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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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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조경철
趙慶哲 | Cho Kyung-cheol
파일:external/img.tvreport.co.kr/20130905_1378346011_46434900_1.jpg
2009년 말년의 모습.
이름 조경철(趙慶哲)
출생 1929년 4월 4일
평안북도 선천군 신부면 청강동
(현 평안북도 동림군 청강리)
사망 2010년 3월 6일 (향년 80세)
고성(孤星)
학력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김일성종합대학 (광산공학 / 제적)
연희대학교 이학원 (물리기상학 / 학사)
터스큘럼 대학교 (정치학 / 학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대학원 (천문학 / 석사 · 박사)
가족 배우자 김상경[1] 소생 2남,
배우자 전계현 소생 1남 1녀
병역 육군 대위 만기전역
직업 천문학자
종교 무종교개신교(여의도순복음교회)[2]

1. 개요2. 생애3. 정치 경력4. 여담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www.lanplaza.net/08091.jpg
[3]

대한민국천문학자. 호는 고성(孤星)으로 혼자 별을 개척한다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미국아폴로 계획에서 따 온 '아폴로 박사'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외에도 순수한 성격(?)때문에 애기박사라는 이명도 있었다.

2. 생애

1929년 4월 4일 평안북도 선천군 신부면 청강동(현 동림군 청강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건설업을 하던 사업가였는데, 집안이 워낙 부유했던 터라, 어린 조경철을 유치원에 보냈을 정도였고, 아버지께서 어느날 미국제 뷰익 자동차를 사왔던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김일성종합대학 광산공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 재학 중 김일성의 독재화에 대해 반대하는 성명서를 쓰다가 당국에 잡혀서 구치소 생활을 한 적이 있다.[4]

이후 월남하여 연희대학교 이학원 물리기상학과[5]를 졸업하였다. 장교로 임관하여 6.25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김화지구 전투에서 공을 세워 금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이때 영어 실력을 인정 받아 통역 및 작전 협조 업무를 맡게 되었는데, 근무 도중 미군 군사 고문단 장교와의 의견 충돌이 문제가 되어,[6] 후방으로 전출되었다가 결국 문제가 커져서 영창에 갇히는 일도 겪었다고 한다. 이후 일이 해결되어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근무하게 됐고,[7] 육군 대위로 만기전역하였다.

군 퇴역 후 국비 장학생 혜택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어 터스큘럼 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고, 이후 미시간 대학교에 잠시 있다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옮겨 천문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업을 마친 후 미국에서 6년간 해군천문대 천체물리연구원, 미국항공우주국(NASA) 우주과학부 주임연구원, 메릴랜드 대학교 교수, 지오노틱스사 우주과학 부장 등에 재직하였다.

1968년에 귀국하여 연세대학교 천문기상학과 교수로 부임하였고, 1969년 KBS의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생중계 당시 패널로 나와 유명해졌다. 당연히 미국 현지중계가 아니라 국내 스튜디오에서 미국 방송의 화면을 받아서 보며 해설하는 것. 1960년대 당시는 대부분의 중계가 이런 식이었다. 사실 당시 초대된 패널들 중 유일하게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인물이 조경철 하나 뿐었던지라, 아예 생중계를 동시통역하는 역할까지 도맡았다고 한다.[8]

1971년, 8살 연하의 영화배우 전계현과 결혼하였다. 1968년, 조경철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을 보고 나서, 영화에 출연한 배우 전계현에게 반했다고 한다. 당시 동아방송의 '유쾌한 응접실'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하던 조경철이 프로그램 PD에게 전계현을 라디오에 게스트로 부르자고 제안하여 같이 출연한 것이 인연이 되었고, 결국 열애 끝에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9] 이후 과학기술정보센터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1978년 연세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79년부터 1992년까지 경희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공과대학 학장, 부총장 등의 보직을 역임하였다.

경희대학교 부총장 직에 있던 1984년, 미국의 여러 기관과 재단[10]에서 천문관측기기의 사용 협의와 자료수집 협조 등을 약속받는 등 적극적으로 천문학과 신설에 앞장섰다. 이런 부단한 노력의 결과 다음해인 1985년 2월 우주과학과[11]를 설치하여 초대 학과장으로 재임했다. 趙慶哲(조경철)교수 渡美(도미)

1990년대부터 텔레비전 예능광고에 적극적으로 출연해 "재미있는 교수님"으로 인기를 끌었다. 대표적으로 1992년, 이경규몰래카메라에서 가짜 UFO외계인에 낚이는 장면이 잘 알려져있다. 단, 이경규가 뒤집어 썼던 뽀뽀뽀 수준의 외계인 탈과 의상, 그리고 UFO는 대놓고 가짜 티가 났기 때문에 진짜로 낚였다기 보다는 알고서도 적절히 리액션을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경규는 그 당시 조경철 박사가 진지하게 믿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어쩌면 애기박사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순수한 성격이기도 하고 또 언젠가는 외계인을 정말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일반인이라면 절대 낚이지 않을 낚시에 걸려들었을 수도 있다. 일부러 늦은 밤을 택했기 때문에 이경규의 조악한 외계인 의상은 멀리서는 잘 알아보기 어려웠고, 가까이 왔을 때는 조경철 박사도 가짜라는 걸 알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후에 이경규의 결혼식 때 주례를 서기도 했다.

