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나당전쟁이 끝난 후 평화를 맞이하자 백제 유민들은 한동안 신라인으로 만족하며 살았을 것으로 보이며 골품제의 모순이란 것도 지역 세력이 성장하지 못한 7세기 ~ 8세기에는 그렇게까지 차별로 다가오는 현상은 아니었다. 그래서 통일신라 전성기 150여 년 동안은 다들 신라인으로서 별다른 무리 없이 적응하고 살았던 걸로 보이는데, 이 기간 동안 백제인 정체성을 내건 반란이나 큰 저항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단 옛 백제 영토에서 일어난 822년 김헌창의 난은 이 대목에서 예사로이 넘길 수 없다. 백제 유민 정체성을 근거로 일어난 반란은 아니었고 주동자 김헌창부터가 무열왕계 강릉 김씨로서 웅천주에 지방관으로 부임했을 때 일으킨 반란이었지만, 옛 백제 영토를 한꺼번에 독립시키겠다는 의도가 생각보다 파급력이 꽤 컸음을 입증한 사건이었고 해당 지역의 반신라 감정이 있음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그런 와중에 통일신라의 전반적인 국력이 안정적으로 성장하면서 지방 세력의 역량 또한 성장하지만 그에 따른 과실은 수도 일대로 여전히 집중되었다. 여기에 지방 세력의 정치 참여 또한 전면 차단되는 현상이 여전하자 골품제로 인한 지방 세력의 불만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고, 이것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던 백제 유민 의식에 점점 불을 붙이게 된다. 신라에서 파견하는 지방관이 고려나 조선의 지방관들과는 달리 흡사 점령지를 관할하는 총독의 입장에서 꽤 긴장된 통치[1]를 행했던 것도 옛백제 지역을 통일신라에 통합하는 데 큰 저해 요소였으며, 화랑들의 산천 탐방이 백제 지역 사회에 후기가 될수록 크게 부담을 주게 되었던 것도 이런 현상에 점차 시너지를 일으킨다. 하필이면 신라의 군사 및 행정 역량이 옛 백제 지역을 꽤 효율적으로 통제해서 지방 세력의 자율성은 상대적으로 고구려 유민만도 못했던 모순도 있었고.[2] 때문에 백제 유민 의식에 기반한 부흥 운동은 결국, 200여 년 후 백제 유민도 아닌 조상 대대로 신라인이었을 개연성이 높은 신라 장수 견훤에 의해 후백제란 형태로 성공하게 된다.
후백제가 망한 후 고려 시대에도 백제 유민 의식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아 무신정권 기의 이연년 형제의 난 때 백제 부흥을 주창하기도 했으나, 그걸 마지막으로 여몽전쟁 이후로는 삼국 유민 의식은 소멸되어 더 이상의 백제부흥운동은 일어나지 않게 된다.
다만 아무래도 한반도에선 유럽과 달리 고려 이래로 천 년 이상 통일국가가 유지되었기에, 한반도에 본디는 기원이 각기 다른 여러 대등한 국가들이 동시에 존재했고 서로 국가정체성을 놓고 경쟁했으며, 여몽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이런 여러 국가정체성이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음을 한국인들 대부분이 실감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심지어 원삼국시대 소국 시절부터 내려오는 전통사회들 또한 국가급 정체성은 아니어도 지역공동체로서 현존한 상황이었고 여기에 현대는 물론 조선시대보다도 훨씬 덜 개발됐던 환경도 그렇고 즉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환경 속에서 당대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때문에 이런 과거에 망한 나라들의 부흥운동을 그저 이름만 빌렸을 뿐이라고 근거 없이 치부해버리는 틀린 견해들이 만연해 있는 상황[3]인데, 그러한 생각들의 대표적인 잘못된 부분 몇 개를 논한다.
2. 백제와 후백제의 관련성
2.1. 시간 간격 237년
백제 멸망후 부흥 운동이 완전히 끝난(663년)뒤에 후백제가 237년 후 정식으로 백제로 부흥(900년)하였기에 그 사이에 유민 의식이 남아있을까 의문스럽다는 주장이 있으나, 유민의식을 계속 이어가는 한 부흥운동에 있어 단순한 시간 간격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망한 나라의 옛 구성원들이 망한 나라에 대해 가지는 국가 정체성이나 귀속감은 망한 시기와 반비례하는 게 사실이지만 사람들에게 있는 관념은 시대적 상황이나 문화 및 종교에 따라 대단히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에 섣불리 속단할 수 없고, 또한 그 '긴 시간이 대체 어느 정도'인지는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맘대로 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당장 한국사에서도 신라부흥운동이라는 강력한 반례가 있고, 태봉-고려의 예도 있다. 이 나라도 고(구)려가 668년도에 망한 뒤 901년에 부흥했으므로 231년 차이가 나지만, 중세 고려와 고대 고(구)려의 계승성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밖에 범위를 더 넓혀 보면 거의 500년 단위로 계속 이란 부활을 외쳤던 페르시아의 사례나 몇백 년이 지나도 본국의 차별 대우 탓에 분리 독립을 주장했던 크레타 등 상황이 있고, 심지어 아일랜드는 800년, 베트남은 천년, 이스라엘은 2천년만에 독립을 이루었다. 더불어 이 분야의 끝판왕인 아시리아인도 존재한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겨우 이백수십 년 갖고 유민의식이 있을리 없다는 얘기가 얼마나 허망하게 보이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서가 아닌 족보상 기록이지만,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을 본관으로 하는 신평 이씨(新平 李氏)의 기록을 보면 백제 멸망 이후 백제계 귀족 및 호족 가문들이 대략 어떻게 역사를 거쳐왔는지가 얼핏 보인다. 신평 이씨의 시조는 백제 사평현(沙平縣)의 호족이었던 이인수(李仁壽)로 이인수의 아들인 이주(李珠) 역시 백제의 호족이었고 이주의 증손자 이석덕(李碩德)은 신라 지방관을 지냈다고 한다.
전라북도 전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전주 류씨(全州 柳氏) 또한 삼국시대부터 이미 백제의 호족이었다고 추정되는데 류방헌(柳邦憲) 묘지명(墓誌銘)에 따르면 증조부 류기휴(柳基休)는 신라의 지방관을 지냈고 조부 류법반(柳法攀)은 후백제(百濟)의 우장군(右將軍)이었으며 아버지인 류윤겸(柳潤謙) 때 고려에 귀의해 대감(大監)을 지냈다고 한다. 류방헌의 어머니인 승화군대부인(承化郡大夫人) 담양 이씨(潭陽 李氏)는 견신검의 정변을 예견하고 몸을 숨긴 이염악(李廉岳)의 딸이라 하는데 전라남도 담양군이 본관인 담양 이씨는 신평 이씨에서 분관한 가문으로 역시 백제계 가문이었다.
