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23:48:51

신축민란

이재수의 난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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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민란 이재수
을사의병 최익현 등 조선 의병
정미의병 이인영13도 창의군 }}}}}}}}}
※ 대한제국기의 사건 포함

1. 개요2. 배경3. 전개
3.1. 봉기의 개시3.2. 민란의 끝, 그리고 이재수의 처형
4. 평가5. 가톨릭 측 반응6. 기타

1. 개요

辛丑民亂
"교인들이 비록 다른 나라의 글을 배웠다고는 하나 본시 우리나라의 신민인데, 한번 교회에 들어가면 관(官)에서도 다스릴 수가 없고, 감히 두려움도 없이 남의 재물을 빼앗고 남의 소송에 간여하여도 감히 누구도 어찌할 수가 없고 심지어 인명을 살상하여도 감옥에 가두지 못합니다. 금번 삼군(제주, 대정, 정의)의 민인들이 세폐를 견디지 못하여 일제히 모여서 호소한 것이 어찌 교인들에게 관계되겠습니까? 그런데 군기를 빼앗아서 성을 함락시키고 발포하니 이게 역적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죽인 것은 역적인 것이요 양민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비록 죽어도 원한이 없습니다."
이재수, 체포 후

구한말 가톨릭 교회와 그들을 앞세운 봉세관(封稅官)이 제주도 토착민에게 범죄를 저지르자 민중들이 자위 집단 상무사(商務社)를 조직해 맞선 민중항쟁. 관련 기사

주동자인 이재수의 이름을 딴 '이재수의 난'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제주도민을 대표하는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는 '제주항쟁(濟州抗爭)'으로 명명해 로마 교황, 한국 천주교회, 프랑스 정부에 공개 사과를 요구했다. 관련 기사

가톨릭에서는 "가톨릭 신자가 희생되었다."라는 의미로 '제주신축교난(濟州辛丑敎難)'이라고 부르며 '제주민란(濟州民亂)'으로 칭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종교적, 정치적 문제로 가톨릭이 박해받은 사건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어감이 좀 완화된 '신축교안(辛丑敎案)'이란 용어도 쓰이고 있다.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제주성에 피신한 무고한 사람들도 많이 희생된 것도 사실이지만 가톨릭 신자들의 행패와 엄청난 범죄 행각이 신축민란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며, 이런 문제 제기로 인해 일방적인 피해의 느낌이 강한 '교난'보다 어감이 좀 완화된 '신축교안(辛丑敎案)'이란 용어 또한 쓰이고 있으나 이 또한 피해자인 민중이 아닌 가해자인 교회를 주체로 범죄 행위를 부인하는 명칭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2. 배경

19세기대한제국의 제주도에서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이 선교를 시작했다. 당시 조선 사람도 천주교로 개종하기만 하면 천주교 신부를 등에 업고 특혜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지방관의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천주교로 개종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하지만 가톨릭은 제주에서 또 다른 문제를 불러왔다.

프랑스인 신부들에게는 고종이 지급한 여아대(如我待), 즉 "나(고종)처럼 대하라."라는 특권이 있었는데, 프랑스인 신부들은 천주교 신자들의 불법행위를 묵인했고 교인을 빙자한 모리배들을 가톨릭 신자라며 두둔하기에 바빴다. 일단 성당으로 달아나면 관리들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로 가톨릭 신자라면서 성당으로 달아난 자들도 적지 않았다. 살인을 저질러도 체포는 커녕 시체검시조차 하지 못하게 하였고 천주교인으로 빙자하면 유부녀나 처녀를 강간해도 항의조차 할 수 없었을 지경이었다.[1] 가톨릭을 내세워 제주 각지의 토착 신당들을 파괴하고 다니는 짓거리는 덤이었다.

한편 당시 제주도에는 일본 채어인(採漁人)들이 대거 진출했는데 이들은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불법적인 통어활동(通漁活動)을 자행하였다. 특히 아라카와(荒川留十郎) 같은 사람은 어로 독점을 위하여 방해가 되는 프랑스 선교사들을 축출하려 하고 있었다. 채어인과 천주교회로 대표되는 일본과 프랑스 간의 세력다툼도 사건의 배경 중 하나다.

