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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산파 숙청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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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산파 숙청 사건
甲山派 肅淸 事件

Kapsan Faction Incident
<colbgcolor=#bc002d,#222222><colcolor=white> 다른 이름 1967년 반당반혁명종파사건[1]
갑산파 사건
박금철·리효순 사건
발생일자 1966년 ~ 1970년대
1967년 5월 4일 ~ 1967년 5월 8일[2]
발생장소 평양시
당사자 [[갑산파|
갑산파 (조선로동당 내 두번째 파벌)
]]
박금철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상무위원 겸 비서국 비서)
리효순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상무위원 겸 비서국 비서)
원인 - 박금철 개인 우상화[3]
- 계파 완전 청산과 김일성 개인 우상화 완성
- 전통사상 연구에 대한 의견 차이[4]
- 만주파에 반대되는 경공업 우선 정책 추구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5. 여담

[clearfix]

1. 개요

1966년부터 1970년대까지 이어진 갑산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사건.

북한에서는 '1967년 반당반혁명종파사건\'으로 불린다.

2. 배경

1953년남로당파 숙청과 1956년연안파, 소련파가 숙청된 '8월 종파사건'을 통해서 만주파는 정국에 대한 주도권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갑산파라는 강력한 견제세력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만주파들은 일말의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갑산파는 량강도[5] 갑산군에 근거를 둔 계파로서, 일제강점기에 김일성과 함께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8월 종파사건까지는 김일성과 손을 잡았으나, 1960년대 이후 만주파 외에 북한이 남아 있던 유일한 계파였기 때문에 김일성이 주도하는 만주파에게 있어서 최후의 숙적이었다. 김일성의 유력 후계자이자 그의 장남인 김정일 역시도 눈엣가시로 여겼다.

3. 전개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벌어졌고 김일성은 문화대혁명 노선에 동조하지 않아 마오쩌둥에게 수정주의자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자 김일성은 "조선은 소련과도 중국과도 다르다."는 소위 북한만의 독자 노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바로 주체사상의 기초가 시작된 셈이었다.

김일성은 이런 관점 하에서 조선로동당의 조직 개편을 단행해 비서국을 신설했고 조직지도비서와 조직비서가 중요 요직으로 부상했는데 이 중요 요직을 자신의 동생인 김영주에게 맡겼고 이는 갑산파의 반발을 불러왔다.

갑산파는 이에 맞서 김일성의 뒤를 이을 인물로 박금철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김도만은 아예 대놓고 박금철 찬양 영화를 만들기까지 했는데 이는 김일성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갑산파는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 소비재 생산과 경공업 투자를 늘릴 것을 요구하면서 김일성의 이른바 "국방·경제 병진노선"에 반발했다.

결국 김일성은 갑산파 제거를 결심하고 로동당 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 박금철과 리효순 등을 '반동적인 봉건주의 사상을 당간부들에게 퍼뜨렸다.'는 죄목으로 숙청하기에 이른다. 소위 갑산파가 봉건주의, 수정주의, 부르주아 사상을 퍼뜨렸다는 것이다. 결국 박금철, 리효순, 고혁, 박용국, 허석선, 김도만 등의 갑산파는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 사라졌고 갑산파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자들은 모조리 썰려나가서 지방의 중견간부직 3분의 2가 공석이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숙청이 단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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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과

조선로동당에는 김일성을 추종하는 '만주파'밖에 남지 않았으며, '김일성 개인 정권 세습 투쟁의 종지부를 찍은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1972년 12월 27일사회주의헌법의 공포와 주체사상을 국가 공식 이념화 하면서, 북한은 어떠한 견제세력도 존재하지 않는, 미증유의 독재 정권이 되어가기 시작한다.

5. 여담

중국은 이 사건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다.


[1] 북한 내에서 통용되는 명칭이다. 오피니언(자유아시아방송)[2]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가 진행된 기간이다. 이 회의를 통해서 김일성갑산파를 완전히 도려냈다. 논문(경희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3] 반대로 보자면, 갑산파는 김일성의 개인 우상화에는 거부감을 보이던 집단이다. 그야말로 '도긴개긴'.[4] 갑산파는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관심을 갖던 계파이다. 그걸 만주파에서는 "반동적인 봉건주의 사상을 퍼뜨린다."라고 비판하며 자신들의 통제 밖에서 사상적 흐름을 조직하려는 시도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으며, 숙청의 구실로 삼았다.[5] 원래는 함경남도였다. 1952년 북한에서 '군면리 대폐합'이 단행되고 량강도가 생겨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