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4년의 우트르메르(십자군 국가)[1] 파랑색: 예루살렘 왕국[2], 주황색: 트리폴리 백국, 녹색: 안티오크 공국, 붉은색: 에데사 백국, 노랑색: 킬리키아의 소 아르메니아 왕국[3] |
[clearfix]
1. 개요
십자군 전쟁으로 세워진 나라들을 십자군 국가(Crusader states)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11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서유럽의 십자군들이 아나톨리아, 그리스,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방의 성지에 세운 기독교 국가들을 말한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주로 서유럽 십자군들이 이들 지역에 정착하면서 봉건 국가를 세웠다.2. 레반트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레반트 지역에 처음 세워진 국가들을 말한다.- 에데사 백국 (1098년 - 1144년): 최초의 십자군 국가. 훗날 예루살렘의 첫 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보두앵 1세[4]가 에데사 지역의 아르메니아 군주 토로사의 후계자로 낙점되면서 건설되었다.
- 안티오키아 공국 (1098년 - 1268년): 1차 십자군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자 남이탈리아의 노르만 귀족인 보에몽 드 타란토 공작이 안티오크를 점령하고 세운 2번째 국가.
- 예루살렘 왕국 (1099년 - 1291년): 1187년까지 수도는 예루살렘. 살라흐 앗 딘에게 함락된 후 아크레로 천도. 예루살렘 함락 이후 하 로렌의 공작인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성묘의 수호자 자리에 앉으면서 건설되었다.
- 예루살렘 왕국 속령
- 갈릴래아 공국: 보에몽의 조카인 탕크레드가 불과 수십 기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던 이 지역을 점령하여 건설했다.
- 자파와 아스칼론 주
- 트란스 요르단 영지
- 시돈 영지
- 트리폴리 백국 (1104년 - 1288년): 트리폴리 자체는 1109년 정복하고 마지막으로 건국. 1차 십자군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자 프랑스의 대귀족인 레몽 드 생질 백작이 건설했다.
- 아르메니아 왕국: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소 아르메니아)은 십자군 이전에 세워졌지만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기독교 왕국의 지위를 부여했고 기독교 왕국으로 서유럽 십자군 국가의 보루 역할을 하였다. 나중에 뤼지냥 가문에 의해 반(半)서유럽 국가가 되었다.
3. 동로마 제국
[[라틴 제국| 라틴 제국 ]]Imperium Romaniae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
봉신국 | ||||
}}}}}}}}} |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그리스와 부속 도서에 세워진 십자군 국가들. 그리스어로는 '프랑크인의 지배'라는 뜻의 '프랑코크라티아(Frankokratia)'[5] 또는 '라틴인의 지배'라는 뜻의 '라티노크라티아(Latinokratia)'라고 불리기도 한다. 4차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을 일시적으로 멸망시키고 몇 개의 국가를 세웠고, 몇몇 섬들[6]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들 국가 중 테살로니카 왕국과 라틴 제국은 동로마의 망명 정권에게 각각 1224년과 1261년에 재정복당했고,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등지의 십자군 국가들은 15세기에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할 때까지 존속했다.
- 라틴 제국 (1204년 - 1261년) :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수립했다. 나머지 프랑코크라티아의 명목상 종주국이었다. 니케아 제국에 의해 멸망당했고, 이후 그 자리에 동로마 제국이 재건되었다.
- 테살로니카 왕국 (1205년 - 1224년) : 몬페라토 변경백 보니파시오가 건국했다.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에게 멸망했다.
- 아카이아 공국 (1205년 - 1432년) : 펠로폰네소스 반도(모레아)에 기욤 드 셩프리트(Guillaume de Champlitte)가 세운 나라. 요안니스 6세에 의해 세워진 동로마의 지방 정권인 모레아 전제군주국에 병합됐다.
- 아테네 공국 (1205년 - 1414년) : 카탈루냐인이 아테네를 수도로 하여 세운 나라로 아라곤 국왕에게 공작위가 넘어갔다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아라곤을 계승한 스페인 국왕은 지금까지도 아테네 공작을 칭하고 있는데, 국내에서 명목상으로 사용하는 칭호일 뿐, 진지하게 아테네의 영유권을 주장하는건 아니다.