거기에 봉세관 강봉헌이 이전에 사라졌던 민포(民布)를 다시 징수하기 시작했고 가옥세, 수목세, 가축세, 어장세, 어망세, 염분세, 노위세, 잡초세 등의 온갖 잡세까지 징수해 갔다. 게다가 천주교 신자였던 강봉헌은 당시 "원주민 천주교도에겐 세금을 면제해주겠다"고 하며 제주의 천주교도들을 세금징수에 이용했다. 결국 이들의 횡포가 극심해 주민들을 격분하게 했다.

3. 전개

3.1. 봉기의 개시

결국 1901년 2월 훈장이었던 현유순(玄裕順), 그의 아버지 현규석(玄圭石), 장의(掌議) 오신락(吳信洛)이 천주교 정의성당으로 끌려간 후 귀가해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참다 못한 제주도 내 유지들이 4월에 교폐와 세폐를 막기 위해서 상무사(商務社)를 조직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제주도민들이 이곳에 모여서 가톨릭과 교회의 폐해, 지나친 세금 등을 토로했고 이를 제주목사에게 시정해 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5월 6일, 강우백과 지역의 향장(鄕長)인 오대현이 민중대회를 주도한다. 이자리에서 두사람은 제주성에가 목사에게 호소하자 제창했고, 그자리에서 오대현을 장두로 뽑혔다. 그 직후 봉세관 강봉헌은 서울로 도주했다. 집회 직후 천주교도들과 작은 충돌이 있기도 하였으나 크게 번지지 않았다.

이틀 뒤, 다시 충돌이 벌어지는데, 관아의 부의방이자 천주교도인 김옥돌의 오대현의 기첩 간음 문제로 그가 태형 30대를 맞은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교인들의 항의를 무마하기 위해 오대현도 태형 15대를 맞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도인 김진사가 무리 50을 모아 그 천주교도를 억지로 석방시킨뒤, 상무사 사람 하나를 끌고 갔다. 이에 상무사 사람들이 끌려간 사람을 구해내고 김진사와 김옥돌은 상무사 사람들에게 매를 맞았다.

한편, 오대현 주도로 제주성으로 향하던 진정단을 천주교 타도를 목표로 하는 난이라고 판단한 제주 천주교회는 마르셀 라크루(구마슬)[2]와 무세(문제만)등의 신부가 무장한 신도 3백명을 모아 두 세력은 명월진에서 충돌한다. 구마슬 신부가 몇발 위협사격을 하자 진정단원들은 일단 잠시 해산하기로 한다. 허나 그 틈을 타 교도들이 오대현 및 진정단원 다섯을 납치해 주목으로 넘긴 뒤, 이어서 철수하는 진정단원들을 쫓아 대정군으로 가, 대정군의 무기고를 탈취하고, 마을 주민들을 위협한다. 이 과정에서 신도리 주민 김봉년이 사망하기까지 한다.

장두가 없어지자, 대정군의 관노이던 이재수가 나서 비폭력적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판단하고 무장봉기를 결심한다. 이재수는 여기저기서 포수 40명 포함 장정들을 모아 무장하고, 5월 15일, 동진은 강우백이, 서진은 이재수 본인이 맡아 제주성으로 향한다. 가는길에 교인들의 은거지를 소탕하며 갔는데, 가는길 마다 분노한 도민들이 합류했다. 5월 16일이 되자, 제주성을 포위하고 근처에 진을 쳤다. 천주교도들은 성안에 들어가 포를 가설하고 사격전을 벌이며 버텼다.

