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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 (칼레)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전경
성채와 시가지
1. 개요
Çankırı튀르키예 중북부의 도시. 앙카라에서 동북쪽으로 75km, 초룸에서 서쪽으로 80km, 카스타모누에서 남쪽으로 70km, 볼루에서 동쪽으로 110km 떨어진 협곡 분지에 위치한다. 인구는 8만명으로, 찬크르 도의 주도이다. 옛 지명은 강그라(Gangra)로, 파플라고니아 왕국의 수도였고 4세기 중반 강그라 공의회가 열리는 등 일대의 기독교 중심지였다. 도시는 크즐으르막 강의 타틀르 지류 양안에 형성되어 있다. 시내에는 쉴레이만 모스크, 타쉬 모스크, 시계탑, 지역 박물관, 성채, 목욕탕(하맘), 영묘(튀르베) 등의 볼거리가 있다. 시가지 북쪽에는 찬크르 카라테킨 대학교가 자리한다.
2. 역사
고대에는 강그라 (Γάγγρα), 창그라, 칸다리, 캉가리 등으로 불렸다. 강그라는 현지 파플라고니아어로 강그라는 염소란 뜻인데, 일설에 따르면 염소 중 한마리가 머무는 것을 본 염소 목동에 의해 세워졌다고도 한다. 로마 역사가 스트라본 에 의하면 비록 수비대 배치된 작은 마을에 불과했지만, 파플라고니아 마지막 군주 데이오타루스 필라델푸스 (재위 기원전 31~ 5/6년)가 거쳐했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왕국 말기의 수도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로마 제국 하에 강그라는 갈라티아 주에 편입되었고, 시가지 역시 성채 언덕에서 그 남쪽 기슭으로 이전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2세기의 작가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하면 클라우디우스의 치세에 그의 동생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외종손이며 칼리굴라의 부친이고 네로의 6촌인 게르마니쿠스를 기리며 게르마니코폴리스 (Γερμανικόπολις)라 명명되었다고 한다. 다만 3세기 카라칼라 대에 이르러 다시 강그라로 환원되었다.4세기 들어 강그라는 주교구가 되었고, 현지 주교 히파티오스는 326년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한 후 귀환 도중 아리우스파에 의해 살해되어 정교회와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추숭되었다. 340년경 강그라에서는 아나톨리아 서부 일대의 주교들이 모인 공의회가 열렸다. 강그라 공의회에서는 삼위일체를 위협하던 마체도니우스와 마니교에 대한 비판과 함께 주인에게 노예 해방을 촉구, 결혼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같은 지나친 금욕, 성인 숭배 거부 등을 주장하던 세바스티아 (시바스) 주교 에우스타티오스 역시 성토하였다. 이러한 20개의 강령은 한세기 후 칼케돈 공의회에서 캐논으로 채택되어 오리엔트 정교회 등을 제외한 정통 기독교 교리에 포함되었다. 따라서 해당 공의회가 열린 강그라는 당대 소아시아의 기독교 중심지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2.1. 중세
술탄 쉴레이만 모스크
천년 이상 로마 지배가 이어지던 강그라는 만지케르트 전투의 여파로 세워진 튀르크계 국가 다니슈멘드에 점령되어 그 서부 거점이 되었다. 비록 1101년 롬바르드 십자군에 의해 점령되었으나 곧 수복되었다. 1134년 8월에는 동로마 군이 포위하였고, 구원에 나서려던 다니슈멘드 군주 귀뮈쉬테킨(Gümüştekin)이 급사하며 이듬해 초엽 강그라는 함락되었다. 이로써 동로마 조는 앙카라를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아나톨리아 내륙 영토를 확보했으나 12세기 말 결국 룸 셀주크에게 일대를 상실하였다. 15-19세기 오스만 제국기에는 칸크르라 불렸고, 아나돌루 에얄레트에 이어 앙카라 에얄레트 산하 산작 (군) 중 하나였다. 시내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술탄 쉴레이만 자미는 1522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558년에야 완공되었다.
종교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시골동네라 인근의 초룸, 요즈가트와 함께 찬크르 초룸 요즈가트 마의 삼각지대(Çankırı Çorum Yozgat şeytan üçgeni)라고 까이는 동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