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제2대 올버니 공작 존 스튜어트 John Stewart, 2nd Duke of Albany | ||
| 이름 | 존 스튜어트 (John Stewart) | |
| 출생 | 1482년 7월 8일 | |
| 프랑스 왕국 오베르뉴 미르플뢰르 성 | ||
| 사망 | 1536년 6월 2일 (향년 54세) | |
| 프랑스 왕국 오베르뉴 미르플뢰르 성 | ||
| 배우자 | 안 드 라 투르 도베르뉴 (1505년 결혼/1524년 사망) | |
| 자녀 | 엘레노어(사생아) | |
| 아버지 | 초대 올버니 공작 알렉산더 스튜어트 | |
| 어머니 | 오베르뉴 여백작 안 드 라 투르 | |
| 직위 | 제2대 올버니 공작 | |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 올버니 공작. 제임스 5세 치세 초기 섭정을 맡았다가 제임스 5세의 모후인 마거릿 튜더의 정변으로 축출되었다.2. 생애
1482년 7월 8일, 프랑스 왕국 오베르뉴 미르플뢰르 성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알렉산더 스튜어트는 초대 올버니 공작이자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2세의 아들로, 형 제임스 3세와 분쟁을 벌이다가 숙청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어머니 안 드 라 투르는 불로뉴 백작 베르트랑 6세의 딸이다. 1485년 8월 7일, 아버지 알렉산더가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주최한 기사 시합에 참석했다가 사고를 당해 치명상을 입고 곧 사망했다. 그 후 그는 어머니에게 양육되었고, 1487년 어머니의 재혼 상대인 샹브르 백작 루이 드 세이셀의 양육을 받았다.1488년 제임스 3세가 사망한 뒤, 존은 제2대 올버니 공작의 칭호를 인정받았다. 당시 스튜어트 왕조는 손이 귀했기 때문에, 그는 1504년부터 스코틀랜드 왕국의 추정 상속인 또는 왕위 계승 서열 2위로 인정받았다. 1505년 7월 8일, 존은 사촌인 오베르뉴 여백작 안 드 라 투르 도베르뉴와 결혼했다. 그녀는 1501년에 사망한 존의 외삼촌인 오베르뉴 백작 장 3세의 장녀이자 상속녀였다. 이리하여 존은 1524년 안이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에서 오베르뉴 백작으로서의 지위와 권위를 누릴 수 있었다.
1513년,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가 플로든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후 제임스 4세의 17개월된 아들 제임스 5세가 왕위에 올랐다. 제임스 4세가 원정을 떠나기 전에 남긴 유언장에 따르면, 마거릿 튜더 왕비가 미망인으로 남는 동안 어린 아들의 섭정으로서 나라를 통치할 수 있었다. 귀족들은 이 유언에 따라 마거릿 튜더를 섭정으로 받들었다. 하지만 잉글랜드 왕실에 강한 적개심을 품었던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그녀가 현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의 누이인 걸 탐탁지 않게 여기고, 프랑스의 지원을 이끌어낼 가능성이 높은 올버니 공작을 대안으로 여겼다.
1514년, 마거릿은 제6대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재혼했다. 이에 귀족들은 앵거스 백작의 급부상을 두려워했고, 그녀가 재혼했으므로 섭정이 될 자격을 상실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스코틀랜드 의회는 마거릿을 섭정직에서 해임하고, 올버니 공작을 새 섭정으로 섬임했다. 올버니 공작 지지자들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프랑스 왕실과 깊은 교류를 한 그라면 프랑스의 지원을 두둑이 받아내서 나라를 잘 이끌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마거릿 튜더 지지자들은 리처드 3세가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을 맡다가 폐위하고 자기가 왕이 되었듯이, 올버니 공작도 제임스 5세의 섭정을 맡다가 찬탈할 거라고 비난했다. 이리하여 스코틀랜드 정계에서 마거릿 튜더 파벌과 올버니 공작 파벌의 대립이 격화했다.
1415년 5월 26일, 올버니 공작은 지난날 제임스 4세가 루이 12세에게 빌려줬던 제임스호와 마거릿 호를 포함한 8척의 함선을 이끌고 프랑스에서 덤버튼으로 이동했다. 그는 곧장 자기를 따르는 귀족들을 규합해 7,000명에 달하는 병력과 몬스 메그 대포를 포함한 포병대를 통솔했다. 그의 군대가 마거릿 튜더가 머물던 스털링 성을 포위 공격하자, 마거릿은 8월 6일에 항복하고 섭정에서 물러나는 걸 받아들였다. 그 후 그녀는 1515년 9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궁정을 떠나 잉글랜드 노섬벌랜드의 탄탈론 성으로 망명했다. 1516년 후반, 마거릿 튜더와 결혼했던 제6대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올버니 공작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리하여 스코틀랜드 섭정이 된 올버니 공작은 여러 외국 장인들을 스코틀랜드로 데려왔다. 이들은 홀리 루드하우스 궁전 의 새 창문과 문을 제작하고 , 여러 창과 파이크를 수리했다. 또한 에든버러 성내 용광로를 짓는 데 벽돌 6천 개가 쓰였으며, 대포 제작자 로버트 보스윅과 프랑스인 "요네 부캇"과 그의 제자 "페리스"가 '팔 코넷'이라고 불리는 대포를 제작해 에든버러 성에 비치했다. 이 대부는 1579년까지 에든버러 성에서 활용되었다. 또한 올버니 공작은 1516년 프랑스 포병 대장 제한노 드 라발(Jehannot de Lavall)을 스코틀랜드 왕립 포병대장으로 선임했다.