즉 역사가 수백 년 된 고대국가가 둘이나 망하는 대혼돈에서 고구려나 백제계 호족들은 각자 살길을 찾기 위해 머나먼 타국으로 이주하거나 아니면 본거지에 그대로 남아 새로운 당나라, 발해 혹은 신라 정부에 충성하여 원래 영역의 지배권을 어느 정도 인정받으며 남북국시대를 지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후삼국시대에는 백제계 호족들이 후백제의 관직을 역임하거나 신검의 정변에서 몸을 피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처럼 각자 지역에 따라 새로운 정권인 고려, 후백제 혹은 요나라에 충성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라인 갈아타기에 몰두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사서에 일일이 다 기록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적게나마 기록된 모습만으로도, 많은 연구자의 예상처럼 삼국시대 토착민 후예들이 변화하는 상황과 시대에 맞춰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음이 드러난다.
2.1.1. 백제의 지배 기간 문제
세부적으로는 충청 동남부가 목지국의 저항 탓에 전북 서북부보다도 백제의 지배화가 늦었긴 하였다. 그러나 이해하기 쉽게 오늘날 행정구역 기준으로 하면 백제의 직접 지배지 진격은 충청이 4세기, 전북 일대가 5세기, 전남 일대가 6세기 전반까지였다. 그러므로 직접 지배 기간으로 따지면 전북 일대는 약 이백 여 년, 전남 일대는 백수십 정도가 되는데, 통일신라의 직접 지배 기간 230여 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짧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직접 지배 기간만 정체성의 형성 기간으로 보는 견해는 곤란하다. 여기서 간접 지배 기간이 영토가 아니라고 한다면 고구려가 차지한 옛 낙랑군 일대도 무려 고국원왕 후반기까지는 고구려 영역이 아니었다는 얘기가 되지만, 이런 주장은 진지한 학자라면 아무도 주장하지 않는다. 또한 간접 지배 기간으로 따지면 전라도 전체는 이미 372년 근초고왕의 정복 이래로 백제의 산하 아래 들어왔는데, 후백제가 차지한 원 신라 영토를 제외한 전 지역이 어떤 제대로 된 고대국가 아래 통합된 건 백제가 가장 처음 경험이었다.[4] 간접 지배 확립 기간까지 따지면 300여 년에 달한다. 즉 통일신라의 직접 지배 기간보다 길다. 게다가 백제 왕실은 신라와는 달리 지역 지배층에게 태수 자리도 겸임시켜 주어 기존 마한 시절부터 내려오는 거수국의 후예들에게 나름 이권을 보장하였다.따라서 직접 지배 기간만 놓고 통일신라보다 기간이 짧으니 유민의식이 의문시된다는 견해는 설득력이 매우 부족해진다.
2.2. 꾸준한 무력저항 여부
백제가 망한 시기와 후백제가 건국된 시기 사이에 꾸준히 저항이 있지 않았고 신라의 통치에 내내 순응하다 신라가 쇠약해지자 갑자기 등장했기 때문에 옛 백제 부흥세대와 후백제 주체 세력은 단지 이름만 빌렸을 뿐 서로 연속성 없이 단절된 의식이며 활동이란 주장도 있다.그러나 유민의식이 있다면 목숨을 내걸고 내내 저항 상태에 있어야만 한다는 전제는 대단히 현실적이지 못하다. 가까운 시기의 예로, 일제강점기 조선은 소요가 무척 많았어도 늘상 심각한 소요 상태에 있지는 않았다. 저 페르시아의 사례만 봐도 아랍계인 이슬람 제국이나 몽골 제국 치하에서 순순히 산 세월도 짧진 않았고, 로마 제국에 대한 반감이 크기로 유명했던 유대인들도 로마는 물론이고 여기저기 퍼진 뒤의 유럽이나 아시아, 아프리카의 현지사회에서도 그냥 자기 할일 하면서 쭉 잠자코 지낸 기간이 훨씬 길었던 것처럼 무수히 많은 반례가 있다.
애초에 저항세력이 눈에 띄게 등장하는 시기는 지배세력의 통제력이 약한 시기가 될 수밖에 없는데[5] 모름지기 부흥운동이라면 강한 시기에도 계속 저항해야 한다는 전제는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2.3. 영토상 문제
견훤이 다시 세운 백제는 부여씨 백제의 부수도였던 전주 중심의 전북 일대와, 근초고왕의 침미다례 정벌 후 백제 왕실이 침미다례 일대를 견제하고 끝내는 직접 지배화하기 위해 거의 삼백 년 가까이 우대한 광주 일대를 중심으로 건국되었다. 때문에 처음 강역에서는 침미다례 일대가 없었고, 요즘 대중에게 아예 백제 자체인 것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는 후기 백제의 수도권인 충청도 일부 및 초기 백제의 수도권인 경기도가 판도에서 빠져 있었다. 때문에 근초고왕 당시 백제와 강역이 달라서 후백제가 백제와는 관련이 없다는 의견이 있으나 경기도, 충청도, 침미다례 등을 빠짐 없이 어떤 합체 로봇의 파츠마냥 모두 구비하고 있어야 백제로 인정할 수 있다는 얘긴 그 당대에서조차 아무도 제기하지 않았던 관념이고, 현대에서조차 진지한 역사적 견해로는 볼 수가 없는 개인 의견에 불과하다. 당장 이런 식이면 대중에게 마치 고구려 자체로 인식되는 만주나 하다못해 고구려 초기 발흥지인 집안 일대도 장악하지 못한 고려는 고구려와 아무 상관이 없고 동북공정도 그렇게 주장하지만 이런 의견은 역사학계에서 진지하게 취급되지 못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게다가 영토로 보면 한성백제와 웅진/사비 백제도 매우 달랐다. 한성백제는 경기도에서 발전했다고 하지만 황해도도 상당 부분 영유했었고,[6] 강원도 내륙지역인 영서 지방도 어느 정도 가진데다가, 전라도와 충청도 동부 및 남부를 직할 통치하진 못했음이 고고학적 성과로도 드러난다. 대개는 후기 백제의 수도가 공주 및 부여였던 탓에 충청도를 백제와 불가분의 관계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한성백제는 충청도에 소재한 마한 맹주인 목지국을 기리영 전투가 벌어져 목지국이 크게 약화된 246년도부터 슬슬 무시하며 목지국과 긴장 관계에 들어갔고, 끝내 3세기 후반에 목지국 자체를 무력으로 하극상을 벌여 굴복시키면서 목지국의 영향력이 아직 미치는 충청도 일대와 관계가 대단히 험악해진다.
