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주요 역사적 사건 | |
<colbgcolor=#ccc,#333><colcolor=black,white> 김일성 시대 | 해방 (1945) ·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 (1945) ·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설립 (1946) · 북조선인민위원회 설립 (1947) · 제1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1948)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1948) · 북·남조선로동당 합당 (1949) · 6.25 전쟁 (1950~1953) · 박헌영-리승엽 간첩 사건 (1953~1955) · 8월 종파사건 (1956) ·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 (1958) · 재일교포 북송 (1959~1984) · 조소동맹조약 (1961) · 조중동맹조약 (1961) · 갑산파 숙청 사건 (1967) · 1.21 사태 (1968) ·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1968) ·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8) · 7.4 남북 공동 성명 (1972) · 사회주의헌법 제정 (1972) ·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1976) ·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1983) ·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 · 제13차 평양세계학생축전 (1989) · 남북기본합의서 (1991) · 남북 유엔 동시 가입 (1991) · 북일수교협상 (1991~1992) · 제1차 북핵 위기 (1993~1994) · 서울불바다 발언 사건 (1994) · 김일성 사망 (1994) | |
김정일 시대 | 남북정상회담 무산 (1994) · 고난의 행군 (1994~2000) · 북미 제네바 합의 (1994) ·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1996) · 심화조 사건 (1997~2000) · 제1연평해전 (1999) · 남북정상회담 (2000) · 조미 코뮤니케 (2000) · 제2연평해전 (2002) · 새로운 경제관리개선조치 (2002) · 북일정상회담 (2002~2004) · 6자회담 (2003~2009) · 제1차 핵실험 (2006) · 남북정상회담 (2007) · 제2차 핵실험 (2009) · 화폐개혁 (2009) · 천안함 피격 사건 (2010) · 연평도 포격전 (2010) · 김정일 사망 (2011) | |
김정은 시대 | 제3차 핵실험 (2013) · 장성택 처형 사건 (2013) · 5.30 조치 (2014) · 제4차 핵실험 (2016) · 제5차 핵실험 (2016) · 김정남 피살 사건 (2017) · 제6차 핵실험 (2017) · 김성일 사건 (2017) · 남북정상회담 (평양공동선언) (2018) · 북미정상회담 (2018, 2019) ·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 (2020) · 반체제 정당 조직 적발 사건 (2021) · 코로나 대유행 (2022) · 연평도 해역 포격 사건 (2024) · 지린성 북한 노동자 폭동 사건 (2024) · 반체제 세력 출현 사건 (2024) · 오물 풍선 살포 사건 (2024)ㆍ2024년 북러정상회담 (2024)ㆍ북한 외교관 연쇄 탈북 사건 (2024)ㆍ주러시아 북한 관전무관 폭사 사건 (2024)ㆍ평양 무인기 대북전단 살포 사건 (2024)ㆍ북한의 경의선·동해선 남북 연결도로·철도 폭파 사건 (2024)ㆍ북한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참전 (2024) | |
역사왜곡* | ||
항일무장투쟁 | 타도제국주의동맹 (1926) · 카륜회의 (1930) · 명월구회의 (1931) · 조선인민혁명군 (1932) · 민생단 사건 (1932~1936) · 남호두회의 (1936) · 미혼진회의 (1936) · 동강회의 (1936) · 조국광복회 (1936) | |
6.25 전쟁 | 전쟁 발발 책임 · 승패 인식 | |
백두혈통 우상화 | 김응우 (제너럴 셔먼호 사건) · 김형직 · 강반석 · 김정숙 · 김정일 출생지 왜곡 | |
관련 서적 | 미제와 일제의 조선침략 죄행 · 백두혈통 우상화 교과서 · 세기와 더불어 · 조선력사 | |
* 괄호 안의 연도는 북한의 주장에 근거한 연도이며, 실제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단체 및 사건이거나 실제와는 다른 연도일 수 있음. | ||
상위 둘러보기 틀로 이동하기 |
{{{#!wiki style="margin:-10px" | <tablebordercolor=#E40001><tablebgcolor=#E40001> | 김일성 관련 문서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cccccc,#333333> 일생 | 생애 · 사망 | |
정책 | 군면리 대폐합 · 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 · 남북기본합의서 · 조소동맹조약 · 조중동맹조약 · 조중변계조약 · 천리마 운동 · 청산리 방법· 3대혁명소조운동 · 4대 군사노선 · 7.4 남북 공동 성명 · 1980년대의 경제 정책 · 주체농법 | ||
우상화 사업 | 타도제국주의동맹 · 조선인민혁명군 · 조국광복회 · 보천보 전투 · 주체사상 · 구호나무 · 도서정리사업 · 김일성장군의 노래 · 압록강의 노래 | ||
관련 장소 | 만경대고향집 · 금수산태양궁전 · 대성산혁명렬사릉 · 화진포의 성 | ||
가족 | 가계도 · 증조부 김응우 · 조부 김보현 · 아버지 김형직 · 어머니 강반석 · 본처 한성희 · 이처 김정숙 · 삼처 김성애 · 남동생 김철주 · 남동생 김영주 · 아들 김정일 · 아들 김만일 · 아들 김평일 · 아들 김영일 · 아들 김현 · 딸 김경희 · 딸 김백연 | ||
사건사고 | 훙치허 전투 · 6.25 전쟁(평양시 학살 사건) · 8월 종파사건 · 갑산파 숙청 사건 · 베트남 전쟁 · 1.21 사태 ·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 북한의 대남 수해지원 ·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 ·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 · 임수경 방북 사건 · 프룬제 군사대학 유학파 쿠데타 모의 사건 | ||