5월 23일, 제주군수 김창수는 중재를 시도해 구마슬 신부와 교섭하여 오대현을 풀어주며 상황을 무마하려 했지만, 이재수가 단호히 거부하고, 풀려난 오대현[3]이 참가하며 되려 전력이 강해졌다. 5월 25일이 되자 주민들은 포위로 인해 동요했다. 결국 성내에서 김남혁 주도로 주민들과 부녀자들이 모여 민군을 들일것을 요구했다. 구마슬 신부는 사흘뒤에 열겠다고 하며 민중을 해산시켰다. 물론 이는 프랑스 공사관에 은밀히 적객으로 있던 장윤정을 보내 연락을 넣어뒀기에 사흘 뒤에 프랑스 군함이 도착하리라 예상한 것이었다. 허나 5월 28일이 되어도 도착하지 않았고,[4] 참다못한 부녀자들과 돼지장수들이 성을 지키던 천주교도들을 무장해제시키고 묶은 뒤, 성문을 열어 민군을 들였다.[5] 프랑스 신부들은 정의군수 김희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숨어서 살았다.

입성 후, 이재수는 지시를 내리며 천주교인 약 300명을 색출하여 처형했다.

파일:attachment/이재수의 난/3d.jpg

프랑스 해군이 촬영한 당시 제주성 부근의 천주교인들의 시체.

이들 대다수가 학살당하고도 묻히지 않고 그대로 바깥에서 방치되었다.[6] 하지만 이후 프랑스군군함 두척이 도착하면서 일이 커져갔다.

3.2. 민란의 끝, 그리고 이재수의 처형

5월 31일 프랑스 해군 군함 두척이 제주도에 정박했고 제물포에 주둔 중이던 프랑스 해군 군함들이 갑자기 어디론가 빠져나가는 것을 본 일본 해군 군함 한척이 프랑스 군함들을 추격하여 제주도 앞바다로 따라왔다. 이후 프랑스군은 대대적으로 참전할 뜻을 보이며 도민을 학살하겠다 위협하나, 신임 제주목사 이재호의 호소로 멈춘다.

군함의 도착 소식에 이재수는 다시 민군을 모으니 약 1만여명이었다. 한편, 대한제국군과 프랑스 해군의 담판으로 가까스로 프랑스 해군을 자국 신부들과 교도 40여명을 데리고 돌려보낸다. 이후, 군은 민란이 아직 진정되지 않음을 보고했고, 이에 조정은 기존 예정되있던 제주도 관직의 인사를 변경한다. 6월 10일, 새로이 부임한 찰리사 황기연은 도착하자마자 교폐와 세폐 시정을 명한 고종의 방문을 붙인다. 이에 이재수는 "정부가 외국 군대를 겁내고 백성을 지켜주지도 못하는가"라고 하며 1만여 제주도민을 스스로 해산시킨다.

이재수는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기로 하고 자수했다. 이에 친우인 강우백이 "너만 죽게 할 수 없다"면서 같이 자수했으며 이 학살을 지지하던 양반 출신의 오대현도 자수했다.[7] 6월 11일, 이들은 구속된다. 제주민중이 이들의 석방을 요구 했지만, 정부는 조사가 끝나는데로 풀어주겠다고 약속하며 서울로 압송했다. 이때 횡포를 부리던 천주교도들 또한 함께 구속된다. 이들 중에는 서울로 도망친 봉세관 강봉헌도 있었다.

오대현은 "관노 출신의 용기 있는 이가 모든 책임을 다하는데, 내 어찌 양반으로서 가만히 볼 수 있겠는가. 천한 것이라며 그를 얕보지 마라. 그의 기개는 대장군감이었다."라며 이재수를 칭송했다.

이리하여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은 1901년 7월 18일, 한국 최초로 평리원에서 서양식 재판[8]을 받고, 10월 9일 교수형을 당하여 삶을 마쳤고 대정군수 채구석[9]은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감형되어 파직되었으며[10] 몇몇 주동자들은 징역형을 살았으며 또 하나의 원흉이었던 강봉헌은 이재수와 도민들의 요구로 인해 재판을 받고 파직당했다. 한편 강봉헌은 한성으로 압송된 후 풀려나 고향 평북으로 낙향했는데 무죄방면은 부당하다는 여론에 다시 체포하려 했으나 신분을 버리고 잠적했는지 더이상 쫓을 수가 없었다.