백제가 목지국 잔여 세력을 완전히 해체하고 충청도 전체를 직접 지배화하는 데 성공한 건 4세기 중후반 근초고왕 때 와서였으니, 충청도 목지국 세력은 백제와 격렬한 직간접적 분쟁을 거의 백 년 가까이 벌인 것이다. 오히려 산간 일대인 충북 일대가 제패가 어려웠고 옛 건마국 세력인 전북 서부가 백제에게 협조적이었기에 직접 지배화는 전북 서부가 충북보다도 진도가 빨랐다.[7]
백제와 천안 동남구 청당동 목지국의 험악한 관계는 고고학적 관계로도 뒷받침되는 바이다. 목지국 본류 유적은 4세기 중후반 경 완전 해체되어 사라지는 게 드러나는 데, 이건 쉽게 말해 제압한 뒤에도 반항을 멈추지 않자 군사력으로 아주 짓뭉개서 초토화시켜버렸다는 얘기다. 백제가 현지 세력을 완전 해체하는 이런 부담스런 조치는 상대하기 만만하거나 본디 인구가 드문 지역을 개척할 때나 보였던 걸로 전반적으로는 해석되는데, 충청도에 보면 이런 식으로 백제가 참다못해 완전 해체해버린 소국 공동체가 여럿 되는반면 전라도의 경우 이렇게 완전 해체당한 곳은 근초고왕 당시에 하나, 동성왕 당시에 하나 다 합쳐 단 둘 뿐이고 게다가 다 침미다례에 속한 공동체들이다. 즉 쉽게 말해 충청도 일대가 백제의 지배에 격렬하게 더욱 저항했다는 말이다.[8]
게다가 이렇게 어렵게 제패한 충청도 일대마저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400년도에 충북 일대에 군사 거점을 마련하면서 절반 가까이 내주어야 했고, 장수왕 때는 청주-세종 전체, 대전 서부 절반 정도가 고구려 강역에 들어가면서 충북은커녕 충남마저 백제의 강역에는 절반 정도밖에 남아나지 않았었다. 이랬으니 우리가 아는 충청도 전체가 백제 아래에 확고히 있던 시절은 결국 백 년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충청도 자체를 어떤 필수 백제 요소인양 보는 견해는 성립하기 어렵다
이후 강역이 확 줄어든 백제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전북 익산 일대를 일종의 제2수도로 조영하면서 직할지화하면서 금강 유역권과 영산강 유역권까지 직접 지배력을 투사하여 예전 한성백제가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 하던 것보다, 아니 오히려 더욱 면밀한 중앙집권을 관철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직접 지배 영역만 놓고 볼 경우 웅진-사비 백제가 한성백제와 영역이 겹치는 부분은 근초고왕 이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충청도 약간 지역 뿐이고, 근초고왕 최전성기 기준으로 봐도 충청도와 전북 서부에 불과하지만, 그걸 두고 웅진-사비 백제가 백제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는 없다. 즉 백제는 오랜 역사 속에서[9] 가장 극적인 영역 변화를 겪으며 그때 그때 국가정체성을 역동적으로 재정립해나간 나라다. 중국사로 보면 서진-동진이나 북송-남송 같은 방식으로 구분해도 좋은 사례다.[10]
그리고 그럼에도 충청도 일대 백제 호족이 초기 후백제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백제부흥운동과 후백제의 연관을 부인하는 잘못된 생각이 있다. 그러나 이는 태봉의 군주 궁예가 삼한 의식을 초월하고자 했던 상황을 간과한 의견이다. 궁예는 청주 혹은 그 일대의 충북 북부-경기 남부 일대가 주 활동 영역으로 청주 호족들과 상당한 친분이 있었고, 때문에 건국할 때 친위 세력으로 청주 세력을 우대했으니 청주 세력은 궁예 정권 초창기에 궁예의 고려에게 협력하는 게 이득이었다. 그리고 이는 궁예가 고(구)려 유민 의식을 초월하고자 국호를 마진-태봉으로 바꾸면서 더욱 굳어지게 된다. 그러나 궁예가 쓰러지고 패서의 고려계 호족들이 그간 궁예의 친위 세력으로서 본인들을 숙청하는 데 앞장섰던 청주 호족들에게 복수를 해대기 시작하자 왕건의 역성혁명과 고(구)려 정체성 복고에 반감을 품은 이들은 후백제에 귀부하게 된다. 백제계라는 정체성 계승이 당연히 백제 부흥의식 승계와 관련이 있어 생긴 일이다.
그러므로 경기도 + 충청도만 백제고 전라도는 백제가 아니라고 보는 관점은 애초에 그것이 그 당시엔 있지도 않았던 조선 시대 행정구역 관념을 투영한 것이어서 틀린 건 둘째치고, 아예 사실관계부터가 다른 편견에 찬 주장이다. 이런 논리가 나온 건 1990년대-2000년대 초반까지 경상도=신라/전라도=백제로 등치시켜 지역갈등 구조를 이해하려던 대중의 바르지 않은 인식에[11] 대한 반발이 크게 작용한 탓도 있으나, 어쨌든 바른 역사적 이해를 가로막는 편견과 오류에 한해서는 거기서 거기라고밖엔 볼 수 없다.
한편 후백제의 영토를 들어 백제와 무관함을 주장하는 다른 논리로는 후백제의 영토가 전라도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인데, 백번 양보해서 설령 전라도에 국한되어 있었어도 무관함을 주장할 수는 없으나 이 논리조차도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다. 후백제의 영토는 전라도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경상도 서부 일대는 망하기 몇 년 전까진 후백제가 차지한 영역이 고려보다도 그 차지한 비중이 압도적이었으며, 충청도 영역도 백제의 옛 중심지이던 공주 - 연기 - 홍성 일대는 고려에 맞서 오랫동안 점유하고 있었고 부여 - 대전-계룡 축선은 거의 늘 붙들고 있었으며 충청북도는 백제를 무던히도 애먹였던 삼년산성 일대를 포함해 2/3 정도가 후백제의 강역이었다. 특히 백제가 다른 전라도 지역보다도 거의 오십 년 먼저 아예 왕실 직할령으로 편제해서 제2수도권으로 존속했던 익산 일대가 내내 후백제를 든든히 지지한 건 의미가 크며, 이는 역시 고구려 왕실이 집중적으로 육성한 제2수도권이었던 패서 일대가 궁예와 왕건을 통해 고구려를 부활시켰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현상이다. 게다가 후백제의 강역 대부분은 경상도 및 충청북도 상당 부분과 대전 일부, 충청남도 서북부 외엔 전부 백제가 망하기 전까지 보유하던 영역들인데, 후백제가 완성해나가기 시작한 이 강역이 오히려 성왕-무왕-의자왕 당시 백제가 경상도로 진격하면서 얻어낸 강역과 거의 일치한다. 게다가 후백제는 아신왕이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긴 이래로 한 번도 되찾지 못한 충북 추풍령 일대 및 성왕이 진흥왕에게 빼앗긴 이래로 역시 되찾지 못한 전북 무주, 대전 동부 일대를 확고하게 점유하고 있었다. 강역으로만 보면 오히려 한성백제 시절 강역도 일부 갖고 있는 게 된다.