저서 | 세기와 더불어 | ||
어록 | 이밥에 고기국 기와집에서 비단옷 | ||
기타 | 조선로동당 · 인민대학습당 · 북조선인민위원회 · 김일성종합대학 · 김일성군사종합대학 · 김일성방송대학 · 김일성광장 · 김일성훈장 · 김일성상 · 김일성화 · 김일성 공원 · 김일성 암살설 · 김일성 가짜설 · 김일성 시계 · 4.15절 · 인간관계 | ||
공산주의 · 주체사상 | |||
북한의 사건·사고 갑산파 숙청 사건 甲山派 肅淸 事件 Kapsan Faction Incident | |
<colbgcolor=#bc002d,#222222><colcolor=white> 다른 이름 | 1967년 반당반혁명종파사건[1] 갑산파 사건 박금철·리효순 사건 |
발생일자 | 1966년 ~ 1970년대 └ 1967년 5월 4일 ~ 1967년 5월 8일[2] |
발생장소 | 평양시 |
당사자 | [[갑산파| 갑산파 (조선로동당 내 두번째 파벌) ]] |
박금철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상무위원 겸 비서국 비서) | |
리효순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상무위원 겸 비서국 비서) | |
원인 | - 박금철 개인 우상화[3] - 계파 완전 청산과 김일성 개인 우상화 완성 - 전통사상 연구에 대한 의견 차이[4] - 만주파에 반대되는 경공업 우선 정책 추구 |
[clearfix]
1. 개요
1966년부터 1970년대까지 이어진 갑산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사건.북한에서는 '1967년 반당반혁명종파사건\'으로 불린다.
2. 배경
1953년에 남로당파 숙청과 1956년에 연안파, 소련파가 숙청된 '8월 종파사건'을 통해서 만주파는 정국에 대한 주도권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갑산파라는 강력한 견제세력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만주파들은 일말의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갑산파는 량강도[5] 갑산군에 근거를 둔 계파로서, 일제강점기에 김일성과 함께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8월 종파사건까지는 김일성과 손을 잡았으나, 1960년대 이후 만주파 외에 북한이 남아 있던 유일한 계파였기 때문에 김일성이 주도하는 만주파에게 있어서 최후의 숙적이었다. 김일성의 유력 후계자이자 그의 장남인 김정일 역시도 눈엣가시로 여겼다.3. 전개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벌어졌고 김일성은 문화대혁명 노선에 동조하지 않아 마오쩌둥에게 수정주의자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자 김일성은 "조선은 소련과도 중국과도 다르다."는 소위 북한만의 독자 노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바로 주체사상의 기초가 시작된 셈이었다.김일성은 이런 관점 하에서 조선로동당의 조직 개편을 단행해 비서국을 신설했고 조직지도비서와 조직비서가 중요 요직으로 부상했는데 이 중요 요직을 자신의 동생인 김영주에게 맡겼고 이는 갑산파의 반발을 불러왔다.
갑산파는 이에 맞서 김일성의 뒤를 이을 인물로 박금철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김도만은 아예 대놓고 박금철 찬양 영화를 만들기까지 했는데 이는 김일성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갑산파는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 소비재 생산과 경공업 투자를 늘릴 것을 요구하면서 김일성의 이른바 "국방·경제 병진노선"에 반발했다.
결국 김일성은 갑산파 제거를 결심하고 로동당 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 박금철과 리효순 등을 '반동적인 봉건주의 사상을 당간부들에게 퍼뜨렸다.'는 죄목으로 숙청하기에 이른다. 소위 갑산파가 봉건주의, 수정주의, 부르주아 사상을 퍼뜨렸다는 것이다. 결국 박금철, 리효순, 고혁, 박용국, 허석선, 김도만 등의 갑산파는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 사라졌고 갑산파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자들은 모조리 썰려나가서 지방의 중견간부직 3분의 2가 공석이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숙청이 단행되었다.
4. 결과
조선로동당에는 김일성을 추종하는 '만주파'밖에 남지 않았으며, '김일성 개인 정권 세습 투쟁의 종지부를 찍은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1972년 12월 27일에 사회주의헌법의 공포와 주체사상을 국가 공식 이념화 하면서, 북한은 어떠한 견제세력도 존재하지 않는, 미증유의 독재 정권이 되어가기 시작한다.5. 여담
중국은 이 사건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다.[1] 북한 내에서 통용되는 명칭이다. 오피니언(자유아시아방송)[2]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가 진행된 기간이다. 이 회의를 통해서 김일성은 갑산파를 완전히 도려냈다. 논문(경희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3] 반대로 보자면, 갑산파는 김일성의 개인 우상화에는 거부감을 보이던 집단이다. 그야말로 '도긴개긴'.[4] 갑산파는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관심을 갖던 계파이다. 그걸 만주파에서는 "반동적인 봉건주의 사상을 퍼뜨린다."라고 비판하며 자신들의 통제 밖에서 사상적 흐름을 조직하려는 시도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으며, 숙청의 구실로 삼았다.[5] 원래는 함경남도였다. 1952년 북한에서 '군면리 대폐합'이 단행되고 량강도가 생겨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