이들 셋이 모든 책임을 졌기 때문에 이재수의 유일한 혈육인 누이동생 이순옥과 오대현의 아우와 강우백의 식솔들은 일체 처벌받지 않았다. 이재수 등이 봉기군을 해산하고 자수함으로서 프랑스 해군 등 외국군은 개입할 명분을 잃었고 제주 도민들의 피해도 줄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재수 등은 주민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는 죽은 가톨릭 신자들의 묘지를 안장하는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는 1903년 말이 되어서야 유족들이 인수해가고 남은 무연고 시신 31기를 사라봉(沙羅峰) 아래 황사평(黃沙坪)에 안장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5,160원의 배상금이 프랑스에 지급되었으며 배상금의 이자인 722원은 제주도민들의 탄원으로 석방된 채구석이 도민들로부터 걷어 지급했다. 한편 황사평에 안장된 무연고 시신들은 이후 1987년에 개장하여 지금의 순교자 묘역으로 모아 합장하고 남은 부지를 천주교 제주교구 소속 성직자와 신도들의 공원묘지로 조성하여 1990년대에 성지로 축성했는데 이 곳이 바로 '황사평 성지'이다.

4. 평가

외세 종교로 인한 충돌과 서양 군대의 침입, 3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냈던 여러가지로 큰 역사적인 사건이건만 이상하게도 이 사건은 그동안 한국 근대사에서 드러나지 않았으며 한국사 교과서에서조차 언급이 없다. 한반도 본토에 비해 제주도 향토사에 대한 관심 자체가 미비하고 다른 항쟁에 비해 파급 효과가 적은 것이 그 이유로 볼 수 있다.[11] 그나마 1961년 이재수의 혈육 이순옥의 주도로 제주도민들은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 세 사람을 기려 삼의사비라는 비석까지 세웠는데 비석은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있다. 하지만 당시 가톨릭계의 반발로 인적이 드문 곳에 감춰진 이 비석은 1997년 새로운 3의사비가 세워지면서 그 비석 밑에 묻혀 버렸다.

파일:external/pds18.egloos.com/e0006522_4dc5f2b7b750d.jpg

새롭게 만든 3의사비. 새로 만든 비 아래에 이순옥이 1961년에 주도하여 만든 3의사 비가 묻혀 있기 때문에 제주도에서도 이걸 복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3의사비의 비문에 대해서 논란이 조금 있었는데 비문의 내용 중 “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식이 될 것이다.", "1801년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그의 아내 정난주(丁蘭珠)[12] 마리아가 유배되어 온 후 딱 100년 만에 일어난 이재수 난은 후세에 암시하는 바가 자못 크다"란 부분에서 가톨릭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 측에서 이에 대해 지나친 내용이라고 반발하였으나 비석의 건립 자체를 막지는 않았다. 비문의 전체 내용은 다음 링크를 참고하기 바란다. #

일본의 영향 등이 잘 나타나 있지 않은데 이 문서 등을 참고. 다만 링크에 나온 내용은 민란을 일으킨 세력들에 대해 너무 부정적으로 묘사된 것에 비해 당시 천주교도들의 만행에 대해서는 적혀 있지 않으므로 걸러봐야 할 것이다.

5. 가톨릭 측 반응

https://youtu.be/JlBiB6qmelE

1999년 천주교 제주교구는 학술 심포지엄을 통해 과거 교회사의 문제점을 반성하고 정리하는 시도를 벌였다.

2003년 11월 천주교 제주교구와 제주도민을 대표한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는 '신축년 제주항쟁 102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화해와 기념을 위한 미래선언'을 채택했다. 선언문을 통해 '상호 존중의 기조 위에 과거사의 진실을 명명백백히 밝힐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제주 공동체의 화합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고자 노력한다'고 다짐했다.