- 낙소스 공국 (1207년 - 1597년) : 베네치아인이 제4차 십자군 후에 에게 해에 건국한 나라로, 16세기 말까지 존속하여 십자군 국가들 중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국가가 되었다.
- 베네치아 공화국령 그리스: 4차 십자군의 결과로 크레타, 에우보이아는 베네치아가 병합했고 후에 남계후손이 끊긴 키프로스 왕국을 겁박해 키프로스마저 병합했으나 에우보이아는 1470년, 키프로스는 1570년, 크레타는 크레타 공방전 후 1669년에 오스만에게 잃었다.
4. 지중해 동부
- 키프로스 왕국 : 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 키프로스에 세워진 기독교 십자군 왕국. 원래 키프로스는 동로마 제국령이었으나 3차 십자군 전쟁 중에 키프로스의 지배자인 이사키오스가 잉글랜드 왕국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에게 겁 없이 개기다가 털린 이후로 잠시 앙주 제국령이 되었고, 나중에 서유럽으로 돌아가면서 자신이 후원했던 기 드 뤼지냥이 예루살렘 왕위에 오르지 못하자 키프로스의 지배권을 보상으로 내주게 되면서 그리스도교 십자군 왕국이 세워져 키프로스 왕국의 왕으로 임명됐다. 이후 1489년 마지막 여왕인 카테리나 코르나로(Catherine Cornaro)가 베네치아 공화국에 키프로스 왕국을 강제로 할양했다.
- 병원기사단령 로도스 섬: 병원기사단은 1291년 예루살렘 왕국의 멸망 후 육지의 거점을 잃고, 키프로스로 도망쳐 무슬림과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후, 1310년 그들 자신에 의해 군사지배화된 국가를 로도스 섬과 소아시아의 일부 및 몇몇 인근 섬에 수립했다. 그들은 로도스 기사단을 명칭으로 무슬림의 상선이나 군함을 습격했으나, 결국 1522년에 오스만 제국에 쫓겨나 몰타로 들어갔다.[7]
5. 발트 해 동부 연안
동방 십자군 활동으로 건국된 국가들. 함락 직전인 아크레를 수호하기 위해 결성되었다가, 후에 헝가리 왕국 등으로 옮겨 이민족과 이교도에 대한 정벌의 첨병이 된 독일인의 성모 마리아 기사수도회(튜튼 기사단, 독일 기사단이라고도 함)는 팔레스타인에서 십자군이 철수한 후, 발트 신화를 믿는 프루스인, 리투아니아인과 전투를 벌여 독일 기사단국을 건국했다.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의 정복 활동으로 기사단령과 여러 주교령이 형성되었다. 튜튼 기사단은 1237년에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을 합병하였고, 1241년에 루스로 진출하였으나 알렉산드르 넵스키에게 패배하여 실패하였다. 이후 발트 지역의 무역을 독점하여 큰 돈을 벌었고, 한때 발트해의 강국으로 부상하였으나,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기사단이 리투아니아 대공국-폴란드 왕국 연합군에게 패배한 후 몰락하였다. 1525년에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마르틴 루터를 직접 만나고 온 호엔촐레른 가문 안스바흐 분가 출신 알브레히트가 루터교회로 개종하고 기사단국을 세속화하여 프로이센 공국을 건설하였다. 이 프로이센 공국이 호엔촐레른 가문 본가가 통치하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동군연합하여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되고, 1701년 프로이센 왕국이 되어 1871년 독일을 통일한다.[8]6. 이베리아 반도
넓게 구분하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레콩키스타도 십자군에 포함된다.7. 북유럽
이베리아 반도 쪽과 마찬가지로 넓게 본다면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3국, 즉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도 십자군 국가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북방 십자군으로서 스웨덴 북부의 사미족들이나 핀란드 등을 정복하였기 때문.[9] 오늘날 북유럽 국가들의 국기가 이 북방 십자군 활동에서 유래되었다.8. 십자군 국가 간의 관계
The states of Antioch, Tripoli and Jerusalem were autonomous. ... the king had no right to intervene in Tripoli's internal administration, while the count was not bound by treaties which the king made with foreign powers. Nevertheless it would be misleading to overemphasize the degree of separatism between the state; they had always been willing to assist each other when threatened by Muslim powers, and by Baldwin IV's reign, as a result of intermarriage, all three ruling houses were closely related and this increased the likelihood of mutual intervention. Although there were important differences in some areas the political, military and social structures of Tripoli and Antioch had a great deal in common with those of the Kingdom of Jerusalem.
