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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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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년기3. 왕위 계승자4. 초기 통치5. 아라곤의 카탈리나 왕비와의 결혼 무효 분쟁6. 가톨릭과의 결별7. 카탈리나 왕비의 죽음과 앤 불린의 몰락8. 은총의 순례9. 클레베의 앤캐서린 하워드10. 스코틀랜드와의 전쟁11. 말년

1. 개요

16세기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의 국왕 헨리 8세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초년기

1491년 6월 28일, 잉글랜드 왕국 켄트주 그리니치의 플라센티아 궁전에서 잉글랜드 국왕 헨리 7세요크의 엘리자베스 왕비의 셋째 아들로 출생했다. 그에게는 여섯 형제가 있었는데, 그중 유아기를 무사히 넘긴 이는 웨일스 공 아서 튜더,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의 왕비 마거릿 튜더,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의 왕비인 메리 튜더뿐이었다. 아버지 헨리 7세는 장미 전쟁에서 랭커스터 왕조 편에 서서 요크 왕조와 대적하다가 에드워드 4세에게 밀려 브르타뉴 공국으로 망명했고, 에드워드 4세 사후 에드워드 4세의 남동생인 리처드 3세가 조카 에드워드 5세를 폐위하고 잉글랜드 국왕이 되면서 잉글랜드 정계가 혼란해진 틈을 타 프랑스 왕국의 지원을 받고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물리친 뒤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으며, 에드워드 4세의 장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요크 가문과 화해했다.

1493년, 2살의 헨리는 도버 성의 치안관, 잉글랜드 남동부 5개 항구의 관리인으로 선임되었다. 1494년 요크 공작에 선임되었고, 이후 잉글랜드의 마리샬 백작과 아일랜드 총독이 되었다. 또한 훌륭한 교사들의 지도 아래 좋은 교육을 받았고, 그 덕분에 라틴어, 프랑스어, 스페인어에 능숙했다. 그는 젊은 시절 열렬한 도박꾼이자 주사위 놀이꾼이었고, 마상창시합, 사냥, 그리고 현대 테니스의 시조인 '왕립 테니스'도 즐겼다. 또한 음악에 재주가 있었고, 문학 작품과 시도 잘 썼다. 그는 논 서치 궁전,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 예배당,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을 포함한 여러 주요 건물의 재건 및 개보수에 참여했다.

3. 왕위 계승자

1501년,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인 아서 튜더는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스페인 공동 왕 페란도 2세이사벨 1세의 막내 딸인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결혼했다. 당시 각각 14세와 16세였던 두사람은 왕위 계승자와 그의 아내가 결혼할 때의 관습에 따라 한동안 웨일스로 보내졌다. 그런데 아서 튜더는 결혼한 지 20주가 지난 1502년 4월에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고, 헨리는 웨일스 공이자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헨리 7세는 카탈리나가 아서 튜더와 결혼할 때에 가져온 지참금 20만 크라운을 반환하기 싫어서 카탈리나를 스페인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잉글랜드에 잡아둔 채 새 왕세자가 된 자신의 차남이자 카탈리나의 시동생이었던 헨리 왕자와 다시 결혼시키자고 제안했다.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건 기독교 교리에 위배하는 일이었기에, 이를 이루려면 교황청의 특별 승인이 필요했다. 아라곤의 카탈리나는 아서 튜더와 성적 결합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특별 승인은 필요하지 않고 단지 형식적인 결혼을 해소하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스페인과 잉글랜드 법원 모두 결혼의 합법성에 대한 모든 의심을 불식하기 위해 교황의 특별 승인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교황청은 스페인 당국, 특히 이사벨 1세의 강력한 요청과 로비에 따라 특별히 승인했고, 그리하여 헨리 왕자와 카탈리나 공주는 아서 튜더가 사망한 지 14개월 후 약혼했다.

그러나 1504년 이사벨 1세가 사망한 뒤, 헨리 왕자와 카탈리나의 결혼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헨리 7세는 페란도 2세가 새로 성립하는 결혼에 맞춰 보내야 할 지참금을 보내지 않았기에, 카탈리나가 자기에게 빚을 지고 있으므로 결혼을 미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페란도 2세는 이미 지참금을 다 보냈는데 또 보낼 수는 없다며 거부했다. 지참금 협상이 쉽사리 이뤄지지 않자, 헨리 7세는 페란도 2세를 압박하기 위해 카탈리나에게 지급하던 생활비를 끊어버렸다. 카탈리나는 이 때문에 시녀들에게 월급을 제대로 주지 못하고, 스페인에서 가져온 낡은 옷을 입고 지내야 했으며, 보석과 식기를 팔고 돈을 빌려가며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 등 무척 궁핍하게 지내야 했다. 페란도 2세는 간간히 생활비만 보내줄 뿐 딸이 스페인으로 돌아오도록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고, 나중에는 딸을 잉글랜드 주재 스페인 명예 대사로 선임해 그곳에서 계속 지내게 했다. 한편, 헨리 왕자는 아버지의 압력에 따라 약혼이 자신의 동의 없이 주선되었다고 선언해야 했다.

4. 초기 통치

1509년 4월 21일, 헨리 7세가 52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18세의 헨리 왕자가 잉글랜드의 새 군주 헨리 8세로 등극했다. 전임인 헨리 7세가 가혹한 징세로 인기를 많이 깎아 먹었던 탓에[1] 젊은 국왕 헨리 8세가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란 기대가 높았다. 그 후 헨리 8세는 7년간 빈곤하게 지내던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별도의 지참금을 받지 않고 결혼하겠다고 선언하고, 페란도 2세의 승인을 받아냈다. 1509년 6월 11일, 헨리 8세는 그리니치 궁전에서 카탈리나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그 해 6월 24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함께 치렀다. 대관식 이틀 후, 헨리 8세는 부왕 시절 악명이 높았던 징세관 에드먼드 더들리와 리처드 엠프슨을 체포하여, 런던 탑에 가둔 뒤, 반역죄로 기소하여 1510년 참수했다.

헨리 8세 재위 첫 2년간 윈체스터 주교 리처드 폭스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워럼이 국정을 이끌었지만, 1511년부터는 잉글랜드 추기경 토머스 울지가 실권을 장악했다. 같은 해 교황 율리오 2세가 이탈리아를 노리는 프랑스에 대항하여 신성 동맹을 선포하자, 헨리 8세는 페란도 2세가 이끄는 스페인, 막시밀리안 1세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오스트리아 대공국)과 함께 이에 가담했으며, 프랑스에 대항하여 스페인에 상호 지원을 약속하는 웨스트민스터 조약에 서명했다.

1513년 6월 30일, 헨리 8세는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 잉글랜드 병사 11,000명을 거느리고 칼레로 진군했다. 헨리 8세가 부재한 동안에 카탈리나 왕비가 섭정으로서 잉글랜드와 웨일스를 대신 통치했다. 토머스 울지가 조직한 이 군대에는 기병, 포병, 보병, 궁수병 등 모든 병과가 포함되었으며, 갑옷을 더욱 효과적으로 뚫을 수 있도록 철촉 화살을 장비했다. 잉글랜드군은 아르투아 백작령에 속한 테루안으로 진군했다. 슈루즈버리 백작 조지 탈보트가 선봉대 8,000명을 지휘해 먼저 진군하여 테루안을 포위 공격했지만, 앙투안 드 크레키가 이끄는 수비대의 결사적인 항전에 가로막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해 8월 13일 에르쉬르라리스에서 막시밀리안 1세와 회동한 헨리 8세는 테루안을 공략할 방안을 논의했다.