2011년에 가톨릭에서 당시 가톨릭 신자 사망자들을 복자로 시복 추진하겠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으나 이후 한국 가톨릭에서 시복시성을 준비한 124위에는 이재수의 난 관련자가 단 1명도 없다. 상술된 것처럼 가톨릭 측 피살자의 상당수가 가톨릭의 이름을 내세워 강간, 고문 등을 저지른 파문당해 마땅한 중범죄자들이라 이들이 시복된다면 다른 제대로 된 순교자들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가톨릭이 정상적으로 심사한다면 탈락하는 게 당연하다.[13]

가톨릭출판사에서 펴낸 순교의 맥을 찾아서(2009)를 보면 646쪽에 나온 부분이 비가톨릭 쪽으로 보면 굉장히 거슬릴 수도 있다. "지방관리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들의 비리를 가톨릭 쪽으로 넘겼으며 무당 및 토착 세력이 도왔다"고 하면서 오대현과 이재수를 그저 반란자, 폭도로 묘사하며 가톨릭 신자 학살이라고 서술했다.

다만 이 책은 "가톨릭이 피해자다"라며 변명하는 불쏘시개는 아니다. 바로 다음 페이지인 648쪽에서는 이 난에 대하여 4가지로 압축하여 쓰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단, 그러는 와중에도 결정타가 된 온건파 지도자 납치는 없다고 침묵한다.
1. 일부 가톨릭인들의 비리 및 행패를 저질렀으며, 비리를 저지른 관리들이 가톨릭인을 고용하여 더 행패를 조장했다.
2. 이에 대하여 프랑스인 신부들은 그저 무조건 옹호하면서 외세와 종교에 대하여 제주도민들에게 증오를 받았다.
3. 한국 침탈을 노리던 일본이 무기를 제공하고 분열을 조장했다.
4. 거기에 무조건적인 가톨릭 믿음을 강요하며 무속 및 토속 신앙 및 불교같이 오랫동안 자리를 한 이들과 갈등이 빚어졌다.

이 사건이 있었다고 제주도에서 가톨릭의 교세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선교사들이 와서 다시 선교를 해서 어느 정도 다시 교세를 일으키고 학교까지 만들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선교사들이 자국으로 징병당해서 다시 쇠퇴했다.

당시(1902년) 선교사가 상부에 보낸 기록에 의하면 신입 신자들은 그렇게 많은 살인이 처벌받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대정(大靜) 지역은 여전히 적의에 차서 도망가는 몇몇 신자들을 놓친 것을 한스러워하고 정의(旌義) 지역은 좀 온건하나 가톨릭 신자 자처하는 불량배들이 외교인(타종교인)들에게 행패를 부리는데 이들 대부분은 자신들에게서 쫓겨난 이들로서 주민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으로서 자신의 가족이 학살당했다는 구실하에 돈을 갈취하고 이에 선교사는 이들 여러 명을 관아에 보내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14]

이 사건의 발단에 있어서 일본의 영향이 상당했는데 제주 가톨릭 교회와 일본인의 갈등이 이어져서 1902년 6월 양시중(梁始中) 사건이 일어났다. 교회와 제주 향촌 사회와의 갈등은 사라지지 않아 1903년 초에는 정의군 지역에서 가톨릭 교회의 타파를 요구하는 문서가 나돌았으며 호근리에서는 허 좌수(許座首)라는 자가 가톨릭 결사를 조직한 적도 있었다. 결국 1902년 김명필 사건이 터지면서 갈등이 드러났다.

천주교 제주교구 제5대 교구장 문창우 비오 주교가 신축년 제주항쟁 사건과 관련해 인터뷰를 나누었다. 2021년 천주교 제주교구는 황사평과 하논본당 등에 '화해의 탑'을 제막하고 위령미사를 거행했다. 심포지엄 또한 개최되었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는 여전히 '신축교난(辛丑敎難)'이라는, 본인들의 피해를 더 강조하는 표현을 고수하고 있기는 하다만 최근에는 '신축교안(辛丑敎案)'으로 바뀌어가는 추세다. 다만, 표현과는 별개로 현대에는 당시 희생된 무고한 교인들도 안타깝지만 제주도민에게 교인의 탈을 뒤집어쓴 모리배들이 각종 만행을 저지른 것은 맞기에 반성하고 피해를 입은 제주도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태도가 대다수다.

