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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주룸

테오도시오폴리스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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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 (시타델)와 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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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마크인 쌍미나렛 마드라사와 시가지

1. 개요2. 상세3. 역사
3.1. 동로마 제국3.2. 동로마 vs 이슬람 제국3.3. 동로마 제국 2기3.4. 살투크 왕조의 수도3.5. 룸 셀주크3.6. 중근세3.7. 오스만 제국
3.7.1. 아바자 메흐메트 파샤의 반란3.7.2. 혼란의 19세기3.7.3. 1차 대전
3.8. 현대
4. 기타5. 볼거리

1. 개요

튀르키예어: Erzurum
아르메니아어: Կարին(카린)
아랍어: '''أرضروم

튀르키예 동부의 도시다. 에르주이 아니다 동명의 의 도청소재지이며 인구는 37만명이다. 아르메니아고원의 서쪽, 해발 1760m에 위치한 도시이다. 지명 에르주룸은 페르시아어로 로마인의 땅이라는 뜻의 Erz-ı Rûm에서 비롯되었다.[1] 동부 아나톨리아의 역사적 중심지로, 구도심에는 성채와 여러 마드라사 및 모스크 등이 남아있다.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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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타델 (칼레시)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좌측 돔은 성채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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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에르주룸 동계 유니버시아드를 앞두고 세워진 스키점프

로마 시대의 명칭은 테오도시오폴리스로, 이란/이슬람 세력에 대한 주요 기지였다. 700년경 우마이야 왕조에게 점령되어 말라티아와 함께 이슬람 세력의 소아시아 진출에 있어 전초기지였으나 949년 동로마 제국이 수복하였다. 다만 만지케르트 전투셀주크 제국을 거쳐 12세기 살투크 왕조의 초기 수도였다. 13세기에는 룸 셀주크를 거쳐 일 칸국령이 되었고, 이후 트레비존드 제국 - 추판 왕조 - 흑양 왕조 - 티무르 제국 - 백양 왕조 - 사파비 왕조를 거쳐 1516년 찰디란 전투오스만 제국령이 되었다. 현재는 아르메니아를 견제하기 위한 튀르키예의 군사 기지가 위치한다. 시가지 서쪽의 아타튀르크 대학교는 학생이 무려 9만에 달하여, 튀르키예에서 가장 학생이 많은 대학으로 유명하다. 이래 저래 상당히 낙후된 동부 아나톨리아 고원 지역의 중심 도시 역할을 수행한다.

도시 주변에 유프라테스 강의 발원지와 국제적으로 스키점프 경기장이 위치한 팔란듀켄 스키 리조트가 위치하며, 구도심에는 셀주크 ~ 일칸국 시절에 지어진 마드라사가 여행지로 가볼 만하다. 튀르키예에서 눈이 가장 많이 오는 곳으로 유명하며 튀르키예에서 제일 추운 지역이다. 도시의 기후는 보기도 매우 드문 고지 지중해성 기후(Dsb)로 여름에는 건조하고 따뜻한 같은 기후를 느낀 반면, 겨울에는 춥고 눈폭탄이 많이 쏟아질 정도를 가진다. 따라서 튀르키예 동계스포츠 훈련 및 경기장을 오래전부터 만들어둬서 겨울 스포츠 전문도시로 알려져 있다. 이런 점으로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유치를 신청했지만, IOC의 최종후보 선정에서 탈락했다. 스포츠 시설이니 숙박 시설 평가는 나쁘지 않으나, 동부 쪽 치안 문제 및 교통 불편이 걸려서 가장 먼저 후보에서 탈락했다.

3. 역사

상고대 시기 일대는 우라르투에 속했고, 아리아계 민족인 디아우에히 족이 거주했다. 고대 아르메니아 왕국 시절 이란계 카렌 가문의 일파가 정착하여 카린의 도시란 뜻인 카르노 카가크(Կարնոյ քաղաք)라 명명했고, 이후 단순히 카린(Կարին)이라 불렸다. 아르탁세스 왕조아르샤쿠니 왕조 시기 도시는 바르다즈르 하이크(상부 아르메니아) 지역에 속한 카린주의 치소였다. 그러다 387년, 로마 제국사산 왕조가 아르메니아를 분할 점령하자 카린은 동로마 령이 되었고 당시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이름을 따서 테오도시오폴리스 (Θεοδοσιούπολις)라 명명되었다. 테오도시오폴리스는 사산 제국령 아르메니아를 감시할 군사 거점으로 중시되었다.

