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제국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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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제국 Stormaktstiden[1] | |||||
국기 | 국장 | ||||
스웨덴 제국의 최대 판도 | |||||
1611년 ~ 1721년(1878년) | |||||
위치 | 스웨덴 본토와 휘하 식민지 | ||||
수도 | 스톡홀름 | ||||
정치체제 | 군주제 | ||||
인구 | 2,500,000명 (17세기) | ||||
국가원수 | 스웨덴 국왕 | ||||
언어 | 스웨덴어, 독일어[2] | ||||
종족 | 스웨덴인, 핀란드인, 에스토니아인, 라트비아인, 사미인, 독일인, 이조라인 등 | ||||
종교 | 루터교회 | ||||
주요 사건 |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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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 리크스달러[3] | ||||
면적 | 1,100,000 km² | ||||
성립 이전 | 바사 왕조 | ||||
해체 이후 | 스웨덴 왕국 러시아 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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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세기 ~ 18세기에 걸쳐 발트해의 패권을 장악하였던 시절의 스웨덴을 일컫는 명칭으로 발트 제국이라고도 부른다.보통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즉위한 1611년을 시작으로 대북방전쟁에서 패해 뉘스타드[4] 조약으로 몰락한 1721년까지를 의미한다.
2. 역사
자세한 내용은 바사 왕조 문서 참고하십시오.스웨덴은 칼마르 동맹으로 덴마크 국왕이 스웨덴 국왕을 겸하면서 사실상 덴마크에게 지배당했지만 구스타브 바사가 이끈 독립 전쟁으로 독립을 달성한 이후 지속적으로 덴마크와 대립했다.
1611년,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즉위하고 나서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으로 켁스홀름(Kexholm)[5]을 위시한 라도가 카리알라와 잉에르만란드(Ingermanland)를 석권하여 오늘날 핀란드의 지리적인 영토를 완성함과 동시에 핀란드와 에스토니아를 육로로 연결하는 한편 루스인의 발트해 진출 시도를 원천 차단하였다. 그리고 부왕 칼 9세때 벌어진 칼마르 전쟁은 훗날을 기약하며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마무리하였고, 사촌형이자 스웨덴 왕위 계승 분쟁 중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그문트 3세를 압박하여 리보니아를 석권한 후, 30년 전쟁에서는 가톨릭 동맹을 상대로도 계속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전사한 뤼첸 전투에서도 이겼으며[6] 이를 통해 프랑스가 30년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쟁을 끝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시기의 스웨덴은 과거부터 핀란드와 에스토니아를 소유한 데다가 30년 전쟁에 개입한 결과 포어포메른, 오데르강, 베저강 입구를 장악했다. 구스타브 2세는 전쟁뿐만 아니라 내정 개혁에도 힘썼으며 특히 이전까지 용병이 주축이 되었던 전쟁에서 귀족들에게 토지를 지급하고 군사를 징병할 수 있는 상비군 제도를 도입했다. 특히 스웨덴의 군사 제도는 아직 군사적인 발전이 미흡했던 루스 차르국이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등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7]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한 후 유일한 자식인 크리스티나 여왕[8]이 평생 결혼하지 않은 채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스스로 퇴위하면서 바사 왕조는 단절되었고[9], 왕위는 크리스티나 여왕의 고종사촌 오빠인 팔츠 비텔스바흐 가문의 팔츠츠바이브뤼켄클레부르크 궁정백 카를 구스타프가 칼 10세 구스타브로 즉위하였다.
칼 10세 구스타브는 카자크 봉기로 정신없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공격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의 1/3을 점령하는 한편 폴란드 왕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덴마크가 침공해오자 폴란드에서 물러나 덴마크로 발걸음을 돌려 코펜하겐에 입성하여 로스킬레 조약으로 덴마크의 스코네, 블레킹에, 보른홀름 섬과 노르웨이의 트뢰넬라그, 보후슬랜을 석권하여 스웨덴의 최대 판도를 이룩하였다. 이후 덴마크를 완전히 정복할 목적으로 일으킨 전쟁이 실패하여 보른홀름 섬과 트뢰넬라그는 반환하였으나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던 스코네와 블레킹에, 보후슬랜은 지켜냈다. 구스타브 2세, 크리스티나 여왕, 칼 10세 구스타브 3대에 걸친 전쟁의 결과 스웨덴은 영토 상으로 큰 이득을 보았다. 기존의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외에도 잉에르만란드, 리보니아, 포어포메른, 비스마르, 브레멘-베르덴 공국을 편입시켰으며 유럽 바깥에도 북아메리카에는 뉘아스베리예, 아프리카에서도 황금해안 등의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거의 반 세기 동안 계속된 전란에서 스웨덴은 덴마크, 폴란드-리투아니아, 루스 차르국을 압도하였다.