6. 기타

  • 이재수의 유일한 혈육 이순옥은 1982년에 86살로 작고할 때까지 독신으로 살면서 오빠를 알리고자 노력해 왔다. 아쉽게도 3의사가 묻힌 무덤은 일제강점기에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녀에겐 더더욱 한 맺힘으로 남았다. 이규태에세이에 따르면 21살부터 예수를 믿었다고 하며[15]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재수 본인도 압송되기 전 하느님에게 자신의 유명을 빌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이순옥은 고작 5살밖에 안되었다고 한다.[16] 현지에서는 '오돌또기 할망'이라고 불렸다는 모양. #
  • 한국 교과서는 물론 역사책에서도 잘 언급되지 않던 이 사건은 제주도 출신 작가이기도 한 현기영에 의해 《변방에 우짖는 새》라는 제목으로 재조명되었다. 재일 한국인 출신 소설가 김석범(본적 제주도)의 소설 《화산도》에서도 일부 언급되기는 하지만 거의 현기영에 의해서 발굴된 사건이라고 해도 좋다. 사건 당시인 1901년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김윤식이 남긴 일기 《속음청사》를 기본으로 황성신문 같은 당대 신문 기사들도 찾아가면서 자료를 모으고 썼다고 한다. 1999년에는 박광수 감독의 영화 <이재수의 난>으로 대대적으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영화에서는 이재수가 너무 광기에 찬 모습으로 나와 제주도에선 "이재수에 대한 모욕"이라는 비난이 많았다. 하지만 제주도에서도 영화 촬영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아부오름 정상에서 촬영하도록 협조했으며 당시 도지사였던 우근민이 엑스트라로 특별출연을 했다. 당시 천주교 제주교구에선 이 영화가 가톨릭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알리는 게 아닌가 우려도 했지만 이를 두고 가톨릭 여러 고위 성직자들은 "당시만 해도 제국주의 종교로서 세계에서 학살과 차별을 조장한 가톨릭의 역사를 되새기고 반성할 기회"라고 하여 "영화에 대한 반대 시위와 같은 일을 저지르면 안 된다"고 주장하긴 했다. 어찌 됐건 영화는 기대 이하 평과 서울 관객 5만이라는 심히 저조한 흥행으로 참혹하게 사라져서 이 사건은 다시 묻혔다. 제작비만 40억 원을 들였기 때문에 참패했고 박광수 감독은 이후 독립영화를 주로 감독하고 있다. 이재수의 난 개봉 후 제주도에 집중호우가 내렸는데 당시 몇몇 도민들은 오름 정상을 촬영지로 제공해서 오름신이 노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영화 주연으로는 이정재, 심은하 등 지금 생각해 보면 상당한 영화배우들이 캐스팅되었다. 2021학년도 수능 대비 수능완성 국어에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의 대목이 수록되었다.
  • 2003년에야 당시 사망자 317명 이름이 담긴 책인 삼군평민교민물고성책(三郡平民敎民物故成冊.1901년 7월)이 공개되었다. 여기에는 정확한 사상자 수와 사상자의 이름까지 서술되어 있는데 그동안 7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는 인식[17]과 달리 실제로는 그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다. 이 책자에 의하면 가톨릭 신자들은 모두 309명이 희생당했으며 민군은 모두 8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참고로 절대다수가 남성이었다.
    파일:external/pds18.egloos.com/e0006522_4dc5f5461f05e.jpg

    당시 사망자 명단을 적은 삼군평민교민물고성책
  • 당사국이었던 프랑스도 굉장히 난감한 입장에 처했는데 왜냐면 당시 프랑스에서는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반종교적 성향이 득세했고 결국 얼마 못 가 1905년 법으로 정교분리(라이시테)를 못박아 놓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 코가 석자였던 셈이다.