자크 드 라 팔리스 원수가 지휘하는 8,000 가량의 프랑스군은 새벽에 포위군을 기습 공격해 큰 타격을 입혀서 테루안을 구원하려고 했지만, 잉글랜드 정찰병들이 이들을 발견하고 헨리 8세에게 보고했다. 이에 헨리 8세는 1,1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선봉대를 파견하고, 그 뒤를 이어 10,000 ~ 12,000명의 보병을 파견했으며, 막시밀리안 1세도 기병 2,000명을 파견했다. 이후 8월 16일에 벌어진 기나가트 전투에서, 막시밀리안 1세와 헨리 8세의 연합군은 프랑스군 3,000명을 죽이거나 생포했고, 군기 9개를 노획했으며, 금박을 입은 귀족 21명을 생포했다. 이렇게 프랑스 구원군을 성공적으로 격파한 연합군은 8월 22일 테루안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얼마 후, 스코틀랜드 사절이 찾아와서 자국과 동맹을 맺은 프랑스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면 잉글랜드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헨리 8세가 스코틀랜드를 모욕하는 발언을 쏟아내며 묵살하자,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는 1513년 8월 24일 4만 2천 병력을 이끌고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하여 노럼 성과 에탈 요새, 포드 요새 등 4개 성을 재빨리 공략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서리 백작 토마스 하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 2만 6천 명이 9월 9일 스코틀랜드군의 보급로를 위협하고자 북상하자, 제임스 4세는 이들을 물리치러 출진했다. 이후 벌어진 플로든 전투는 스코틀랜드의 재앙이었다.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 알렉산더 스튜어트, 백작 9명, 귀족 14명, 장병 1만 7천명이 전사했다. 잉글랜드군의 사상자는 1,500명에 불과했다고 전해진다. 제임스 4세는 항복을 거부하고 처절하게 저항하다가 화살에 턱을 맞고 미늘창에 손을 베이고 목을 찔려 사망했다. 제임스 4세의 유해는 잉글랜드군에 발견되어 런던으로 옮겨졌다. 당시 잉글랜드의 섭정이었던 카탈리나 왕비는 남편에게 제임스 4세의 망토를 보내면서 아래의 서신을 덧붙였다.
"폐하께서는 제가 약속을 어떻게 지켰는지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폐하의 깃발에 대한 보답으로 왕의 망토를 보내드리기 때문입니다. 제가 직접 폐하께 망토를 전달하고 싶었지만, 잉글랜드군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보상을 받는 것보다는 평화롭게 지내는 편이 더 나았을 겁니다."

1513년 9월 23일, 투르네 수비대는 잉글랜드군에게 항복했다. 헨리 8세는 10월 2일 투르네 대성당에서 미사에 참석하고 많은 지휘관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이후 헨리 8세는 투르네 총독으로 제4대 마운트조이 남작 윌리엄 블런트를 선임한 뒤 잉글랜드로 귀환했다. 이후 신성 동맹을 맺었던 다른 세력들이 프랑스와 평화 협약을 맺자, 헨리 8세는 1514년 여동생 메리 튜더를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와 결혼시키고, 투르네를 프랑스에 돌려주기로 했다. 스페인의 적수인 프랑스와 결혼 동맹을 맺은 것에 발끈한 페란도 2세가 강하게 항의하면서 양국의 사이가 나빠지자, 헨리 8세는 카탈리나와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는 방안을 고려했다. 하지만 1515년 프랑수아 1세가 프랑스의 새 국왕이 된 뒤 팽창주의적 행보를 보이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적대감이 다시 고조되자, 헨리 8세는 페란도 2세와 화해했다.

한편, 16세기 초 셀림 1세 치하의 오스만 제국이 급격하게 팽창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교황 레오 10세는 모든 유럽 국가들 사이에 5년간의 휴전을 확보하고 오스만 제국에 맞설 십자군 결성을 맺기를 희망했다. 잉글랜드 추기경이자 재상인 토머스 울지는 교황의 의중을 파악하고 기존에 프랑스와 논의하던 휴전 협상을 유럽 전역에 확대하는 걸 주도했다. 1518년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휴전 협약이 런던에서 체결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는 헨리 8세와 프랑수아 1세가 합의한 조약에 서명하도록 초대받았으며,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나머지 유럽 대륙 국가들도 나중에 조약에 참여하는 걸 권유받았다. 이렇게 성립된 조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1. 서명국 간의 불가침을 약속한다.
2. 제3자의 공격에 대해 상호방위를 약속한다.
3. 서명국간의 모든 분쟁은 평화적으로 해결한다.
4. 서명국 중 어느 한 국가라도 협정을 위반할 경우, 다른 모든 국가는 힘을 합쳐 대응한다.
5. 교황은 결성된 연맹의 대표를 맡는다.

1519년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한 후, 헨리 8세는 공개적으로는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토머스 울지는 독일 선제후들에게 헨리 8세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세우라는 로비 활동을 은밀히 벌였다. 그러나 1519년 황제선거에서 선제후들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로 선출했다. 이후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는 서로를 꺽기 위해 전쟁을 서슴지 않는 한편, 헨리 8세를 회유하려고 시도했다. 프랑수아 1세는 1520년 5월 또는 6월에 칼레 인근의 기네와 아르드르 사이의 초원에서 소위 금빛 천의 들판으로 알려진 회담을 열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궁전 모두 서로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금박, 금 자수 천, 악세서리 등으로 천막과 부스를 장식하고 참석자들은 세련된 옷을 차려입는 등, 이 회담의 규모는 무척 컸고 호화로웠다. 회담의 목적은 두 왕국 간의 적대 행위를 종식하는 동시에 카를 5세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는 것이었다. 카를 5세는 이에 질세라 잉글랜드 켄트주에 호화로운 사절단을 보내 막대한 선물을 보내면서 역시 동맹을 제안했다.

헨리 8세는 두 강대국 중 한 국가와 손잡고 다른 국가와 적대하는 걸 망설였고, 중재자로서 두 국가간의 화해를 도모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1522년, 헨리 8세는 프랑수아 1세가 아키텐 영토 일부를 돌려달라는 요구에 불응하자, 카를 5세와 동맹을 맺기로 했다. 그 해 6월 16일 윈저에서 체결된 조약에서, 잉글랜드와 스페인은 프랑스에 대한 공동 공격을 개시하기로 했고, 각각 최소 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기로 했다. 또한 카를 5세는 프랑스와의 갈등으로 인해 잉글랜드가 잃을 수 있는 수입을 보상하고, 과거에 진 빚을 갚기로 합의했다. 헨리 8세는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당시 외동딸이었던 메리 공주를 카를 5세와 결혼시키려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그 해 7월, 잉글랜드군은 칼레에서 출격해 브르타뉴와 피카르디로 쳐들어가서 시골 지역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신성 로마 제국과의 전쟁이 급했던 프랑수아 1세는 이에 대응하지 않았다. 헨리 8세 역시 프랑스 내 잉글랜드의 옛 영토를 획복하는 데 필요한 군자금을 카를 5세가 대주길 꺼리자 더 이상 공세를 벌이지 않았다.

1525년 2월 24일, 파비아 전투에서 카를 5세의 군대가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프랑수아 1세를 생포했다. 이 소식을 접한 헨리 8세는 지금이야말로 잉글랜드 왕들이 오랫동안 주장해 온 프랑스 왕위를 차지할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그러나 프랑스를 정복하기 위한 대규모 군자금이 없었기에, 의회에 80만 파운드의 자금을 마련해야 하니 특별세를 부과하는 걸 승인하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의회는 1522~23년 전쟁 당시에 부과된 '대출'이 상환되지 않았고, 특별세 부과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위험한 수준에 달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이에 헨리 8세는 울지에게 전쟁 자금을 마련할 방안을 고안하라고 명령했고, 울지는 '자선(benevolence)'을 부과하기로 했다. 이 세금은 평신도 재산의 1/6에서 1/10, 성직자 재산의 1/3에 부과되었다. 의회에 상정되지 않고 왕의 명령에 따라 곧바로 부과되었기 때문에, 의원들은 자기들의 동의를 거치지 않은 특별세 부과에 강하게 반발했고, 백성들 역시 분노했다. 서퍽에서 납세자 파업과 봉기가 일어났고, 에식스와 캠브리지셔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특히 주요 무역 도시인 라벤햄에 1만에 달하는 봉기군이 집결하기도 했다. 봉기는 서퍽 공작 찰스 브랜던과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에게 진압되었지만, 여론은 여전히 매우 불안했다.

여기에 런던에서도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헨리 8세는 요구액을 40만 파운드로 줄였다가 결국 계획을 백지화하기로 했으며, 주민들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1523년에 부과된 보조금 지급액을 줄이기로 했다. 5월 말, 봉기 주모자들은 성심원(Star Chamber)에 끌려가 사면을 받았다. 울지는 과시적인 화해 의식을 주관하며 왕에게 서퍽의 봉기 지도자들을 사면해달라고 청원했고, 심지어 그들이 당한 시간을 보상하기에 충분한 금과 은화까지 제공했다. 그 결과 민심은 수습되었지만, 이 일은 울지가 헨리 8세의 뜻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첫 번째 사례였으며, 그에 대한 민중의 반감이 강화되는 게기로 작용했다.

