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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조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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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리하르트 조르게
Рихард Густавович Зорге | Richard Sorge
파일:Richard_Sorge_2.jpg
암호명 램지
Ramsay
출생 1895년 10월 4일
러시아 제국 바쿠현 바쿠군 사분치[1]
사망 1944년 11월 7일 (향년 49세)
도쿄도 스가모 형무소
국적
[[독일 제국|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제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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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1895~1918)
파일:독일 국기.svg 바이마르 공화국 (1918~1920)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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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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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1920~1944)
직업 군인 → 스파이
배우자 크리스티안 게를라흐 (1921년 ~ 1929년)
에카테리나 알렉산드로바 (1929년? ~ 1943년)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간첩이 되다2.3. 대일본 첩보활동2.4. 처형2.5. 사후
3. 평가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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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독일 제국군 병사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선 소련군 소속으로 활약한 독일계 러시아인 간첩.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에서 바르바로사 작전의 침공 개시일자를 미리 확보하는 등의 일련의 첩보활동을 벌여 스파이계의 전설로 남았다.

2. 생애

2.1. 유년기

그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아제르바이잔 바쿠 근교의 사분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인으로 캅카스 석유회사에 고용된 유전 기술자였으나 계약이 해지되어 독일 제국베를린으로 돌아왔으며 어머니는 러시아인이었다. 큰할아버지인 프리드리히 조르게는 공산주의 이론가인 카를 마르크스의 동지였으며 제1인터내셔널의 서기장이자 미국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시초격인 인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에서는 동일인물이 맞는지 가계도가 의심되고 있다.

고등학교 재학 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자원병으로 참전하였으나 손가락 세 개를 잃고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전상으로 야전병원에 입원한 그는 마르크스의 서적을 접하고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제대 후 대학교에서도 마르크스를 공부하면서 아직 재학 중이던 1919년에 독일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1921년 스승 쿠르트 알베르트 게를라흐의 전처였던 크리스티아네와 결혼하면서 공산당 활동에 전념했다.

2.2. 간첩이 되다

그는 1924년 공산당 전당대회에 출석했다가 코민테른에서 파견나온 간부들에게 영업을 당하여 그 길로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 내의 첩보부 설치에 참여했다. 부하린코민테른의 권력을 잡은 1926년부터는 부하린의 신임을 받으면서 북유럽 3국과 영국, 아일랜드를 전전했고 결국 과중한 업무로 가정을 돌보지 못하고 이혼했다.

그런데 1929년 스탈린의 비판에 의해 부하린이 실각하고 코민테른 내의 숙청이 시작되면서 그도 코민테른에서 쫓겨나 소련군 제4국(GRU, 군사정보국) 소속으로 인사이동되었다.

GRU로 적을 옮긴 그의 첫 임무는 중국의 상하이 파견이었는데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농업신문인 도이체 게트라이데차이퉁지에 기자로 취직했지만 실제 업무는 소련의 지령을 중국공산당에 전달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저우언라이 등 중국공산당의 방첩조직원들과 관계를 형성했다. 한편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과 접촉하거나 저명한 좌익 저널리스트인 아그네스 스메들리(Agnes Smedley)를 만나 잠시 사귀는 등 인맥을 쌓았으며 특히 스메들리를 통해 일본 기자인 오자키 호쓰미(尾崎秀実)를 포섭하여 정보원으로 삼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는 오자키의 진술서를 토대로 공산당원인 기토 긴이치(鬼頭銀一)가 소개한 것으로 보고 있다.

1933년 독일에 귀국한 그는 프랑크푸르터차이퉁지의 정규 특파원 직함을 취득했는데 이 직함은 여권 획득을 수월하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치당원 자격을 입수하고 인맥을 쌓는 데도 편리한 도구였다.

2.3. 대일본 첩보활동

1933년 9월 6일 일본에 도착한 그는 가장 먼저 주일 독일대사관을 찾아갔다. 앞서 독일에 있으면서 하우스호퍼 등 나치 관련자들의 호감을 사고 소개장을 입수하였기 때문에 주일 독일대사관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독일대사관을 중심으로 빠르게 일본인외국인, 그리고 관료신문기자 등으로 구성된 첩보망을 조직하였다. 그의 마수는 심지어 궁중까지 뻗었는데 그의 요원이자 오토 쿠시넨의 부인이었던 아이노 쿠시넨은 야스히토와 접견하여 정보를 입수하는 등 일본의 중추에서 흘러나오는 정보는 모두 그가 손에 쥐고 있었다.

이러한 첩보망을 통해 그는 독일-이탈리아-일본의 방공 협정, 독일-일본 협약, 진주만 공격의 정보를 빼내 소련에 전달했다. 특히 1941년엔 일본 주재 독일 무관에게서 정보를 빼내 독일의 소련 침공 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의 정확한 개시 일자[2]를 전달했으며 이는 그뿐만 아닌 스웨덴 등의 여러 루트를 통해 이미 상당한 의심정황이 알려졌지만 소련 지도부는 대숙청의 여파로 그를 신용할 수 없었는데 특히 그의 나치 이중간첩설은 근래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논란이 불거지고 있는 주제이며 그 진위여부와는 별개로 일단 소련 지도부가 그를 이중간첩으로 의심한 것만은 사실로 보여진다.

