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의 총학생회에 대한 내용은 고려대학교/총학생회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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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대학교는 전통적으로 학생운동이 매우 활발하다. 이미 일제강점기 보성전문학교 시절부터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의 위력이 대단했으며, 특히 1960~1980년대의 고대생들은 이승만독재와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에 거의 극단적으로 저항하여, 말 그대로 고대생들은 모두 데모꾼이나 다름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특히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한 것이나, 미제국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전통이 강했던 것은, 고려대의 별칭이 '민족고대'로 통하는 원동력이다.2. 일제강점기의 학생운동
3.1 운동은 보성전문학교의 교주, 교수,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것이었다. 일단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부터가 보성전문의 수송동 교사 바로 옆에 있는 보성사였고,[1] 여기서 인쇄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대규모 독립시위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보성전문 학생대표 강기덕이었다. 민족대표 33인의 리더였던 손병희는 보전 교주였고, 보성고보 교장 최린도 33인의 대표에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보성전문 교장이었던 윤익선도 3.1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며, 보전 교수 신익희, 보전 졸업생 주익, 윤기섭, 성준용, 재학생 한창환, 오일철, 손재기, 이병헌, 이태운, 방정환, 박용준, 김상진, 이양식, 남위 등도 구속되었다. 이들 가운데 재학생 이태운, 방정환, 김상진 등은 결국 퇴학당하였다.그 후에도 보성전문은 전통적으로 데모기질 충만한 민족독립운동의 투사들을 무수히 길러낸 학교로 명성이 높았다. 보성전문 학생인 서정관(법과 1929년 졸업) 등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조직하여 학생운동의 맥을 이어나갔고, 서정관을 중심으로 한 여러 보전 학생들과 당시 보전 교수를 지낸 박인호 등은 1926년 6.10 만세 운동에 대거 참여하기도 하였다.[2]
특히 1930년대 이후에는 보전에서 사회주의적 성향의 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한국의 체게바라로 불리던 이현상 남부군 총사령관과 이호제 강동학원 원장 등이 대표적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보성전문학교 문서 참조.
여담으로 고려대학교의 전통이자 악습으로 유명한 사발식이 여기서 탄생하였다고 전해진다.
3. 자유당 정권기의 학생운동
관련글, "4.18 고려대 시위, 4.19 혁명의 시작"
1960년 당시 고려대 운동권은 엄청난 강성 운동권으로 '먼저 나가고 먼저 깨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즉 다른 학교보다 먼저 일어나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4.18 의거이다.[3]
애초에 고려대학교 총학생회는 이승만 정권이 '학생층의 사상통일과 단체적 훈련을 강화하여 애국심 함양시키고 국가에 헌신봉사함을 목적'으로 하는 학도 호국단을 모체로 하고 있다. 그러나 4·19 혁명의 하루 전인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 후, 4월 30일 학도 호국단 탈퇴를 선언하였다. 이후 같은 해 11월 12일 학생들만의 자치기구인 총학생회가 정식 발족하게 되었다.
3.1. 4.18 의거
3.15 부정선거 후 자유당의 독재를 규탄하던 고려대 학생들은 4·19 혁명의 하루 전에 이승만 정권 반대 시위를 선도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러나 시위를 모두 마치고 해산하여 귀가하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정치깡패들에게 습격당했고, 그로 인해 다수의 부상자가 나왔다. 이 사건은 수많은 시민들을 격분케 하였으며, 바로 다음날의 4.19 혁명에 더욱 큰 불을 붙였다.
지금도 고려대 총학생회에서는 이 날을 기념하여 4.19 혁명 성지를 방문하는 "4·18 구국대장정" 행사를 주최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4.18 학생 시위 문서 참조.
4. 박정희 정권기의 학생운동
박정희 정권이 수립된 이후 1964년에는 다수의 학생들이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하여 6.3 항쟁을 일으켰다. 당시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자, 6월 3일 정오를 기해 대표적으로 이명박 당시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 등의 주도하에 고려대, 연세대, 서울대생 외에 서울 18개 대학 1만 5천여 명 등 총 3만 명가량이 거리로 몰려나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해 계엄령까지 선포되었으며, 이명박 등 주도자들은 체포되었다.관련글, "고려대 6.2 데모"
1969년 6월 12일에는 고대생들이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에 참여하였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영구집권을 위해 3선 개헌을 강행하려 하자, 다수의 고대생들이 신민당과 연대하여 저지투쟁에 돌입한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주모자들을 처벌하면서 강력 대응하였고, 결국 1969년 9월 14일, 국회 제3별관에서 공화당과 정우회 무소속 의원들이 몰래 모여 개헌안을 변칙 통과시킴으로써 3선 개헌 반대 투쟁은 패배로 귀결되었다.
1972년 이후 박정희가 유신독재를 강력하게 밀어붙였을 때에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여기에 다각적으로 저항하였다. 특히 고려대학교 내 이념서클인 한맥회는 회보에, 광주대단지 사건 등 정부의 실정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내용을 실어 정권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아침 고려대학교 정문에 박정희 정권의 핵심인물들인 이후락, 윤필용, 박종규의 실명을 거론하며 이들이 부정부패의 원흉이라는 내용의 대자보가 게시되었다. 이 사실을 안 수경사령부[4]는 무장군인들을 고려대학교 내에 투입하여 한맥회의 간부 5명을 무단 연행하여 구타와 고문으로 이들을 심문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고려대학교 한맥회 간부들은 석방되었지만 군인의 학원난입에 대한 시위가 빈발하였고, 1주일 후에는 위수령이 발령되어 학원에 군인이 진주하였다. 그 결과로 한맥회는 공식적으로는 해체되었고, 한맥회 간부들은 지하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들은 ‘민우’라는 유인물 잡지를 발행하면서 유신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글들을 게재하였다. 물론 이를 좌시할 리 없는 유신정권은 1973년 5월 24일에 당시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이던 김낙중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학원간첩단 사건을 조작하여 이들을 탄압하였다. 이른바 ‘민우지 사건’이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수백명의 언론인이 ‘언론자유’를 외치다 거리로 쫓겨나던 1975년 봄에도 고대생들은 유신반대 투쟁을 뜨겁게 전개하였다. 당시 서울 시내 많은 대학교에서 유신반대 투쟁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첫 시위는 고려대생들이 시작하였다. 권순성·박구진·설훈·김관회·문학진·최규엽·신태식·신계륜 등이 모의를 했고, 3월31일 1,500명이 대강당에 모여 비상학생총회(회장 도천수)를 구성해 반독재구국선언문과 결의문을 채택했다. 4월6~7일에는 무려 2,000여 명의 학생들이 야간까지 시위를 했다.