미성년의 칼 11세의 치세 초창기에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네덜란드와 연합한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고전했으나 프랑스의 중재로 포어포메른과 스코네를 되찾았다. 프랑스는 유럽의 열강이었고, 그런 프랑스가 스웨덴이 지속적으로 세력을 유지하도록 도왔기 때문에 비교적 스웨덴이 유리하기도 했다.
스웨덴의 성장을 견제하려고 폴란드 왕이자 작센의 선제후였던 아우구스트 2세는 덴마크-노르웨이 왕 프레데리크 4세, 루스 차르국의 표트르 1세와 동맹을 체결, 1700년 대북방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칼 12세의 반격을 받아 덴마크가 곧바로 이탈하고, 루스 차르국은 나르바에서 대패하였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한 집중 공격에 버티지 못한 아우구스트 2세는 폐위당하고 작센으로 쫓겨났다.
허나 감당할 수 없는 전쟁을 지속했던 스웨덴은 무리한 러시아 침공의 결과 폴타바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수세에 몰렸고, 폴란드-리투아니아도 아우구스트 2세가 복위하여 반격에 나섰다. 여기에 덴마크, 프로이센 왕국, 하노버 선제후국까지 전쟁에 가세하여 스웨덴을 굴복시키면서 결국 한때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던 스웨덴은 포어포메른을 제외한 발트해 영토를 모조리 빼앗겼다.[10]
이후 카리브해의 생바르텔레미마저 1878년 프랑스에 매각해 식민제국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3. 평가
스웨덴은 인구나 생산력 등의 규모에 비해 엄청난 영토를 확장했지만, 잦은 전쟁으로 확장한 영토의 잠재력을 제대로 끌어내지도 못한 채 전쟁을 지속했고 확장에 치중한 나머지 등한시했던 외교가 발목을 잡았다.스웨덴 제국은 실질적인 규모에 비해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칼 10세 구스타브, 칼 12세 같은 전쟁 군주, 요한 바네르, 렌나르트 토르스텐손 같은 장군과 악셀 옥센셰르나 같은 명재상의 지도 아래 제도, 기술, 체제적인 면에서 혁신적이고 질적인 우위인 바탕으로 팽창, 유지되었다. 그러나 당시 서유럽은 강력한 왕가, 지도자들이 계속 치열하게 서로 땅을 점령하고 작위를 얻기 위해 경쟁하던 상황이었고 제도적인 것은 빠른 전파와 확산에 의해 쉽게 좁혀졌고 그에 따라 국력의 차이만이 남게 됐다.
이를 보여주는 게 30년 전쟁 당시 혁신적인 제도와 전술을 가졌던 스웨덴군은 제국군, 폴란드-리투아니아군, 러시아군, 덴마크군을 전부 다 돌아가며 패배시킬 만큼 강력한 전력을 가졌다. 마찬가지로 18세기 초반 대북방전쟁에서도 덴마크, 폴란드-리투아니아, 루스 차르국이 모두 연합하여 달려들었는데도 스웨덴의 정예병은 대부분을 격파하며 승리 직전까지 갔었다. 그러나 지속적인 전쟁으로 인해 기껏 확보한 영토를 소화하는 등 내부를 정비할 시간이 부족했던 스웨덴에게는 국력의 한계가 찾아왔고, 스웨덴처럼 군사제도를 혁신하고 체급차이가 나던 러시아의 반격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대북방전쟁은 패배로 끝나게 된다.
