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22 14:38:23

헨리 키신저/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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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출생부터 젊은 시절3. 정부 각료로4. 생애 후반5. 사망

1. 개요

헨리 키신저의 생애에 대해 다룬 문서.

2. 출생부터 젊은 시절

1923년 5월 27일 바이마르 공화국 바이에른 자유주에서 유대인 집안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따라서 초명은 독일어식인 '하인츠 알프레트 키싱어(Heinz Alfred Kissinger)'였고 헨리 앨프리드 키신저는 미국 이민 후 영어식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나치 통치 기간 동안 키신저와 그의 유대인 친구들은 히틀러유겐트 갱단에게 학교폭력을 당했는데 김나지움에도 갈 수 없었고 아버지도 직장에서 잘렸다. 1938년 나치의 폭력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가족 전체가 런던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친 후 야간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고 낮에는 면도기 공장에서 일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뉴욕에 위치한 시티 칼리지 오브 뉴욕에 입학하여 회계학을 파트타임 학생으로서 공부했다. 1943년 초반에 학업을 중단하고 미군에 입대하였다. 이때 육군 훈련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1년간 라파예트 칼리지에서 교육받으며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고 제2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했다.
파일:external/media.news.harvard.edu/HKissinger_s.jpg
젊은 시절의 모습. 1950년 하버드 대학교 졸업 사진이다

전후 귀국해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다. 1950년 정치학 학사 학위를 최우수(summa cum laude) 성적으로 취득했으며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1951년에는 정치학 석사, 1954년에는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학위 취득 후 모교에서 국제정치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정부 관련 일을 했다.

1957년에 <핵무기와 외교>라는 저서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대량보복전략'을 비판하여 학자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당시 그의 저서는 미국뿐만 아니라 적성 국가였던 소련의 군부에서도 높이 평가되었다. 당시 핵무기 만능주의를 맹신한 니키타 흐루쇼프가 100만 단위의 병력을 감축하고 함대 건설 프로젝트를 취소하며 남은 자원을 미사일과 핵무기에만 쏟아붓자 소련 군부는 크게 반발하며 핵 보복에 대한 집착은 결국 멸망과 백기투항 두 개의 선택지만 남겨 놓을 것이라면서 그 근거로 키신저의 저서를 들었다.

아울러 그는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메테르니히가 주도했던 '빈 체제'에 정통했는데 박사 학위논문 『회복된 세계(A World Restored: Metternich, Castlereagh and the Problems of Peace, 1812-1822)』에서 빈 체제를 다뤘기 때문이다. 이는 훗날 자신이 외교관으로 재직할 때 많은 영향을 미쳤다.

3. 정부 각료로

파일:external/i.telegraph.co.uk/kiss_1793262c.jpg
리처드 닉슨과 함께 찍힌 키신저의 사진.[1]
1969년 리처드 닉슨미국 대통령이 되자 국가안보보좌관에 발탁되었다. 당시 그의 업적 중의 하나가 베트남 전쟁을 종식(정확히는 평화협상 체결)시킨 것이었다. 당시 호치민이 이끌었던 북베트남은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미국과의 협상을 거부했는데 미국으로서는 아무리 전술적인 승리를 거두어도 답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닉슨 행정부는 핵전쟁으로 페이크를 걸면서 소련을 위협함으로써 소련을 움직여 북베트남을 협상장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참고로 이렇게 허세와 쇼를 적절히 섞은 전략이 바로 '미치광이 전략'인데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을 상대로 구사하면서 유명해졌던 바로 그 전략이다. 미국은 미치광이 전략으로 모양새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는 데 성공했다. 남베트남 정권은 제럴드 포드 행정부를 거치며 멸망하고 말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ssinger_Mao.jpg
마오쩌둥과 함께. 뒤쪽에는 저우언라이가 보인다.
1971년 7월, 미국 최고위급 인사 중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극비 방문했다.[2] 이때 그를 맞이한 것이 예젠잉황화였다. 미국 측 비밀 특사로서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을 개최했으며 저우언라이를 만나 - 양국의 관계 개선 방안을 논의했고 이듬해 닉슨-마오쩌둥 회담을 성사시켰다. 이 시기는 중소관계 악화가 심화되던 시기이고 미국은 중국을 미국 편으로 끌어들여 이용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파일:키신저 박정희.jpg
파일:키신저 전두환.jpg
박정희 전 대통령과 대담하는 제럴드 포드 전 미국 대통령과 키신저 1985년 방한 중 전 국무장관 신분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접견하는 키신저
1973년 닉슨이 재선되자 백악관 안보보좌관 직책에 국무장관까지 겸임하게 됐다.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닉슨에게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도 두 직책을 계속 지켰지만 1975년 11월 도널드 럼즈펠드가 조직한 할로윈 대학살(Halloween Massacre)이라고 불리는 포드 행정부의 대대적 개각으로 인해 백악관 안보보좌관 자리를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3]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백악관에서의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한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대중 납치 사건 때 헨리 키신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것을 계기로 그와 개인적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키신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예정된 일이었다며 축하하였고 당시 한국 언론은 이러한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토대로 마치 키신저가 '평화의 전도사'인 것처럼 소개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결코 '선의의 평화주의자'가 아니었고 오늘날 키신저 자신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관한 논란을 포함하여 그에 대한 평가는 보다 냉정하고 복잡하다. 그는 자국의 이익이라면 타국 정치에 대한 개입이나 독재에 대한 옹호도 서슴지 않은 어떻게 보면 현명하다고 할 수 있는 현실주의자였다.
파일:넬슨 록펠러와 키신저 2.jpg
넬슨 록펠러와 헨리 키신저.(1975년)
파일:데이비드 록펠러와 키신저 2.jpg
데이비드 록펠러[4]와 헨리 키신저.
특정 사상이나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국의 이익만 추구한 그의 성향답게 온건 공화당인 록펠러 공화당에 속했다고 하며 록펠러 가문과 가까웠다.