소련은 서쪽을 침공한 나치 독일에 발맞추어 동맹국인 일본 제국도 아시아 쪽에서 협공할 것을 우려했다. 그러던 1941년 9월 14일 그는 일본군의 동향을 전달하였는데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함락시키기 전까지 일본군은 소련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신 일본군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남방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전달하였다. 바르바로사 작전 정보와 더불어 리그의 활동 중 가장 유명한 사례이다. 이 정보를 근거로 소련군은 극동 전선에 배치된 병력 중 일부를 차출해서 모스크바 공방전에 투입하였다는 부분이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스탈린이 이 첩보를 신용했는지는 불확실하다.

2.4. 처형

"나는 1차 대전에 아버지 조국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웠지만, 나는 내 어머니 조국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일말의 후회도 없다."
체포 당시[3]

그는 본디 1937년 소련 당국으로부터 귀환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는데 명령에 불복종하고 귀환하지 않았으나 돌아간 다른 요원들은 줄줄이 숙청당했다. 본국에서 버림받은 그의 입장에서 첩보활동을 지속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전쟁은 중대국면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첩보활동을 계속했다.

한편 소련에서 쓰이던 1회용 암호표에 의한 무선량이 대폭 늘어나면서 일본의 방첩기관은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본계 미국인 기타바야시 도모의 체포를 시작으로 그의 요원이었던 오자키 호쓰미가 1941년 10월 14일에 먼저 체포되었고 그는 10월 18일에 도쿄에서 체포되었다. 오트 대사는 그의 체포를 일본의 과민반응 정도로 생각하고 도조 총리에게 격렬하게 항의하는 등 구명활동을 펼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독일 측이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1942년의 일이었으며 그나마도 주일대사가 아닌 만주국의 주만공사관을 통해 전달받은 것이었다.

처음 일본은 그를 해외방첩청(Abwehr)의 요원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첩보국은 이를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고문에도 불구하고 소련과의 연관성을 부정했고 소련도 조르게를 자국의 요원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제국은 그를 소련에서 붙잡힌 일본 간첩과 교환하려고 하였으나 소련이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 성사되지 않았다.

그는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44년 11월 7일교수형으로 스가모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요원이었던 오자키 호쓰미는 그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처형되었다.[4]

그는 스가모 형무소 내의 묘원에 묻혔다가 도쿄의 타마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그의 일본인 연인이었던 이시이 하나코는 그녀가 살아 있던 2000년까지 계속 그의 묘를 찾았다.

2.5. 사후

1961년 그의 삶을 각색한 영화 〈조르게씨, 당신은 누구요?(Qui êtes-vous, Monsieur Sorge?)〉가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일본 합작으로 만들어졌는데 소련에서도 개봉되어 큰 인기를 끌었고 개봉 직전에 영화를 관람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KGB에게 이 영화가 사실에 근거한 것이냐고 물었다.

그가 실존 인물임을 확인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1964년 그에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하면서 자국 요원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그의 일본인 연인 이시이 하나코에게 연금을 주었고 소련에서 그에 대한 재조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소련의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그의 소비에트 연방 영웅 추서 이후 주일본 소련 대사는 부임 후 승리의 날(5월 9일)에 그의 묘소를 찾아 추모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고 소련 붕괴 후에는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 연방 대사가 그의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관련 기사,

3. 평가

"조르게는 역사상 가장 위험한 첩보원이었다."
이언 플레밍 '007 시리즈'의 원작자
"내 평생 그보다 위대한 인간은 만나보지 못했다."
요시카와 마쓰사다, 조르게를 기소한 일본 검사
"조르게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첩보원이다."
톰 클랜시, 미국의 첩보소설 작가
"눈부신 첩보활동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결정적인 사례이다."
더글러스 맥아더, 미국의 육군 원수
"스탈린의 제임스 본드"
르 피가로, 프랑스의 주요일간지

두말할 것도 없이 스파이계의 전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남자. 그가 해 온 공작들이 소련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정말로 1명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 러시아에서는 구국의 영웅으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손꼽힌다.

앨빈 토플러는 '권력이동'에서 그를 언급하면서 조르게는 숙련된 프로 스파이였지만 앞으로의 사회는 숙련된 프로 스파이 1인을 길러내는 방식보다는 비숙련 아마추어 스파이들의 대량투입을 통해 정보를 대량으로 입수하고 이를 국가기관인 정보부에서 가공하는 방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스파이의 정보 입수 방식도 산업 혁명 이전의 숙련된 수공업자의 방식이 아니라 산업화된 공장의 대량생산 방식이 될 것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중국에 의해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증명되고 말았다.

4. 기타

동독에서도 나치에 맞섰던 그를 높이 평가하여 그의 전기가 발표되고 기념우표를 발행하는 등의 기념사업을 하였으며 일본과 폴란드에서는 그를 다룬 만화가 출판되었다.