그러자 1975년 4월 8일 박정희 정권은 고려대만을 대상으로 하는 희한한 ‘긴급조치’를 발동했다. 그 유명한 긴급조치 7호였다. 이때 안암동 교정에 진입한 계엄군은 고대생들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집단폭력을 가했다. 전국에서 고려대학교 한 대학만을 대상으로 휴교령을 내렸고 군인들이 학교를 통제하게 하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이 확정된 8명을 확정판결 1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 집행해버렸다. 학생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조치였다.
관련 글, "봄만 되면 긴급조치 7호 악몽 시달려"
이 시기 고려대학교 학생운동가들은 야학에 참여를 많이 하였다. 그때까지의 학생운동이 시위만을 강조함으로써 운동역량의 상실만 초래하였으며 독재정권의 기반에는 결정적 타격을 가하지 못했다는 자각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학생운동만으로는 한국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으므로 노동현장에서 노동대중을 의식화, 조직화하는 작업을 수행하자는 쪽으로 많이 기울어졌다.
5. 전두환 정권기의 학생운동
5.1. 10.26에서 5.18까지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저격, 살해함으로써 박정희 독재정권 18년이 종식되고, 사회 전반에서 민주회복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비롯한 군부 소장파에 의하여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고, 유신잔당의 재등장이 노골화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 4월 15일 전두환은 중앙정보부를 장악하였으며, 4월 18일 국무총리 신현확은 정부 주도로 개헌을 하겠다고 발표하고, 1981년 하반기에나 정권교체가 가능하다는 정치일정을 발표하였다. 그러자 고대생들은 "곧 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에 의해 대한민국 전역에 계엄령이 떨어진 그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은 신계륜이었다. 이때 신계륜은 1980년 5월 13일부터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고려대생들을 이끌고 계엄령 철폐시위에 나섰다. 5월 14일에는 전국 21개 대학에서 15만명의 학생들이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고, 5월 15일에는 서울역 광장에 무려 15만명의 학생들과 시민이 운집했다.
이때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나섰다. 심재철은 더이상 시위가 과열되면 군부에게 무력개입의 빌미를 준다고 주장하면서 전국 학생회장단을 설득하여 시위를 해산하고 학교로 돌아가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신계륜은 이에 반대하였다.[5] 결국 5월 16일 고려대학교 학생회관에서 서울시내 23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고, 심재철의 주장대로 가두시위를 일단 중지하고 정상수업을 받기로 결의하였다. 이로 인해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 이루어졌다. 당일 오후 다수의 고대생들은 5.16을 규탄하는 가두행진을 고대에서 수유리까지 진행하며 철수에 대한 항의의 뜻을 알렸다.
그러나 그 다음날 0시를 기해 비상계엄선포지역은 전국 일원으로 확대되었으며, 전두환은 광주를 군홧발로 짓밟았다. 그리고 군부는 전국의 대학에 진주하여 점령하고 학원을 군의 병영으로 삼으며 전국적인 휴교령을 내렸다.[6] 그로 인해 신계륜을 비롯한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의 지도자들은 모두 검거되었고 경찰서에서 고문을 받았으며, 감옥이나 군대로 끌려갔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5.2. 1981~1984년의 학생운동
전두환이 정권을 잡고, 많은 학생들이 구속, 강제징집, 수배되면서 고대의 학생운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2년 5월 14일 고려대학교 학생회관 식당에서 유인물 '반파쇼 민주학우 시국선언' '반파쇼 민주학원 수호 선언' '반파쇼 민주학우 투쟁산언' 등이 배포되었고, 시위가 일어났다. 그 선언문에는 대외 종속형 경제구조, 파쇼적 문화정책, 한미관계, 노동3권의 유명무실함, 농민들의 어려움, 학원탄압 등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1983년 5월 18일에는 고대생 300여 명이 반정부 구호가 적힌 옷을 입고 투석전을 벌이며 신설동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5월 28일에는 고대생 100여 명이 동대문 지하철역 부근에서 유인물을 뿌리며 시위를 하였고, 일부는 청량리까지 진출하였다. 이들은 민정당사와 경찰서의 유리창을 깨는 등 치열하게 시위를 벌여 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그 후 1983년 12월 23일, 전두환 정부는 갑자기 '국민화합조치'라는 명분으로, '학원자율화' 조치를 필두로 한 일련의 유화조치를 단행하였다. 재적생을 복교시키고, 학원에서 사복경찰들을 철수시켰으며, 해직교수도 복직시키는 등, 그동안의 폭력진압, 구속, 연행 등 일방적인 억압에서 정책의 대전환을 시도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1984년부터는 제5공화국 수립 이후 최초의 유화국면이 조성되었다. 군사정권은 국회의원 총선 등 개량적인 전술을 구사하였고, 그에 대립하는 강력한 야당의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대중의 정치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 역동적으로 분출되었다.
1984년 4월 13일, 고대에서는 '학원 자율화 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5월 4일에는 강제징집 사망 학우인 한희철, 이윤성, 김두황, 정성희 등 6명을 위한 합동위령제가 거행되었다. 위령제가 끝난 후 고대생들은 강제징집 및 지도휴학의 폐지, 인권탄압의 중지, 언론탄압의 중지 등을 요구하며 철야농성을 벌였으며, 농성을 마치고 내외신 기자회견을 가졌다.
1984년 8월 29일에는 고대에서 한일관계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토론회가 끝난 후 고대생 3,000여 명이 가두시위에 나섰으며, 민정당 중앙당사와 일본공보관에 돌을 던지는 용감무쌍함을 보여주었다.
1984년 9월 20일에는 전국에서 최초로 고려대학교에서 총학생회가 부활하였다.[7] 이때 고려대 총학생회장을 맡은 사람은 영문과 81학번 김영춘이었다.
1984년 11월 14일에는 김영춘을 비롯한 다수의 고대생들이 연대생, 성대생과 합세하여 총 264명의 인원으로 민정당사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총학생회의 인정, 문교부 장관의 문책, 노동자 권익 옹호 등 14개항의 요구를 하였으나, 곧 검거되었고, 19명이 구속되었으며, 186명이 즉심에 넘겨졌다.