전쟁 자금을 마련하는 데 실패한 토머스 울지는 차선책으로 프랑스와 협상을 시작했고, 프랑수아 1세가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프랑스의 섭정을 맡은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인 사보이아의 루이즈와 1525년 8월 30일에 모어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잉글랜드는 랑스에 대한 일부 영토 주장을 포기하는 데 동의했고, 그 대가로 프랑스로부터 연간 2만 파운드의 연금을 받았다. 프랑스는 메리 튜더가 지참금으로 줘야 할 돈을 탕감해주기로 했다. 또한 프랑스 정부는 헨리 8세와 울지의 요구에 따라 당시 프랑스에 체류 중이었던 제2대 올버니 공작 존 스튜어트가 스코틀랜드로 귀환하는 걸 막기로 했다. 그리고 잉글랜드는 프랑수아 1세의 석방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울지는 이를 통해 스코틀랜드가 프랑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올버니 공작의 섭정을 받으면서 프랑스와 완전한 동맹이 되는 걸 저지하려 했다.

한편, 헨리 8세는 신성 로마 제국 내부에서 발발한 종교 개혁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1521년, 그는 토머스 울지 추기경과 대법관 토머스 모어의 도움을 받고 <일곱 성사의 옹호>(Assertio Septem Sacramentorum)를 발간해 마르틴 루터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 논문은 교황 레오 10세에게 헌정되었으며, 레오 10세는 1521년 10월 헨리 8세에게 Fidei Defensor (신앙의 수호자) 칭호를 수여했다. 1530년대에 헨리 8세가 가톨릭 교회와 결별한 후 교황청은 그에게 파문을 선고하며 이 칭호를 취소했지만, 잉글랜드 의회는 그의 상속인들에게 이 칭호를 대대로 수여하기로 결의했다. 이 칭호는 오늘날에도 영국 군주제에서 사용되고 있다. 마르틴 루터는 이에 대응해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에 대한 반박문>(Contra Henricum Regem Anglie)을 지어 헨리 8세의 주장을 반박했고, 토머스 모어는 이에 대응해 <루터교회에 대한 응답>(Responsio ad Lutherum)을 지어 루터의 주장을 재반박했다.

5. 아라곤의 카탈리나 왕비와의 결혼 무효 분쟁

헨리 8세는 카탈리나 왕비와의 사이에서 최소 7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 중 유아기를 무사히 넘긴 자식은 딸 메리 튜더 뿐이었다. 헨리 8세는 메리 불린과 엘리자베스 블런트를 포함한 여러 여인을 정부로 두었고, 엘리자베스 블런트와의 사이에서 사생아이자 초대 리치먼드 백작이며, 나중에 서머셋 공작이 되는 헨리 피츠로이를 낳았다. 1526년, 카탈리나가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게 분명해지자, 헨리 8세는 메리 불린의 여자 형제이자 카탈리나 왕비의 시녀앤 불린에게 접근했다. 앤 불린이 정부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신을 왕비로 삼아달라고 요청하자, 헨리 8세는 이에 따라 카탈리나와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헨리 8세의 유일한 적장녀인 메리 공주를 당시 관습대로 외국 왕가에게 시집보내면 하나 남은 계승권이 외국에 넘어가며,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헨리 8세가 죽을 경우, 헨리 7세 치세 이전 근 30여년 간 벌어졌던 왕위 계승 다툼인 장미전쟁이 재현될 수도 있었다. 자식이 없어서 왕조가 끊기거나 아들 없이 딸만 있어서 가문의 영지가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일은 유럽 세계에서 종종 있는 일이지만, 여계 계승은 남자 계승자가 없을 경우 예외적으로 두는 수단이었고, 그나마도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경우는 보기 힘들었다. 프랑크 왕국 계통의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왕국에서는 살리카법이 엄격하게 적용되어 남계가 절손되면 상위 군주에게 영지가 몰수되거나 아주 먼 친척에게 새로 분봉되었다. 프랑크 왕국 계통이 아닌 유럽 국가에서도, 딸에게 무사히 물려주는 경우보다 후계자가 어리거나 여성인 경우 무력으로 찬탈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렇듯 앤 불린에 대한 사랑과 남성 후계자를 어떻게든 얻어야 하는 정치적 필요성 때문에, 헨리 8세는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사절을 보내 카탈리나와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카탈리나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하는 건 자신의 결혼 생활이 "하느님이 보시기에 그릇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카탈리나는 본래 그의 죽은 형 아서 튜더의 아내였으므로, 자신이 그녀와 결혼한 것은 형수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레위기 20장 21절의 말씀을 위배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헨리 8세는 교황청에 비서 윌리엄 나이트를 보내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결혼을 허락한 율리오 2세의 교서가 기만을 통해 얻어졌으므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7세사코 디 로마 이후 카탈리나 왕비의 조카인 카를 5세에게 사실상 포로 생활을 강요받고 있었기에, 헨리 8세의 요구를 들어주기 힘들었고, 결국 나이트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그 후 토머스 울지가 왕의 명에 따라 스티븐 가디너와 에드워드 폭스를 로마로 파견해 교황청을 설득하려 했지만, 단지 소송 제기를 허가하는 위임장을 받는 데 그쳤다. 이후 헨리 8세와 카탈리나의 결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결성된 위원회는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을 승인한 교황 칙서는 그 근거가 되는 주장이 허위로 판명될 경우 무효로 선언될 것이라고 결정했다. 예를 들어, 결혼이 영국-스페인 동맹 유지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는 주장이 허위로 판명될 경우, 해당 칙서는 무효 처분을 받을 것이었다.

1528년, 교황 특사인 로렌초 캄페치오 추기경과 토머스 울지 추기경이 공동 의장을 맡아 헨리 8세의 결혼 문제에 관한 재판을 시작했다. 재판 중에 로체스터 주교 존 피셔를 포함한 잉글랜드 주교들의 서면 의견이 낭독되었는데, 그 내용은 왕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존 피셔는 나중에 자신의 증언이 위조되었으며, 본인은 결혼 무효에 단호히 반대하고, 세례 요한의 이혼 불가 원칙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또한 카탈리나 왕비는 아서 튜더와의 성적 결합이 성사되지 않았기에 결혼이 성립되지 않았고, 따라서 헨리 8세와의 결혼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조사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다.

헨리 8세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가 부족했고, 카탈리나 왕비와 존 피셔의 확고한 입장 때문에, 캄페치오는 재판을 연기하고 심리를 로마로 옮겼다. 그 후 교황청이 처리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일상적인 법원 절차에서 결혼을 무효로 하려는 시도는 가망이 없어졌다. 이렇듯 자신의 뜻이 제대로 먹히지 않고, 교황청이 속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은 채 시간을 끌기만 하자, 헨리 8세는 갈수록 초조해졌다. 1529년, 교황청과의 협상을 맡은 잉글랜드 추기경이자 재상 토머스 울지가 교황의 허가를 끝내 받아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은 끝에, 울지를 교황의 권위를 왕관 위에 둔 혐의로 재판에 기소했고, 울지는 1530년 11월 반역죄로 기소된 뒤 런던으로 소환되던 중 객사했다.

1529~1530년, 런던 주교이자 헨리 8세의 개인 사제인 존 스토클리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대사로 파견되어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자신과 카탈리나 왕비의 결혼을 취소하기 위한 추가 지원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헨리 8세는 가톨릭과의 결별을 감행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는 걸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6. 가톨릭과의 결별

1529년, 헨리 8세는 자신의 입장에 동조할 여론을 확보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다. 일명 '종교 개혁 의회'로 일컬어진 이 의회는 1529년부터 1536년까지 열렸으며, 교회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가진 인사들을 한 곳에 모았다. 성직자가 평신도를 교회 법정에 소환할 수 있는 특권에 반감을 품은 일반 변호사들도 있었고, 마르틴 루터의 영향을 받아 기존의 가톨릭 신학에 적대적인 인사들도 있었다. 울지의 후임 재상으로 부임한 토머스 모어는 마르틴 루터 이래로 날로 확산되어가는 이단을 뿌리뽑기 위한 새로운 법률 제정을 원했다. 변호사이자 의원인 토머스 크롬웰은 의회를 이용하여 교회에 대한 왕의 우월성을 확립하고, 루터의 신학을 가미한 새로운 교리를 잉글랜드에 퍼뜨려서 교회와 성직자들의 영향력을 약화하길 희망했다.