또한 전라도 지역이 상대적으로 백제 중앙정부에 대한 복속이 늦은 것은 사실이지만 백제라는 국가에 대한 소속의식이 성장할 수 없을 정도로 마냥 늦었던 것도 아니다. 웅진 천도 이후로 적어도 만경강 연안지역은 백제 정부의 핵심 세력권에 편입되어 무왕 시기에 이르러서는 익산에 궁궐이 건설되었고, 백제부흥운동 역시 중심지였던 주류성의 가장 유력한 후보지가 전북 부안 위금암산성이다. 수도가 함락당한 상황에서 전시조정이 자리를 잡을 정도면 적어도 백제라는 국가 체제를 위협할 반역세력은 존재하지 않는 확고한 세력권으로 평가해줄 수 있다.
구백제의 중심지였던 충남 지역 호족들은 태봉/고려와 후백제 사이를 오가며 줄타기를 했지만, 이건 그 일대 호족들이 백제부흥운동에 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견훤 자체가 신라 방면에 전력을 집중한 게 주된 이유였고 애초에 신라가 옛 백제 수도권역을 집중 관리했으며, 태봉의 궁예 정권이 고구려 일변도식의 정체성을 버리고 백제 유민도 적극적으로 포섭하려 했던 것이 이유가 크다. 패서 호족과 왕건이 궁예에게 반기를 든 것, 그리고 청주, 공주 일대의 백제계 호족이 왕건에게서 돌아선 것도 이것이 이유였다. 고구려 옛 영토, 특히 수도였던 평양 지역의 평정과 위무를 중요시했던 고구려계의 입장에서 백제계와 영합해 실속도 없고 고구려계의 정서와도 동떨어진 대신라 초강경책을 부르짖으며 국력을 낭비하는 궁예 정권의 행보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실제로 왕건이 집권한 고려는 순식간에 대신라 유화책으로 방향을 180도 바꾸며 구백제계와 결별한다.
애초에 공주, 부여 지역은 한강 일대를 잃고 쫓겨내려온 백제 왕실이 그나마 택할 수 있었던 차선책에 가까웠고, 수도라는 강력하고 인위적인 행정기능이 사라진 시점에서는 자체적으로 번성할 수 있는 입지가 전혀 아니었다. 백제 왕실이 기껏 사비로 천도해놓고도 괜히 금마를 추가적인 수도로 조성했던 게 아니다. 권력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나오는 법이고, 그런 점에서 백제 유민들의 물적 인적 자원이 집중되어 '백제 부활'을 선언할 수 있는 곳은 다름아닌 행정기능과 생산력을 고루 갖춘 완산주 일대였지 후대에도 충청감영이라는 강력한 행정기능을 가지고도 사족층이 크게 번성하지 못한 첩첩산중의 공주나[12] 이미 웅주의 속현으로 전락해 쇠락한 부여 따위가 아니었다.
또한 백제 멸망(660년) 후 백제 부흥 운동은 백제 중심지인 충남 지역(주류성, 임존성, 사비성 등)에서 일어났으며 호남 지방에서는 백제 부흥 운동이 사실상 없었다고 하지만, 이는 신라 지배하에서도 백제 지역 유민들의 적극적이지 않은 저항은 간간이 있었고 그건 신라의 집중적인 관리를 어쩌다가 피한 전북 일대에서 주로 일어났음을 간과한 것이다.[13]
그리고 김헌창의 난 때 옛 백제 영역 전체가 김헌창 반란에 동참해서 중앙에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은 백제사와 통일 신라사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영역이다. 김헌창은 백제란 이름 자체를 내세우진 않고 그저 서라벌을 중심으로 한 국가에서 떨어져나가겠다는 분리주의만 표명했는데도 일순간의 파급력은 강했던 것이다. 김헌창의 난은 이념을 앞세운 지역 주민의 본격적인 민심 싸안기란 과제까진 나가지 않았기에 추진력이 약하여 쉽게 실패했지만, 이는 견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 견훤은 김헌창보다 한술 더 뜨는 자세로 나가게 된다.[14]
물론 백제 왕가 직속 군대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일종의 제2수도로 경영된 익산 부근 전북은 백제 왕가와 관련이 보다 깊었던 게 사실이지만 왕가와 직접 관련 있고 직접지배하는 곳만 그 나라 영토면, 신라는 그 존속 시기 내내 경상북도 동부나 5소경 인근만 신라 영토였나? 패서 일대는 신라와 아예 무관했고? 그렇지 않다. 이 부분은 나주 공방전문서 참조. 이런 괴상한 논리라면 고구려 역시 수도가 국내성/평양/한성 일대였으나 막상 고구려부흥운동은 비교적 변방이었던 개성에서도 했기에 별 상관 없다고 봐야 한다. 일단 당장 전주가 전라도고 뭐시고 따지기 이전엔 부여-전주 직선거리보다 평양-개성 직선거리가 훨씬 멀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전주가 공주, 부여 등과 거리가 좀 있으니 백제성이 없다면 개성에 정도한 고려의 고구려성은 더더욱 없다. 게다가 백제의 제2수도였던 익산은 그냥 전주 바로 윗동네다. 반면 고구려 제3수도였던 재령은 개성과 거리가 여전히 멀다.
혹자는 또 옛 침미다례 일대가 고려에게 귀부하였다고 후백제와 백제의 연관성을 부정하지만, 이 또한 상술한대로 어떤 잘 알려진 고대 국가 판도가 빠짐없이 다 갖춰져야 누가 계승성을 인정할 수 있다는 자의적 조건에 불과하다. 침미다례는 전라도 동부 일대와 오랜 경쟁 관계였고, 옛 건마국 세력인 전북 서부 일대와는 준왕의 건마국 건국 단계부터 불편한 관계였으며, 본디는 침미다례와 계통이 같은 광주와는 광주가 아주 일찍부터 백제에게 붙어 침미다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한 탓에 정말이지 광주 세력과는 관계가 최악이었다. 그 장보고 세력이 장보고의 입지전적인 능력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내분으로 쉽게 무너진 건 나주 VS 광주 간 지역감정이 이유로 들어질 정도.