5.3. 삼민투와 허인회
1985년 4월 17일에는 고려대학교 학생회관 앞 민주광장에서 전국 23개 대학에서 참석한 학생대표 등 2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전학련'의 결성식이 거행되었다.[8] 그리고 고려대학교 부학생회장 허인회가 전학련 산하 상설투쟁기구인 삼민투[9]의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85년 5월 23일부터 26일 사이에는 허인회를 비롯한 다수의 고대생들이 서울대, 연대, 성대, 서강대 등과 연대하여 총 73명의 인원으로 미국문화원을 점거하고 농성하였다. 이들은 미국에 대해 광주학살 지원에 대한 책임을 지고 미국행정부는 공개 사과할 것,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지원을 즉각 중단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10]1985년 9월 5일에는 전학련 민중민주화 선언대회가 고려대학교에서 개최되었다. 그 다음날인 9월 6일에는 제2회 범국민 시국대토론회가 개최되었으며, 여기에 시민과 학생 2,0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이때 신민당의 박찬종, 조순형 의원과 재야인사 30여명이 고대에 들어가려다가 경찰 제지로 좌절되었고, 고대 교문 앞에서 두 시간 가량 농성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날 고려대 총학생회장이자 삼민투 위원장이었던 허인회는 구속되었다.[11]
1985년 11월 15일에는 고대생 6명이 노동부장관 비서실을 점거하고 "노동운동 탄압하는 노동부는 자폭하라" "민중민주생존 압살하는 예속정권 타도하자"는 등의 구호를 외치다가 체포되었다. 그리고 11월 18일에는 다수의 고대생을 포함한 전학련 소속 대학생 186명이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본관을 기습, 점거하고 '군사독재정권 퇴진' '노동운동 탄압중지' 등 20개 요구조항을 주장하다가 전원 연행 구속되었다.
5.4. NL의 부상과 직선제 개헌 투쟁
1986년 상반기부터는 전국 대학가에 NL 이념이 확산되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의 당시 상황은 미국의 식민지였다. 정치적으로는 독립되어 있지만, 그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사실상 미국은 군사적, 경제적 지배를 관철시키는 식민지 종주국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학생운동의 당면과제는 민주화투쟁에 앞서서 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고대생들은 이러한 흐름을 선도하면서 선명한 반미투쟁의 깃발을 높이 쳐들었고, 이러한 경향은 여러 대학으로 확산되었다.한편 당시의 여당인 민정당은 내각제 개헌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학생운동의 주류였던 자민투는 이에 맞서 직선제 개헌투쟁을 벌였다. 반면 민민투는 이에 대해서 소부르주아 정세관에 입각한 기회주의, 개량주의 노선이라고 비판하였다.[12] 자민투 계열은 1986년 10월 조직에 커다란 타격을 받았지만, 1987년에 다시 조직을 재건하였다. 이 당시 전국적으로 자민투를 주도하고 대중노선을 구현하려 애쓴 사람이 바로 1987년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고대 국문과 84학번 이인영이었다. 이인영은 1987년 5월 연세대학교에서 '서대협'을 결성하였으며, 당시 CA 그룹 등에게서 '개량주의적 본질의 현상화'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직선제 쟁취야말로 '민중승리의 전과물'이 될 것이라 강조하였다.
그 후 서대협은 '호헌 철폐' '직선제 쟁취' 등을 외치며 1987년 6월 항쟁을 주도하였다.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소식이 알려지자, 이미 5월 말부터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뭉쳐서 종로로 나와 시위를 벌였는데, 그렇게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의 숫자가 예전보다 훨씬 더 늘어나 눈길을 끌었다. 게다가 종로에서 단체로 드러누워 집회를 하던 고대생들을 경찰이 체포하려 하자 여태까지 수수방관하던 시민들이 경찰에 항의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1987년 6월 5일 고대 정문앞. 최루탄 가스가 자욱하게 뿌려져 있다. 당시 비폭력 시위를 천명했기 때문에 최루탄을 쏴도 저항하지 않고 그냥 주저앉은 것이다.)
1987년 6월 10일은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 날이었다. 이 날에 맞춰서 재야 인사들이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규탄 집회를 전국 22개 도시에서 열었을 때에는 서울에서만도 수십만 명의 대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했다. 이때 전국적으로는 150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 이후에도 거의 매일마다 고대생들은 가두로 나가 시위를 벌였으며, 이 뜨거운 6월 한 달 동안 대한민국의 정치와 경제는 거의 마비되다시피 하였다. 그 결과로 6월 29일 노태우가 이른바 '항복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직선제는 쟁취되었고, 학생들과 시민들이 감격적인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그 후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의 장례 절차를 위해 1987년 7월 5일 연세대학교에서 전국의 학생회장들이 모였을 때, 서대협 의장인 이인영의 주도로 '통일된 학생운동단체'를 만들자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1987년 8월 19일, 충남대학교에서 전국 95개 대학 4,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기 전대협 발족식이 거행되었다. 제1기 전대협 의장으로는 이인영이 선출되었다.
5.5.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
국민투표에 의하여 직선제 개헌안이 통과되고 대통령선거가 구체적 정치일정으로 눈앞에 닥쳐오자 고대생들은 선거에 대한 전술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NL계열은 '김대중 비판적 지지론'과 '후보단일화론'으로 분열하였다. 고대생들 대부분은 그 중에서도 '김대중 비판적 지지론'에 기울어져 있었다.실제로 1987년 10월 27일 고려대학교에서 시국토론회가 열렸을 때, 고대생들은 김영삼과 김대중에 대해 편파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김영삼에 대해서는 “우~ 우~” 하는 야유와 함께 “(대선 후보를) 사퇴하라! 사퇴! 사퇴! 사퇴!” 이런 외침을 터뜨렸던 반면, 김대중이 연설대에 올랐을 때에는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준 것이었다.