올버니 공작은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희망한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과는 달리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전쟁을 벌이던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의중에 따라 잉글랜드와 평화 협정을 맺고자 했다. 올버니 공작은 1517년 바스티 영주 앙투안 다르세스를 비롯한 부관들을 통해 섭정을 행사했다. 1517년 8월 26일, 그는 알랑송 공쟉 샤를 4세와 루앙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간의 옛 동맹을 갱신하고 제임스 5세가 프랑스 출신 왕비와 결혼하는 걸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여기에 더해, 양국은 잉글랜드가 한 국가를 침공할 경우 다른 국가가 잉글랜드를 막는 걸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1519년, 올버니 공작은 자기 아내의 자매가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조카와 결혼한 인연을 살려서 교황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스코틀랜드 국왕이 스코틀랜드 교회 계층의 공석을 채울 후보자를 지명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 때문에 스코틀랜드 교회 인사와 수입이 왕의 권위에 사실상 완전히 종속되었고, 이는 나중에 성년이 된 제임스 5세가 스코틀랜드 교회 요직에 자기 사생아들을 앉혀서 수입을 대거 거둬들이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올버니 공작의 스코틀랜드 귀환은 지연되었다. 프랑수아 1세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의 요청에 따라 그를 붙잡아 놓은 것이다. 올버니 공작은 수년간 프랑스에 억류되어야 했고, 그 사이에 제임스 5세는 올버니 공작이 임명한 부관들의 감시를 받으며 스털링 성에서 억류 생활을 했다. 1521년 11월, 올버니 공작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평화 협정이 깨지고 나서야 스코틀랜드로 귀환했다. 그동안 남편 앵거스 백작과의 사이가 악화한 마거릿 튜더는 올버니 공작과 화해하기로 했다. 에든버러에서 열린 의식에서, 관리인은 올버니 공작에게 열쇠를 주었고, 그는 그것을 왕의 모친 마거릿에게 건넸으며, 마거릿은 그것을 올버니 공작에게 돌려줘서 스코틀랜드 정부가 그의 손에 있음을 확인했다. 그 해 12월, 올버니 공작은 앵거스 백작을 반역죄로 고발했고, 나중에는 프랑스에 보내 사실상 포로 생활을 하도록 했다.
1522년, 올버니 공작은 프랑수아 1세의 요청에 따라 잉글랜드 침공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 해 여름에 조직된 원정군은 잉글랜드에 대한 군사 작전 참여를 거부했다. 그들은 프랑스의 실질적인 군사 지원 부족에 불만을 품었고, 로우랜드 귀족 사이에서 잉글랜드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의견이 강해졌다. 그 해 11월, 올버니 공작은 노섬벌랜드를 침공해 워크온트위드 성을 포위 공격했지만, 윌리엄 리슬 경이 지휘하는 수비대의 방어에 가로막혀 사흘간 고전하다가 날씨가 악화하자 철수했다. 1523년, 올버니 공작은 프랑스로 간 뒤 5천 명에 달하는 프랑스 원정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그러나 1523년 10월 말 잉글랜드 영토에 진입한 스코틀랜드군은 더 이상 진격하길 거부했고, 올버니 공작은 병력을 철수해야 했다. 프랑스 부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코틀랜드 의회의 요청에 따라 스코틀랜드를 떠났다.
잉글랜드 원정 실패로 올버니 공작의 위신이 떨어졌고, 반 올버니 세력은 이 기회를 틈타 정변을 준비했다. 1524년, 올버니 공작이 프랑스를 방문하느라 자리를 비우자, 마거릿 튜더는 초대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과 아란 백작 추종자들의 도움을 받아 제임스 5세를 스털링 성에서 에든버러 궁전으로 모셔왔다. 그 후 8월에 의회를 소집해 섭정을 종식하고 12세의 제임스 5세가 조기에 완전한 왕권을 승계했다고 선언했다.
그 후 올버니 공작은 프랑스에 남았지만,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원을 계속했다. 스코틀랜드 상인들은 올버니 공작의 지원 덕분에 프랑스 항구인 디에프에서 관세를 면제받았다. 또한 올버니 공작은 스코틀랜드-프랑스-교황청의 연합을 꾸준히 지지했으며, 1527년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친척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제임스 5세의 결혼을 주선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클레멘스 7세는 혼사가 실패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스코틀랜드 성직자들이 연간 1만 파운드에 달하는 영구 세금을 스코틀랜드 왕실에 바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는 스코틀랜드 왕국이 성직자들의 세금을 받으면서 잉글랜드 국교회로 개종하고 가톨릭을 억압하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를 견제하기를 희망했기에 내려진 것이었다.
1521년 ~ 1525년 이탈리아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올버니 공작은 프랑수아 1세의 프랑스군 1/3을 지휘해 교황군을 물리치고 당시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던 나폴리를 공략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임무를 착실히 수행했지만, 프랑수아 1세가 이끄는 주력군은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궤멸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올버니 공작의 군대는 뿔뿔이 흩어졌고, 올버니 공작은 나폴리에 도착하지 못한 채 프랑스로 귀환했다. 이후 여생을 프랑스에서 조용히 지내던 올버니 공작은 1536년 6월 2일 오베르뉴의 미르플뢰르 성에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오베르뉴 여백작 안 드 라 투르 도베르뉴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두지 못했다. 정부 제인 애버네시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엘레노어 스튜어트를 낳았는데, 이 여인은 1547년 10월 22일 퐁텐블로에서 슈아지 백작 장 3세 드 로피탈과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