3.1. 동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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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기에 세워져 계속 보강된 에르주룸 칼레시 (시타델)

502년 동로마 제국을 침공한 사산 제국의 샤한샤 카바드 1세가 테오도시오폴리스를 점령했다. 그는 더 나아가 아미다까지 함락했으나 에데사 점령에는 실패하고 회군했다. 이후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테오도시오폴리스를 요새화하고 많은 수비대를 배치했다. 530년, 이베리아 지역을 석권한 사산 제국군이 테오도시오폴리스를 점령했으나 뒤이은 사탈라 전투에서 패하고 철수했다.

그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테오도시오폴리스 성벽을 더욱 강화했다. 한편 최소 5세기 초엽부터 테오도시오폴리스에는 카이사레아 대주교 하의 주교가 있었고, 칼케돈 공의회에도 참석했다. 572-91년의 전쟁으로 서부 아르메니아 전역을 장악한 동로마 황제 마우리키우스는 아르메니아 교회의 칼케돈파를 강화하기 위해 593년에 테오도시오폴리스 공의회를 개최, 서부 아르메니아의 주교들을 소환했다.

소집된 주교들은 칼케돈파 신앙 선서를 이행한 후 바가란의 요안니스를 새 총대주교로 선출했다. 603년에는 사산 제국의 호스로 2세가 폐위된 마우리키우스 장남 테오도시우스를 내세우며 아나톨리아로 진군했고, 이에 608년 테오도시오폴리스가 항복했다. 이후 호스로 2세는 동로마 제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세우지만, 헤라클리우스의 반격에 패해 물러난다. 따라서 624년에 일대는 다시 동로마 령이 되었다.

3.2. 동로마 vs 이슬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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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례 주인이 바뀐 에르주룸 성채

이슬람 정복 시기 테오도시오폴리스는 하비브 이븐 마슬라마 알 피흐리가 이끄는 8천여 이슬람 제국군의 공격을 받았다. 수비대는 반격하여 처음에는 성공적이었으나 결국 패해 성내로 철수했고, 협상을 통해 안전한 철수 혹은 지즈야 (인두세) 납부의 조건으로 항복했다. (654년) 많은 주민들은 동로마 영토로 떠났고, 하비브는 더욱 서진해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동로마 군을 격파한 후 귀환했다. 곧 당시 시리아 총독이던 무아위야 1세가 보낸 2천의 아랍 기병이 정착했고, 지명은 옛 아르메니아계 지명인 카르노 카가크에서 유래한, 혹은 현지 아르메니아인 왕비 칼리의 이름을 따서 칼리킬라 (قاليقلا)로 명명되었다. 7세기 말엽 2차 피트나를 틈타 동로마 군이 재차 점령했으나 701년,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에 의해 수복되었다. 이후 칼리칼라는 멜리테네처럼 자치적인 아미르 (변경백)령이 되었다.

칼리칼라는 아르메니아 지역의 유일한 아랍 거점이었다. 칼리칼라의 아미르들은 지속적으로 동로마령 아나톨리아를 습격했다. 그러다 752년, 콘스탄티노스 5세가 압바스령 아르메니아를 공격하여 테오도시오폴리스와 멜리테네 (말라티아)를 함락, 파괴한 후 기독교도 주민들을 트라키아로 이주시켰다. 다만 당시 막 건국된 압바스 왕조는 내부 통합에 힘쓰던 시기였기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930년 가을에는 동로마 장군 요안니스 쿠르쿠아스가 칼리칼라를 포위했고, 도시는 동로마 제국에 병합되지 않으려던 조지아의 이베리아 왕국측 보급 덕에 버텼다. 하지만 요안니스가 아락세스 강 이북의 영토를 넘겨주자 이베리아 왕국은 동로마와 동맹을 맺었고, 완전히 고립된 칼리칼라는 7개월 만인 931년 봄에 함락되었다. 칼리칼라에는 동로마 군이 주둔했고, 그 아미르는 동로마에 연공을 바치며 복속했다.