이러한 고대생들 앞에서 김대중은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어떤 결단을 내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라고 외쳤다. 결국 다음날, 김대중은 자신을 따르는 정치인과 함께 통일민주당을 전격 탈당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게 애타게 고대생들이 김대중을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1987년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노태우의 당선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6.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대통령 직접선거에 의해 노태우 정권이 수립된 뒤에도 고려대학교의 학생운동은 계속 활발하였다. 이인영의 뒤를 이어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이 된 오영식은 전대협 2기 의장의 자리에 올랐으며,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맞이하여 야당 선거운동을 지원하고 부정선거를 감시하여 여소야대 국회가 만들어지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후 8 ·15 남북학생회담을 시도한 데 대한 여론의 반응은 대체로 썰렁했고, 정국에 큰 영향을 미치지도 못했다.그 여파로, 1988년말에 있었던 총학생회장 선거에서는 여태까지 고대 학생운동권 내에서 비주류의 위치에 머물러 있던 PD계열에서 총학생회장이 배출되었다. 그때까지의 고대 총학이 학내 민주화나 학생들의 권익 등 문제는 도외시하고, 지나치게 친북 성향으로 기울어진 채 정치투쟁에만 매몰되었던 데 따른 반작용이었다.
그 흐름에 따라 1989년의 고대 총학은 여태까지 정권 쪽에만 겨누었던 칼날을 이제 학교 쪽으로 돌리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폭로된 부정입학 사건을 빌미로 하여 총장 선거에 개입하여 이준범 총장의 당선을 무효화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고, '민주적인 총장선출'과 '등록금 동결' 등을 요구하면서 전교적인 수업거부를 밀어붙였다.
그 와중에 세종캠퍼스 학생들 1,200여명이 상경하여 고대 본관 앞 김성수 동상에 검은천을 씌우고 밧줄을 매달아 철거를 시도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의 친일이력을 근거로, 더 이상 이런 사람을 스승으로서 기릴 수는 없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이에 고려대학교 측은 휴교를 선언하였는데, 학생들은 이러한 고대 총학의 행태를 보면서 총학에 대한 지지를 슬슬 철회해버리고 말았다. 지나치게 무차별적이고 과격한 투쟁행태에 넌더리를 낸 탓이었다.[13] 결국 총학과 학교 간의 싸움은 일반 학생들이 외면하는 가운데 총학의 비참한 패배로 귀결되고 말았다.
그 외에도 1989년 여름 임수경 방북 사건으로 인해 조성된 공안정국 속에서 친북적 학생운동에 대한 학생들의 거부감 역시 강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1989년 10월에 터진 설인종 고문치사 사건, 즉 연세대학교에서 고대와 연대의 운동권 학생들이 프락치로 의심되던 어느 민간인을 고문,살해한 사건은, 운동권 학생들의 도덕성에 대한 신뢰를 바닥까지 추락시키고 말았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91년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수만 명의 고대생들이 시위에 가담하는 등 고대의 학생운동이 다시 살아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일어난 정원식 총리 밀가루 투척 사건으로 운동권의 입지는 더욱 급격히 좁아졌다. 그 후로 고려대학교의 학생운동은 점점 주체사상 종교운동 아니면 마르크스-레닌주의 하드코어 공산혁명운동 비슷한 것으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관련글, "1991년의 4.18"
1995년에는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정태흥(법학과 91학번)이 제3기 한총련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정태흥은 1995년 5월 29일과 30일 전국 100여개 대학의 학생들을 규합하여 5.18 특별법 제정과 특별검사 제도 도입을 촉구하는 동맹휴업을 결의하고, 격렬한 거리시위를 벌였다. 어쩌면 이때까지가 고려대학교의 조직적 학생운동이 정국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다음 해인 1996년 범민족대회 및 범청학련 통일대축전 남측행사 도중 연세대 사태가 일어났다.
7. 1990년대 중반~2000년대
2000년 10월에는 고대 총학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고려대학교 방문을 차단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행정학과 함성득 교수의 초청으로 김영삼이 고려대학교를 방문하자, 고대 총학은 고대 정문 앞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방문에 항의하면서 그 입장을 가로 막아버린 것이었다.이 때문에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가용 안에서 우유 깡통에다가 소변을 보아가며 장시간 기다렸으나, 결국은 고대 정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수모를 당하였다. 물론 정국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많은 사람들은 이때 고대생들의 행동을 보면서 '아주 시원하다'는 반응을 보여주었다.[14]
그 후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역시 김영삼과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당시 이건희는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기 위해 고대를 방문하였는데, 다수의 고대생들은 이건희의 편법상속, 노동자 탄압 등을 비판하며 학위수여 저지 투쟁을 벌였다. 이때 외부인들은 이 사건의 주체를 총학생회으로 인식하였지만, 고대 내부에서는 고려대학교 문과대 학생회와 '다함께'라는 노동운동 단체에 속한 학생들이 그 주체로 인식되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의 고려대 총학생회는 비운동권 학생회였다. 하지만 사회 참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운동권에 대한 일반적 시각과 달리, 고려대 총학생회는 미국산 쇠고기 협상 반대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총학생회장과 부총학생회장이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였다.
8. 2010년대
8.1. "오늘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 대자보
2010년 3월 10일,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 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살겠다며 '자발적 퇴교'를 선언한 고려대학교 학생이 화제가 되었다.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학생은 전지 3장 분량의 대자보에서 끊임없는 경쟁과 불안감을 조성하는 대학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대자보에는 경쟁과 서열화를 조장하는 대학과 기업, 국가를 향한 20대의 울분이 실렸다. 이날 대자보 앞에는 오후 내내 수십 명의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당신의 용기를 응원합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는 글귀가 쓰인 종이와 장미꽃이 나붙기도 했다.
8.2. 2010년 총학생회와 학생사찰
2010년도 총학생회 선거(2009년에 치러진)에는 4개의 선거본부가 나왔다. 그런데 하필 공교롭게도 각각 상징색이 보라색(함께, 멀리), 연두색(Movin' Movin'), 노란색(소통시대), 빨간색(희망충전)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2010년 총학 선거는 텔레토비 대전이라 일컬어졌다. 실제로 노란색에 해당하는 선거본부의 선거활동 당시 나나가 출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귀여운 인상과는 달리 선거는 각종 흑색선전과 상호비방으로 점철되었다.그 후 2011 총학생회 선거를 앞두고 43대 소통시대 총학생회가 자신들이 운영하던 강의평가 사이트인 클루를 통해 학생들의 신상정보를 털었다는게 밝혀졌다. 당연히 학생들은 분노 폭발. 당시 고파스에는 쪽지를 보낼 때, 받는 사람의 아이디가 노출되었는데, 고파스에 총학 비방글이 올라올 시 클루의 관리자 아이디를 통해서 고파스와 클루의 ID가 같은 사람일 경우에 정보를 확인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관리자 아이디를 집행부 모두가 알고있는 것은 아니었고, 모르는 집행부는 고파스 아이디를 구글링하여 얻어낸 정보를 자기네들의 집행부 클럽에 올렸다고 하였다.
