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의 자주포에 대한 내용은 곡산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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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북도의 군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align=center><table width=320><table bordercolor=#ffffff> 곡산군 谷山郡 Koksan County | }}} | |||
군 소재지 | 곡산읍 | ||||
지역 | 해서 | ||||
면적 | ㎢ | ||||
행정구역 | 1읍 20리 | ||||
시간대 | UTC+9 | ||||
인구 | 120,693명 | ||||
인구밀도 | |||||
시당위원장 | |||||
인민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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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해도 내륙 산악지대에 위치한 고장. 백두대간과 언진산맥, 멸악산맥이 지나가는 험악한 산간 오지이다. 아울러 예성강과 대동강의 지류 남강의 분수령이 되는 해발 1,277미터의 대각산이 있는 곳으로 이른바 '산중삼읍' 수안·신계·곡산중에서는 유일하게 대동강의 지류로 유입하는 하천이 있는 지역이다.척준경, 신덕왕후의 고향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곡산군의 토성(土姓)으로 곡산 노씨·곡산 강씨·곡산 한씨·곡산 연씨 등이 기록되어 있다.
2. 지리
2.1. 북부? 중부?
해서정맥(海西正脈)의 경계. |
곡산을 북부 지방으로 보는 경우는 이렇다. 하천 중심의 산경도로 황해도를 남북으로 구분할 경우, 대개 해서정맥을 기준으로 북쪽은 대동강 수계에 속하여 북부 지방, 반면 남쪽은 예성강 및 임진강 수계에 속하여 중부 지방으로 구분한다. 곡산의 경우, 군청소재지가 위치한 군 북부의 곡산천 유역이 대동강 지류 남강으로 흘러 들어가기 때문에, 따라서 해서정맥 북쪽에 위치하는 도시로 간주된다.[2]
곡산을 한반도 중부 지방으로 보는 경우는 이렇다. 산 중심의 산맥도로 황해도를 남북으로 구분할 경우, 대개 멸악산맥을 기준으로 구분하는데, 곡산은 산맥 바깥에 위치한다.
3. 역사
삼국시대 초기 고구려가 차지한 후 이곳에 십곡성현(十谷城縣)을 설치했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칠지도의 제작 과정에 언급되는 곡나철산(谷那鐵山)이 곡산군 일대의 철광산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 있으나, 백제의 욕내군(欲乃郡)이 위치했던 전라남도 곡성군으로 비정하는 학설이 더 유력하다. 일본서기 기록에서 곡나가 백제의 영토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3], 백제의 유민인 곡나진수(谷那晋首)의 이름에도 해당 지명이 들어가기 때문이다.신라가 이후 차지한 뒤 신라 경덕왕 때인 757년 전국 지명 한화정책을 시행하며 진단현(鎭湍縣)이 되었다. 일단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상으로는 신라 9주 5소경 중 한주에 속했는데, 신라 후기에 한주와 구분되는 특수 행정구역 패강진을 신라 서북면에 설치했다는 설을 긍정한다면 이곳도 위치상 패강진 관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762년에 태수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어 현에서 진단군으로 승격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에는 곡주(谷州)로 불렸다.
광복 당시 12면으로 이루어졌다. 지금의 곡산군은 곡산면·청계면·운중면·도화면·서촌면(일부), 신계군 촌면(일부)·동촌면(일부) 일대에 해당한다. 나머지 지역은 1952년에 황해북도 신평군(新坪郡)과 평안남도 회창군(檜倉郡)으로 분리되었는데, 신평군에 속하는 지역은 곡산군 상도면·하도면·이령면·화촌면·멱미면 일대이며 회창군에 속하는 지역은 봉명면이다. 세 지역 다 경지면적이 매우 좁아서 거의 밭농사에 의존하며, 광업이 주요 산업이다. 철도는 없는 대신 평양원산간 고속도로가 지나간다.
북한 치하에서는 황해북도의 별다른 특징 없는 군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곳에 곡산비행장이 존재한다.
4.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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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당시 12면. 면적 1,855㎢로, 황해도에서 가장 넓은 군이었다.