다만 939년 칼리칼라 주민들은 동로마 주둔군을 축출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요안니스가 도시를 포위했으나, 함단 왕조의 사이프 앗 다울라가 구원에 나서자 철수했다. 이후 사이프 앗 다울라는 콜로네이아 (셰빈카라히사르)까지 진격하고 칼리칼라 일대를 안정시켰고, 942년 들어 요안니스는 다시 공세에 나섰지만 아르메니아고원 대신 킬리키아 ~ 자지라 지방에 치중했다. 그러나 949년 2월, 요안니스 쿠르쿠아스의 동생이자 요안니스 1세의 조부인 테오필로스 쿠르쿠아스가 칼리칼라를 몇 차례 습격한 후 포위했다. 7개월 간의 공성전 끝에 도시는 9월에 항복했고, 다시 테오도시오폴리스로 환원되어 동로마 제국의 동쪽 변경 성채가 되었다.

3.3. 동로마 제국 2기

점령 후 아랍 주민들은 축출되었고, 그리스 및 아르메니아 기독교도로 재정착되었다. 이와 함께 테오도시오폴리스 테마가 신설되었고, 테오필로스는 그 사령관이 되어 10여년간 주둔한다. 1세기에 걸친 동로마 제국의 2차 전성기 동안 테오도시오폴리스는 안정을 누렸다. 1018년 바실리오스 2세는 현지 아르메니아 주민들과 함께 시가지와 성채를 재건했다. 중세 아르메니아 왕국과 접경하던 도시는 1045년 동로마의 아르메니아 병합으로 거의 후방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1050년대 후반부터 셀주크 제국이 일대를 습격하며 다시 불안정해졌다. 1071년, 당시 테오도시오폴리스 총독이던 아르메니아계 장군 니키포로스 바실라키스가 아르메니아와 시리아 인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만지케르트 전투에 참전했으나 포로로 잡혔다. 이후 테오도시오폴리스는 손쉽게 점령되어 셀주크 제국령이 되었다.

3.4. 살투크 왕조의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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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9년에 세워진 울루 자미 (대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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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투크 왕조 시절의 '세 무덤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셀주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은 부하 살투크에게 테오도시오폴리스 일대를 하사했고, 그는 '로마인의 땅'이란 뜻인 에르주룸이라 명명했다. 1077년에 동로마 군이 도시를 수복하지만 1079년 살투크가 재점령했고, 그는 베이를 칭하며 살투크 1세가 되었다. 1090년대 셀주크 제국이 내전에 돌입하자 살투크 베이국은 사실상 독립했고, 에르주룸은 그 수도로써 번영했다. 1174년, 샤다드 왕조의 수도 아니를 함락하고 아르메니아고원으로 침투하던 조지아 왕국기오르기 3세는 같은해 에르주룸까지 일시 함락한 후 회군했다.

조지아 인들은 에루주룸을 카르누 칼라키라 불렀다.1191년 살투크 조의 여왕으로 즉위한 마마 하툰은 에르주룸 서쪽 70km 지점에 신도시 테르잔을 세워 천도했다. 다만 1200년에 그녀는 폐위되었고, 뒤를 이은 아들 알라웃딘 무함마드는 1202년에 조지아 원정을 위해 에르주름을 지나던 룸 셀주크의 쉴레이만샤 2세에게 폐위된 후 감금되었다. 이로써 살투크 왕조는 멸망하고 일대는 룸 셀주크 조의 영토가 되었다.

3.5. 룸 셀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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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쿠바트 1세의 딸 후다반드 공주의 후원으로 1265년에 완공된 치프테 미나렐레 메드레세 (쌍 미나렛 마드라사)
룸 셀주크 시기 에르주룸은 조지아 왕국에게서 아나톨리아 동부를 지키는 군사 거점으로 중시되었다. 1242년 몽골 제국의 아제르바이잔 총독 바이추가 몽골-조지아 군대를 이끌고 내부 반란으로 약해진 룸 셀주크를 침공, 에르주룸에 당도했다. 바이추가 보낸 항복 요구 사절이 모욕적인 거절을 당하자 그는 에르주룸을 포위했고, 2개월의 전투 끝에 몽골측 공성 병기가 성벽을 허물었다.

도시는 함락되었고, 몽골군은 무자비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기존 서아시아 도시들과 달리 에르주룸에서는 보물 약탈을 위해 교회들까지 약탈되었고, 기독교도 병사들은 성유물 등을 고향으로 보냈다. 이후 바이추는 아제르바이잔으로 회군했고, 이듬해 술탄 케이휘스레브 2세의 셀주크-아르메니아-압하지아 연합군을 쾨세다으 전투에서 격파하며 룸 셀주크를 몽골 제국의 제후국으로 삼았다.