해당 회의가 열리던 중선관위 회의실은 직접 지켜보려는 학우들로 가득 들어찼으며 중선관위가 붙여야 할 사퇴/해임/전학대회 공고를 붙일 공간이 부족할 정도로 규탄 대자보가 학내 게시판을 뒤덮었다. 총학생회 집행부였던 신임 공대 학생회장이 구글링을 통한 신상털기에 참여했음을 자백하면서 중선관위원 직, 이후에 학생회장 직을 사퇴했다. 이 와중에 집행부 중 누군가가 해당 신상털기 글이 올라갔던 집행부 클럽을 폐쇄시키는 등 증거인멸 시도를 했고, 다시 지탄을 받았다. 피해자 측은 민형사 고소 준비하였다고 하였으나 집행부 사과의 수준으로 마무리되었다.
참고로 제43대 소통시대 학생회장은 민주당 전병헌 정책위의장의 딸 전지원 씨였다.[15] 아버지는 민간인 사찰을 까고 딸은 학생 사찰을 했던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여기에서 전 집행부원들 중 일부는 구글링만을 하였다고 이야기하였으며, 구글링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으로 재학생 커뮤니티인 고파스 내에서 상당한 파장이 일었다. 하지만 수많은 대자보에도 불구하고 이게 사실 오프라인에서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는 않아서인지, 고려대 학생사회 역사상 초유의 탄핵투표가 실시되었지만 투표율 미달로 부결되었다.
그런데 위 상황에 전년도에 소통시대와 경쟁했던 비운동권 선거본부, '함께 멀리'의 여론조작이 개입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함께 멀리' 선거본부의 후보였던 로망과 그와 함께한 선거본부원들의 네이트온 대화로 그가 공개가 되었으며 그곳에는 고파스 운영자이자 고대공감대 창립멤버인 고펑과 그의 후신격인 소통시대를 '죽이기' 위한 각종 여론몰이 상황을 공모했으며 www.zzirashi.com이라는 본격 황색저널리즘 사이트까지 개설하였다. 그들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며 항변했으나 이미 고려대학교 학생 커뮤니티 고파스에서는 매장 분위기.(간간히 실드쳐주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심지어 엔하위키 내 고려대학교항목이나 고파스항목도 함께 멀리 선본원들이 편집하고 있던 것으로 드러나 더욱 충격적이었다. 이른바 '함멀게이트'는 아직 해명이 올라오지 않고 있으며 현 선관위원장 역시 법대 학생회 출신인 함멀의 뒤를 이은 자유전공학부 학생회장이라는 점에서 아직까지 중선관위의 공식적인 입장이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에 의심을 주고 있다. 결국 중선관위는 회의를 통해 현임 중선관위원장이 본 사태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참고글
8.3. 2011년 총학생회와 한대련 사태
결국 '소통시대'와 '함께멀리'가 뻘짓하고 있는 틈에 치고 나온 '후마니타스'가 2011 총학생회를 차지하였다. 그런데 취임한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총학의 사고가 난무하였다. 연평도 사태 직후의 한미 합동훈련 때는 청와대에서 기습 1인 반전 시위[16]를 벌였고, 그나마 한대련 의장직을 맡겠다는 발언은 임시 전학대회에 의해 부결되었다.정작 1순위였던 등록금 동결 공약은 지키지 않고 학교와 인상률 4.5%으로 합의한 줄 알았으나, 다행히 등록금조정위원회를 통해 다시 해결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1월 19일, 오히려 학교에서 내놓은 등록금 인상안에서는 인상률이 5.1%로 올라갔다.[17] 이에 총학생회와 고파스는 폭발할 기세.
2011년 3월에는 한대련이 주최하는 '새내기콘서트'가 고려대학교 중앙광장에서 열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는 중앙운영위원회에서 분명히 부결된 사항이었다. 그러나 후마니타스 총학생회에서는 일사부재의의 원칙을 씹어먹고 분명히 부결된 사안을 세 번이나 재논의해서 결국 콘서트를 강행하게 하였다. 물론 일부 단과대 학생회장들은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였다. 참고로 고려대학교 중앙광장은 내부에 지하공간이 넓고 지반이 약한 것으로 조사되어 '새내기 콘서트'와 같은 많은 인원이 모이는 행사, 그것도 심지어 고려대학교가 아닌 다른 단체에서 여는 것은 어불성설임에 틀림없다.
8.4. 2012년 총학생회와 한대련 탈퇴
위의 결과로, 2012년 총학생회는 비운동권의 압도적인 승리로 돌아갔다. 개표결과 기존에 운동권이 강세이던 단대를 포함해 대부분의 단대에서 비운동권을 지지했다. 비운동권 선거본부가 둘, 운동권 선거본부가 둘이었는데 두 비권 선거본부가 각각 득표수 1,2위를 얻었다. 당선된 선거본부는 '고대공감대'로, 회장은 이전에 부총학생회장을 지낸 적이 있고 고파스를 만든 고펑이었다.고펑의 출마와 당선도 이슈였지만, 운동권 선거본부 중 출교생 중 한 명이 출마해 이슈였다. 엄밀히 말하면 탈퇴한 것은 아니고 탈퇴를 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원래 1학기에 탈퇴 투표 후 결과를 지켜볼 예정이었지만, 1학기 중운위에서 '지금 투표는 너무 이르다'는 의견에 따라 2학기로 투표가 미뤄졌다.
물론 정책투표가 발의되어 89%의 찬성표가 나오기는 했지만, 이는 정책투표이기 때문에 이로서 탈퇴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2012년 10월 6일, 전체학생대표자회의에 발의가 되어 오랜 시간의 회의 끝에 2012년 10월 7일 새벽 2시 총원 56명, 찬성 42표 반대 4표 기권 10표로 최종적으로 한대련을 탈퇴하게 되었다.