처음에 의회는 교회 수수료, 성직자 생계비 지불, 성소를 통제하는 등의 소소한 법안을 통과했다. 하지만 카탈리나와의 결혼 무효 조치를 교황으로부터 받아낼 가망이 없어지자, 헨리 8세는 국내 성직자들을 압박해 카탈리나를 왕비에서 끌어내리는 조치를 받아들이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처음에 주교 8명과 다른 성직자 7명을 프레무니레[2] 혐의로 기소했고, 뒤이어 프레무나레를 위반한 성직자 전체를 상대로 대규모 소송을 제기하기로 했다. 1531년 1월 24일, 캔터베리 의회에 참석한 성직자들은 왕의 사면을 받는 대가로 10만 파운드에 달하는 벌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그리고 2월 7일에 의회는 다음 5개 조항에 동의하라는 왕의 지시를 받았다.
1. 성직자들은 헨리 8세를 잉글랜드 교회와 성직자의 유일한 보호자이자 최고 수장으로 인정해야 한다.
2. 왕은 그의 신하들의 영혼에 대한 책임을 맡는다.
3. 교회의 특권은 왕의 특권과 왕국의 법률을 훼손하지 않는 경우에만 유지된다.
4. 국왕은 프레무니레 법령을 위반한 성직자들을 사면한다.
5. 평신도들도 왕의 사면을 받는다.

절대군주인 헨리 8세의 분노를 사고 싶지 않았던 의원들은 1531년 3월 8일에 왕이 제시한 5개 조항에 동의했고, 같은 해에 성직자 사면법을 통과했다. 그 후 5월 15일에는 의회가 왕의 동의 없이 교회법을 제정할 권한을 포기하게 하기로 했고, 이는 1533년 의회가 교회법을 포함한 법률을 제정할 때 왕의 동의가 필요하며, 의회에서 통과된 법률이 국법이나 왕실의 특권과 모순될 때 무효로 처리된다는 일명 '성직자 복종법' 반포로 이어졌다. 토머스 모어는 이 흐름에 반발하여 5월 16일 대법관 직위에서 사임했고, 토머스 크롬웰이 헨리 8세의 수석 장관을 맡아서 국정을 이끌었다.

1533년 1월 25일, 헨리 8세는 임신한 앤 불린과 비밀리에 결혼했다. 그는 앤 불린이 아들을 곧 낳을 거라 확신하고, 카탈리나와의 결혼을 조속히 무효로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교황이 모든 교회 문제에 대한 최종 권위자였기 때문에, 교황의 허락이 없는 한 결정이 지연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의회는 1533년 4월 첫째 주에 왕의 명령에 따라 '항소 금지법'을 반포했다. 이에 따르면, 종교 문제나 기타 문제에 대해 로마 교황에게 항소하는 것을 금지하며, 국왕은 잉글랜드, 웨일스, 그리고 기타 지역에서 모든 법적 최고 권위자로 받들어졌다. 이 법안을 어기고 교황에게 항소하고 그의 판결을 따르는 것은 반역자로 간주되어 엄벌에 처해졌다.

이제 잉글랜드 왕국은 교황청을 배제하고 왕의 의지에 따라 종교 문제를 결정하는 국가로 간주되었고, 7년간 질질 끌던 헨리 8세의 카탈리나 왕비의 결혼 무효 문제는 5월 23일 의회에서 두 사람의 결혼이 하느님의 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무효 판결을 내리면서 비로소 종식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교황청은 분노해 1533년 7월 11일 헨리 8세를 파문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아랑곳하지 않고 교황의 권위를 잉글랜드에서 배제하기 위한 일련의 법안을 게속 반포하도록 의회에 압력을 행사했다. 그 결과 의회는 1533~1534년에 일련의 법안을 잇달아 반포했다.

'새로운 이단법'은 교황을 반대하는 말을 하더라도 성사주의자[3], 재침례파를 제외하고 처벌받지 않는다고 보장했다. '주교 임명법'은 잉글랜드 내 모든 주교는 교황청에 자금을 납부할 수 없으며, 오직 왕만이 주교를 임명할 수 있다고 못박았다. 만약 대성당 측이 왕의 주교 지명을 거부한다면, 프레무니레를 범한 것으로 간주하고 반역 혐의로 처벌한다고 명시했다. '첫 열매와 십일조법'은 교회 소득에 대한 세금을 교황이 아닌 왕실에게 바칠 것을 명문화했으며, '베드로의 페니와 면제에 관한 법'은 토지 소유자가 교황에게 매년 베드로의 페니를 내는 것을 불법화했고, 캔터베리 대주교가 면제와 허가를 부여하는 권한을 교황을 대신해 내리도록 했다.

1534년 11월 3일, 의회는 수장령을 반포했다. 수장령은 국왕이 잉글랜드 국교회의 유일한 '최고 수장'(supreme head)이며, 왕관은 "해당 위엄에 상응하는 모든 명예, 존엄, 우월성, 관할권, 특권, 권위, 면제, 이익 및 상품"을 향유한다고 선언했다. 한편으로, 이 법의 문구는 의회가 국왕에게 이러한 칭호를 부여한 것이 아니며, 왕에 의해 합립된 사실을 인정한다고 못 박았다. 따라서 의회는 나중에 수장령을 철회할 권리가 없었다. 헨리 8세는 수장령에서 교황과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잉글랜드 국교회와 완전한 독립을 주장했으며, 자신과 후계자들을 그렇게 독립한 국교회의 최고 통치자로서 대대로 군림하게 했다.

헨리 8세는 뒤이어 반역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수장령을 부인하고 국왕의 존엄, 직함, 또는 이름을 박탈하는 것은 반역으로 간주한다고 명시했다. 따라서 잉글랜드 종교에 대한 국왕의 통제는 절대적이었고, 왕의 조치에 반하여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려는 자들은 신속하게 처벌받았다. 전임 대법관 토머스 모어와 로체스터 주교 존 피셔는 수장령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가 반역법이 적용되어 1535년 6월 22일과 7월 6일에 런던 탑의 타워 힐에서 참수당했다. 1537년, 아일랜드 의회에서도 잉글랜드 국왕과 상속인 및 후계자가 아일랜드 교회의 최고 수장이 되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이리하여 헨리 8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잉글랜드에 이어 아일랜드에서도 종교에 관한 절대 권위자로 군림했다.

또한 헨리 8세는 1536년 2월에 <수도원폐쇄령>(Act for the Dissolution of the Lesser Monasteries)을 의회에서 승인했다. 해당 법의 내용들을 뜯어보면 다음과 같다.[참조1]
  • 해당 법이 공포되기 1년 전에 이러한 조치가 취해진 수도원들도 이 법에 의해 적법한 것으로 취급.
  • 연 자산 가치 200파운드 이하인 수도원의 모든 자산을 국유화한다.[5]
  • 왕은 이렇게 확보한 자산을 헛되이 쓰거나 사사로이 취급하지 않는다.[영문1]
  • 왕이 국유화한 수도원의 원장의 채무를 구제한다.[영문2]
  • 국유화한 수도원의 원장에게는 연금이 지급되며 수사와 수녀들은 새출발지원금을 받거나[영문3], 보다 대규모의 수도원으로 옮겨야 하며, 이로 인해 수도원을 옮기려는 수사/수녀들은 반드시 받아줘야 한다.[영문4]

7. 카탈리나 왕비의 죽음과 앤 불린의 몰락

1536년 1월 7일, 왕비 직위에서 폐위된 뒤 킴볼튼 성에서 힘겹게 지내던 카탈리나 왕비가 사망했다. 그녀를 부검한 의사가 심장에 종양이 시커멓게 있었다는 기록을 남긴 걸 봤을 때, 에 걸렸을 가능성이 높다. 카탈리나는 죽기 전에 헨리 8세에게 "당신이 내게 저지른 모든 것을 용서하며, 메리를 잊지 말아달라"라고 호소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헨리 8세는 결혼 무효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7년간 버텼던 카탈리나를 몹시 미워했기에 무시했다. 게다가 딸 메리가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했으며, 앤 불린과 함께 축하의 의미로 노란 옷을 입고 공식 석상에 나타났다.