안티오크, 트리폴리, 예루살렘은 자치적이었다. ... (예루살렘의) 국왕은 트리폴리의 내부 행정에 개입할 권리가 없었다. 반면 (트리폴리의) 백작은 국왕이 외국 강대국과 그들이 맺은 조약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간의 분리주의의 정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항상 기꺼이 함께 해왔었다. 이슬람의 힘에 의해 위협을 받을 때 서로를 돕고, 보두앵 4세의 치세 기간에는, 결혼의 결과로서, 세 개의 지배 집단은 모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이것은 상호 개입의 가능성을 증가시켰다. 비록 몇몇 지역에서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지만 트리폴리와 안티오크의 정치, 군사, 사회 구조는 예루살렘 왕국의 그것들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Bernard Hamilton, Professor of Crusading History, University of Nottingham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안티오크, 트리폴리, 예루살렘은 자치적이었다. ... (예루살렘의) 국왕은 트리폴리의 내부 행정에 개입할 권리가 없었다. 반면 (트리폴리의) 백작은 국왕이 외국 강대국과 그들이 맺은 조약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간의 분리주의의 정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항상 기꺼이 함께 해왔었다. 이슬람의 힘에 의해 위협을 받을 때 서로를 돕고, 보두앵 4세의 치세 기간에는, 결혼의 결과로서, 세 개의 지배 집단은 모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이것은 상호 개입의 가능성을 증가시켰다. 비록 몇몇 지역에서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지만 트리폴리와 안티오크의 정치, 군사, 사회 구조는 예루살렘 왕국의 그것들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Bernard Hamilton, Professor of Crusading History, University of Nottingham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1] 프랑스어 Outre(바깥/건너) + Mer(바다)[2] 짙은 파랑색은 프리드리히 2세가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을 수복한 1229년의 영토다.[3] 셀주크 제국의 침입을 피해 피난온 아르메니아인이 세운 나라로, 합성론파 기독교 국가였다.[4] 첫 지배자인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성묘의 수호자란 검소한 칭호에 만족했다.[5] 그리스에서는 서유럽을 프랑크라고 부르곤 했다. 이는 신성 로마 제국 형성 이후 동로마 제국의 '우리가 로마고 저들은 로마가 아니다'라는 입장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이다. 한편 아랍인들 역시 서유럽인들을 주로 프랑크라고 불렀다.[6] 크레타, 에우보이아, 이오니아 등[7] 몰타 기사단은 몰타를 중심으로 여전히 오스만 등의 이슬람 함선을 습격하였으나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의 일환으로 몰타섬을 침공해 점령해버렸고, 기독교도와 싸우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기사단이 항복하면서 기사단 국가는 멸망했다. 이후 다시 재건되기는 하나 영토가 없는 사실상 NGO단체로 전락해버렸다. 그래도 유엔 등의 국제기구에서 옵서버로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8] 여담으로 프로이센 왕국의 중심지는 프로이센 공국이 아니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었다. 애초에 호엔촐레른 가문의 중심지가 브란덴부르크니 수도가 베를린으로 정해졌고, 호엔촐레른 가문이나 프로이센 융커 계층에게는 브란덴부르크 계승의식만 있었지 튜튼 기사단과 동프로이센은 안중에도 없었다.[9] 심지어 노르웨이의 시구르 1세는 아예 레반트로 십자군 원정을 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