8.5. 2013년 비운동권 총학생회
2012년 말에 치러진 2013년 총학 선거에서는 비운동권 선거본부 한곳, 운동권 선거본부 두곳이 출마하였다. 운동권 측에서는 단일화 움직임이 있었으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따로따로 출마, 결국 운동권 지지측의 표가 분산되어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약 40%의 지지를 얻으며 당선되었다. 예상보다 비운동권 지지율이 높지 않았기에 단일화가 이루어졌으면 충분히 박빙승부가 이뤄질수 있었던 상황이었어서 운동권을 지지했던 학우들은 아쉬워했다는 후문이다. [18]시간이 지날수록 운동권과 비 운동권의 선거 공약에 별다른 차이가 없어지고 있다. 이건 어찌보면 당연한 건데 교내 학우들이 좋아하는 공약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 때 양 당의 후보들이 내놓는 공약이 비슷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한편 고대공감대에서 이어지고 있는 비운동권 선본이 '진보적 비운동권' 계통의 성향을 띄고 있다는 점도 비운동권 선본의 우세 추세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8.6.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2013년 12월 경영대학 '08학번 주현우 학생이 코레일 고속철도 자회사 설립 논란과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태, 밀양 송전탑등의 현안에 대해 '안녕들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정경대 후문(안암역에서 인문계 캠퍼스로 들어가는 문)에 게시하였다.
"철도 민영화에 반대한다며 수 천 명이 직위해제되고 불법 대선개입, 밀양 주민이 음독자살하는 하 수상한 시절에 어찌 모두들 안녕하신지 모르겠다.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대자보는 "수 차례 불거진 부정선거 의혹,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이란 초유의 사태에도 대통령의 탄핵 소추권을 가진 국회의 국회의원이 사퇴하라 말 한마디 한 죄로 제명이 운운되는 지금이 과연 21세기가 맞는지 의문"이라 비판했다. 그리고 "자본과 경영진의 ‘먹튀’에 저항한 죄로 해고노동자에게 수십억의 벌금과 징역이 떨어지고, 안정된 일자리를 달라하니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비정규직을 내놓은 하수상한 시절"을 개탄하기도 했다.
대자보를 붙인 바로 그날에 주현우 학생은 동료 학생들한테서 따뜻한 음료 70개를 받는 등 큰 호응을 얻었으며, 대자보 옆에는 40개의 화답성 게시글이 붙기도 했다. 12월 15일에 이르러서는 담벼락 대부분이 대자보로 뒤덮일 지경이 되었고, 며칠만에 전국의 수많은 대학교, 중고등학교에서 “안녕하지 못하다”라는 내용의 응답이 들려왔다. 그리고 이는 SNS를 통해 확산하는 등 큰 정치, 사회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기존의 운동권 대자보가 투쟁을 강조하는 선동구, 명령조로 점철되었던 것과 달리, 2013년 12월에 게시된 위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는 가벼운 물음으로 보는 이들의 공감을 자극하는 데 성공하였다. 물론 대자보의 내용은 진부한 운동권적 주장으로 채워져 있고, 논리도 엉성한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자보가 당시 세상을 울렸던 것은 그 당시 공감능력 부족한 공주님스러운 지도자 밑에서 다 함께 고단한 삶으로 지쳐가던 국민들을 향해 우리 모두 서로를 걱정하고 챙겨줄 줄 알아야 한다는 공동체의식을 일깨웠다는 점에 있었다.
게다가 대자보 작성자가 당당히 자기 이름을 밝혔으며, 인간미 넘치게 자필로 작성하였고, 고전적 운율미를 갖춘 것 역시 대자보의 간지를 더욱 살려주었다. 2010년대 후반 이후 인터넷상의 조리돌림이 두려워 다 같이 쫄보처럼 익명 뒤에 숨고 초성체로 ㅋㅋ거리거나 난무하는 반말, 욕설로 현대적 병신미를 구현하거나 시선강간, 여성혐오 등 자기네 집단만 사용하는 단어로 내용을 꽉 채우는 대자보에 익숙한 세대에게는 "이게 바로 대자보였구나!"하는 느낌을 주는 대자보, 마지막 불꽃과도 같았던 대자보였다 할 수 있다.
8.7. 고대공감대 부정선거 파동
2013년말, 2014년 총학생회장 선거를 앞두고 NL계열 운동권이 다시 총학 선거에 도전했다. 민생 공약에 대해서 비운동권 고대공감대 선본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공약했지만 2011년에 총학생회장을 지낸 조모씨가 선본에 참여한게 논란이 되면서 비운동권 고대공감대 선본에게 1,000표 정도의 차이로 패배하였다. 그러나 비운동권 선본 '고대공감대'가 선거 과정에서 부정선거를 저지른 것이 뒤늦게 드러나 논란이 되었다.논란의 출발은 2014년 11월 비운동권 고대공감대 선본에 참여한 신 모 학생이 2014년 11월 2일 고대공감대의 2012년 제46대 총학 선거와 2013년 제47대 총학 선거에 대해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면서부터였다. 총학생회장이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맡는 동안 선거에 개입했고, 2013년 선거에서 리플렛을 초과 배포했다는 내용, 불법 투표 독려를 2013년 선거에서 했다는 내용 등이었다. 그 근거로 2013년 11월에 고대공감대 47대 선본과 당시 총학생회장, 고펑(45대 회장) 등이 참여한 카카오톡 대화방 스크린샷들을 제시했다.
2012년에 총학생회장을 지낸 고파스의 운영자 고펑이 리플렛 초과 배포에 동조하고 고펑이 중앙선거관리위원장[19]을 맡은 2012년에 치러진 선거의 리플렛을 디자인한 사실까지 드러나 파장이 일었다. 고펑과 총학생회장은 11월 2일 초과 인쇄를 한 사실을 시인하며 정해진 부수만 배포했으며, 고펑은 중선관위장을 맡기 전에 리플렛을 디자인했다고 해명했다.
11월 4일엔 제보자 신 모씨가 이 사건을 2014년 총학생회장단 선거 정후보가 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공과대 학생회장과 의예과 전 학생회장의 증언이 나와 파장이 일었다.[20] 신씨는 5일 새벽, 이들에게 자료를 제공하지 않은 채 부정 선거에 대해 언급했던 것이 협상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점을 사과했다.
이후 47대 고대공감대 선본의 부정선거에 대한 징계를 의결하고 46대 선거 리플렛 논란에 대해서 디자인 소스를 준 것은 상관이 없지만, 리플렛 전반에 대해 논의했는지 여부가 확인되지 않아 논의에서 제외했다. 고펑은 47대 선거당시 학생회원으로서 부정선거를 방조 조장한 것에 대해 징계를 받았다. 징계 대상은 박 모 제 45대 안암총학 회장, 황 모 제 46대 안암총학 회장, 정 모 제 46대 중앙선거관리위원, 신 모 제 46대 안암총학 정책국장(제보자)이었다. 11월 6일에 중앙운영위원회에서 제보자 신 아무개를 제외한 위에서 언급한 전원에 대해 제명 징계를 하기로 했다.