- 곡산면(谷山面)
- 관할 리 : 능동(陵洞), 남천(南川), 부평(富坪), 송항(松項), 연하(蓮荷), 장(長), 장림(長林), 적성(赤城)
- 면사무소와 군청이 능동리에 있었다. 면적 27.82㎢로 도내에서 가장 넓은 곡산군의 면적에 비해서는 오히려 좁은 편.
- 도화면(桃花面)
- 관할 리 : 평원(平原), 갈천(葛天), 무릉(武陵), 산양(山陽), 월계(月溪), 현암(玄巖)
- 동촌면(東村面)
- 관할 리 : 한달(閑達), 귀락(貴洛), 오륜(五倫), 이상(梨上), 이하(梨下)
- 경승지로 이상리의 고달산(高達山, 866m)이 있다. 고달산을 경계로 수계가 면 서쪽의 예성강 수계와 면 동쪽의 임진강 수계로 나뉘는데 임진강 수계 쪽은 강원도 판교군으로 편입되었다.
- 멱미면(覓美面)
- 관할 리 : 문암(文巖), 두무(杜霧), 마하(摩訶), 상단(上端), 생왕(生旺), 송현(松峴), 오류(五柳), 장양(長陽), 하단(下端)
- 면소재지인 문암리는 통칭 '신평(新坪)'이라고도 불리는데 북한 행정구역상 신평군 소재지이다.
- 문암리에는 기암괴석으로 이름난 자하담(紫霞潭)이라는 경승지가 있다.
- 봉명면(鳳鳴面)
- 관할 리 : 신언(新彦), 동천(桐川), 조양(朝陽), 택인(擇仁)
- 면 남부 동천리를 제외한 면 전 지역이 평안남도 회창군에 편입되었다.
- 상도면(上圖面)
- 관할 리 : 웅담(熊潭), 대동(大同), 방동(坊洞), 장암(將巖), 지경(地境), 희업(希業)
- 서촌면(西村面)
- 관할 리 : 도리포(桃李浦), 금성(錦城), 조인(助仁), 화천(貨泉)
- 운중면(雲中面)
- 관할 리 : 초평(草坪), 동포(洞浦), 문원(文原), 완정(完井), 우밀(右密), 유촌(柳村), 임계(林溪)
- 임계리에 신덕왕후의 집터가 있다.
- 이령면(伊寧面)
- 관할 리 : 추전(楸田), 거리소(巨利所), 난전(蘭田), 도음(陶陰)
- 일제강점기 때 개발된 중석 광산인 백년광산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곡산군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면이었다(1944년 당시 21,566명). 백년광산은 1958년에 만년광산으로 개명되었다.
- 청계면(淸溪面)
- 관할 리 : 문양(文陽), 고로(古老), 성곡(城谷), 청송(靑松)
- 하도면(下圖面)
- 관할 리 : 명탄(鳴灘), 미산(眉山), 하남(河南), 횡천(橫川)
- 화촌면(花村面)
- 관할 리 : 광천(廣川), 도리(桃李), 무고(無故), 봉산(蓬山), 운암(雲巖), 장평(長坪), 청금(靑衿), 청룡(靑龍)
- 면 소재지인 광천리를 비롯한 남강 계곡 일대는 1987년 남강발전소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다.
[1] 시의 전문은 “1000번을 돌아도 역로는 서울로 돌아가고 1만 번 굽이쳐도 시냇물은 대동강으로 들어가누나” (萬折溪流入大同。金處禮詩:“千回驛路歸京國,云云。”)[2] 사실 곡산군 북부를 관통하는 곡산천도 본래는 예성강의 상류였으나 신생대 제4기에 신계곡산용암대지가 형성되면서 물길이 막혀 대신 대동강의 지류인 남강의 상류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예성강의 규모는 줄어들어 군 남부의 지석천이 대신 예성강의 상류가 되었다.[3] "《백제기》에 따르면, 아화왕(阿花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귀국이) 우리의 침미다례 및 현남(峴南), 지침(支侵), 곡나(谷那), 동한(東韓)의 땅을 빼앗았다." — 《일본서기》 오진 천황 8년(397년 추정) 3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