2003년 일본에서는 그의 인생을 다룬 '스파이 조르게'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주연은 이언 글렌.[5] 일본 뉴웨이브 영화를 이끌었던 거장 시노다 마사히로가 만들어 기술적인 완성도는 높으나 전반적으로 지루하다는 평이 대다수다.[6] 2020년 시점에서는 시노다 마사히로의 마지막 영화기도 하다. 성우 츠다 켄지로가 무명 시절 단역으로 출연했다고 한다.

그를 소재로 다룬 여러 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데즈카 오사무아돌프에게 고한다가 리하르트 조르게를 그려보고 싶어서 시작한 작품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등장분량은 잘 해야 조연 수준이다. 게다가 그의 암호명인 스파이 '램지' 이야기도 중요한 듯하지만 별로 안 중요한 떡밥으로 끝난다.

블랙 불릿의 등장인물들 중 한 명인 안드레이 리트빈체프를 비유할 때도 리하르트 조르게의 이름이 언급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큰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7]

듀얼마스터즈에서도 그를 모티브로 한 코드 네임 졸게라는 카드가 나왔는데 여기서는 헌터와 에일리언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언노운 일족의 첩자로 나온다. 자세한 건 초차원 류세이 홀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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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바람이 분다에서는 그를 모티브로 한 '카스토프'라는 단역 캐릭터가 등장한다.[8] 독일인으로 호텔에서 주인공을 만나 일본과 독일의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발언을 하는데 며칠 후 경찰에게 쫓기게 되며 주인공도 엮여서 봉변을 당할 뻔 한다.

전상으로 손가락을 잃고 다리를 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편력으로 유명했는데 박사 출신에 위장신분이 언론인이었을 정도로 말빨 좋은 지식인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에는 상당한 미남이기도 했다. #

Hearts of Iron IV의 라 레지스탕스 DLC가 나온 후 소련 간첩으로 등장한다.


[1] Сабунчи. 현 아제르바이잔 바쿠시 사분추구 사분추(Sabunçu).[2] 1941년 6월 22일. 혹은 그보다 앞선 6월 20일로 전달했다는 설도 있다. 대규모 작전 계획의 개시일자를 며칠 차이로 알아냈다는 건 세계 스파이 역사상 최대의 성과 중 하나다.[3] 조국을 뜻하는 말로 많이 쓰이는 표현이 독일어로는 Vaterland로 아버지가 들어가고 러시아어로는 Родина로 어머니가 들어가는 말이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실제로 독일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증조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친구였다. 두 개의 조국이라는 개념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소련이 러시아 민족주의적, 패권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기 이전까지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관념이었는데 실제 자신이 태어난 나라가 민족적 조국이라면 소련은 계급과 사상의 조국이고 따라서 소련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매국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독소 불가침조약 이전의 소련은 명목상 '민족 집단과 영토의 제약을 받지 않는 국가'로 여겨졌고 소련의 국체도 명목상으로는 자유로운 주권을 가진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연합체였다. 결국 범세계적 혁명을 통해 모든 나라를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재편한다면 이 형제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하나의 연합체를 이룸으로써 영구적인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꿈이었다.[4] 조르게와 오자키가 소련으로 송신한 비밀 무선의 내용을 일본 특별고등경찰은 끝끝내 해석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1회용 암호표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소련과 조르게가 사전에 정한 해석 코드를 발견하는 게 필수였는데 이것을 못 찾았기 때문이다. (1회용 암호표(Ontime pad)를 이용한 암호는 이론상 절대적인 보안 기능을 가지기 때문에 암호표 자체를 입수하지 못하는 한 무한한 계산 자원을 동원하여 무한한 시간 동안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대입하더라도 해독할 수 없다. 다만 이렇게 강력한 보안 기술이 다른 분야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것은 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발신자와 송신자가 반드시 같은 암호표(해석 코드)를 가지고 있어야 하므로 불특정 다수간의 통신에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통신을 위해 암호표를 전송하다가 탈취당한다면 당연히 그 암호표에 의해 암호가 해독된다. 만약 암호표가 탈취당하지 않을 수 있도록 절대적으로 안전한 전송수단이 있다면 그냥 그 수단으로 평문을 전송하면 된다.) 다만 스파이와 본국간의 통신이라는 특정한 상황에서는 절대적으로 안전한 교신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호쓰미는 혹독한 고문과 심문으로 머리가 하얗게 변색되어 버렸다.[5] 한국인들에게는 왕좌의 게임 조라 모르몬트 역으로 알려져 있다.[6] 중간에 액션이나 갈등요소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냥 역사 다큐멘터리 같은 분위기가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편인데 러닝타임 3시간이 넘는 영화다.[7] 안드레이 리트민체프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잡히긴 했지만 특수부대 출신에다가 강력한 무장세력을 지휘하는 테러리스트다. 리하르트 조르게에게 비유될 정도로 쉽게 잡히지 않던 인물로, 작중에서 그의 부하들의 도움으로 탈주하는 데 성공한다.[8] 큰 코와 바짝 올라간 눈썹, 주름살등을 통해 대놓고 따왔다는 걸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