의외로 NLL이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발언했던 것이 알려지기도 했다.#

4. 생애 후반

직책으로는 윌리엄 & 메리 대학교 제22대 총장과 9/11 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과도하게 공약을 지키려던 당선 초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모든 공약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과 러시아와의 관계가 개선되길 바란다면서 그 시간이 곧 올 것이라고 밝혔으며# 트럼프가 친러 인사국무장관으로 기용한 건 훌륭한 선택이라고 하였다. 이 기사에 따르면 그가 닉슨중국을 이용해 소련을 견제한 것처럼 훗날 강해지는 중국을 상대로 러시아를 이용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예견했다고 한다. #

다만 그는 꾸준히 도널드 트럼프의 대중정책에 반대하면서 중국과 우호적으로 지낼 것을 피력하였다. 예를 들어 도널드 트럼프 당선 직후 진행된 인터뷰에서 대선 기간 동안 보여준 도널드 트럼프의 반중 레토릭이 진심이 아닐 것이라고 희망하면서 "중국의 국익이 곧 미국의 국익"이라면서 유화적인 대중 정책을 주장하였다.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 시에도 헨리 키신저는 미국과 중국은 서로 경쟁할 필요가 없으며 대립을 피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한국에서는 어째서인지 도널드 트럼프의 친러 정책을 대중견제를 위한 포석으로 해석하면서 이것이 헨리 키신저의 조언에 의한 것이라는 얘기가 널리 퍼졌는데 이는 The Daily Beast[5]라는 미국 매체가 보도한 내용에 기반한 것이지만 헨리 키신저는 해당 보도를 "순수한 창작"이라고 직접적으로 부인하면서 미국과 중국은 서로 친하게 지내야하며 대중 압박 정책같은 것은 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거듭 피력하였다.# 미중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그가 평소에 빈번하게 발언했던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판데믹으로 인해 국제질서가 영원히 바뀔 수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에 칼럼을 기고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상대로 완전한 승리를 얻으려고 하지 말고 조속히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 협상 내용이 개전 이전 시점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사실상 우크라이나도 러시아도 만족할 수 없는 미봉책[6]에 불과하여 거센 비판을 받았으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뮌헨 협정을 언급하며 불가함을 내세웠다. 생애 문단에서 언급된 바처럼 키신저는 바이마르 공화국 출신의 유대인으로 나치 독일의 폭력을 직접 겪은 이력이 있기 때문에 나치 독일과 연관된 뮌헨 협정을 언급한다는 것은 강도 높은 수준의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예나 지금이나 외교적으로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을 고집했다는 걸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후에는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을 지지하는 등 러시아 비판에 동참하는 발언을 했다. #

2023년 5월 27일에 100세 생일을 맞았다. 그는 저명한 정치인과 셀럽 중에서는 정말 독보적으로 장수한 편인데, 당시 그와 비슷하게 장수했던 조지 H. W. 부시,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엘리자베스 2세, 김종필, 밥 돌[7], 미하일 고르바초프, 장쩌민, 마하티르 모하마드, 지미 카터, 무라야마 도미이치 등이 모두 그보다 뒤에 태어났고, 이들 중 적잖은 이들이 코로나19 팬데믹 전후로 사망했는데도[8] 그는 지칠 줄 모르는 듯 꾸준히 활동했다. 물론 그가 몰고 다니는 안티 세력은 저들에 비하면 훨씬 독보적이기 때문에 대중들은 그가 언론을 타거나 책을 냈을 때마다 "저 양반 아직도 안 죽었어?"로 대동단결했다. 아예 미국에서는 \'Immortal bastard'(불멸의 개X끼)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그의 아들 데이비드 키신저는 2023년 5월 25일에 워싱턴 포스트지에 '헨리 키신저의 100세 생일: 아버지에 대한 감사(Henry Kissinger turns 100: An appreciation for my father)'이라는 기고를 쓰기도 했다. 사실 키신저의 생활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장수 비법과는 완전히 동떨어졌는데 식생활로 따지면 소식이나 채식은커녕 돼지고기로 만든 독일식 소시지브라트루르스트와 송아지 고기를 튀겨 먹는 오스트리아식 돈가스인 슈니첼을 즐겼으며 평생 '가혹하게 긴장감 넘치는' 의사 결정을 해야 했고 스포츠는 단 한 번도 참가하지 않고 관객으로만 즐겼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가 정신적, 육체적 활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사명감인데 95세 때부터 AI에 관심을 가져[9] AI와 관련된 책 2권을 썼고[10] 애국주의, 충성심, 초(超)당파주의를 신봉하여 이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정파에 관계없이 서로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11]