카탈리나의 사망으로 앤 불린의 입지는 반석 위에 오르는 듯 했으나, 그녀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헨리 8세의 총애를 잃기 시작했다. 딸 엘리자베스를 낳은 후, 앤은 2번 임신했지만 한 번은 유산, 다른 한 번은 사산으로 끝났다. 이에 헨리 8세는 또 다른 시녀인 제인 시모어에게 관심을 돌렸고, 이내 제인 시모어와 결혼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카탈리나와 이혼하는 과정에서 오랜 법정 투쟁을 벌인 선례를 겪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앤 불린을 신속하게 처단하고 제인 시모어를 왕비에 앉히기로 했다.

1536년 5월, 앤 불린은 다섯 남자와 간통한 혐의, 동생인 로치포드 자작 조지 불린과 근친상간을 일삼은 혐의, 왕을 모욕하고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을 심리한 법정은 앤 불린의 외삼촌인 제3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가 주재했다. 후대 학자들은 이 모든 혐의가 조작되었다고 간주하지만, 이미 유죄를 내리기로 정해졌기 때문에 앤은 구제받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앤과 그녀의 동생은 참수형을 선고받았고, 앤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주장된 나머지 네 남자는 교수형, 익사형 및 사지 절단형을 선고받았다. 로치포드 자작은 재판이 끝나자마자 참수형에 처해졌고, 나머지 네 피고인은 참수형으로 감형되었다. 앤 불린은 5월 19일 런던 탑에서 참수된 뒤 성 피터 애드 빈큘라 성당에 안장되었다. 앤 불린의 아버지인 윌트셔와 오몽드 백작 토머스 불린은 궁정에서 추방된 뒤 1539년에 병사했다.

1536년 앤 불린이 처형된 지 며칠 후, 헨리 8세는 제인 시모어를 3번째 왕비로 맞이했다. 1536년에 반포된 왕위 계승법은 헨리 8세의 다른 딸들인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제외하고 제인의 아들들이 왕위 계승 서열에 포함되도록 선언했으며, 국왕은 장래에 왕위 계승 서열을 직접 결정할 권한을 가졌다. 제인은 1537년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왕자를 낳았지만, 불과 몇 주 만에 산욕열에 시달린 끝에 사망했다. 헨리 8세는 소중한 아들을 낳아줬던 제인의 죽음에 깊이 슬퍼했고, 이후 그녀를 항상 "진정한 아내"로 여겼다.

8. 은총의 순례

수도원의 통폐합이 집행될 무렵, 잉글랜드 북부에서는 흉작과 그로 인한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이 때문에 여러 부작용이 야기되었다. 수도원은 잉글랜드 북부 농민들의 일상생활에 깊이 관여했다. 종교적 예배 외에도 지역 사회의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봤고, 여행자에게 보호와 환대를 제공했으며, 일자리를 제공하는 등 중요한 경제적 요인이기도 했다. 또한 농촌 수도원은 종종 가난한 가족들이 교회에 속한 밭을 경작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역할을 하던 수도원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으면서 지역 경제와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또한 다양한 전통 종교 공휴일이 취소된 점도 주민들의 불만을 샀다. 그리고 <An Act Concerning the Uses and Wills>를 통한 부동산 소득 제한은 기득권의 불만을 야기했으며, 여러 교구를 소유하던 주교들은 한 교구만 빼고 수입을 완전히 몰수하며, 기존 교구 수입의 10%를 또 바치라는 법률이 통과된 점도 성직자들의 강한 불만을 샀다.

1536년 9월 말, 링컨셔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처음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는 카이스터, 링컨, 혼캐슬로 확산되었다. 반란군은 자신들의 불만 사항을 요약한 여러 조항을 작성해 관리들에게 보냈다. 헨리 8세는 이를 평정하기 위해 초대 서퍽 공작 찰스 브랜던을 파견했다. 하지만 그가 링컨셔 반란을 진압하느라 분주하던 10월 8일, 요크셔의 베벌리 타운에서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런던에서 요크셔로 돌아오는 중이었던 요크셔의 저명한 변호사 로버트 애스크를 붙잡은 뒤 그들과 함께 할 것을 맹세하게 했다. 10월 10일, 애스크는 이스트 라이딩에서 봉기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가 맹세에 매여 있었는지, 반란에 강제로 참여한 건지, 아니면 신념에 따라 반란군에 합류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애스크는 경험 많은 변호사로서, 왕에 대한 어떠한 반항도 대반역죄에 해당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헨리 8세의 분노를 사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는 모든 반란군에게 하느님, 왕, 그리고 평민에게 충성하고 교회를 지지하겠다고 맹세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종교에 중점을 두고 대중의 분노를 왕의 눈과 귀를 흐린 고문들, 특히 많은 사람이 수도원 폐쇄의 원인으로 비난했던 토머스 크롬웰에게 향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요크로 진군하는 동안 순례라는 종교적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반군이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10], 가시관, IHS[11], 성체성사에 쓰이는 잔이 그려진 깃발을 들었다.

순례자들의 주된 목표가 옛 교회 질서의 회복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양한 성직자 분파의 지원을 받았다. 나레스버러의 삼위일체 수도원 회원인 로버트 애쉬튼은 이스트 라이딩에서 일어난 봉기 소식을 곳곳에 퍼뜨리며 주민들의 호응을 유도했다. 요크의 도미니코회 전 원장인 존 피커링은 반란군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베벌리의 프란치스코회는 순례자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고, 이미 수도원이 해체된 수도회들은 공식적으로 애스크를 따르는 동료 사제들에게 수도원과 토지가 반환되길 희망한다는 뜻을 표명했다.

1536년 10월 13일, 이스트 라이딩과 웨스트 라이딩의 연합 반란군 9천 명이 요크로 진군했다. 이윽고 순례자들이 요크에 도착했을 때 그 수는 2만 명으로 늘어났고, 그들 중 다수는 말을 타고 있었다. 여기에 이스트 앵글리아와 노퍽에서도 은총의 순례에 가담하려는 봉기가 일어났다. 10월 16일, 요크 시민들이 봉기군을 환영해 성문을 개방하면서, 봉기군은 요크에 무혈 입성했다. 애스크는 요크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낭독했다.
"우리가 착수한 이 순례는 그리스도 교회, 잉글랜드 왕국, 우리의 최고 군주이신 국왕, 귀족과 국민 모두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며, 폐하께 이 왕국의 잘못된 것들을 개혁해 달라고 청원하기 위한 것이다."

애스크는 순례를 가능한 한 평화롭게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약탈을 방지하기 위해 일반 보병이 성벽 안에 머무르는 것을 금지했으며, 순례자들이 음식, 의복과 같은 필수품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요크에 있던 2개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다시 열도록 하는 등, 추방된 수도자수녀들이 수도원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했고, 수도원을 폐쇄했던 관리들을 축출했으며, 가톨릭 의식을 재개했다.

한편, 리치먼드셔, 세드버그, 니더네일, 매샴셔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봉기가 일어났다. 봉기군은 저볼스 수도원을 접수했고, 패쇄되었던 커버럼 수도원을 다시 열었다. 노스 라이딩 반군의 여러 회의가 리치먼드셔에서 열렸고, 그곳에서 젠트리 계층 구성원들도 지도자로 선서했다. 특히 훗날 헨리 8세의 여섯 번째 왕비가 될 캐서린 파의 남편인 제3대 라티머 남작 존 네빌이 봉기군의 압력에 굴복하여 그들과 뜻을 함께 하겠다고 맹세했다. 라티머 남작이 소유한 스네이프 성은 주요 도로를 통제하고 북쪽으로 가는 길을 확보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리치먼드에서 열린 회의에서, 봉기군의 계획이 조정되었다. 그들은 더럼 대성당의 유물인 성 커스버트의 깃발을 탈취하여 순례 행렬의 선두에 세웠다. 바너드 성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개방되었다. 10월 18일, 그들은 병력 대부분을 요크의 로버트 애스크에게 보냈다. 10월 19일, 헐 시도 봉기군에 성문을 개방했다. 초대 다아시 남작 토머스 다아시는 폰트프랙트 성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반군을 저지할 준비를 했다. 그는 왕에게 보낸 서신에서 성의 방어가 형편없어서 공격자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이후 시민들이 봉기군 편에 설 의사를 명확히 보이자, 그는 10월 21일 로버트 애스크와 회동한 후 폰트프랙트 성을 개방하고 순례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가 있는 깃발을 배포했다. 다아시는 편을 바꾼 뒤 은총의 순례의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잉글랜드 북부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헨리 8세는 격노했다. 역사가들은 로버트 애스크가 어떤 식으로든 왕의 전복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데 동의하지만, 헨리 8세는 자신이 기획한 정책에 반발해 봉기를 일으킨 것만으로도 중대한 반역이라고 여기고 반군의 요구 사항을 절대로 들어주지 않으려 했다. 그는 제3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와 제4대 슈루즈버리 백작 조지 탈보트를 왕립군 사령관으로 세워서 반란군 진압을 맡겼고, 노퍽 공작의 조카 프랜시스 브라이언과 헨리 8세의 사촌인 초대 엑서터 후작 헨리 코트니를 포함한 다른 궁정 신하들도 군대에 배속되었다. 노퍽 공작과 슈루즈버리 백작은 반군이 남쪽으로 진군하는 것을 막기 위해 트랜트 강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하기로 했다.