고로 침미다례 일대는 비록 동성왕-무령왕 당시 백제 왕실과 극적으로 타협을 보아 적극적으로 백제에게 협력했을망정 다른 전라도 세력들과 이런 알력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무리였다. 그랬으니 침마다례 호족들은 아무리 신라가 싫었어도 라이벌 관계인 광주와 전주 일대 세력이 주도하는 백제부흥운동에는 결코 참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15] 게다가 나주 일대도 미다부리정이 주둔한 남평읍 일대만은 내내 견훤과 후백제를 일관되게 지지했으니 그 내부에서도 의견은 분분했음을 알 수 있고, 견훤도 끝내 이 일대를 제패해서 후백제의 판도로 편입한다.[16]
그러니 "호남인들의 조상들 운운"하면서 이들 전체가 최후까지 백제의 침공에 저항하던, 정복자 백제라면 아주 이를 갈고 증오하던 마한인들이란 주장은 조선 시대 행정구역 관념을 그보다 천년 전 상황으로 소급한 지어낸 말에 불과한데다, 최근 고고학적 성과와 완전히 역행하는 관념이다. 백제는 애초에 마한 구성국으로 시작해서 마한 맹주국이 되어 마한 소국들을 통합했고, 그 과정에서 크게 보아 네 권역으로 구분되는 마한은 수백 년이 지나 서서히 망해 흡수된 관계다. 그러니 그 과정에서 애초에 하나로 통짜로 엮는 게 불가능한 마한의 원한과 유민의식이 유독 조선시대 행정구역인 호남에만 강렬하게 남았다고 망상하는 건 틀린 역사 읽기다. 그런 마한의 원한이란 게 정말로 있었다면 충청도 일대에 남아 있었어야 하지만 이는 확인되지 않는다. 애초에 백제 자체가 마한 연합의 일부였던데다 모든 저항 세력이 이미 4세기 중반에 초토화되어 사라졌고, 목지국 이전에 마한 맹주였던 건마국 잔여 세력 및 백제가 목지국에 대한 마지막 예우 차원에서 남겨둔 천안 용원리 세력이 백제 왕실을 초지일관 지지하는 상황에서 마한 정체성이란 게 효과를 보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마한은 단일 국가가 아니다.[17] 또한 정치단위의 변화보다 고고학적 변화가 다소 늦음을 간과해서도 안된다. 고구려의 경우만 보더라도 옥저 지역이나 한사군 지역의 고고학적 변화는 고구려의 병합 시점보다 다소 늦는 편이나 아무도 이를 두고 옥저/한사군인들의 고구려에 대한 저항이니 뭐니 떠들지 않는다.
그런 관념에서 보면 백제는 영원불멸 초기 부여계가 처음 시작한 위례성 그리고 이후 현대 한국인에게 이미지상으로 잘 알려진 공주, 부여에만 고정된 존재지만, 당연히 이런 가상현실 백제는 있어본 적 없는 허상이다. 국가는 변화하는 현실에 따라 적응과 변천, 통합과 흡수를 반복하는 실체지, 누군가의 관념에서 건국 당시로 고정되어 늘 그 환경 그 조건에 맞춰 상연되는 테마파크가 아니다.
물론 신라 귀족의 직계 후예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신라부흥운동과 후삼국시대 백제부흥운동의 양상이 다소 다른 건 맞지만, 부흥운동을 옛날 귀족 직계 후예가 일으켜야 인정할 수 있다는 것도 역사학계에선 통용되지 않는 일개인의 편견이다. 설령 이를 인정하더라도, 똑같은 신라 귀족의 후예였으나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우선하여 근왕군을 일으켜, 조상이 같은 신라 귀족 후예들을 단순 반란역적으로 취급하여 토벌해 살해했던 참상이 이 부분에선 벌어지지 않았던 것은 신라와 고려의 옛 나라 백성 흡수가 역시 차이가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18]
2.4. 명칭상 문제
여말 교체기에 일어난 백제부흥운동에 대해, 남부여부흥운동이 아니며 남부여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는 점을 들어 정식 국호가 백제인 후백제란 나라가 '남부여'와 무관하다는 의문이 있을 수 있는데, 일단 논해볼 가치는 있다. 건국 당시 부여계가 해당 지역과 해당 인적 집단에게 영원불멸 늘 고정된다면 이런 주장이 옳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한성백제를 구성한 고고학적 지배 세력은 크게 보아 두 계통인데, 그 중 하나는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고구려계 세력이지만 다른 하나는 위에서 자주 언급되는 침미다례와 그 고고학적 계통이 오히려 똑같은 서해안 토돈분구묘계 세력이었다.[19] 즉 백제는 이미 초기에 성립할 때부터 단순 정복왕조가 아닌 토착민을 지배세력으로 수용한 연합왕국이었던 것이다.게다가 백제를 건국한 주축 세력인 고구려계 세력은 본인들 선언과는 달리, 부여에서 직접 내려온 세력도 아니었다.[20] 고고학적으로는 백제와 부여가 과연 무슨 물질적인 관계가 있는지는 발굴 성과가 상당히 축적된 오늘날까지도 계속 의문시되고 있는데, 이는 동북공정을 외치는 그 중국도 도저히 부정하지 못하는, 고구려-부여와의 연속성과는 대단히 대조적인 상황이다. 백제와 부여의 관계에서 굳이 확증되는 게 있다면 백제와 고구려의 부정할 수 없는 연속성으로 드러나는 부여와의 관계성이지만, 이런 관계가 철저히 고구려를 매개로만 해서 드러나니 백제의 부여 관련 주장이 오늘날 학자들 대부분에겐 여전히 회의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즉 백제의 뿌리가 고구려가 아닌, 고구려의 원류인 부여에 있다는 백제 왕실의 주장은 적어도 고고학적으론 지지받을 수 없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고구려는 소수 부여계 지배 세력이 대다수 고조선인과 연합해서 성립한 나라였는데 초기 고구려 또한 묘제에서 드러나듯 지배층의 일부에 고조선계도 꽤 수용한 걸로 드러난다. 고로 비록 백제는 기존 마한 입장에서는 외래 세력이었다지만 같은 조선계라는 큰 틀에선 예외가 아니었고, 때문에 시간이 오래 흘러 동화와 회유 등을 통해 토착 호족들을 구슬러 같은 백제라는 국가 안에서 어느 정도 통합을 이뤘던 것이다.
게다가 백제국 자체가 그런 고구려에서 온 자들이 일방적으로 한강 유역에 먼저 있던 토돈분구묘계[21] 세력을 일방적으로 찍어누른 게 아니라 꽤 평화적으로 연합해서 세웠다는 정황이 갈수록 두드러지고 있는 판국이다. 부여씨가 국성이고 국호를 남부여로 했다지만 적어도 국호의 경우 '남부여' 왕실이 시퍼렇게 힘이 있었던 현실에서도 역시 오래 갈 수가 없었던 건, 이미 백제라는 브랜드로 오래도록 통합을 이뤘다는 현실을 거스를 수 없었던 데 이유가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후대의 부흥도 역시 백제란 국호를 중심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부여의 유산은 그저 백제를 구성하는 부품 중 하나가 되었을 뿐 이미 백제는 부여와는 차별화된 정체성을 갖게 된지 오래였음을 드러내주는 현상이었다.