황 모 회장과 정 모 선관위원은 당시 선거관리 사무를 맡고 있어 중립을 지켜야 했으나 대화방에 참여해 선거를 논의했기 때문에 징계를 받았다. 그리고 고펑은 전직 학생회장인데도 이를 방조했다는 점에서 제명 결정을 받았다. 제보자 신 모씨는 선거운동본부장으로 지내는 동안, 중립 의무를 지켜야 하는 선거관리위원과 선거관리위원장이 선본 대화방에 참여한 것을 방조했기 때문에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박탈되는 징계를 받았다.
11월 9일 오후 1시에 열리는 전체학생대표자회의에선 징계안에 대한 의결과 탄핵안의 학생총회나 총투표 회부 여부에 대한 표결을 하였다.
표결을 앞둔 11월 9일 새벽, 47대 총학생회장과 부총학생회장은 자신들이 책임을 지고 이미 7일 금요일에 고려대를 자퇴했다는 소식을 알려 파장이 일었다. 오후 1시 열린 전학대회에서는 아직 수리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며 총학생회장과 부총학생회장에 대한 탄핵안을 처리했다. 신 모 선거운동본부장에게는 피선거권 선거권 무기 정지, 고펑 등에게는 제명, 총학생회장과 부총학생회장에 대해선 피선거권, 선거권 정지의 징계를 의결했다.
이에 따라 학생중앙운영위원회가 기존 47대 총학생회 선거를 무효화시키고, 2014년 11월에 치러질 선거를 보궐선거나 후임 48대 선거가 아닌 '47대 선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학생 사회에 대한 불신이 높아진 가운데 2015년 총학 선거에는 비운동권 선거본부 한 곳, 운동권 선거본부 한 곳[21][22][23]이 출마하였다.
비운동권 선거본부는 정후보와 부후보가 고대공감대와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많이 받았고, 운동권 선거본부는 정후보의 과거 행적 및 부후보의 학생 활동 경력 부족이 주로 지적되었다. 결국 비운동권 선거본부가 근소한 차이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총학생회장단 탄핵으로 인하여 총학생회가 담당해야 할 차기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조직 및 인수인계 등에 차질이 생겼고, 이로 인해 선거 진행 과정에서 문제가 다소 발생하기도 하였다. 새로 들어선 비운동권 학생회 '지음'은 고대공감대가 보여준 '진보적 비운동권' 성향을 계속 보이고 있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인해 2014년의 제47대 총학생회는 흑역사가 되어 사실상 결번 처리되었고, 2015년에 새로운 제47대 총학생회가 들어서게 되었다.[24]
8.8. 2016년 총학생회와 미래대학, 박근혜 정권 규탄 학생총회
2016년 학교당국은 이화여자대학교의 미래라이프대학과 유사한, 사실상 기여입학제와 대학기업화를 위한 단과대학인 미래대학을 설립하려고 한다. 모든 단과대에서 약간의 정원을 줄여 설립하려고 했던 미래대학에 대한 반발이 커지자, 학교는 종전의 모든 단과대 인원 소폭 감소를 철회하고 미래대학을 '크림슨 칼리지'로 이름만 바꾸고 이미 있던 자유전공학부를 폐지하고 그 정원을 크림슨 칼리지로 보내는 설립안을 강행하려 했다.그런데 하필이면 이 시기가 박근혜정권 퇴진을 위한 학생총회 성사를 준비하던 시기여서 학교당국 규탄도 안건에 포함시키게 되었고, 정권퇴진 운동의 어마어마한 동력에 뜬금없이 총장도 얻어맞는 꼴이 되었다. 한편, 배우던 과가 없어지게 생긴 자유전공학부 학생들이 총장실에 항의방문을 하기 위해 본관 앞에서 교직원들과 대립하게 되는데, 교직원이 한 학생을 건물 밖으로 패대기치는 사태가 일어났다. 곧 분노한 학생들은 본관에서 우발적으로 점거투쟁을 시작하였다.
본관점거 일주일 후, 계획되었던 학생총회가 기적적으로 정족수를 채워 성사됨에 따라 '미래대학 철폐', '박근혜 정권 퇴진', '학사제도의 민주적 운영'의 세 안건이 통과, 의결되었다. 총장은 미래대학 설립의 날치기 통과를 위해 자유전공학부 폐지안을 철회하고 '크림슨 칼리지'(안)을 '크림슨학부'로 바꿈과 동시에 거짓정보까지 흘려가며 교무위원회[25]를 개회하고자 하였지만 학생들은 귀신처럼 회의장소를 찾아내어 회의를 무산시켰다. 결국 12월에 미래대학을 총장 임기내에 다시 검토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나서야 학생들은 점거를 풀었다.
