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의 증손이자 구성군의 양자에 대한 내용은 회원군(1464) 문서 참고하십시오.
전주 이씨 영성군파의 역대 종주 | ||||||
1대 영성군 이계 | ← | 2대 회원군 이윤 | → | 3대 함평군 이홍 |
조선 선조의 손자 회원군 檜原君 | ||
봉호 | 회원군(檜原君)[A] | |
시호 | 정간(貞簡) | |
본관 | 전주(全州) | |
이름 | 윤(倫) | |
자 | 여명(汝明) | |
생부 | 영성군 | |
생모 | 회산군부인 창원 황씨(昌原 黃氏) | |
부인 | 함평군부인 함평 이씨(咸平 李氏) | |
자녀 | 2남[2] | |
묘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 |
생몰 기간 | 음력 | 1636년 11월 2일 ~ 1731년 8월 6일(향년 94세) |
양력 | 1636년 11월 28일 ~ 1731년 9월 6일(향년 9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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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서13남 영성군의 적장자이다. 조선의 왕손 중 가장 장수한 사람이다.2. 생애
1636년(인조 14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영성군은 선조가 55세에 낳은 늦둥이이고, 회원군도 영성군이 당시로서는 늦은 30살에 낳은 아들이다. 그래서 인조의 사촌동생이지만, 나이는 인조의 장손인 경선군과 같다.승헌대부(承憲大夫) 회원군[A]에 봉해졌다. 1655년(효종 6년)에 숭헌대부(崇憲大夫)로 올라갔고, 이후 왕실 종친으로서 종묘대제, 사직대제, 기우제 등 국가 주요 제례 때 제관, 헌관 등을 맡았다. 이밖에도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고 현종이 인선왕후와 온양행궁에 갈 때 별운검으로서 호위했다. 그리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여러 번 다녀오기도 했으며 사옹원 제조, 감선 제조, 종친부 유사당상 등을 역임했다.
앞서 언급했듯, 영성군 - 회원군 부자는 둘 다 늦둥이였다. 거기다 회원군은 장수하여 1731년(영조 7년)까지 살았다. 즉, 선조의 손자이자 인조의 사촌동생이 무려 영조 시기까지 생존했던 것이다.[4] 그래서 실록을 보면 회원군을 왕실에서 각별히 우대했다는 기사들이 꽤 있다.
좌참찬(左參贊) 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선조(宣祖)의 왕손 회원군(檜原君) 이윤(李倫)이 나이 이제 89세이니, 마땅히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恩典)을 별도로 시행하여야 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경종실록》 14권, 경종 4년(1724) 1월 11일 병술 1번째기사의 일부#
"선조(宣祖)의 왕손 회원군(檜原君) 이윤(李倫)이 나이 이제 89세이니, 마땅히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恩典)을 별도로 시행하여야 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경종실록》 14권, 경종 4년(1724) 1월 11일 병술 1번째기사의 일부#
또 하교하기를,
"회원군(檜原君)은 선묘(宣廟)의 왕손(王孫)으로 나이가 90에 가까우니, 실로 희귀한 일이다. 이미 자궁(資窮)하였으니, 그의 손자를 특별히 가자(加資)하라, 제령군(齊寧君) 달윤(達胤)은 나이가 90에 가까우니 특별히 가자하여 노인을 우대하고 친척을 친근히 하는 뜻을 표(表)하라."
하였다.
《영조실록》 2권, 영조 즉위년(1724) 11월 21일 신유 2번째기사#
그리고 1727년(영조 3년) 1월에 영조가 종신(宗臣) 63명을 불러 술을 내려주며 활쏘기를 시킬 때 회원군도 참석했는데, 이때 영조가 특별히 예를 갖춰 대우했다. 회원군이 이에 대한 보답으로 노래 1곡을 올리자 영조가 이런 시를 내렸다."회원군(檜原君)은 선묘(宣廟)의 왕손(王孫)으로 나이가 90에 가까우니, 실로 희귀한 일이다. 이미 자궁(資窮)하였으니, 그의 손자를 특별히 가자(加資)하라, 제령군(齊寧君) 달윤(達胤)은 나이가 90에 가까우니 특별히 가자하여 노인을 우대하고 친척을 친근히 하는 뜻을 표(表)하라."
하였다.
《영조실록》 2권, 영조 즉위년(1724) 11월 21일 신유 2번째기사#
光陰倐倐幾乎更
빨리 가는 광음 얼마나 바뀌었는지
宣廟王孫只有卿
선묘의 왕손 오직 경만이 있네
九耋衰年精力健
노쇠한 90 나이에도 근력 좋으니
壽星必也照公庭
수성이 반드시 공의 뜰에 비추었으리
《영조실록》 11권, 영조 3년(1727) 1월 15일 임인 1번째기사의 일부#
이렇게 말년에 종실의 큰어른으로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다 양력 1731년(영조 7년) 9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96세[5]. 조선의 왕손 중 가장 장수했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에 있다.빨리 가는 광음 얼마나 바뀌었는지
宣廟王孫只有卿
선묘의 왕손 오직 경만이 있네
九耋衰年精力健
노쇠한 90 나이에도 근력 좋으니
壽星必也照公庭
수성이 반드시 공의 뜰에 비추었으리
《영조실록》 11권, 영조 3년(1727) 1월 15일 임인 1번째기사의 일부#
3. 가족과 후손
판서로 추증받은 함평 이씨 이초로의 딸 함풍군부인과 혼인해 아들 이규령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규령이 일찍 죽는 바람에 후사가 끊겨 세종대왕의 적5남 광평대군의 8대손 이홍을 양자[6]로 들여 대를 이었다. 이홍은 함평군(咸平君)으로 봉군되었고, 함평군은 아들을 6명을 낳아 현재까지 대가 이어온다. 그래서 지금 현재 회원군의 후손들은 실제로는 대부분 광평대군의 자손이다.[7][A] 봉호는 경상남도 창원시의 별호인 '회산(檜山)'에서 따왔다.[2] 후술하겠지만 1남은 양자이다.[A] [4] 영조는 인조의 현손이다. 즉, 영조 입장에서 회원군은 고조할아버지의 사촌동생이다. 게다가 영조의 아들인 효장세자가 태어나고 죽을 때에도 살아 있었다.[5]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 기준. 만 나이로는 94세.[6] 임진왜란 이후로 혈연관계가 8촌 이상이 되는 경우라도 다른 파간으로 입계가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1902년에 편찬한 《선원속보(璿源續譜)》를 보면, 선원선계 3파와 도조 이후의 자손들의 계보 여러군데에서 이런 일이 나오는 걸 볼 수 있다.[7] 일부는 광평대군의 자손이 아닌 다른 파에서 입계한 경우가 몇 군데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