[1] 실제로 강기봉이라는 사람이 교인을 빙자해 강간을 저지른 후 아이를 낳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2] 5월에는 피정을 가있어 제주도에 없었다고도 한다.[3] 이때 형인 오대헌도 민군에 참가 하고 있었다.[4] 5월 30일에 도착한다.[5] 이 때 이재수는 제주성의 서문인 진서루(鎭西樓)로, 오대현, 오대헌 형제와 강우백은 각각 남문인 정원루(定遠樓), 동문인 연상루(延祥樓)를 통해 제주성에 입성하였다.[6] 대부분은 이후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한다. 1903년 말이 되어서야 유족들이 인수해가고 남은 무연고 시신 31기를 사라봉(沙羅峰) 아래 황사평(黃沙坪)에 매장한다. 후술.[7] 이렇게 백성들이 공권력의 부패에 맞서 무장 봉기한 다음 관과 협상을 하여 받아들이고 타협하는 대신 지도부 몇몇만이 총대를 메고 자수해서 목숨을 대가로 내놓는 사례는 조선 후기의 '민란'에서는 거의 관례적으로 반복되는 사례다. 이때 지도부로서 봉기의 모든 책임을 지는 자를 장두(狀頭)라고 하는데 문자 그대로 정부를 상대로 그 정부 공권력의 비리를 고발하는 고소장의 고소인으로써 첫머리에 이름을 올렸다는 뜻이다. 국어사전에도 '장두를 서다'라는 단어가 실려 있는데 그 뜻은 현대 한국어관용어에서 '총대를 메다'라는 표현의 의미와 같다.[8] 이때 오대현은"백성들이 괜히 무기를 들고 나섰겠는가? 조정의 무책임과 외세의 약탈로 피해 보는 백성을 생각해 달라."고 당시 조정과 천주교 측을 법정에서 꾸짖었다.[9] 채구석은 신부들 중 일부를 보호해 주거나 이후 프랑스 측이 눈에 불을 켜고 조사해도 그리 큰 문제가 없다고 할 정도로 프랑스인들을 살려주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파직당할 때 프랑스 측이 오히려 어이없어 할 정도였다.[10] 배상금 부담을 조건으로 풀려났다. 이 배상금 때문에 가세가 기울어 힘들게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불가능으로 여겨질 정도로 난공사인 천제연 도수로공사를 완성시켜 5만 평 가량의 황무지를 농지로 탈바꿈시켰다. 참고로 그의 5남인 채몽인(蔡夢印)이 세운 기업이 애경그룹이다. 다만 며느리 장영신 회장이 천주교인인 데다 제주항공이 누구네 회사인지 생각해 보면 참으로 묘하다.[11] 1885년 러시아 함대가 일으킨 제주성 위협사건도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12] '정명련'이라고도 한다. 정약용의 큰형인 정약현의 딸이다. 정 마리아가 유배 갈 당시 아들 황경한은 2살이었고 어머니와 헤어져 추자도에서 자랐다.[13] 저 강간, 약탈, 살인 등의 죄명들은 십계명에서 금지한다! 십계명이 기록된 출애굽기는 그리스도교에서도 경전으로 인정하는 만큼 당연히 이들은 가톨릭 관점에서도 죄인으로 시복은커녕 파문시킨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14] 교구연보;1878~1940. 362페이지[15] 출처: # 정황상 개신교일 가능성이 높다. 천주교 제주교구에서 그녀의 교적을 확인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순옥 자신은 "정녕 오빠는 하나님의 사자이십니다. 하나님을 팔아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들을 꾸중하러 보내신 겁니다. 오빠는 하나님 편입니다."라고 전했다고 한다. 물론 후에 제주를 무고한 양민의 피로 물들인 주범들 역시 하나님을 따른다고 떠드는 인간들이었다.[16] 영화에서 심은하가 연기한 배역이 이재수의 여동생이라고 이전까지 문서에 남아있었으나 사실 이재수의 여동생을 연기한 것이 아니라 이재수의 연인인 가상인물 일숙화를 연기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재수의 여동생은 직접 출연은 커녕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작중에서 일숙화는 과부로 살지 않겠다며 혼인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데 이는 이재수의 여동생이 평생 독신으로 살아왔다는 것에서 영감을 받은 듯하다.[17] 그런데 이 인식은 가톨릭 측 주장이었다. 그만큼 자기들 신자들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다가 이게 공개되면서 이제 300~350명, 즉 이전과 달리 절반 정도로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