자동차 애호가로서 자동차생활 등의 잡지에도 칼럼도 많이 썼다. 대표적인 작품이 백만인의 자동차생활(범우사, 1991)이라는 작품. 가장 좋아했던 차량은 티코라고 한다.[12] 아폴로 박사의 티코 리포트

말년에는 남북화해무드를 타고 고향인 북녘 땅을 밟았고 동생 조경두를 만났다. 이 당시를 담은 다큐멘터리가 SBS를 통해 방영되었는데, 어머니의 묘소에 남한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13]의 영정사진을 갖다 놓고 울면서 성묘를 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 때 북측 안내인이 옆에서 위로하며 "오늘은 기쁜 날인데 웃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거드는 장면이 나오는데, 엉뚱하게도 만화가 최지룡은 이 장면을 보고 빡쳐서 북한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술회했다.[14]

과학대중서를 중심으로 170권의 저술을 남겨 과학의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자신을 딴따라로 보는 학계의 시각 때문에라도 연구 및 저술활동에 더욱 매진했다고 한다.

파일:external/dimg.donga.com/26679213.1.jpg
지병인 심장 질환으로 입원해 치료를 받던 중 심장마비로 혼수 상태에 빠져 2010년 3월 6일 오전 10시에 향년 81세의 연세로 별세하여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경기도 파주시 용미리공원묘지에 매장되었다.

3. 정치 경력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10구 - 강남구[15]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 민주공화당 후보로 MIT 박사 출신인 이태섭도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두 박사의 대결로도 주목받았다. 그러나 신민당 정운갑 후보와 민주공화당 이태섭 후보에 밀려[16] 낙선하였다.(28,163표 8.41% 3위)
파일:10대 총선 조경철.jpg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0구 - 강남구) 선거벽보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서울 1구 - 종로구-중구 선거구에 신정당[17] 후보로 출마하였다. 그러나 민주정의당 이종찬 후보, 민주한국당 김판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15,701표 6.59% 4위)
파일:11대 총선 조경철.jpg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구 - 종로구) 선거벽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였다. 이후 새정치국민회의의 후신 새천년민주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4. 여담

  • 소행성에 이름이 붙어 있는 몇 안 되는 한국 사람이다. 2001년 일본 도쿄대학은 1991년 8월 9일 일본의 아마추어 천문가 와타나베 가즈오가 JCPM 삿포로 관측소에서 발견한 소행성에 조경철 박사의 이름을 따 4976 Choukyongchol이라고 지었다. 이 소행성 이름은 국제천문연맹(IAU)에 공식등록되어 있다.
  • 강원도 화천군 광덕산에 있는 조경철 천문대가 바로 조경철 박사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천문대이다.
  • 어릴 적부터 회화에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난한 유학생 시절에는 초상화를 그려 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고. 훗날 부인이 되는 영화배우 전계현과 연애을 할 때도, 전계현이 출연한 영화의 한 장면을 유화로 그려서 선물하면서 마음을 샀다고 한다.
  • 본인이 몸담았던 신정당의 당기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파일:신정당(1981) 당기.jpg
신정당의 당기

5. 관련 문서


[1] 삼양그룹 창업주 김연수의 장녀[2] 출처.[3] 1987년 대우 르망살롱 시제차 옆에서 포즈를 취한 사진. 잡지 '자동차생활'에서 찍은 인터뷰 사진이다. 앞범퍼가 사고차처럼 삐뚤어져 있다. 조경철 박사는 유명한 자동차 애호가 중 한 사람이었다.[4] 본인 회고가 여기에 나온다.[5]연세대학교 이과대학 물리학과[6] 미군 장교와 주먹다짐까지 했다고 한다.[7] 당시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정호용 등이 육군사관학교 생도였는데, 이들을 직접 가르쳤다고 한다.[8] 당시 닐 암스트롱이 달에 발을 디딜 때, 조경철이 너무 흥분해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다가 옆으로 굴러서 넘어져서 스튜디오가 웃음 바다가 되었다는 일화가 본인 자서전에 나온다.[9] 사실 조경철에게도 전계현에게도 이것은 초혼이 아니라 재혼이었다. 조경철은 미국 유학 시절, 국내 재벌가 삼양사 집안의 딸인 김상경과 결혼을 한 뒤 두 아들을 두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했으며,# 전계현도 조경철과 재혼을 했을 때 이미 10살 난 딸이 있던 상태였다.[10] 미항공우주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카네기 재단[11]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천문학과와 함께 천문학과 TOP3 지망학과로 꼽히고 있다.[12] 카 비젼 이라는 잡지에 티코 할인쿠폰을 싣기도 했다. 실제로 할인해줬긴 한데, 티코 가격이 당대 기준으로도 싼 편인지라 대우차에서 할인해준다고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다.[13] 조경철이 월남한 후에 그의 아버지도 따로 월남해 부자상봉했다.[14] 뉘앙스에 따라 애매하게 갈리는 장면이다. 어떤 사람들은 (어머니의 묘소에 성묘를 온 건 매우 오래간만에 어머니를 뵌 거나 마찬가지니까) 오늘은 기쁜 날이니 웃으셔야죠라고 위로하는 것으로 해석했는데, 최지룡은 같은 장면을 두고 (슬픈 감정을 자아내는 국면에서 억지로 웃을 것을 강요하는) '공산주의의 반인륜적인 면'을 본 것으로 해석했다. 판단은 각자 알아서... 다만 운다는 게 꼭 슬퍼서만 우는 건 아니니 여러 감정이 섞였다 볼 수 있다.[15] 당시는 서초구(방배동 제외. 방배동은 1980년 4월 관악구에서 강남구로 편입됨.), 송파구, 강동구까지 포함하는 권역이었다.[16] 당시는 중선거구제였다.[17] 1992년 박찬종이 창당한 신정치개혁당이 아닌 별개의 군소정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