폭동을 일으키자, 이를 제어할 세력은 없었다. 원로원 대다수는 제 살 길을 마련하겠다는 이유로 방관했다. 군부와 연이 있어 중재 역할을 해줄 이들은 이미 피소 프루기 사건 등을 보면서 네르바가 자업자득이라는 식으로 궁중 쿠데타 세력을 용인했다. 결국 네르바는 고립된 상황이 됐고, 아일리아누스에게 모든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답을 한 후, 유폐된 처지가 되었다. 황제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고, 원로원은 네르바가 무리하게 피소 프루기 등을 공격한 일을 간접적으로 언급하면서 네르바 역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뒷짐을 졌다. 그 사이 보결집정관에는 군부, 프라이토리아니의 입장에 사실상 손을 들어준 원로원 인사들이 오르면서 네르바의 선택지를 없앴다.
네르바의 남은 2~3개월은 결국 군부의 뜻에 따라 좌지우지되었다. 황제가 사실상 유폐되고, 모든 면회가 통제된 상황에서 황제의 이름으로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한 혐의를 받은 자들이 체포되어 살해당했다. 이 과정에서 네르바는 군대의 지지를 받을 수 있고, 자신에게 등을 돌린 원로원 내의 뜻인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의 인척이기도 한 트라야누스를 반강제적으로 후계자에 지명했다. 허나 프라이토리아니의 명령은 도미티아누스 명예회복 등의 명분 아래 네르바의 친구들을 압박하는 모양새로 흘러갔다. 실권은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지방에 있던 트라야누스 손으로 갔다.
이런 상황속에서 네르바가 제위에 오른 지 채 2년이 지나기도 전인 서기 98년 1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네르바는 청중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주제로 연설하던 중, 고령의 나이와 최근 겪은 스트레스로 고생한 와중에 겪은 후유증 탓에 뇌졸중 증세를 호소하며 쓰러졌다. 그는 거주 중이었던 살루스트 정원 내 베스파시아누스 별장으로 호송되었다. 며칠 뒤, 네르바는 별장 안에서 유폐된 채, 친족인 조카손자들과 격리된 채 열병으로 고생하다가 붕어했다. 그 후 화장된 유해는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장되었다. 네르바 황제를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투스 영묘의 묘실이 가득 차서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는 아일리우스 영묘를 새로 건설해 황제 일가의 무덤으로 삼았다.[12]
6. 평가
재위 기간이 짧았던 탓에 네르바가 이룬 업적은 적다. 포로 로마노에 포룸이 완공되었을 때 당시 황제였던 네르바의 이름이 붙어 '네르바 포룸'이 되었지만, 이는 엄연히 말하면 도미티아누스가 착공을 지시했던 건축물이었다.[13] 애초에 오현제에 들어간 것 자체가 원로원과 타키투스 등 친 원로원 성향의 역사가들의 미화 때문이었고, 이때문인지 나무위키에는 오현제 중 가장 늦게 등재되었다.네르바는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 이외에 한 일이 없다는 비아냥을 받기도 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꼭 그렇게 볼 수 없다. 네르바가 트라야누스를 지명했던 결단은 내전 직전까지 몰린 제국을 구해냈다.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그가 취한 관용책과 선제 도미티아누스 시대 동안 발생한 희생자들의 명예회복 조치는 파탄으로 치닫고 있는 정국을 안정시켰다. 이런 공로와 함께, 네르바는 반은 타의였지만, 어쨌든 간에 양자 계승의 원칙을 확립했다.
다른 왕조들과는 달리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내전 없이 성립되었고, 원로원과의 관계가 대단히 좋은 편이었는데[14] 이는 네르바의 공이 컸다. 물론, 네르바로서는 반(半) 강제로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를 지명한 상태였고, 그의 양자 지명은 후사가 없는 로마 귀족들의 관습상 늘상 있는 조치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네르바가 제위에 오른 뒤, 보여준 관용적인 대처와 유연함 속의 결단력은 종국적으로 황제와 원로원의 공존을 전제로 한 프린키파투스(원수정) 체제의 안정 속에서 팍스 로마나가 꽃을 피운 힘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친 원로원 성향의 역사가였던 타키투스는 네르바의 치세를 일컬어 황제의 권력과 시민의 자유가 양립할 수 있었던 행복한 시기라고 호평했다. 여기에서의 시민이란 곧 원로원이었다.[15]
하지만 현대의 역사가들은 네르바의 공이 조금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찬사를 보내지는 않는다. 되레 트라야누스의 후계자 지명 자체가 군부가 주동하고, 네르바는 도장만 찍어준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근위대가 네르바를 유폐하고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한 자들을 처형했을 때 이미 네르바는 실권을 잃었을 거라는 것이다. 또 그가 원로원 내에서 무리하게 피소 프루기 사건을 일으켜 군부가 반격한 것 등도 네르바의 공이 아닌 실책으로 벌어진 일로 평한다.