1536년 10월 23일 노퍽 공작이 뉴어크온트렌트에 있는 동안, 슈루즈버리 백작은 더 북쪽의 폰트프랙트를 향해 이동했다. 당시 노퍽 공작의 군대는 5,000명이었고, 슈루즈버리 백작은 8,000명이었다. 반면에 폰트프랙트 성에 집결한 로버트 애스크의 봉기군은 30,000~40,000명에 달했다. 이렇듯 수적 열세가 너무도 컸기 때문에, 노퍽 공작은 강경 진압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에 반군과 협상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고, 폰트프랙트 성에 사절을 보내 평화 협상을 하자고 제안했다. 로버트 애스크는 순례자 4명을 돈캐스터로 보내 노퍽 공작에게 봉기의 이유를 설명하기로 했다. 그는 플로든 전투에서 활약해 북부 주민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면 봉기 성공에 큰 도움이 되리라 여겼다.

그 후 노퍽 공작과 사절단 4인은 휴전 협정을 맺기로 합의했고, 10월 27일 사절단 중 로버트 보우스와 랄프 엘러커가 노퍽 공작의 동의를 받아 왕에게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윈저로 파견되었다. 왕은 청원서를 읽은 뒤 청원서의 내용이 불명확하고 두루뭉실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봉기를 중단한다면 너그럽게 넘어갈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1536년 11월 21일, 순례자 협의회가 요크에서 개최되었다. 왕을 만나고 돌아온 로버트 보우스는 왕이 순례에 호의를 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로버트 콘스터블 경과 그의 추종자들은 반란을 그만두지 않으면 철저하게 보복하겠다고 위협하는 내용이 담긴 토머스 크롬웰의 서신을 공개하면서, 트렌트 강까지의 지역을 확보해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 토머스 크롬웰이 실각하고 나서야 협상에 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애스크는 왕과 즉각 협상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협의회는 그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이후 애스크는 왕에게 보낼 청원서를 좀더 명확하게 작성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1. 예외 없이 모든 순례자에게 사면을 내려달라.
2. 순례자들의 요구 사항을 논의하기 위해 북부에서 의회를 소집해달라.
3. 사생아로 격하된 메리 공주의 신분을 회복해 달라.
4. 교황의 권위를 회복해 달라.
5. 이단서를 불태우고 이단자에 대한 적절한 처벌을 내려달라.
6. 폐쇄된 수도원을 복원해달라.
7. 종교 시설 폐쇄와 관련된 다양한 의회법을 폐지해달라.
8. 트렌트 강 북쪽의 모든 사람을 위해 요크 교구의 관활권을 확장해 달라.
9. 토머스 크롬웰, 리처드 리치, 토머스 오들리를 내각에서 해임해 달라.

헨리 8세는 봉기군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고, 반란 주모자들을 어떻게든 응징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군대가 수적으로 너무도 열세했기에, 노퍽 공작은 적어도 순례자들의 요구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이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헨리 8세는 12월 6일 노퍽 공작에게 전면 사면, 휴전 연장, 순례자들의 우려를 논의하기 위한 특별 의회 소집 약속에 대한 권한을 주었다. 이러한 권한은 노퍽 공작의 입지를 강화하여 폐쇄된 수도원에 관해서도 반란군을 달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수도원을 다시 열 권한은 없었지만, 왕에게 복종한 수도원은 특별 의회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자신이 복구하겠다고 약속했다.

많은 순례자들은 노퍽 공작이 제시한 약속에 만족하지 않았고, 다시 한 번 봉기를 일으키자고 주장했다. 애스크는 그들을 간신히 달랜 뒤 12월 8일에 봉기군을 공식적으로 해산하고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가 새겨진 깃발을 내리도록 했다. 그 후 헨리 8세의 초대를 받고 그리니치 궁전에서 열린 성탄절 연회에 참석한 애스크는 왕으로부터 진홍색 벨벳 재킷을 선물받았다. 또한 왕은 전면 사면령을 내리고, 다음 의회를 요크에서 소집하고, 심지어 제인 시모어를 요크에서 왕비로 대관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애스크는 왕의 지시에 따라 순례에 대한 회고록을 썼는데, 헨리 8세가 북부 사람들의 마음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권고도 포함되었다.

1537년 1월, 로버트 애스크는 모든 것이 잘 풀렸다고 여기며 요크셔로 돌아왔지만, 상황은 곧 악화되었다. 헨리 8세는 순례자들의 정치 개입 시도를 강하게 비난하는 서신을 보냈고, 노퍽 공작은 1월 말에 헨리 8세로부터 순례자들의 맹세를 무효화하고. 헨리 8세를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며, 왕위 계승 순서 변경을 인정하고, 수도원의 해산을 인정하도록 강요하며, 이를 따르지 않는 자는 반역자로 간주해 처벌하라는 지시를 받고 돈캐스터로 향했다.

하지만 노퍽 공작이 행동에 옮기기 전, 세틀링턴의 프랜시스 비고드 경이 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헨리 8세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고, 노퍽 공작이 조만간 군대를 이끌고 순례에 참여한 이들을 학살할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약속이 이행될 때까지 북부를 장악하고 노퍽 공작을 사로잡아서 순례자의 맹세를 따르겠다는 서약을 받아내기로 작정했다.

애스크는 왕의 호의를 잃지 않기 위해 프랜시스 비고드와 재빨리 거리를 뒀다. 그는 주민들에게 비고드의 반란에 절대로 가담하지 말고 왕과의 협약을 깨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프랜시스 비고드와 그의 동지 존 헬럼을 따르는 무리 수백 명이 헐과 스카버러에서 봉기를 강행했다가 곧바로 진압되었다. 헨리 8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모든 협상과 양보를 무효로 선언했고, 노퍽 공작은 잉글랜드 북부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프랜시스 비고드의 반란에 가담한 인사 200명을 처형했다.

애스크는 동료 로버트 콘스터블, 토머스 다아시 경과 함께 노퍽 공작을 찾아가서 자신들은 프랜시스 비고드의 봉기를 막으려고 노력했으니 왕에게 잘 설명해 달라고 청원했다. 이에 노퍽 공작은 런던으로 가서 왕에게 선처를 호소하라고 권고했고, 그들은 이에 따랐다. 그러나 런던으로 향한 애스크와 콘스터블, 다아시 경은 곧바로 체포되었고, 1537년 5월 재판에 회부되었다. 라티머 경과 제6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은 반군의 위협에 강제로 편입된 것이 인정되어 무죄를 선고받았다. 반면 로버트 애스크, 로버트 콘스터블, 토머스 다아시, 존 헬럼, 프랜시스 비고드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다아시는 타워 힐에서 참수되었고, 비고드는 타이번에서 처형되었다. 콘스타블과 헬럼은 헐에서 처형되었으며, 로버트 애스크는 1537년 7월 12일 요크로 보내졌고, 요크 성의 클리퍼드 타워에서 온종일 쇠사슬에 매달렸다가 타워 밖에 세워진 사형대로 끌려간 후 참수형에 처해졌다.

은총의 순례 봉기가 진압된 뒤 헨리 8세는 봉기를 지원한 성직자들에 대한 보복에 착수했다. 그는 수도원과 수도회가 자신에 대한 저항 세력이라고 확신하고 노퍽 공작에게 수도자들을 상대로 조치를 취하라는 명확한 명령을 내렸다. 반란에 가담했던 수도원장들은 세속 반역자로 취급되어 처형되었고, 수도원의 재산은 왕실의 소유가 되었다.