더군다나 남부여라는 명칭은 성왕 때 잠시 사용한 이벤트성 국명 혹은 정착하는데 실패해서 곧 폐기된 국명이라는 것이 학계 결론이고 성왕대 어느 시점, 혹은 바로 다음 왕인 위덕왕 대에 남부여 명칭은 폐지되고 다시 백제로 돌아간 것이 분명하다. 당장 위덕왕 대에 조성된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이나 무왕 대에 조성된 미륵사지 사리장엄구에도 뚜렷이 '백제'라 적혀있으니 말 다한거다. 즉 정체성을 부여로 아예 소급하려던 시도는 당장 백제 왕족들에게도 그다지 지지받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국호 변경 이후에도 중국과 일본 사서는 '백제'라는 국명만을 일관되게 사용한다. 이런 논리면 1910년 이후 한반도의 원주민들이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강점이 끝난 이후에도 '대한'보다 익숙한 '조선'을 자칭했던 사실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22]
물론 고구려와 대등한 부여에서 왕실이 왔음을 겉으로 표방하는 백제국에게 복속당한 중북부 마한인들이 그 같은 정체성을 가질리야 만무했던 것이, 그들이 백제라는 틀 자체를 거부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백제왕 또한 오랫동안 마한왕을 자칭할 수밖에 없었던 게 과연 무엇이 이유였겠는가? 나당연합군으로 북방계 부여씨와 대성팔족이 완전 없어졌으니 백제인의 정체성이 완전히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야말로 백제인의 국가정체성에 대한 현대인의 심각한 착각이다. 백제의 지배를 받아들이던 토착 호족들은 신라 중앙 정부의 강력한 간섭으로 성을 쓸 수는 없었지만 모두가 세력을 거세당한 건 아니었고, 그 중에 가장 백제의 정체성이 강했던 건 고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백제 왕실이 제2수도를 운영한 바 있는 전북 일대였다. 또한 기존 마한계 호족조차 백제 치하에서와는 달리 태수의 행정적 간섭을 더욱 강하게 받는 현실을 어느새 인지하게 되자 불만을 점차 쌓아가게 되고 이것이 그들이 백제부흥운동에 합류하게 되는데까지로 이어지는 것이다.[23]
무엇보다 백제의 귀족인 대성팔족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당장 백제 멸망 직후인 673년에 대성팔족인 진씨(眞氏)가 국보 제108호 '계유명삼존천불비상'을 제작하기도 했고 국씨(國氏) 역시 통일신라 시대의 금석문에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전씨(全氏)와 마씨(馬氏) 등 백제 개국공신 가문도 현재까지 남아있으며,[24] 대성팔족의 후예로 추정되는 성씨도 상당히 많다. 임씨, 구씨, 백씨, 사씨, 복씨 등.
2.5. 견훤의 출신지
견훤의 출신지가 경상북도 문경(출생지) 및 상주(성장지)고 본디는 서남 해안에 배치된 신라 장수였다는 점을 들어 후백제의 백제 계승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적지 않은 현대 한국인들이 저지르는 착각이 셋 있다.바로 한 가지는 고대국가에서 모든 사람들이 현대인과 같은 확고한 국가정체성이 있어야 부흥운동에 동참할 거란 환상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동서고금을 따져봐도, 본인이 현재 체제에서 기득권이 있어도 유민의식과 별도의 국가 정체성을 이용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새로운 국가의 중심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망한 국가가 다시 일어날 때 그 주역이 정복국의 유력자거나 심지어는 정복국의 왕족인 경우가 오히려 흔하며, 망한 나라의 왕실 직계나 그 후손이 복국에 성공하는 경우가 그야말로 소설에서나 등장하는 매우 드문 케이스다. 망하면서 지배 국가의 관리를 거치게 되면 그나마 반항할 물적 힘과 야심을 가진 인재는 지배 국가의 유력한 계층 출신이 될 수 밖에 없다. 애당초 대항할 힘도 없는 자를 중심으로 사람이 모일 수는 없기 때문이며, 김헌창의 난이 꽤 성공적이었던 건 희귀하게 여겨지겠지만 오히려 세계사적으로 볼 때는 이쪽이 다수다. 심지어 그리스의 경우 국민들이 대놓고 강대국 출신의 국왕을 원해 빅토리아 여왕의 차자인 알프레드 왕자가 국민투표에서 1위를 거머쥐었을 정도였다.[25]
애초에 부여씨 백제 왕실부터가 토착세력 출신이 아니다. 성씨도 그러하고, 기록에 남은 백제 왕실 스스로의 인식도 그러했다. 토착세력은 고사하고 백제는 단 한 번도 왕가의 출신지를 영토로 삼아본 역사가 없었고, 심지어 건국 발상지마저 상실한 삼국 유일의 국가다. 이른바 대성팔족으로 불리는 최상위 귀족층 또한 위례성에서 패퇴해 왕실과 함께 내려온 세력과 웅진/사비 현지 세력이 뒤섞여있다. 이런 마당이니 백제 토착세력이어야만 백제 부활을 선언할 수 있다는 명제는 근본적으로 성립할 여지가 없다. 이런 논리면 백제라는 국가 자체가 실체 없는 어떤 가공의 존재라는 결론만 나온다.
견훤이 892년에 무진주를 점령하고 900년에 완산주에 이르렀을때까진 백제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나 완산주에 이르러 굳이 백제 의자왕을 들춰낸 건, 그 전까지 백제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명분이 통할지, 그리고 신라 체제를 자기 힘으로 온전히 극복할지에 대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모색 과정에서 나온 게 '신라 서면도통 지휘병마제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사중승 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라는 긴 칭호였다. 그러나 이는 백제 부흥을 결심하기 전에 독자세력화를 구상하는 단계에서 내세운 호칭일 뿐이며, 전주로 근거지를 옮기고 백제부흥을 천명한 단계에서까지 저렇게 한 건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왕건의 부친 왕륭은 명목상으로나마 신라의 사찬이었는데 그럼 왕건의 고려 부흥 천명도 의미가 없는 것인가? 이것도 이미 상술된 것으로, 동서고금 예전에 망한 나라를 부활시키는 자는 그 나라를 멸망시킨 나라에서 세력이 있는 자로서 대부분은 그 멸망 세력에서 벼슬이 있었다. 이것이 자체로 부흥국 군주로서의 정통성을 충분히 훼손하고도 남는다는 의견은 당대인은 전혀 문제삼지 않았던 사항을 후대인이 오해하여 거론하는 개인 의견일 뿐이지 진지한 역사적 견해는 될 수 없다.