이를 증명하듯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말기 ~ 세베루스 왕조 시대까지 활동한 원로원 의원이며 역사가인 디오 카시우스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네르바의 외종손을 비롯한 남자 혈육들이 여럿 있었다고 말했다. 물론, 디오 카시우스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정통성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네르바가 국가를 위해 사심을 빼고, 이탈리아인이 아닌 외국 출신의 로마인을 오로지 그 능력을 믿고, 선택했다며 담담하게 기록해 놓았다.
7. 여담
- 전해져 내려오는 사실에 의하면 유배를 당한 사도 요한을 그가 풀어주었다고한다.
- 로마 황제 중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마지막으로 묻힌 황제로, 해당 영묘의 매장자들 중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와는 혈연 관계도, 인척 관계도 없는 유일한 사람이다.
- 기록말살형을 당한 도미티아누스의 조각상에서 머리를 교체해 만든 조각상들이 많아, 고령의 노인임에도 신체는 30대 후반 ~ 40대 초반의 강건한 모습으로 만들어진 모습으로 묘사된다.
- 원로원 의원이자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의 전체 이름 중 코케이아누스가 네르바 황제의 성씨와 관련이 깊다. 그 이유는 네르바가 디오 카시우스의 조부를 후원 또는 추천한 것 때문이다.
-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창건자이지만, 이름만 빌려줬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후 이 왕조 황제들과 원로원에게 대우가 박했다. 어느 정도였는지, 트라야누스 황제가 식민도시 이름에 돌아가신 친부모를 넣고 승인을 받을 때, 원로원은 곧바로 승인하고 당연하다고 여겼다. 또 트라야누스 황제가 115년 본인의 선친 얼굴을 아우레우스 금화 뒤에 넣으면서, 아예 본인 아버지에게 디부스(Divus)를 앞에 붙이고, 황제의 아버지 트라야누스라고 강조했을 때에도 황제의 효심을 높이 사면서 찬사를 했을 정도. 괜히 근대 이후부터 트라야누스의 즉위는 질서 있는 계승이라기보다는 성공적인 쿠데타라는 평이 우스개소리가 아닌 정식 평가로 있을 정도다. 다만, 네르바를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콤모두스 모두 부정하지 않았다. 네르바를 부정한다는 것은 곧 왕조의 실질적인 창건자 트라야누스 정통성에 흠집을 내는 일이고, 원로원과의 관계에서도 썩 좋은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1] 네르바 황제와 이름이 같으며, 네르바 황제까지 4대의 이름이 모두 똑같다.[2] 네로 황제 사후 내전기 동안 제위를 차지한 비텔리우스 황제의 아버지[3] 베스파시아누스는 69년에 집권했다. 다시 말해 베스파시아누스의 중요한 측근으로, 반정공신에 속했음을 의미한다.[4] 황제와 함께 집정관직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었다. 형식상으로 집정관은 로마의 최고 관직이었고, 황제와 동격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5] 이는 하드리아누스의 치세를 제외한 오현제 시대 내내 이어졌다. 하드리아누스는 집권 과정에서 몇몇 반대자들을 숙청했고, 말년에는 매형과 외종손에게 죄를 덮어 씌워 모두 자살하라고 강요했다.[6] 여기에는 네르바가 이 해에 친아들처럼 아꼈던 외조카 오토 코케이아누스를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의심 속에 억울하게 잃으면서 얻은 상실감과 그로 인한 다짐도 짙게 깔렸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7] 대 파우스티나의 어머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할머니이며,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장모이자 소 파우스티나의 외할머니인,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숙부이다.[8] 소 플리니우스는 노골적으로 크라수스가 비열하게 이 사건 책임을 피했다면서, 그를 상종하지 못할 사람이라는 식으로 기록했다.[9] 올리브유, 포도씨유, 포도주를 담는 표준 그릇 1개를 기준으로 한다. 로마 공화정 시대를 기준으로 했을 때, 원로원 의원 중 고위 선출직에 오른 사람들이 준 선물 및 기부금의 표준량이었는데, 1그릇당 3.48리터였다.[10] 이 조치는 훗날 트라야누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 이름만 바꿔서 계속 집행되었다가, 마르코만니 전쟁이 장기화되자 점차 축소되면서 폐지되었다.[11] 공공건축물 개보수, 아우구스투스 시대 건축물 및 SOC 개보수 계획 지출액[12] 트라야누스는 아예 생전에 자신의 이름이 부여된 포룸에 자신을 위한 신전과 함께 묘까지 미리 지었다.[13] 그에게 기록말살형이 내려졌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서민들의 항의로 도미티아누스 경기장(현재의 나보나 광장)의 이름은 그대로 남게 되었다.[14] 네르바의 제위는 원로원에 의해 정당성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기의 원로원은 다른 때에 비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다.[15] 역사서를 비롯한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이 원로원 의원 출신으로 대표되는 상류층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나쁜 황제라고 알려진 황제들은 원로원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