그는 소련 정권의 억압적 성격에 대해선 조금도 환상이 없었지만 이렇게 정기적으로 대화하는 것이 충돌 위기에 있는 듯한 두 수퍼파워 간 긴장을 완화하는 것이라고 봤다고 하는데 이와 함께 데이비드 키신저는 아버지의 외교에 대해 "아버지에게 외교는 결코 게임이 아니었고, 나치 독일에서 겪었던 참혹한 경험과 신념에서 외교를 했다. 어느 아들도 아버지의 유산에 대해 객관적일 수 없지만, 일관된 원칙과 역사 현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토대로 국정 운영(statecraft)을 하려고 한 아버지의 노력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

2023년 7월 20일에는 중국을 방문해서 시진핑 국가주석과의 만남을 가졌다.#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까지 만나며 100세의 나이임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중 독일에서 하마스 지지 시위가 열린 것을 독일의 난민 정책과 연계해 비판했다.#

5. 사망

2023년 11월 29일[12] 코네티컷주 소재 자택에서 향년 10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유족들은 비공개로 가족장이 치러질 것이며 향후 뉴욕에서 추모식이 열릴 것이라고 밝혔다. #


[1] 두 사람이 함께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는 등 닉슨과는 한 세트로 엮인다. 비슷한 사례로 중국의 마오쩌둥-저우언라이가 있다. 참고로 동시기의 사람이며 네 사람 모두 만난 적이 있다.[2] 맹방인 파키스탄과 짜고 일단 파키스탄에 외교사절로 도착해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며 (내막을 아는) 대통령이 요양을 권하자 대통령 전용 산장으로 간 다음 여기서 대부분의 미국 요원, 사절단을 구금(...)한 후 최소한의 비서진만을 대동하고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이렇게 날아가고서도 적진에 날아갔다고 생각하여 살해당할 가능성을 우려했다고 한다.[3] 스코우크로프트는 예비역 공군 중장 출신으로, 1977년 지미 카터의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공직을 떠났다가 조지 H. W. 부시에 의해 다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되어 1991년 걸프 전쟁 승리에 공헌했다. 이후 세계 외교계의 원로 대접을 받으며 여생을 보내다가 2020년에 9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4] 넬슨 록펠러의 막내 동생. 삼극위원회의 창립자이기도 하다.[5] 영어 위키백과의 Controversies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표절, 가짜 뉴스 생산, 자극적인 문구 선정 등 미국 내에서 상당히 비판받는 언론이다.[6] 우크라이나는 그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보상도 얻지 못한 채 또 내전을 치러야 하고 러시아(푸틴)는 우크라이나에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물러서 현 권력층의 정치 기반을 끝장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맺어진 협정이나 법령은 유사 이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과거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터진 이유도 링컨의 전임 대통령들과 정부 관료들이 지속적으로 미봉책만 취해가며 근본적 문제 해결은 외면한 게 마침내 터져 버린 것이 이유였다.[7]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인물이다.[8] 비슷하게 장수한 정치인 중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키신저보다 정확히 생일이 5년 빠르며 코로나가 창궐하기 직전인 2019년 11월 29일 101세로 사망했다. 여담으로 전술한 이들 중 현재 생존 중인 사람은 마하티르 모하마드 前 말레이시아 대통령 권한대행, 무라야마 前 일본 총리, 카터 前 미국 대통령 세 사람뿐이다.[9] 데이비드 키신저의 말로는 아버지의 AI에 관한 관심의 '강렬함'이 마치 MIT 대학원생과 같았다고 한다.[10] 이들 중 'AI 이후의 세계(The Age of AI: And Our Human Future)'는 2021년 11월 2일에 출판되어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한국에서는 키신저의 100세 생일으로부터 3일 전에 번역 출판되었다. 구글 전 CEO였던 에릭 슈밋, MIT 학장이자 컴퓨터과학자인 대니얼 허튼로커(Daniel Huttenlocher, 1959~)와 공동으로 집필한 책으로, 키신저는 AI에 대해 "모든 국가가 AI의 파괴적 힘을 제한할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보았다.[11] 소련과의 냉전이 한창일 때에도 키신저는 당시 주미 소련 대사였던 아나톨리 도브리닌과 집에서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이슈를 협상하는 중간 중간에 체스 게임을 했을 정도였다.[12] 공교롭게 찰리 멍거는 99세로 바로 전날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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