다른 억측은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라고 해도 중국 제국 지역 내라면 그 지역 고대 춘추국가의 한 글자 국호를 활용하여 나라를 세웠던 중국사의 사례를 근거로 계승의식이 없어도 얼마든지 국호 빌려쓸 수 있다는 얘긴데, 적어도 중국사 외의 다른 사례에선 그러한 예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게다가 중국사에서 한 글자 국호로 다시 등장하는 이민족 국가들의 경우, 그 한 글자 국호를 썼던 국가의 역사에 대해 원한을 풀어주고 말고를 언급하면서 그 해당 역사를 끌어낸 사례는 있는가? 거의 없다. 비슷한 사례는 후금-청의 경우가 있으나 이건 그야말로 계승의식이 분명 확인되는 경우다. 게다가 다시 이게 다 맞다고 쳐도, 그렇게 견훤의 근거 지역에서 마한 계승 의식이 강렬했다는 추측을 한다면, 왜 견훤은 망해가는 신라를 거부하는 구실로 그보다 훨씬 역사가 길다 볼 수 있는 마한의 원한은 내세우지 않고 굳이 의자왕의 원수 운운했던 것인가? 그것은 대대로 신라인이고 신라계 토착 호족인 견훤이었어도 무시할 수가 없었던 백제 유민의식이 이유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 견훤의 신라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현대의 국민국가적 민족 관념을 통해 보다가는 오류가 생긴다. 근대 민족주의의 발흥으로 인한 큰 진통(세계대전 등)을 거친 현대에야 국적이나 민족 개념이 강력하게 정착했지만[26] 전근대시대에는 이런 개념이 상당히 느슨했기 때문에 어떤 한 정치집단의 정체성은 기득권을 가장 많이 가진 핵심계층부터 순차적으로 강하게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견훤의 고향 상주는 진한 소국인 사벌국이 있었던 곳으로 원 신라영역이 아닌 법흥왕~진흥왕 대에 편입되긴 했는데, 해당 지역은 삼국 시대에도 단순한 변경지는 아니었다. 국경 지대긴 했지만 소백 산맥 너머에 큰 대망을 품은 신라 왕실이 아주 직할령 수준으로 밀접하고 첨예한 관심을 기울이던 지역이라 신라 왕실에게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던 건 맞다. 그러나 원성왕계 왕실이 들어선 후 무열왕계 왕실에서 꽤 긴밀하게 관리하던 경기도 일대가 상대적으로 푸대접된 정황이 지적되는데[27], 경기도보다도 무열왕계 왕실과 더욱 유착 관계가 깊었던 이 일대 또한 적어도 그때까지 받던 특별 대우를 받지 못하게 된 정황은 보인다.[28]
그러니 왕실 직할령 호족 가문 아자개의 아들인 견훤은 그나마 왕건 같은 그냥 지방 호족보다는 상황이 나아서 신라 왕실 근위대에 들어갈 수는 있었고 이미 20대 나이에 그가 속했을 5두품에서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비장'이 되는 입지전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어쨌든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즉 당시 신라 제도로 보면 견훤은 20대밖에 안되는 나이에 정식 장군 계급인 신라 왕실 근위대장 보직을 제외한다면 골품제상 가장 가능한 승진을 이뤘긴 하였으나, 왕실 근위대장으로 승진하지 못한다면 은퇴할 때까지 그 계급에만 머물러야 했다. 게다가 설령 왕실 근위대장 자리까지 간다한들 그 자리는 오늘날 한국군 기준 원스타에 불과했던데다 전성기라면 모를까 쇠퇴해가는 신라 왕실의 근위대장 보직은 견훤에게 전혀 메리트가 없었다.
고로 이건 원스타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가 신라군 총사령관이 될 능격도 있다고 생각하던 견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결과는 결코 아니었다. 고려나 조선 같았으면 강감찬이나 척준경이 그랬듯 대장군이든 상장군이든 되던가 결혼도 왕실 아니면 왕실과 연줄 있는 대귀족과 할 수 있었으나, 신라는 그런 걸 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니었다.
때문에 견훤은 그 이상 출세하려면 신라에게 반기를 들어야 했다. 그래서 당대에 견훤을 깎아내리거나 비난할 때는 '신라인'으로서 '신라 왕조'를 배신했다고 까는 게 아니라 '신라 군인'이었는데도 '신라 왕조'를 배신했다는, 즉 다분히 봉건적인 주군-신하의 충성에 대한 윤리를 들어서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야망에 불타던 신흥 군소호족 자제 견훤이 백제계 호족들과 잘 타협만 하면 단순한 기득권 보장을 넘어 유서 깊은 고대 국가 백제의 새로운 왕실을 꾸릴 수 있는데 그 모든 걸 버리고 능력에 맞는 입신양명을 제약하는 신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관철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물론 견훤이 본뿌리인 신라에서 벗어나 신라의 오랜 적국 백제를 부흥한 건 백제 왕을 하고 싶다는 개인적 야망이 컸지만, 개인적 야망이 있으면 백제 부흥이란 이념과 무관해진다는 얘기 또한 앞뒤가 맞지 않다. 이 역시도 상술했듯 신라 골품제의 한계를 부수고 그 이상 올라가고 싶었던 개인적 야망이 백제 부흥이란 옛 백제인들의 열망과 합쳐져 백제가 부흥된 것이고, 견훤 본인도 이후로는 그 이념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서로 모순되는 관계가 아니란 얘기다. 그리고 견훤이 이렇게 백제 왕을 자칭한 단계에서 나름 손해본 것도 많았다. 신라 왕실은 견훤과 후백제에게 크게 분노하여 내내 극도로 태도가 적대적이었고, 때문에 왕건과는 달리 견훤은 끝내 신라에게 그 무엇도 인정받지 못했다. 게다가 아버지 아자개와도 사이가 벌어졌고 그의 고향인 문경과 상주 일대는 그를 지지하지 않는 견해가 보다 우세했다. 물론 견훤이 이런 상황을 참지 못해 적어도 900년대 후반에는 상주 외 사벌주 일대를 점령하면서 문경을 손에 넣었고, 아버지 아자개의 지역인 상주마저 기어코 927년에는 무력으로 함락하여 숙원을 해소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 견훤이 겪었을 분노와 초조가 적지 않았을 것은 짐작이 어렵지 않다. 견훤이 그예 참지 못하고 무력으로 문경, 상주를 짓밟은 건 구현하지 못했으나, 태조 왕건 드라마에서 이와 같은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다른 나머지 세 번째는 바로 국가정체성이다. 국가정체성은 현대인한테만 있는 게 아니며, 고대나 중세에도 물론 강도나 출발점은 분명 약할 수 있지만 문화적 상황과 시대적 배경에 따라 얼마든지 비슷한게 나타날 수 있다. 애초에 자신의 세력 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라에 대한 자신의 반란을 명분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백제'란 브랜드가 여전히 유효했던 것 자체가, 그 지역에 살던 '신라인들'이 신라인이란 정체성을 포기하고 망한지 오랜 백제인이 되겠다고 선택했을 정도로 백제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3. 결론
후백제가 백제와 연관 없다는 일각의 주장은 당대 사회상과 사람들의 의식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자의적인 해석이다. 통일신라의 민족융합정책은 고려의 삼국통합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결과적으로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고 후백제같이 합병당했던 국가가 몇백년 후 다시 부활한 사례는 세계사적으로 봤을 때 드문 일로 보기는 어렵다.[29] 물론 후백제는 과거의 백제가 단절없이 그대로 이어진 국가는 아니었지만 엄연히 그 유민과 문화 그리고 정체성을 계승한 후계국이었다.4. 참고 자료