이 무렵 교황 바오로 3세가 잉글랜드 추기경 레지널드 폴에게 기회가 되면 잉글랜드로 건너가 반란군을 지원하라는 지령을 내리고 플란데런으로 파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을 접한 헨리 8세는 폴 가문을 불신했고, 1538년 일부 귀족들이 헨리 8세를 몰아내고 초대 엑서터 후작 헨리 코트니를 왕위에 올려서 가톨릭을 부흥하려 했다는 엑서터 음모에 폴 가문을 연루시켜 가혹하게 탄압했다. 이때 헨리 8세의 오촌이모였던 마거릿 폴[12]도 처형되었는데 그녀는 1886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순교자로 간주되어 시복되었다.

9. 클레베의 앤캐서린 하워드

헨리 8세는 에드워드 왕자 외에 더 많은 남자 후계자를 확보하기 위해 다시 결혼하기로 했다. 그는 폐위당한 덴마크-노르웨이 국왕 크리스티안 2세의 딸이자 밀라노 공작부인인 덴마크의 크리스티나와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작의 누이인 클레베의 앤 중 한 명을 결혼 대상으로 고려했다. 왕의 심복인 토머스 크롬웰은 루터교회의 거두인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국의 라마르크 가문과 손을 잡고 가톨릭 세력에 맞서자고 권고했고, 왕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당대 최고의 궁정 화가 한스 홀바인을 클레베로 보내 앤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이후 천연두의 흔적이 전혀 없는 모습으로 미화된 앤의 초상화를 보고 마음이 동한 데다, 크롬웰 등이 앤을 칭찬하는 말에 설득된 왕은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앤이 잉글랜드에 도착했을 때, 헨리 8세는 그녀를 보고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급기야 그녀를 "플란데런의 암말"이라고 욕했다. 하지만 루터교회 진영과 손을 잡고 가톨릭에 대항할 필요성이 컸기 때문에, 그는 별 수 없이 1540년 1월 6일 앤과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6개월 후 클레베 공국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 카를 5세의 공세로 영지 대부분을 상실했고, 루터교회 진영에서도 헨리 8세와 그가 세운 성공회에 대해 전혀 호의적이지 않자, 헨리 8세는 앤과 헤어지기로 마음먹었다.

앤은 현명하게도 왕의 혼인 무효 소송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적 결합이 이뤄지지 않았으며, 단지 왕이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이마에 입을 맞추기만 했다고 증언했다. 그리하여 결혼이 무효화된 뒤, 앤은 "왕의 여동생"이라는 칭호를 받고 앤 불린 가문의 옛 저택이었던 하버 성을 하사받았고, 이후로는 헨리 8세의 호의를 받으며 잘 지냈다. 반면에, 토머스 크롬웰은 실패한 결혼을 주선한 일로 왕의 총애를 잃고, 얼마 안가 정적들의 모함을 받고 반역 혐의로 재판도 받지 않은 채 참수형에 처해졌다.

1540년 7월 28일 크롬웰이 처형된 날, 헨리 8세는 클레베의 앤의 시녀인 캐서린 하워드를 다섯 번째 왕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후 궁정 신하 토머스 컬페퍼와의 스캔들에 휩싸였고, 헨리 8세와 결혼하기 전에 비공식적으로 사귄 적이 있었던 프랜시스 데러햄을 비서로 고용했다가 발각당했다. 캐서린 하워드를 왕비로 옹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하워드 가문을 적대시했던 토머스 크랜머는 왕비의 비도덕적인 활동에 대한 증거를 확보한 후 헨리 8세에게 보고했다. 왕은 처음에는 이를 믿지 않았지만, 크랜머에게 조사를 하도록 허가했고, 이를 통해 의혹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1541년 12월 컬페퍼와 더럼은 처형되었고, 캐서린 하워드도 유죄 판결을 받은 뒤 1542년 2월 13일 결혼 무효 선고를 받은 직후 처형당했다.

10.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1542년, 카를 5세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를 놓고 또다시 전쟁을 단행했다. 헨리 8세는 이전의 조약에 따라 자신에게 줘야 할 연금을 차일피일 미루는 프랑수아 1세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었기에, 카를 5세와 손잡고 프랑스를 침공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프랑스와 '오래된 동맹' 관계를 맺고 있던 스코틀랜드가 1513년처럼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할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국왕이자 조카인 제임스 5세에게 가톨릭과 단절하고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으라고 권고했다. 제임스 5세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그는 스코틀랜드부터 공격하기로 했다.

제임스 5세는 1542년 잉글랜드로 망명한 앵거스 백작, 총독 로버트 보우스 등이 지휘하는 대군이 국경지대에 집결하고 있다는 급보를 받자, 이에 대응해 제4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에게 1만 병력을 이끌고 국경을 경비하도록 했다. 헌틀리 백작은 적이 쳐들어오기 전에 선제 공격하려 했지만,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이 "적군이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지 않는 한 그들을 공격하지 않겠다며 거부했다. 그러다가 로버트 보우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 선봉대 3,000명이 스코틀랜드 국경을 넘어 헤든 리그로 진군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그제야 헌틀리 백작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1542년 8월 24일, 헌틀리 백작은 즉시 새볔녁에 헤든 리그로 진군한 뒤, 방심하고 있던 잉글랜드군을 급습했다. 그 결과 잉글랜드군 2,000명 이상이 전사했고 600명이 생포되었는데, 사로잡힌 이들 중에는 로버트 보우스, 윌리엄 모브레이 경, 그리고 잉글랜드 북부의 저명한 귀족 60여 명이 있었다. 다만 앵거스 백작은 말을 거세게 몰아서 겨우 탈출해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스코틀랜드군의 손실은 기록상에 전해지지 않는데 매우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스코틀랜드 진영은 임신한 마리 드 기즈 왕비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휴전을 맺자고 제안했지만, 잉글랜드 측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542년 11월 9일, 제임스 5세는 교황 바오로 3세에게 헨리 8세가 제3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를 시켜 스코틀랜드에 대한 대대적인 습격 작전을 벌여 큰 피해를 입혔다고 비난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면서 헨리 8세가 스코틀랜드를 국교회로 강제 개종시키려 하고 있으니 이를 막기 위해 지원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11월 22일, 제임스 5세는 전국에 병력 소집령을 내렸다. 스코틀랜드 보그리 인근 모튼 교회에 이 명령서 사본이 보관되었는데, 거기에는 덤프리스, 피블스, 셀커크, 호윅 출신 병사들이 동원되었다고 밝혔으며, 그들의 이동 경로가 언급되었다.

1542년 11월 24일, 15,000 ~ 18,000명에 달하는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로 진격했다. 제5대 맥스웰 경 로버트 맥스웰이 군대를 통솔했는데, 일부 사료는 그가 잠시 자리를 떠난 사이 제임스 5세의 총애를 받은 오크니 치안판사 올리버 싱클레어가 자신이야말로 제임스 5세가 선택한 총사령관이라고 선언했지만 다른 귀족들이 이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지휘 체계가 엉망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반면에, 잉글랜드군 사령관 토머스 위튼 경과 윌리엄 머스그레이브 경은 맥스웰경이 스코틀랜드군을 이끌었다고 밝혔다.

어쨌든 스코틀랜드군은 아케쇼실에서 적 기병 분견대를 물리친 뒤 아서렛 하우스 쪽으로 남하했다가 솔웨이 모스 인근의 에스크강과 모스 강 사이 습지대에 갇힌 채 잉글랜드군 3,000명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스코틀랜드군은 진흙탕에 빠진 채 적의 대규모 경기병대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20명이 전사했고, 도주하다가 수백 명이 강에 빠져 익사했으며 올리버 싱클레어 등 1,200명이 포로가 되었다. 반면에 잉글랜드군의 피해는 고작 전사 7명에 불과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로크마벤에서 열병에 걸린 채 전투 결과를 기다렸던 제임스 5세는 솔웨이 모스 전투 패배 소식을 접하자 낙담한 채 포클랜드 궁전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중병에 걸려 1542년 12월 14일에 3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 후 생후 6일밖에 안 된 외동딸 메리가 스코틀랜드 여왕에 등극했고, 제2대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이 스코틀랜드 호국경을 맡아서 국정을 대신 이끌었다. 헨리 8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이 기회에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에 귀속시키기로 마음먹었다.