3.6. 중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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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년 당시 일 칸국의 총독이던 호자 야쿠트가 세운 야쿠티예 메드레세

1308년 룸 셀주크의 해체 후 에르주룸은 일 칸국령 아나톨리아의 일개 주가 되었다. 1310년대에는 잠깐 트라페준타 제국이 지배하며 마지막으로 동로마 영향력이 미치기도 했다. 1330년대 일 칸국의 해체 후에는 에레트나 왕조를 거쳐 추판 왕조 령이 되었다. 1350년대에는 추판 왕조를 멸한 잘라이르 왕조령이 되었고, 1380년경 흑양 왕조령이 되었다. 곧 티무르 제국이 일대를 정복했으나, 1405년 티무르의 사후 다시 흑양 왕조 령이 되었다. 그렇게 안정을 유지하다가 1467년 우준 하산에 의해 백양 왕조령이 되었고, 1501년에는 우준 하산의 외손자인 이스마일 1세가 점령해 사파비 왕조령이 되었으나 1514년의 찰디란 전투오스만 제국령이 된다.

3.7.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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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후반 대재상 뤼스템 파샤의 후원으로 미마르 시난이 설계해 세워진 타쉬 한 (뤼스템 파샤 베데스탄)

1514년 셀림 1세가 찰디란 전투 후 점령하며 에르주룸은 오스만 령이 되었고, 1533년 쉴레이만 1세의 치세에 세워진 에르주룸 에얄레트의 치소가 되었다. 오스만 시기 에르주룸은 사파비 왕조 및 조지아를 견제하는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다. 1553년 에르주룸 총독 이스켄데르 파샤가 사파비 왕조의 코이를 공격하자 타흐마스프 1세는 아들 이스마일 2세를 보내 반격에 나섰다. 뤼스템 파샤의 오스만 군대가 콘야에 묶여 있는 틈에 사파비 군대는 반과 에르주룸을 점령했고, 1554년 쉴레이만 1세가 친정에 나서 수복했다. 16-17세기 에르주룸의 파샤들은 종종 이메레티 왕국의 왕위 계승에 관여할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3.7.1. 아바자 메흐메트 파샤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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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학자가 '아르메니아의 수도'로 묘사한 1700년경의 에르주룸 전경

1622년 예니체리 개혁을 시도하던 오스만 2세가 예니체리에게 시해당하자, 술탄의 개혁 상담 상대 중 하나였던 압하지아계 에르주룸 총독 아바자 메흐메트 파샤는 관할지 내의 예니체리들을 추방하거나 죽였다. 이에 조정은 11월에 메흐메트 파샤를 해임했지만, 그는 시해 책임자들을 처벌하고 싶을 뿐, 조정에 대한 충성은 여전하다며 계속 에르주룸에 머물렀다. 예니체리의 대체제로 논의되던 아나톨리아 중부의 튀르크멘들은 메흐메트 파샤에 동조하며 모였고, 따라서 그는 손쉽게 앙카라를 장악했다. 뒤이어 메흐메트 파샤는 코스탄티니예를 목표로 부르사까지 진격했으나 격퇴되었고, 1624년 조정은 하프즈 아흐메트 파샤 하의 토벌군을 보냈다. 그해 8월, 카이세리 전투에서 일부 병력의 전향으로 패배한 메흐메트 파샤는 니으데를 거쳐 에르주룸으로 철수했다.

뒤이은 협상에서 그는 술탄 무라트 4세에게 자신의 '선한' 의도를 납득시킬 수 있었고, 총독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오스만-사파비 전쟁 (1623-39년)이 한창이던 1627년 여름, 사파비 군이 조지아의 아흐스카 (아할치케)를 위협하자 조정은 에르주룸의 메흐메트 파샤에게 병력 지원을 명했다. 이에 그는 지휘권을 요구했으나 거부되었고, 어쨋든 휘하 병력과 전장에 당도했다. 하지만 기회를 노리던 그는 적절한 틈에 오스만 군을 기습 공격해 다수의 예니체리를 비롯해 여러 파샤들을 전사시켰다. 놀란 조정은 대재상 할릴 파샤를 해임, 가지 휘스레브 파샤를 선임해 난을 진압하게 했다. 대규모 병력과 출정한 휘스레브 파샤는 1628년 9월, 메흐메트 파샤가 있는 에루주룸을 포위했다. 포위군이 대포로 공격하자, 메흐메트 파샤는 하루밤 만에 항복하여 코스탄티니예로 압송되었다.[2]

3.7.2. 혼란의 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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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군과 여러번 전투가 벌어진 도시 동쪽 언덕의 아지지예 포대 겸 외곽요새