빈약한 스웨덴 해군도 발목을 잡았다. 어찌됐든 반도의 위치한 스웨덴 입장에선 발트해의 패권을 잡기위한 해군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 허나 해군을 증강하려고 했던 계획도 계속 실패[11]하고 여전히 강력한 해양 세력이었고 엄청난 해군 전력을 가진 네덜란드의 지원까지 받았던 덴마크를 상대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심지어 폴란드-리투아니아 해군[12]을 상대로도 패배를 겪었다. 전쟁에서 여러 번 덴마크의 본토인 셸란 섬과 유틀란트 반도까지 위협했던 스웨덴이 점령에 실패하고 결국 여러 세력의 연합을 물리치지 못한 건 이런 해군의 부재도 컸다.
한편 확장한 영토들이 주변국가들이 약해진 틈을 타서 점령한 것이기 때문에 해당국의 원한을 샀으며,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주변에 만들어놓은 수많은 적들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바꾸지도 못했다. 17세기 중후반 스웨덴의 적들이었던 덴마크, 폴란드-리투아니아, 루스 차르국 셋 다 서로 사이가 좋지않던 적대적인 관계인데 일시적으로나마 이런 경쟁국들이 동맹을 체결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주변국과의 관계가 얼마나 안좋았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스웨덴이 우호관계였던 국가들과 잘 지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30년 전쟁 당시 스웨덴에 우호적인 국가는 스웨덴이 합스부르크 제국을 상대하는 사이에 라인강을 공격한 프랑스 왕국, 가톨릭 세력에게 위협당하는 네덜란드와 신성 로마 제국의 개신교 국가들이였다. 당시 빈곤했던 스웨덴이 행정 개혁으로 관료 집단을 키우고,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부유했던 네덜란드의 자금 지원이 있었고,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의 개신교 제후국들은 이해관계가 맞음에 따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허나 30년 전쟁 이후 스웨덴의 발트해 패권으로 인해 북방 무역에서 손해를 본 네덜란드가 동맹을 끝내면서 많은 재정적 타격을 주었고, 프랑스는 지정학적인 이유로 맺은 동맹 그 이상으로는 발전하지 못해 스웨덴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아닌 폴란드-리투아니아, 덴마크 같이 프랑스의 이해가 크게 안 걸린 국가와 싸울땐 지원하지 않았다. 신성 로마 제국의 개신교 국가들은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스웨덴이 일방적으로 슈트랄준트를 비롯한 포메른의 교역 도시들을 차지하자 반감을 가져서 군사적인 위협이 사라지자마자 관계를 청산했다. 이로인해 17세기 후반의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스웨덴은 결국 홀로 맞서야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4. 식민지 목록
[1] 원래는 스웨덴어로 '강자의 시대'라는 뜻의 일반 명사지만 북유럽을 호령했던 이 시기의 스웨덴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도 쓰인다.[2] 주로 상업[3] 옛 스웨덴의 통화로 1777년부터 1873년까지 스웨덴의 공식 통화였다.[4] 현재 핀란드 우시카우풍키.[5] 핀란드어로는 캐키살미(Käkisalmi). 현재 러시아 프리오제르스크(Приозе́рск)[6] 다만 뤼첸 전투는 스웨덴이 전술적으로 승리하고 전략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성공했지만, 스웨덴군이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양측의 피해는 비슷하거나 발렌슈타인이 이끄는 제국군이 오히려 더 적었다. 스웨덴군은 국왕도 전사하고 정예 부대들이 크게 소모되어서, 이후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스웨덴군이 증발해버리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7] 대북방전쟁 당시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특유의 인해전술에 스웨덴 군사 제도를 카피하여 폴타바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스웨덴군을 모델로 군사 개혁을 이끌어 페르벨린 전투에서 스웨덴을 상대로 승리하였다.[8] 위로 세 명의 형제들이 있었지만 모두 사산되거나 생후 1개월만에 사망했기에 구스타브 2세가 전사한 시점에서 유일한 직계 왕족이었다.[9] 당시 스웨덴 국법에 따르면 국교는 복음주의 루터교회였고, 루터교회가 아닌 왕족은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다[10] 그 포어포메른도 중심지인 슈테틴은 프로이센에 내주었다.[11]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사 호의 침몰이었다.[12] 단치히 자유시의 무장 상선단이 주축이었다.[13] 인도 타밀나두 지역에 있는 항구이다.