1543년 7월 1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대표단은 그리니치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양국은 헨리 8세와 메리 여왕 생전, 그리고 두 사람이 사망한 후 1년간 평화를 유지하며, 메리 여왕은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6세와 결혼하며, 두 사람의 자녀가 두 나라를 통치할 권리를 누리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간의 '올드 동맹'을 깨서 스코틀랜드가 프랑스와 힘을 합쳐 잉글랜드를 위협하는 일을 방지하고, 장차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에 통합하려는 헨리 8세의 의중이 담겨 있었다.

유아 여왕을 대신해 스코틀랜드 섭정을 맡은 제2대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의 지도 아래, 스코틀랜드 의회는 그리니치 조약을 조건부로 수락했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동맹을 중요하게 여기고, 헨리 8세의 잉글랜드 국교회 강요 정책에 반감을 품고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고자 하는 스코틀랜드 내 내부 파벌의 반발이 강했기에, 에드워드 6세와 메리 여왕의 결혼은 쉽사리 성립되지 않았다. 1543년 7월, 친 프랑스 성향의 스코틀랜드 추기경 데이비드 비튼은 린리스고에서 여러 스코틀랜드 귀족 및 지주들과 함께 '비밀 결속(Secret Bond)'을 맺었다. 이 문서에 서명한 이들은 메리 여왕과 헨리 8세의 아들 간의 결혼에 끝까지 저항하며, 스코틀랜드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섭정의 전횡에 맞서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그들이 군대를 일으켜 아란 백작에 도전하자, 아란 백작은 1543년 7월 25일 에든버러와 린리스고 사이의 들판에서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과 만난 뒤 악수와 우호적인 포옹을 통해 화해했다. 그 후 그들은 커클리스턴에서 우호 협정을 체결했고, 아란 백작은 친 영국 정책과 종교 개혁을 포기하고 메리 여왕과 에드워드 왕자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기로 했다. 1543년 9월, 외교관과 첩자들을 통해 스코틀랜드 내부 분위기를 전해들은 헨리 8세는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 성문까지 로우랜드 전역을 황폐화해서 스코틀랜드를 압박할 계획을 세웠다. 1543년 12월 15일, 스코틀랜드 의회는 그리니치 조약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헨리 8세는 일방적으로 조약을 파기한 것을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전쟁은 일명 '거친 구혼'으로 일컬어지며, 헨리 8세가 사망한 지 몇년 후인 1550년까지 이어졌다.

11. 말년

1543년, 헨리 8세는 부유한 미망인인 캐서린 파와 여섯 번째로 결혼했다. 새 왕비는 헨리 8세와 종교 문제로 논쟁을 벌였는데, 왕은 성공회 신자로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칼뱅파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로 인해 입지가 위험했지만, 헨리 8세에게 복종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났다. 또한 그녀는 헨리 8세의 두 딸 메리 공주엘리자베스 공주가 아버지와 화해하도록 주선했다. 1544년, 의회는 두 공주가 서자로 낙인찍혔지만, 에드워드 왕자의 뒤를 이어 왕위 계승 서열에 오르도록 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1544년 여름, 헨리 8세는 프랑스를 침공하여 불로뉴쉬르메르를 포위해 1544년 9월 14일에 공략했다. 이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확보한 유일한 해외 영토였다. 이 도시는 아들 에드워드 6세 치세인 1550년에 프랑스에 도로 매각되었다.

헨리 8세는 말년에 허리 둘레가 137cm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비만에 시달렸다. 그의 비만은 1536년 마상창시합 도중에 허벅지 부상을 입고, 운동을 할 수 없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야외 활동을 마음껏 즐길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나이가 들수록 생활태도가 방종해졌고, 과식을 일삼으면서 고도 비만이 되어 버렸다.[13] 원래 다혈질적이고 충동적인 성미의 소유자였지만 다리를 다치기 전에는 기분이 좋을 때 그나마 너그럽고 호탕한 면모라도 있었다. 하지만 다리를 다친 후로는 짜증을 잘 내고 신경질적인 성격이 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왕비를 둘이나 참수시키고 중용했던 관리들의 목까지 베어댔기 때문에, 신하들은 언제 헨리 8세의 심기를 거슬러 목이 날아갈까 두려움에 떨었다.[14] 정서적으로도 굉장히 불안정했으며 나이가 들면서는 병으로 인해 앓아눕는 일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또한 몸 곳곳에 종기와 수포가 자라 보기에 몹시 흉했으며 악취도 지독했다. 게다가 통풍을 심하게 앓았으며 낙마로 다친 다리의 상처는 크게 악화되어 궤양으로 변해,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1547년 1월 28일, 헨리 8세는 화이트홀 궁전에서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아들 에드워드와 메리 여왕 사이의 결혼을 어떻게든 추진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일설에 따르면, 왕이 남긴 마지막 말은 "수도자들! 수도자들! 수도자들!"이었다고 한다. 사후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에드워드 6세가 9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16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섭정 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에드워드 6세의 삼촌인 에드워드 시모어가 잉글랜드 호국경에 선임되어 나라를 이끌었다.

이때 헨리 8세가 남긴 유언장의 조항에 따르면, 에드워드 6세가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할 경우, 장녀 메리 공주와 그녀의 상속인들에게 계승되며, 메리가 자식을 낳지 못할 경우 엘리자베스 공주와 그녀의 후손에게 돌아가게 했다. 마지막으로 엘리자베스의 혈통이 단절될 경우, 헨리 8세의 여동생 메리 튜더의 후손인 그레이 가문이 계승하도록 했다. 헨리 8세의 여동생 마거릿 튜더의 후손이자 스코틀랜드 통치 가문인 스튜어트 왕조는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다. 에드워드 6세는 1553년 사망하기 직전에 존 더들리 등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선왕의 유언장을 어기고 제인 그레이를 자기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에드워드 6세 사후 메리 1세가 지지자들의 지원에 힘입어 제인 그레이를 9일만에 폐위하고 잉글랜드 여왕이 되었다. 그리고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한 후, 스튜어트 가문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를 겸임했다.
[1] 대신 헨리 7세가 그렇게 세금을 왕창 걷어놓고 사치도 부리지 않고 굉장히 아껴서 써서 헨리 8세 즉위 후엔 재정적으로 넉넉할 수 있었다.[2] praemunire. 자국 군주에 대항하여 교황이나 타국 군주의 권위를 옹호하고 그들에게 개입을 호소하는 행위. 1392년 리처드 2세 치세에 반포된 뒤 오랜 세월 잊혀졌지만 헨리 8세 시기에 교황의 잉글랜드에 대한 권위를 묵살하려는 목적하에 부활했다.[3] Sacramentarians, 가톨릭의 성체변화설과 마르틴 루터의 성찬결합설 모두 부인하고, 성찬예배 때 독실한 영혼이 받고 즐길 수 있는 예수의 영혼이 성찬에 자리잡지만 어떠한 물리적 또는 신체적 현존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친 종파.[참조1] Henry Gee,'Documents Illustrative of English Church History'[5] 'ornaments, jewels, goods, chattels'도 언급된다. 즉 부동산이나 금융 자산뿐만 아니라 십자가, 성상, 촛대 등 성물들까지 싸그리 긁어간다는 뜻이다.[영문1] 'use of his majesty without spoil, waste, or embezzling the same'[영문2] his highness shall satisfy, content, and pay all and singular such just and true of the debts which are owing to any person or persons by the chief governors of any the said religious houses, in as large and ample manner as the said chief governors should or ought to have done if this Act had never been made.[영문3] 'shall have their capacities, if they will, to live honestly and virtuously solved abroad, and some convenient charity disposed to them towards their living[영문4] it is ordained by the authority aforesaid, that the chief governors and convents of such honourable great monasteries shall take and accept them into their houses, from time to time, such number of the persons of the said convents as shall be assigned and appointed by the king's highness, and keep them religiously, during their lives, within their said monasteries.[10] 전승에서 예수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입었다고 전해지는 상처[11] 예수의 이름의 축약형[12] 헨리 8세의 어머니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친사촌.[13] 특히 채소를 멀리하고 대신 독한 고기들을 마구잡이로 폭식하면서 비만이 더 심해졌다. 물론 당시 유럽 왕족귀족들이 채소가 가난한 하층민들이나 먹는 저급한 식재료라며 싫어했고, 고기를 마음껏 먹는 식생활이야말로 고귀한 습관이라고 여겼던 문화적 배경도 작용했다.[14] 물론 그만큼 헨리 8세 때 잉글랜드 국왕의 왕권이 강력해졌으며, 정점에 달했다는 뜻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