19세기 초반, 카자르 왕조러시아 제국에게 조지아를 상실한 후 보상으로 동부 아나톨리아를 노렸다. 이로써 에르주룸 총독과의 관계가 악화되던 차에 국경의 쿠르드 후국들이 문제를 일으키자 카자르 조는 영국의 중재 하에 국경 문제를 회담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이로써 벌어진 오스만 제국과 이란 간의 마지막 전쟁인 오스만-카자르 전쟁 당시 1821년, 카자르 왕자 압바스 미르자가 3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해 비틀리스와 도우베야즈트를 함락하고 에르주룸으로 진격했다. 이에 에르주룸 총독은 5만 2천의 오스만 군대와 맞섰으나, 에르주룸 전투에서 패했다. 다만 사파비 군도 지쳤기에 도시를 공격하지 않고 철수했고, 1822년 오스만 군의 반격은 실패했다. 이라크 전선 역시 결국 카자르 군이 철수했고, 결국 양측은 1823년 7월 에르주룸 조약을 체결하여 현상 유지의 휴전을 맺었다.

또한 에르주룸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카자르 왕조를 (자신 외의) 유일한 이슬람 국가로 공식 승인했고, 양측은 왕래를 자유롭게 하며 3년마다 사절을 교환하기로 합의하는 등 18세기까지 이어졌던 종파주의를 극복한 평화적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후 양측의 교역이 급격히 늘었는데, 페르시아 상인들이 코스탄티니예로 향함에도 에디르네, 트라브존 등 국경 세관에서의 1차 관세 부과 후 목적지에서 2차 과세를 당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로써 다시 전운이 일자 영국, 러시아의 중재로 양국은 1847년 5월에 에르주룸 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페르시아 상인들은 최종 목적지에서만 관세를 내게 되었고, 유럽 상인들이 내던 12%보다 훨씬 낮은 4~6%만 납부했다.[3]

그리스 독립 전쟁이 한창이던 1828년,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령 아르메니아를 침공해 6월에 카르스를 점령했다. 에르주룸 총독 키오스 파샤는 카르스 구원에 나섰으나 도착하기 직전에 성채가 러시아 군에 항복하여 회군했다. 이반 표도르비치 파스케비치가 이끄느 러시아 군은 에르주룸으로 향하는 척하다 북쪽으로 기수를 돌려 조지아의 아크할칼라키와 아크할치케를 점령했다. 1829년 6월, 파스케비치는 2만여 병력과 함께 무려 (3만의 니잠 제디드를 포함한) 8만 오스만 병력이 수비하는 에르주룸으로 향했다. 이에 신임 에르주룸 총독 하그키 파샤는 2만 병력과 나아가 사간루그 산지의 멜리뒤즈 고개에서 러시아 군과 맞섰으나 패배하고 사로잡혔다. 뒤이어 러시아 군이 에르주룸을 포위하자 지휘관이 없는 수비대는 항복했다. (6월 27일) 러시아 군은 4개월 후, 아드리아노플 조약 체결 후에 철수했다.

크림전쟁 중인 1855년, 러시아 군이 카르스를 포위하자 에르주룸의 부대가 구원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다만 병력이 부족했던 러시아 군은 에르주룸에 접근하진 했지만 공격하지는 않고 철수했다.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기인 1877년 11월, 우준아흐메트 전투에서 승리한 2만 5천의 러시아 군이 오스만 패잔병이 철수한 에르주룸으로 진격했다. 다만 성벽이 보강되어 있는데다 눈 폭풍까지 일자 앞선 전투로 지친 러시아 군은 철수했고, 이듬해의 휴전까지 봉쇄하는 것에 그쳤다.[4] 에르주룸 수비를 맡은 아흐메트 무흐타르 파샤는 '가지' 칭호를 하사받았다. 1878년 성 스테파노 조약으로 에르주룸은 러시아에 할양되기로 하여 2월에 러시아 군이 무혈 접령했다. 다만 뒤이은 베를린 회의로 조약이 철회되자 에르주룸은 오스만 령으로 환원되었다. 1895년 하미디예 학살 당시 시내의 아르메니아 인들이 일부 희생되었다.