[1] 보성사는 보성전문학교 설립자인 충숙공 이용익이 설립한 인쇄사다.[2] 6.10 만세운동의 주모자인 이천진은 1926년 경성제대 예과에서 제적된 후 보성전문 상과에 입학하여 1931년 졸업했다. 또 다른 주모자인 이현상은 만세운동 당시 중앙고보생이었는데, 그 다음해인 1927년 보성전문 법과에 입학하여 전설적인 사회주의자가 되었다.[3] 이 때의 봉기를 '각 학교 간의 공조를 무시한 지나친 과시욕의 산물'이라고 폄하하는 견해도 있으나, 불의를 견디지 못하고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학생운동의 선봉장으로 나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4] 당시 윤필용 소장이 수경사령관이었다.[5] 이때 신계륜과 함께 회군에 반대한 사람이 바로 서울대 대의원회장 유시민과 복학생 운동권의 리더격이었던 이해찬이었다. 이들 세 명은 나중에 정계에서 재회하였다.[6] 역사에 가정은 물론 없다지만, 만약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회군을 안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결과론이지만, 그때의 철수로 당시의 학생 운동권은 전두환의 쿠데타를 막을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5만명의 학생이 모였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당시 군부는 학생들의 숫자에 질려서 저녁 8시까지 이들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군부가 이 수많은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려 했다면, 수도 한복판에서 킬링필드를 만들자는 것과 다름이 없었고, 이는 이승만이 하다가 쫒겨났던 일이었다. 그런데 심재철의 주장대로 서울역 회군이 이루어짐으로써 당시의 학생 운동권은 뿔뿔이 흩어졌고 군부에 의해 각개격파 당하고 말았다.[7] 그 사흘 전에 서울대에서는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 발생하였다.[8] 당시 전학련 의장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김민석이었으나, 단순히 얼굴마담일 뿐이었다는 얘기가 많다.[9] 삼민투는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이라는 전학련 3대 이념을 실천하는 전학련 상설 전위조직이었다. 전학련이나 총학생회가 학생운동의 대중적인 확산작업을 맡는 데 비해, 삼민투는 선도적인 정치투쟁을 수행하는 구조였다. 학생회를 중심으로 하는 대중조직의 체계로서는 대적타격을 유효적절하게 수행하는 선도적인 정치투쟁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설치된 것이며, 삼민투는 내부적으로 전학련과 총학생회를 오히려 지도하는 위치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10] 이 당시 미국문화원에 들어간 사람은 허인회 외에도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정태근 등이 있다.[11] 이때 허인회는 장기간의 수배생활을 마무리하는 집회를 가지면서 몸에 신나를 붓고 경찰이 고려대학교 안으로 진입할 시 분신할 것을 경고하였으며, 성북경찰서에 미리 연락을 하고 고대 정문 앞에서 자진 연행 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사들은 자기가 먼저 허인회를 체포했다면서 특진과 현상금을 노리고 별의별 생쑈를 다 하였다. 몸싸움 와중에 허인회를 호위했던 고려대학교 체육부장이 현장 사진과 함께 허인회를 체포한 형사라고 보도되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12] 1985년까지는 전위조직으로서 학생회를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 삼민투 하나였던 반면에, 1986년에는 이것이 자민투와 민민투로 2원화되었다. 자민투와 민민투는 서로 이념을 달리하였으며 총학생회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서로 대립하였다.[13] 당시에는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총재조차도 인촌 김성수의 문화민족주의 또한 높이 평가 받아야 된다는 말을 하던 시절이었다. 솔직히 말해 전두환 같은 살인마도 멀쩡히 살아있는 판국에 김성수 가문 같이 나름 민주주의에 호의적이었던 야당 가문을 그렇게까지 시급한 타도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14]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진 지 몇 년 되지 않았던 때라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증오심이 상당했었다. 이러한 현상은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짐에 따라 점차 누그러졌다.[15] 전지원씨는 이후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였는데, 삼성그룹 법무팀에 취직 확정된 상태에서 변호사시험에 낙방하여 망신살이 하늘끝까지 뻗치고 말았다.[16] 개인의 정치적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물론 자유다. 하지만 민족고대 총학생회의 이름을 빌린 것이 큰 문제였다.[17] 이 수치는 2011년 1월 현재 등록금 인상률의 상한선과 동일하다.[18] 물론 통진당 사태 때도 볼 수 있었듯이 NL, PD, IS등의 운동권 세력들은 서로 간의 통합이 잘 안 된다. 대학생들은 기성 정치인들과 다르지 않겠냐는 시각도 있을 수 있지만 운동권 학생들 대부분은 기성 정당과 연결 되어 있는 현실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설득력 없는 시각이다.[19] 관행적으로 임기가 끝난 총학생회장이 맡고 있었다.[20] 신 모씨가 통수 친 원인에 대해 현재까지도 가장 유력한 주장이다. 당시 총학생회에서는 증언을 한 공대 학생회장 서 모씨를 차기 정후보로 내정하였고, 선거운동본부장으로 발벗고 뛴 자신 대신 다른 사람을 내정했다는 것에 분노한 신 모씨는 부정선거를 폭로하겠다며 협박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총학생회장단은 신 모씨에게 고대공감대 이름을 주어 표면적으로만 돕고 뒤로는 서 모씨를 다른 선본으로 출마시켜 밀어줄 계획을 세우고, 이것을 안 신 모씨는 승산이 없다 판단하고 자폭을 시전한 것이라는 주장. 결국 사건 이후 새로 선본을 꾸려 출마한 서 모씨가 고대공감대쪽 지지층을 대거 흡수하여 당선되지만 사실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21] 하지만 공약 등 여러가지 면을 미루어 보아 운동권이라 단정짓기는 애매하다. 고려대 역시 다른 대학교처럼 학생들의 학생회 관심이 점차 떨어지고 있고 이에따라 단독출마의 가능성 역시 높아지고 있다. 이미 비운동권 선본 고대공감대가 3년째 장기집권 중이었고, 2015년에 출마한 비운동권 선본 '지음' 역시 고대공감대와 관련이 있는 '주류'였다. 상대 선본으로서는 세력을 키우기 위해 그나마 선거 및 학생회 경험이 있는 운동권쪽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당장 위에서 비운동권으로 분류된 함께 멀리와 이 선본의 성향이 비슷하다.[22] 현재 고려대 내 운동권은 2011년의 많은 사고와 연이은 낙선, 그리고 학생들의 인식 변화로 사실상 총학생회를 차지할 능력을 잃은 상태이다. 자신을 운동권이라고 칭하는 학생도 드물고, 과거 운동권 학생들은 후배들을 많이 양성하지 못한채 졸업하였다. 이 선본이 받아들인 운동권 세력 역시 예전 운동권의 색깔이 많이 퇴색되고 와해되어 그저 정치관이 진보적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23] 현재 일부 정치관이 보수적인 학생들이 진보적인 학생들을 운동권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운동권, 비운동권은 본디 학생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에 대한 입장으로 나뉘는 것이다. 다만 운동권을 주도하는 단체들의 정치관이 죄다 진보일 뿐이라 운동권=진보 가 된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학생회가 보수단체와 연합해 보수 시위를 해도 운동권인 것이다. 거꾸로 비운동권이 항상 보수적이라는 법도 없다. 그래서 여전히 개인적 정치관은 진보가 다소 우세한 고대 특성상 진보적 비운동권이 가능한 것이다.[24] 참고로 고대신문에서는 두 총학을 제47대(2014년)과 제47대(2015년)으로 구분한다.[25] 부총장, 각 단과대학장 및 대학원장들과 각 부처의 장이 위원으로 참석하고 총장이 위원장으로 있는 회의체로 학칙상 이사회로 넘어가기 전 가장 높은 의결기관이지만, 실상은 자문기구의 역할만 하고 있고 총장이 마음먹는다면 단독으로 안건통과를 강행하는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