- 한성백제박물관 : <백제 초기 고분의 기원과 계통>
- 한성백제박물관 : 쟁점백제사 총서 제19권 <백제은 언제 영산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나>
- 문안식 : <호남인의 기원과 문화원형>
- 강종훈 : <신라상고사연구>
- 전덕재 : <역사지리학 강의> 중 4부 241~256쪽
- 전덕재 : <신라 왕경의 역사>
- 성주탁 교수 추모논총 간행위원회 : <백제와 주변세계>
- 황선영 : <나말여초 정치제도사 연구>
- 충청남도문화연구원 :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제7권 <백제유민들의 활동>
- 육군본부 : <한국군사사> 제1~2권 고대편
- 태봉학회 & 철원군 : 태봉학회 총서 제3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의 성립>
- 신호철 : <후삼국시대 호족 연구>
- 전남대학교출판부 : <견훤의 후백제 건국과 광주>
5. 같이보기
[1] 역사 지리학 강의 참조[2] 김헌창의 난 때도 구 백제 지역보다 구 고구려 지역이 더 신라 정부에 충성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물론 그 자율성 때문에 장안국이나 신라 정부 둘 모두에 아주 적극적으로 적대하거나 협력하지 않는 간을 보는 모습 또한 제대로 보여주었다.[3] 이것이 중국의 동북공정이 취하는 궤변 중 일부와 일맥상통함은 대단히 중요하고 심각하다.[4] 명목상으로는 마한 시절에 건마국과 목지국의 영도 아래 있었으나, 이 거수국들은 바로 주변 지역 외엔 실질적인 영향력은 행사하지 못한데다가 고대 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백제에게 병합당했다.[5] 쿠르드족 또한 이전의 바트당 정권 하에서는 대체로 잠잠히 있다가 이라크전쟁과 IS의 준동으로 인해 모국인 시리아나 이라크가 불안정해지자 본격적으로 군사활동을 통해 정치적 영역 구축에 나선 바가 있다.[6] 물론 백제가 황해도를 영유하던 기간은 370년대~390년대로 무척 짧다.[7] 마찬가지로 대중이 마치 고구려 자체로 인식하는 만주 일대 또한 대부분은 본디 부여 영토였고 부여가 고구려에게 그렇게 순순히 만주 일대를 내준 건 아니었다. 부여는 한나라, 위나라, 서진 등을 끌어들이며 최대한 고구려를 막아보려 하였다.[8] 물론 충청도로 진격하던 3세기 후반~4세기 초반 백제의 국력과, 충청도 일대 및 전북 서부를 완전 제패한 371년 당시 근초고왕 백제는 국력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러므로 전라도 일대 소국들은 그 백 년 전 충청도 일대 소국들과는 달리 더욱 막강해진 백제에게 보다 저자세로 기어야 했던 정세 또한 이 결과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저항 강도로만 보면 충청도가 더 격렬한 건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9] 고고학 및 중국측 문헌과 전혀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초기 건국 연도는 그대로 취신하기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 고고학 및 문헌 교차 검증으로 전혀 반론의 여지 없이 실재를 입증할 수 있는 시기는 3세기 중후반부터기 때문이다. 임진강 유역 군집 고구려계 묘제 세력을 굳이 하북위례성 단계 백제로 볼 경우 2세기 후반까지 연대 인상이 가능하지만 그걸 넘어서서부터는 답변이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있다. 굳이 말하면 최소한 오백 년 이상은 된다고 할 수 있겠다.[10] 다만 주의. 구태여 말하면 아예 영토와 정부가 계속 이어진 로마-동로마에 비해선 약했으나, 그 누구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영토적 연속성만 상대적으로 많이 떨어질 뿐 정부 연속성은 서진-동진이나 북송-남송의 사례보다는 강했다.[11] 예컨대 영화 황산벌이라든가.[12] 단적인 예로 현 공주 지역의 서원은 그 감영을 빼앗긴 청주의 절반도 안 되는 네 곳에 불과하다.[13] 백제 양식의 석탑이 백제 멸망 후에 갑자기 명맥이 끊기다가, 신라의 통제가 약화된 말기부터 갑자기 백제의 옛 땅에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며 주로 현재의 충남, 전북 지역이었다.[14] 김헌창의 난 때도 구백제 지역보다 패서 구 고구려계 지역이 더 신라 정부에 충성하는 모습이 드러난다.[15] 내몽골도 바로 이 비슷한 상황으로서, 외몽골 주도 세력에게 주도권을 내줄 수 없어 신생국 몽골에의 합류를 거절했었다.[16] 다만 남평읍은 신라 지방 기병군단 주둔지로서 그 일대가 견훤을 늘 지지한 건 성공한 신라 장군이었던 견훤 개인의 신라군 군맥이 원인이었을 가능성 또한 높은 건 사실이다.[17] 이는 가야 또한 마찬가지인데 가야 역시 섬진강~낙동강 권역의 군소 국가들의 집합체 단위에 가까웠지 지금의 유럽연합처럼 가야 지역에 속한 소국들이 연맹체를 결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18] 고려를 세운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그 왕씨란 성씨에서 알수 있듯이 고구려 귀족출신또는 그 혈통을 자처했을 확률이 높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신라 사찬관등을 받고 신라의 귀족으로 활동했다가. 중앙정부가 붕괴되자 그때서야 원래 정체성으로 돌아갔다.[19] 이 계통은 고조선 계통이자 경기~전라 내륙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며 마한 목지국, 건마국의 계통이기도 한 토광-석곽묘 계통과는 어느 정도 구분되는 유형이다.[20] 물론 고구려는 본인들이 고구려가 아닌 부여에서 나왔다는 백제의 주장을 일절 무시하면서 아예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21] 일명 침미다례로 언급되는 영산강 유역 토돈분구묘계 세력과 같은 계열이다![22] 더군다나 대한은 13년 짧은 세월이었을망정 조선의 마지막 공식 국명이기라도 했지 백제는 성왕 때 잠깐 외엔 상술했듯 본래 국명으로 되돌아갔고 마지막 국명 역시 그냥 백제다.[23] 호남인의 기원과 문화원형 참조[24] 전씨와 마씨 성을 가진 백제인들이 실제로 기록되어 있다.[25] 특히 유럽은 왕가간 통혼이라는 교류가 빈번해 다른 나라의 왕가라 해도 유럽 내의 왕가면 타국에 대해서도 충분히 권위가 있었다. 하물며 그게 당대의 강대국인 영국이었으니. 한반도의 경우도 그나마 백제-신라-가야 간 통혼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서동요라든가.[26] 물론 이게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서 분쟁이나 내전이 여전히 심각한 나라들도 많다.[27] 신형식 교수 통일신라사 참조[28] 사실 경기도니 경북 서남부니 뭐니 하기 전에, 무열왕계 왕실은 옛 백제 지역 전체에 대해서도 결코 방심하지 않고 나름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반면 원성왕계 왕실은 이러한 문제 의식을 딱히 드러낸 바 없어보이는 게 사실이다.[29] 당장 신바빌로니아의 경우 바빌로니아 멸망으로부터 거진 천 년은 뒤에 나온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