3.7.3. 1차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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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에르주룸에 진주한 러시아군

1차 대전 발발 후 1915년 초에 러시아 제국과의 사리카미쉬 전투에서 7만을 잃은 오스만 제국은 다시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했다. 이러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당시 4만에 달하는 일대의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는 추방되거나 학살되었다. 성당, 학교, 사교장 등의 건물들은 약탈되거나 파괴되었다. 하지만 기존에 보급을 담당하던 아르메니아 일꾼들도 해고 혹은 추방되자 아르메니아 전선의 오스만 군 보급로는 사실상 끊겼고, 이에 러시아 군은 13만의 보병과 3만 5천의 기병을 동원해 에르주룸으로 진격했다. 러시아 군은 또한 대포 338문과 차량 150대, 전투기 20대도 동원했다. 그에 맞서는 오스만 군은 8만의 병력과 450문의 대포가 있었다.

1915년 12월, 러시아 군은 에르주룸 외곽 요새들을 공격하여 크리스마스 공세에서 2천을 잃으며 아자프케이를 장악했다. 2월에는 흐느스가 장악되었고, 에르주룸 성벽을 포위했다. 에르주룸 성에는 2개의 시타델과 11개의 요새 및 포대가 있었고, 235문의 대포가 있었다. 오스만 군대는 결사 항전했지만 압도적인 화력에 도시는 함락되었고, 1만 3천의 수비대가 포로로 잡혔다. 도시에는 무슬림 외에 2백의 아르메니아인 주민이 있었다. 이후 러시아 군은 1916년 여름까지 무쉬, 비틀리스, 에르진잔 등을 점령해 동부 아나톨리아를 대부분 장악했다. 약 2년간 러시아 군정 하에 있던 에르주룸은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소련이 전쟁을 그만두며 오스만 령으로 회복되었다.

3.8.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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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에르주룸 회의가 열리 건물. 본래 아르메니아인 학교이던 사나사리아였으나, 1915년에 교사들이 처형되며 폐고되었다.

1919년 7월, 무스타파 케말은 에르주룸에서 오스만 제국군의 중장 직위에서 사임하며 튀르키예 민주공화국 시민이자 군인임을 선포했다. 따라서 그는 튀르키예 공화국의 '제1시민'으로 여겨진다. 그해 8월 튀르크 민족주의 혁명가들이 모여 에르주룸 회의를 열었고, 이는 터키 독립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공화국 건국 후 에르주룸은 제3 감찰관이 배치되어 에르주룸, 아르트빈, 리제, 트라브존, 카르스, 귀뮈쉬하네, 에르진잔, 아으르 등 동북부 지역을 관장했다. 감찰관 제도는 1952년에 폐지되었다. 1957년, 동부 지역에도 거점 대학이 있어야 한다는 무스타파 케말의 뜻에 따라 에르주룸에는 아타튀르크 대학교가 세워졌다. 20세기 후반 들어 에르주룸은 그 서늘한 기후 덕에 스키장 등 동계 스포츠 도시로 유명해졌고, 2011 에르주룸 동계 유니버시아드를 개최했다. 다만 아직 동계 올림픽 개최는 성공하지 못했다.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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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티예 마드라사의 정문 장식
  • 에르주름에서 서쪽 90km 떨어진 에르진잔과 헷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튀르키예 한인회에서도 종종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다.

5.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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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프테 미나렐레 메드레세 부속 영묘 야쿠티예 마드라사의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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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타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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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티예 마드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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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프테 미나렐레 메드레세 (쌍 미나렛 마드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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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스템 파샤 베데스타 (타쉬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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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지예 외곽 요새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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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루 자미 (대사원)


[1] 이는 다시 아랍어로 같은 뜻인 아르드 알 룸 (أرض الروم)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만 셀주크 제국의 공용어가 페르시아어이기에 페르시아어에서 현 에르주룸 지명이 직접 유래한 것이다[2] 비록 그는 지식과 용기를 눈여겨 본 무라트 4세의 사면을 사형을 면했지만, 1628년 연고가 없는 보스니아 총독에 봉해졌다. 1633년 폴란드 원정을 수행한 메흐메트 파샤는 이듬해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 간의 분쟁에 있어 후자의 뇌물을 받고 편향적 판정을 내렸다는 혐의 하에 처형된다[3] 카자르-오스만 관계는 매우 호전되어 1829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시에 테헤란 군중이 러시아 영사를 때려죽일 정도였고, 19세기 말에는 범이슬람주의가 휩쓸었다[4] 한편 한 러시아 병사는 에르주룸 외곽 아지지예 요새에 남겨진 러시아 부상병들을 현지 여성들이 주방칼 등으로 도륙했다는 기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